예수님께서 날 때부터 맹인된 자를 고쳐주시는 장면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눈이 먼 자를 보시고 그에게 다가가서 땅에 침을 밷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을 듣고 순종한 날 때부터 맹인된 자는 없었던 시력을 회복하고 다시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주님께서 맹인의 눈을 고치신 실질적인 이유는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면 우리의 육신의 눈의 약함을 고쳐주실 뿐 아니라 또한 감겨져 있는 영적인 눈도 회복될 것을 말씀하신다.
주님은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말씀을 하시고 맹인의 눈을 뜨이게 하셨다.
그리고 맹인의 시력을 고치신 후에 이런 말씀을 하셨다.
(9: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보지 못하는 자들이 된다.
무엇을 말하는가? 주님은 우리의 영적의 눈을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 하며서도 우리의 영적인 눈이 감겨져 있다면 빛이신 주님의 실체를 볼 수 없지만 주님께서 우리의 영적인 눈을 만지시면 감겨져 있던 눈이 떠져서 거룩한 빛이신 주님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영적인 눈이 떠져 있는가 아니면 감겨져 있는가?
만일 나의 영적인 눈은 떠져 있다면 거룩한 주님의 빛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영적인 눈이 감겨져 있다면 주님께서 내 안에 계심으로 나는 빛 가운데 있지만 암흑 가운데 있기에 발산하는 주님의 빛을 볼 수 없어 마치 캄캄한 어둠속에서 방황하며 있지는 않는가?
나의 영적인 눈이 뜨여져야 한다.
주님께서 나의 눈을 만져주시기를 바라자.
내가 원하여 얻어 지는 것이 아닌 전적인 주님의 은혜이다.
주님께서 나를 바라보고 계신다.
주님께서 태어날 때 부터 맹인된 자를 고치신 순서를 살펴보자.
첫째, 주님은 그를 보셨다 (1).
주님께서 먼저 보시지 않으셨다면 맹인은 고침을 전혀 받을 수 없었다.
주님의 그를 향한 사랑이 있었던 것이다. 날 때부터 맹인된 자는 어떤 기대도 갖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이미 체념한 상태였던 것이다. 많은 이들 역시 맹인을 보았지만 아무도 주님처럼 사랑과 긍휼의 마음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모든 것을 포기한 상태의 맹인이 주님을 먼저 찿아 간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맹인된 자를 찿아 가신 것이다. 맹인은 주님을 찿지 않았고 주님께 자신의 눈을 뜨게 해달라고 간구하지도 않았다.
(사65:1)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찿지 아니하던 자에게 찿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
주님께서는 우리의 아픔과 슬픔과 곤고한 것과 가난한 것을 잘 아신다.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는 주님께서 먼저 찿아 가신다.
방황하고 실의에 차있는 자를 주께서 택하셨다면 주님께서는 주님의 약속하신 때에 그를 찿아 가셔서 막힌 것을 뚫으시고 회복시키신다.
둘째, 주님은 맹인의 눈을 치료하시면서 구태여 어떤 과정을 밟으셨다.
(6)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도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말씀이신 주님은 단지 “다시 볼지어다” 말씀하심으로 그의 시력을 회복시키실 수 있으셨다.
그런데도 주님은 구태여 침을 밷고, 진흙을 이기고, 눈에 바르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다.
분명 어떤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해 볼 수 있다. 주님은 어떤 것을 우리에게 알리려고 의도하셨을까?
주님은 침으로 눈 먼 자와 귀가 먹은 자들을 고치셨다.
(막8:23) 예수께서 소경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막7:33)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 뱉아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말씀으로만으로 고쳐 주실 수 있으신 주님께서 일부러 우리의 성질을 너무나 잘 아시기에 침이나 진흙과 같은 어떤 물질을 사용하시어 우리의 약함을 고쳐 주셨다.
사람은 무형질적인 것보다 형질적인 것을 믿는다.
보이지 않는 능력중의 하나가 곧 기도일 것이다. 그런데 기도를 하면서도 실은 기도한 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는 이들은 많지가 않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자신의 어떤 일의 해결을 위해 중보기도를 부탁한다고 하자.
그래서 중보하는 자들이 열심히 기도를 한다. 후에 병이 낫거나 재정적인 위기에서 벗어 났다거나 가족의 문제가 해결을 받았다고 중보기도를 부탁한 사람이 중보기도자들에게 와서 고맙다고 말하는 것을 거의 들어보지 못했다. 왜냐하면 기도는 보이지 않는 무형질의 것이기에 어려운 일의 해결의 도움을 받고도 보이지 않는 기도의 응답이라고 쉽게 믿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로는 중보기도를 부탁한다고 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애당초 기도의 능력을 믿지 않은 것이다.
또 다른 예로는 어떤 영적인 권세가 있는 분이 대중앞에서 안수기도할 때 낫기를 원하는 아픈 곳에 손을 놓으라고 요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할 때 병이 낫고자 하는 이는 안수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이 내 아픈 곳을 실질적으로 만지고 있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실질적인 우리의 믿음은 너무나 작다.
그래서 주님께서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다면 보다 더 큰 것을 볼 수 있으리라 말씀하셨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믿음.
주님은 보이는 것을 더욱 신뢰하는 그런 우리의 형질을 너무나 잘 아시기에 일부러 진흙에 침을 밷어 이겨 눈에 바르셨던 것이다. 그것을 본 자들은 실로 주님께서 태어날 때부터 눈 먼자를 만지시고 치료하셨다는 것을 실질적으로 느낄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진흙하면 무엇이 떠오는가?
진흙으로 하나님께서 모든 생명이 있는 피조물을 창조하셨다.
진흙으로 하나님께서 첫번째 사람인 아담을 만드셨고 아담이 잠든 새에 그의 갈비뼈 하나를 취해셔서 아담의 돕는 배필 이브를 만드셨다.
진흙으로 왔으니 너희는 진흙으로 돌아가리라 말씀하신다. 아무리 뛰어나고 대단한 자일지라고 결국은 시간이 지나면 흙으로 돌아간다.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주님께서 나를 만드신 창조주이시다는 사실이다.
창조주이신 주님께서 진흙을 이겨서 자신의 뜻대로 그릇들을 만드신다.
(롬9: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주님은 자신의 뜻대로 진흙인 눈먼의 눈을 다시 만지셔서 다시 보게 하시고 들리지 않는 귀를 다시 만지셔서 잘 들리게 하시며, 암 덩어리를 다시 만지셔서 원래의 상태대로 회복시키신다.
(롬9: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주님은 자신의 뜻대로 진흙인 눈먼의 눈을 다시 만지셔서 다시 보게 하시고 들리지 않는 귀를 다시 만지셔서 잘 들리게 하시며, 암 덩어리를 다시 만지셔서 원래의 상태대로 회복시키신다.
셋쨰,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실로암의 뜻이 “보냄을 받았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맹인은 주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았다. 즉 이 맹인은 실로암의 물로서 치유된 것이 아니라 보내신 주님으로부터 치유를 받았다.실로암의 물이 이 맹인이 고침을 받게된 하나의 도구로 사용되었된 것이다.
모든 것이 주님으로 부터 시작이 되고 주님에 의하여 끝을 맺게 된다.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주님께서 모든 일을 행하신다.
실로암 연못의 물은 하나의 도구로 쓰였을 뿐이다.
흔히 기도하여 병이 낫게 되면 기도해준 자에게 감사하다며 사례하고 또한 기도한 자는 자신이 무어 대단한 자처럼 느끼기게 되기가 쉽다. 하지만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은 주님께서 그 병을 만지시고 고쳐주셨다는 것이다. 기도해준 자는 실로암의 조그마한 물 몇 방울의 역활을 한 것 뿐이다.
사람을 의지하지 말자. 사람은 단지 실로암 연못의 물 한방울일 뿐이다.
그 배후에 계시는 주님의 임재를 느끼자.
모든 것을 주님께 의지하고 순종하는 법을 배우자.
만일 맹인이 주께서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셨을 때 순종하고 가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그는 고침을 받지 못하였을 것이다. 마치 문등병 걸린 자가 주님의 종의 말을 듣지 않고 요단강가에 내려 가서 7번 씾지 않았다면 그의 문등병은 결코 낫지 않았을 것이다. 6번 목욕해도 낫지 않았을것이며 반드시 7번 목욕을 했어야 했던 것이다.
주님의 은혜가 내게로 다가오기 위해서서는 나의 순종이 수반되어야 한다.
순종하는 종을 주님께서는 기뻐하신다.
순종하는 법을 잘 배우도록 하자.
하지만 우리는 순종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나의 자아는 주님께 온전하게 순종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온전한 순종하는 법을 배워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종이 되라고 주님께서는 나에게 갖가지의 곤람함을 허락하신다. 그 곤고할 때마다 주님께 매달리는 법을 배우고 주님께 간구하는 법을 배우고 그리고 주님을 의지하며 순종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점차로 나의 자아가 깨어져 가며 나를 십자가에 철저하게 못박아 나를 버릴 준비를 해 가는 인생 여정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따름이다.
하늘에 계신 하느님 아버지.
저는 태어나면서부터 죄악중에서 거하였읍니다.
저의 눈은 세상적인 것을 보지만 주님의 영적인 놀라움의 아름다움을 아직 보지를 못합니다.
주님 저의 눈을 만져 주옵서서. 주님의 아름다운 세계를 보기를 원합니다. 제안에 계신 주님의 영으로부터 발산되는 주님의 거룩한 빛의 실체를 보기를 원합니다.
세상의 소리에 익숙한 저의 귀를 만져 주옵소서. 들려 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합니다. 듣고 순종하는 법을 배우게 하소서.
저 자신을 나타내고자 애쓰는 광포하며 교만하며 거짓이 있는 저의 혀를 만져 주옵소서. 주님의 사랑의 말을 전하는 입술이 되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말이 전해지는 곳곳하며 주님의 놀라운 평강이 전해지기를 원합니다.
죄악에 깃들어져 익숙한 저의 마음을 만져 주옵서서. 늘 세상의 것을 따라 가던 길을 멈추고 하나님의 영적인 것을 따라 가려고 합니다. 주님께 온전하게 순종하는 법을 배우게 하옵소서.
주님께 순종함이 없다면 베푸시는 주님의 은혜가 온전하게 열매를 맺지 못할 것입니다 .
주님 저에게 긍휼을 베푸사 온전하게 주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게 하옵소서.
저는 단지 실로암 연못의 하나의 물방울 임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저는 실로 미비한 훅 불어 버리시면 없어져 버릴 미비한 존재입니다.
진흙인 저를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자로 다시 빗으소서.
주님은 지금의 저를 빚으셨읍니다.
제 안의 더럽고 추악한 것들을 다시 빗으소서.
주의 영광이 저를 통하여 나타나게 하옵소서.
저를 통하여 주님 영광을 받으소서.
제가 주님을 축복합니다 .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