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2월 17일 토요일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8:26-27) 이와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의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세상 모든 사람의 특징 중의 하나가 수많은 경우에 간구를 한다.

갑자기 닥친 죽음의 공포앞에서, 절망 가운데 빠져 있을때, 나의 힘으로는 어찌 할 수 없을때, 당한 일이 너무나 억울할 때, 그 어떤 것에 나를 도와달라고 간구를 하며 위안을 가지려고 한다.

본문의 말씀은 올바른 간구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생각하게 한다. 주님의 자녀의 가장 큰 권리중의 하나가 나의 사정을 주님의 이름으로 간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나를 위하여 간구하신다라는 이 말씀을 많이 들어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생각해 보자.
첫째는 성령께서는 연약한 나를 도우시며, 둘째는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며, 셋째로는 성령께서 나를 위하여 탄식함으로 간구를 하신다는 것이다.


첫째, 연약한 나를 도우시는 성령
우선 내가 인정해야 하는 것은 나 자신은 연약한 존재라는 것이다.
육신적으로 영적으로 연약하다.
육신적으로 나는 깨어지기 쉬운 그릇과도 같다.
건강한 듯 생각하지만 실은 언제 어디에서 무슨 일을 만나 깨어질 지도 모른다.
나의 마음은 어떠한가?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되면 마음이 흔들리며 두려워 하고 안절부절하지 못한다.
음속에서는 죄라고 알고 있지만, 죄인줄을 알면서도 어쩔수 없이 죄의 유혹에 넘어가는 연약한 존재이다.


전도서 6:12의 말씀과 같이 우리의 행하는 모든 일들 가운데 무엇이 선한지를 모른다.
(6:12) 헛된 생명의 모든 날을 그림자 같이 보내는 일평생에 사람에게 무엇이 낙인지를 누가 알며 그 후에 해 아래에서 무슨 일이 있을 것을 누가 능히 그에게 고하리요.
그런데도 우리는 헛된 것들에 가치를 두고 우리의 마음을 쏟음으로 때로는 얻기도 하지만 결국은 얼마못가 모두 잊혀져 버릴 것이다.
아무도 나의 연약함을 잘 알지 못하고 인정도 하지 않는다.
누가 나의 연약함을 알아 주는가주님께서 나의 연약함을 인정하신다.
또한 주님은 나의 연약함을 대신 지셨음으로 우리는 담대하게 나의 연약함을 간구할 수 있다.
(8:17)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둘째,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어떠한 내용을 갖고 기도하는가?
대부분의 우리의 기도의 내용은 주로 나 개인의 어떤 유익을 위하여 기도한다.
이것을 해주세요. 저것은 너무나 힘이 드니 피하게 해주세요. 지금 병으로 인해 죽게 되었으니 병을 낳게 해주세요. 낳게 되면 주님의 자녀로서 열심히 주님을 섬기겠읍니다. 자녀들이 좋은 학교를 가야하니 지혜를 주옵소서. 돈을 더 벌어 떵떵거리며 살게 해주세요.
그렇게 기도했더니 기도한 모든 내용들이 응답을 받았는가?
주님의 뜻을 간구하고 있다고 생각을 하는가?
(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요일5:14)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이심이라.
주님안에 온전하게 거한다면 우리의 구하는 것은 더이상 나의 어떤 정욕이나 욕심을 따라 구하지 않게 되고, 오직 주님의 마음으로 기도하며 주님의 뜻을 구하게 된다 그런 주님의 뜻대로 하는 모든 기도는 주님께서 응답을 해주신다.

마땅히라는 단어를 주목해 보자.
우리가 마땅하게 온전한 기도를 드리지 못할 것을 주님은 당연하게 알고 계신다.
주님의 뜻대로 기도를 하면 응답을 받는다.
그런데 대부분의 우리는 주님의 뜻대로 기도를 드리지 못한다 
우리는 어떻게 기도를 해야 하는 지를 마땅히 모른다. 또한 이를 주님께서 잘 알고 계신다.
내가 갖고 있는 죄에 대하여 마땅히 기도를 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마땅하게도 나의 죄의 문제에 대하여 제대로 심각하게 기도를 하지 못한다.
죄는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멀리하게 한다.
죄는 곧 나와의 하나님과의 관계의 단절을 의미한다. 
다른 문제보다 더욱 심각한 내 안에 있는 죄의 문제에 대하여 하나님께 매달리며 간구를 해야 하지만 우리는 마땅하게도 나의 죄의 문제에 대하여 심각하게 탄식하며 제대로 간구를 하지를 못한다.
언제 애통해하며 간구하였는가?
만일 있었다면 왜 애통해하며 간구하였는가?
나의 병 때문에, 아니면 나의 배우자 때문에, 아니면 나의 자녀때문에, 아니면 삶이 너무나 힘이 들어 애통해하며 간구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무엇보다 나의 죄의 문제로 인해 애통해하며 간구해보았는가?
아마도 대부분의 우리는 나의 죄로 인해 어느 정도는 애통해하며 간구하였을 것이지만 말할 수 없는 탄식함으로 기도를 해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죽을 병에 걸렸지만 기적적으로 회복되었을지라도, 억울하게 당한 것이 판명이 되었을지라도, 어려운 재정적인 압박으로부터 벗어 났을지라도 만일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으면 나는 지옥에 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마땅히 어떻게 올바르게 간구를 해야하는 지를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실망하지 말자. 그것이 곧 우리 인간이 갖고 있는 본성이며 주님도 알고 계신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마땅히 제대로 간구하지 못하는 것을 잘 알고 계시기에 주님의 영이신 성령을 나에게 보내주셔서 내주하도록 하셨다. 주님께서는 나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성령님을 보내 주셔서 나를 위하여 중보하시도록 하셨다. 성령께서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의 단절을 의미하는 죄의 용서를 구하는 간구를 나를 위하여 대신해서 하신다. 내 안에 계신 성령께서는 나의 죄의 심각한 문제에 대하여 말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어쩔수 없는 나를 위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이 종을 살려 달라고 간구를 하신다.

셋째, 성령께서 나를 위해 탄식하시며 간구하신다.
내 안에 계신 성령께서 나를 위하여 탄식하시며 간구하는 것을 느끼는가?
나의 육신에 이상이 있을 때 감지를 하듯이 나의 영 또한 내안에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나의 죄악으로 인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간구하실 때 나의 영과 육은 어렴풋이나마 느낄것이라 생각한다.
내가 조그만 가시에 찔렸을때나 손가락의 손톱 주위의 살이 터서 조금이라도 갈라지면 온몸이 불편해하며 감지하지 않던가. 몸속에 조그만 암덩이가 생겨나면 느끼지 못하지만 몸은 쉽게 피곤해하며 마르고 여의어 간다. 몸이 자신의 어딘가에 이상이 있다고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나의 육신은 어느 부분에 이상이 있으면 신호를 보내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나의 영 역시 내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의 움직임을 감지하지 못하겠는가.
내 안에 계시는 성령께서 나를 위하여 탄식하실때 만일 나의 영이 맑고 청결하다면 성령의 탄식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대다수의 우리의 영은 탁해져 있고 죄로 덮혀 있고 세상의 소음으로 가득하 있기에 성령의 탄식을 느낄 수 없을 것이다.
세상에 찌들리고 육신의 말초적인 감각에 의존을 해서 나의 영은 많이 무디어져 있지만 그래도 나의 영은 나의 육신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예민하다. 나의 영은 늘 주위를 늘 감지하고 나에게 경고하며 알려 준다. 그래서 우리의 영은 깨어나야 한다. 세상의 소음으로 가득한 곳에서 고요함 가운데 주님의 임재를 느끼며 주님께 나의 영혼의 주파수를 맞추면 내 안에서 들려주시는 성령님의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나의 영이 잠자고 있다면 경고의 소리를 들을 수 없는 것은 자명하지 않겠는가!
나의 육신은 모르지만 나의 영은 위험을 감지하기도 하여 그곳에 가지 못하도록 한다.
어떤 사람을 만날때 섬뜩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나의 영이 상대방의 영의 상태를 알고 나에게 알려 준다.
어느 곳을 가면 오싹한 느낌이 든다. 곧 나의 영이 주위의 상태를 감지하고 나에게 조심하라고 경고를 한다.


시편기자는 이렇게 노래한다.
(57:6-8) 그들이 내 걸음을 막으려고 그물을 준비하였으니 내 영혼이 억울하도다. 그들이 내 앞에 웅덩이를 팠으나 자기들이 그 중에 빠졌도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나의 영광아 깰지어다 (Awake my heart).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나의 영광아 깰지어다라고 번역이 되었지만, 나의 마음 곧 영혼의 뜻을 갖고 있어 나의 영혼아 깰지어다로 번역을 할 수 있다.  나의 적들은 나를 해치려고 그물을 준비하고 웅덩이를 파고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내 마음에 계시는 성령께서는 나의 영을 통하여 위험을 감지하도록 하시고 피할 길을 열어 주신다. 그래서 나의 영혼이 깨어야 한다. 나의 영혼이 깊은 잠을 자고 있다고 아무리 성령께서 나에게 위험하다고 말씀을 하셔도 들을 수가 없어 속절없이 위험 가운데 노출되고야 만다.

때로 우리는 기도하다가 아무런 이유가 없는데 괜히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며 애통해 하며 간구를 한다.
내 안에 계시는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을 하실때 나의 영 역시 감지를 하고 반응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한다.

많은 성경주석가들이 성령의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애통해 하며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방언이라고 해석을 한다. 저는 이 해석에 동감을 하며, 나의 육신이 성령의 탄식함을 표면적으로 나타내는 곳이 혀를 사용하는 방언이라고 생각을 한다.
모든 피조물은 자신을 지으신 하나님께 감사의 표시를 한다.
나무들은 자신을 지으신 여호와를 바라보며 푸른 잎사귀를 내며 열매를 맺으며 기쁨의 소리를 발한다
동물들은 욕심을 부리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자연의 법칙에 억지를 부리지 않고 순응을 한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우리 역시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좋던 거부하던 어떤 반응을 한다.


육신 중에서 나의 감정이 표출되기 가장 쉬운 곳이 바로 혀이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없이 혀를 사용한다 
음식을 먹을 때나 말할 때나 침을 삼킬 때나 수없이 혀를 사용한다.  


아마도 몸의 많은 기관중에서 가장 바쁜 곳이 두뇌 다음에 혀일 것이다.
혀를 사용하여 우리는 악한 말, 저주의 말, 거짓말, 정욕의 말, 탐욕의 말, 정죄의 말, 포악스런 말을 한다.
하지만 같은 입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감사하며, 기도하며, 남을 위로하며, 주위를 밝게하는 따스한 말을 한다, 혀를 자유롭게 쓸 수 없는 자들은 손짓 발짓 몸짓을 통하여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께 감사함을 표현한다.
성령께서는 그런 나의 혀를 사용하신다.
성령께서 선과 악이 공존하는 혀에 은사를 부어 주셨는데 바로 방언의 은사, 예언의 은사, 권면의 은사, 찬양과 감사의 은사를 주셨다. 많은 은사 가운데 성령께서 나를 위하여 중재하시는 통로중의 하나가 나의 혀를 사용하는 방언이라고 생각을 한다.
 (26)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고전14:2)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마땅히 주님의 뜻대로 기도를 하지 못하지만 나의 영은 방언을 통하여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께 간구를 한다.  방언을 통하여 성령께서 나를 위하여 변호하는 것이라 나는 믿는다.  방언기도는 성령님께서 나의 입장이 되셔서 나를 변호하며 하나님 아버지께 간구를 하는 기도이다.
방언에 대하여 생각을 해보자.
육신을 갖고 있는 우리는 어떤 것이 나의 삶에 유익이 있을 때 가지려고 노력을 하며 나에게 손해를 줄때에는 멀리하려고 한다. 나에게 유익을 주는 사람과는 어떻게든 잘 보여 관계를 맺으려고 하지만 나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과는 아무리 가까운 관계라 할지라도 멀리한다.
교회에 다니는 성도라면 방언에 대하여 들어봤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방언을 소망하지만 또 어떤 이들은 이단시 하며 배척하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보다 중요한 것은 방언이 나의 삶에 유익일 줄까 아니면 해를 끼치는가 생각을 해보아야 할 것이다.  나의 삶에 유익을 준다면 받기를 소망해야 할 것이고, 반대로 해를 준다면 버려야 함이 마땅할 것이다.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방언은 좋은 것이다.
영적인 선물인 방언은 나의 삶에 유익을 주면 주었지 결코 해를 주지 않는다.
그런데 왜 거부를 할까?
못하는 것이 무슨 자랑거리라도 되는가?
방언을 못하는 자들이 왜 방언을 하는 자들을 이단시할까?
물론 방언를 하지 못한다고 해서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은 아니라고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을 한다.
하지만 믿는 자녀라면 당연히 방언을 간구해야 하지 않겠는가.
왜냐하면 방언은 성령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방언은 하나님께 영으로 비밀을 말한다고 하는데 성령께서 나를 위하며 탄식하며 간구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을 한다. 성령께서 방언의 은사를 주신 이유는 바로 나의 지식과 능력의 제한을 받지 아니하고 초월하여 하나님과의 대화의 관계를 맺게 한다.
방언을 통하여 영적인 세계가 열린다고 나는 믿는다.
물론 방언이나 은사들을 무분별하게 사용하여서 세상의 지탄을 받기도 한다. 그래서 은사를 선물로 받은 자들은 교회에서나 모임이나 삶의 일터에서 교만하게 자신을 나타내지 않도록 늘 조심해야 하며 다른 이들을 배려하는 믿음생활을 해야 할 것이다.  또 어떤 이들은 자신이 방언을 한다고 하며 대단한 영적인 자라고 자부를 한다. 제발 착각하지 말자. 방언을 한다고 해서 나의 영적인 상태가 충만한 것은 결코 아니다.
방언을 하는 자녀라면 더욱 풍성한 방언의 은사를 받기를 간구해야 할 것이며, 만일 방언을 하지 못하는 자녀라면 방언의 은사를 부어 달라고 간구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좋고 유익한 것을 달라고 간구하는 자에게 선물로 주실 것이다.
(7:11) 너희가 악한 자라고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고전14:18)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고전 14:39) 그런즉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하나님 아버지
저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합니다.
그저 저의 유익과 정욕을 위하여 간구를 할 뿌입니다.
주님의 뜻대로 간구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응답을 받습니다.

하지만 저는 마땅하게 온전하게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합니다.
저희의 사정을 잘 아시는 주님께서 저를 도우라고
주님의 영이신 성령을 저의 마음속에 내주하시도록 은혜를 베푸셨읍니다.

제 안에 계신 성령께서 저의 죄의 문제에 대하여
저를 위하여 말할 수 없는 탄식함으로 중보를 하십니다. 
저는 제가 갖고 있는 죄의 심각성에 대하여 마땅히 잘 알지를 못합니다.
하나님의 관계의 단절을 가져오는 죄에 대하여 무지하며 무감각해 있읍니다.
저의 영혼을 꺠우소서.

주님의 생명의 호흡으로 저를 새롭게 하옵소서.
죄에 대하여 민감하게 반응을 하여 죄로부터 자유를 누리기를 간구합니다.
저희 영혼이 자유롭게 숨을 쉴 수 있도록 성령이여 은혜를 베푸소서.

성령님께서 탄식하시면 하실수록
저의 영혼은 주님 앞으로 점점 더욱 가까이 갈 것을 확신합니다.
저를 위하여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간구하시는 성령님의
임재함을 환영하며 마음껏 저를 인도하옵소서.

성령님의 인도하심은
하나님께서 제게 베푸시는 최상의 호의이며 말할 수 없는 축복입니다.
저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와 영광을 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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