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1월 21일 일요일

이는 하나님의 권능이니이다

(8:16-19)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에게 명령하기를 네 지팡이를 들어 땅의 티끌을 치라 하라 그것이 애굽 온 땅에서 이가 되리라. 그들이 그대로 행할새 아론이 지팡이를 잡고 손을 들을 땅의 티끌이 다 이가 되어 사람과 가축에게 오리니 요술사들도 자기 요술로 그같이 행하여 이를 생기게 하려 하였으나 못 하였고 이가 사람과 가축에 생긴지라. 요술사가 바로에게 말하되 이는 하나님의 권능이니이다 하였으나 바로의 마음이 완악하게 되어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더라.


“이는 하나님의 권능이니이다”를 “This is the finger of GOD”라 합니다.

애굽에서 종의 삶을 사는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으로부터 끄집어내기 위하여 야훼께서는 모세를 택하사 부르시고 소명을 주십니다. 광야에서 40년을 양을 치는 목자의 삶을 살았던 모세는 야훼 하나님의 부르심을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함을 압니다. 그래서 몇 번이나 사양하며 거절하였지만 야훼의 부르심에는 변함이 없으십니다야훼는 모세를 바로 앞에 세웁니다. 그리고 바로와 애굽에게 10가지의 재앙을 내립니다. 10가지의 재앙을 통하여 애굽은 매우 큰 피해를 받고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으로부터 내어줍니다.

 

열 가지 재앙은 야훼 하나님의 권능을 잘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아론이 들고 있던 지팡이를 던지자 뱀이 되었습니다. 이를 바로의 술사들도 요술로 자신의 지팡이를 뱀이 되게 하였으나 아론의 지팡이가 그들의 지팡이를 삼켰습니다. 하지만 바로의 마음이 완악하여 모세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이에 야훼 하나님은 열 가지 재앙을 애굽에 내리기 시작합니다.

첫 번째 재앙으로 지팡이를 들어 나일 강을 치니 그 물이 다 피로 변하고 심한 악취가 났습니다. 그러자 애굽의 술사들도 요술로 그와 같이 행하자 바로는 마음이 완악하여 모세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둘째 재앙으로 지팡이를 들어 치자 개구리가 사방에서 올라와서 애굽 온 땅에 덮였습니다. 이를 애굽의 요술사들도 요술로 개구리가 애굽 땅에 올라오게 하였습니다. 이를 보고 바로는 여전히 마음이 완악하여 모세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세 번째 재앙으로 지팡이를 들어 땅의 티끌을 치자 애굽 온 땅의 티끌이 다 이가 되어 사람과 가축에 가득하였습니다. 애굽의 요술사들도 자신의 요술로 티끌이 이가 되도록 하려 하였지만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한계에 다달음을 깨달은 요술사들은 이 일은 하나님께서 행하심을 알고 “이는 하나님의 권능이니이다” 라고 바로에게 고할 수 밖에 없음을 경험합니다. 지팡이가 변하여 뱀이 된 일, 강물을 핏빛으로 변하게 한 일, 개구리를 올라오게 한 일은 눈속임으로 어느 정도 따라 할 수 있었지만, 땅의 티끌이 변하여 이가 되게 하는 일은 결코 따라 할 수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1. 사탄의 한계
(19) 이는 하나님의 권능이니이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사탄의 조종을 받는 요술사들의 요술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즉 사탄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비록 이는 보잘것없고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미물이지만, 생명을 창조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생명을 창조하는 일은 야훼의 권능입니다.
사탄은 결코 생명을 창조할 수 없습니다. 사탄은 야훼이신 창조주 주님을 대적할 수 없습니다. 어느 정도 모양을 부릴 수는 있지만 사탄의 능력과 지식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이를 깨달은 요술사들은 “이는 하나님의 권능이니이다” 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생명을 창조하려고 부단히 노력하고 연구하고 있습니다. 모든 환경을 최적의 환경으로 만들고 생명을 창조하려 하지만 조그만 Bacteria조차 창조할 수 없습니다.

사탄의 가장 큰 실수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한 것입니다.
사탄은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이면 모든 것이 끝나고 자신의 왕국이 견고하게 세워질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사탄의 능력의 한계였습니다. 이 일로 인해 사망을 이기신 주님으로 모든 것이 명백하게 드러났습니다.

그래서 사탄은 지금도 주님의 자녀들을 주님으로부터 멀어지도록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해치려 부단하게 노력을 합니다.
(벧전5:8-9) 근신하고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찿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6:12)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2. 완악하게 되어
(19) 요술사가 바로에게 말하되 이는 하나님의 권능이니이다 하였으나 바로의 마음이 완악하게 되어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1) 완악한 세상
바로는 여호와의 권능의 손길로 인한 재앙을 경험하였지만, 아직도 마음이 강퍅하고 완악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내어놓지를 못합니다. 그들을 종으로 쓰는 것이 너무나 유익하며 또한 자신의 소유로 여기기에 애굽에서 떠나라고 하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더 큰 재앙의 피해를 자초하고 맙니다

 

바로는 여전히 완악합니다. 애굽의 왕인 바로는 세상을 의미합니다.

세상은 여전히 완악합니다. 특히 세상은 주님을 믿는 자녀들에게 더욱 심하게 완악하며 핍박합니다.

틈만 나면 믿는 자들을 쓰러뜨리려 하며 더욱 핍박하며 피폐하게 합니다. 억울하게 당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 야훼이신 주님은 우리는 이해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며 의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우리는 이해하지 못합니다. 전혀 뜻하지 않는 주님의 방법으로 일을 해결하시고 또 다른 길을 열어 주십니다야훼이신 주님의 권능으로 우리를 덮습니다.

2) 나 또한 완악
아마도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마음의 상태는 완악함일 것입니다.

완악함을 “목이 곧다”, “자기 소견대로 행함” 혹은 “옛사람” 으로 표현합니다.

 

(3:5) 그들이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 보시고
주님은 안식일에 주님이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시는 것에 대하여 지켜보고 있던 회당의 지도자들의 마음이 완악하심을 보시고 노하셨습니다. 이들 유대교 지도자들은 자신이 배우고 습득한 유대교의 전통을 지키시는 것에서 벗어나는 것이 죄악이라고 규정하였습니다. 주님은 이런 그들을 보시고 마음이 완악하다고 하십니다.

 

나의 편견과 기준에 맞지 않는다 하여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것이 곧 마음이 완악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특히 종교적 완악함을 주의해야 합니다. 혹시나 나도 모르게 사람을 율법적으로 판단하고 정죄하는 율법주의에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도 마음이 완악한 이들이 있습니다. 저 역시 때로는 마음이 완악해집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나의 소견대로 행하기를 좋아하며 옛 사람의 성품대로 행하려 합니다.  애굽에 속하여 죄의 종 노릇을 충실히 행하려 합니다. 하지만 야훼이신 주님은 제가 종 노릇에 얽매여 있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종 노릇 하는 애굽에서 건져 내십니다. 사탄은 온갖 술수로 저를 교묘하게 넘어뜨리려 합니다. 하지만 생명을 창조하시는 주님의 권능으로 저는 애굽에서 벗어나 가나안으로 가는 광야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59:1-2) 여호와의 손이 짦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죄악은 저와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습니다.

그러므로 죄악으로 쓰러지기 쉬운 연약한 우리는 성령의 능력을 간구해야 합니다.
(3:16)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40:29)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죄의 종 노릇을 하라고 꼬드기는 사탄의 궤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죄악이 나를 넘어뜨리려 속닥할 주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나를 종노릇 하라고 꼬드기는 악한 영은 묶임을 받고 떠날지어다하며 선포하십시오.

3) 완악한 인생길
사람의 마음이 완악하면 재앙이 기다리고 있음을 출애굽기에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이스라엘은 목이 곧은 백성이라 이를 고치시기 위하여 이들은 한 달이면 갈 수 있는 거리를 40여 년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내게 재앙이 왔다면 혹 나의 마음이 완악한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 역시 완악하면 쉽고 평안한 길을 나누고 먼 길을 돌아가야 합니다. 때로는 홍해 바다가 가로막기도 하고 마실 수 있는 물이 없는 곳을 지날 때가 있습니다. 너무나 뜨거워 그늘을 찾으려 하지만 없는 곳을 지나기도 합니다. 사나운 짐승들이 나를 먹이로 노리는 곳을 지나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낙심하고 절망합니다.

 

어려움과 곤고함으로 낙심한 저에게 주님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아.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말씀하십니다


성경에는 “너희는 두려워 말라” 하시는 주님의 명령의 말씀이 수없이 언급이 되어 있습니다. 사탄의 권세를 이기신 임마누엘이신 주님의 권능이 바로 저와 함께 하십니다. 바로 제 안에 계신 주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를 건지시고 인도하십니다. 훼이신 주님의 권능이 저를 덮으며 구름 기둥으로 불 기둥으로 저의 인생길을 인도합니다.


3. 여호와의 권능이 함께 함
(7:12) 각 사람이 지팡이를 던지매 뱀이 되었으나 아론의 지팡이가 그들의 지팡이를 삼키니라.

모세의 지팡이가 자신을 잡아먹으려고 포위하고 있던 애굽의 술사들의 지팡이를 삼키는 모습을 그려봅시다. 참으로 통쾌한 모습입니다. 악의 세력이 궤멸하는 순간입니다. 사탄의 조종을 받는 이들은 어느 정도 놀라운 능력을 나타냅니다. 사람들이 볼 때 대단한 일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야훼께서 행하시는 일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삶을 옭아매는 악한 세력은 야훼이신 하나님의 권능이 개입되면 삼킴을 받아 소멸합니다. 

야훼 하나님의 권능이 저와 함께 하기에 저는 안전하며 평강을 누립니다.

사탄은 늘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 댑니다. 사방이 우겨 쌈을 당합니다.

하지만 주님의 자녀는 이미 승리하였습니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주님의 은혜가 있기에 저는 행복합니다. 저를 위해 중보하시며 지키시는 야훼이신 주님의 권능이 저와 함께 하시기에 저는 주님을 신뢰하며 의지하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광야 길을 가면서 주님의 임재를 체험합니다. 주님의 도우심이 없으면 저희는 결코 광야길을 갈 수 없습니다.

주님은 때때로 자신이 우리와 함께하심을 알게 하십니다. 설명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곤 합니다. 그 당시에는 알지 못했지만, 시간이 지난 후에 바로 그것이 주님의 권능의 손길이었음을 우리는 깨닫고 하나님의 권능의 손길이 임했다고 고백합니다.


(10:27-28)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여호와의 권능이 주님의 자녀와 함께 한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여호와의 손이 저를 지키시며 영원히 멸망하지 않는 구원의 은혜를 베푸십니다.

오늘도 야훼이신 주님의 권능은 저와 함께 합니다.
야훼이신 주님의 권능이 임한 저희는 너무나 큰 축복을 받은 자들입니다.
승리의 개가를 부르며 한 걸음 한 걸음 천성을 향하여 갑시다.
때로는 쓰러져서 낙심하고 상처를 입지만 야훼이신 주님의 권능으로 저희는 다시 일어납니다.
기쁨과 환희로 생명을 회복하며 나아가도록 인도하시는 주님의 권능의 손길은 항상 저희와 함께 합니다.




야훼 하나님,

저희는 거칠고 메마르며 황량한 광야길을 갑니다. 주님의 도우심이 없으면 사나운 짐승의 먹이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굶주리고 심한 갈증으로 쓰러지게 될 것입니다.

야훼 하나님의 권능으로 저를 덮으소서.
사나운 물결이 저를 덮치려 하지만 물을 고요케 하시며 바람도 잠잠케 하시는 주님의 능력으로 저를 감싸주시니 감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21년 10월 30일 토요일

하나님의 섭리

(2:5-8) 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나일 강으로 내려오고 시녀들은 나일 강 가를 거닐 때에 그가 갈대 사이의 상자를 보고 시녀를 보내어 가져다가 열고 그 아기를 보니 아기가 우는지라 그가 그를 불쌍히 여겨 이르되 이는 히브리 사람의 아기로다

 

하나님의 섭리를 우리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Providence라 하는데 이는 미래에 있어질 일을 예비하는 행위라 정의합니다. Providence: Act of providing or preparing for future use or application [Webster]


섭리를 이해하는데 우연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는 수많은 우연을 지금껏 경험합니다. 저의 눈에는 우연처럼 보였지만, 실은 주님께서 저의 삶 가운데 공간적으로 시간적으로 개입하셔서 섭리하시며 인도하셨습니다

 

모세

우연때마침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모세를 보면 하나님의 섭리로 인도하셨음을 보게 됩니다.

(5-10) 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나일 강으로 내려오고

 

죽어야 할 모세가 죽지 않고 바로의 딸의 양자가 된 것에는 많은 우연들이 있습니다.

다른 갓난 사내아이처럼 모세 또한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세의 부모는 모세를 갈대 상자에 넣어 나일 강가의 갈대 사이에 둡니다. 갈대상자는 물과 바람이 흐르는 데로 언제든지 떠 내려 갈 수 있었습니다

때마침의 은혜

때마침 바로의 딸이 나일 강가로 내려옵니다.
때마침 목욕하러 나온 바로의 딸의 눈에 뜨이게 됩니다.

때마침 바로의 딸이 사랑이 많아 갈대상자에 있는 갓난아기가 죽어야 할  히브리 기임을 알고도 내치지 않습니다.

때마침 젖을 먹을 때가 되어 아이가 웁니다.
때마침 숨어서 지켜보던 미리암은 선뜻 나서서 히브리 여인 중에서 유모를 찾을까요 물어봅니다. 이에 바로의 딸은 유모를 찾아오라 하니 모세의 어머니를 데려오게 되어 허락받고 모세를 집에 데려다가 젖을 뗄 때까지 2-3년간 돌보게 됩니다.

전화위복의 은혜

아기를 나일 강에 던져 죽게 할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마음 편히 놓고 누구 눈치 보지 않고 떳떳하고 당당하게 아기를 돌볼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젖을 뗀 후에는 바로의 딸에 데려가니 물에서 건져 내었다의 뜻을 가진 모세라 이름을 지어 주고 자기 아들로 키웁니다. 모세는 이름의 뜻과 같이 이스라엘을 애굽으로부터 건져내는 사명을 감당하게 됩니다바로의 딸이 이름을 모세라 지어준 것 역시 하나님의 뜻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을 애굽으로부터 끌어 나오게 하는 자로서 택함을 받았습니다. 모세와 같이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모세를 보면 많은 우연이 있습니다.

우리 역시 우연으로 보이지만 우연의 연속은 하나님의 섭리가 담겨 있는 필연입니다.

 

우연을 경험한 믿음의 선진들의 예를 보겠습니다.

 
아브라함
(22:14)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아브라함은 101세가 되어 얻은 귀한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말씀을 받습니다. 이에 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에 있는 산으로 데려갑니다. 결박한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 칼을 들어 잡으려는 순간 여호와 하나님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네 손을 대지 말라하며 멈추게 하시고 수풀에 뿔이 걸려 있는 숫양을 보게 합니다. 아브라함은 이 양을 이삭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리고 이곳을 ‘여호와 이레 (The Lord has provided or will provide)’ 하며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요셉
요셉의 삶에도 여러 우연이 있습니다.

(37:24) 그를 잡아 구덩이에 던지니 그 구덩이는 빈 것이라 그 속에 물이 없었더라
채색옷을 입고 편애를 받았다고해서 그의 형제들이 요셉을 없애려고 구덩이에 던졌는데 마침 그곳에는 물이 없어서 요셉은 살 수 있었으며 그곳을 마치 지나가던 자들에게 구해지고 얼마후에 종으로 팔리게 됩니다. 종으로 팔려 보디발의 하인이 되어 집안일을 돌보게 됩니다보디발의 아내의 일로 감옥에 가게 됩니다. 옥에서 왕을 가까이서 모시던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의 꿈을 해몽하며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2년이 지나도록 아무 소식이 없어 잊혀졌는가 싶었는데 때마침 왕이 기이한 꿈을 꾸게 되어 해몽을 원하지만 아무도 해몽을 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꿈을 해몽한 요셉이 기억난 술 맡은 관원장의 천거로 왕의 꿈을 해몽하게 위하여 왕에 인도됩니다. 꿈을 지혜롭게 해몽하고 그 후의 일 처리도 제안한 요셉의 총명함을 본 왕은 요셉을 총리로 세웁니다.

그 당시 혈기 왕성한 청년인 요셉은 이런 자신의 삶이 전혀 이해되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요셉을 종으로 팔려 보디발의 하인이 되게 하고 또한 감옥으로 인도하심은 요셉을 세우려는 하나님의 섭리요 계획이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
사람의 눈으로 보면 우연으로  보이지만 주님께서는 이미 계획하셨음을 사마리아 여인을 통하여 볼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자신의 부도덕한 행동으로 부끄러워 사람을 만나는 것을 피하려고 모두가 쉬고 있는 뜨거운 대낮에 우물가로 갔는데 그곳에는 이미 일부로 가던 길로 가지 않고 오신 예수님께서 이 여인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여인은 자신이 구주를 만난 것이 우연이라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는 주님의 뜻이었습니다.


섭리를 잘 표현한 구절이라 생각을 합니다.

(롬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고후4:8)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때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당하여 실망하며 좌절하십니까? 그렇다고 해서 염려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맙시다. 인도하시며 섭리하시는 주님이 바로 제 안에서 동행하십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참으로 좋으신 주님의 은혜로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6:26-34)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저를 뒤돌아보면 많은 곳에서 주님은 저를 위하여 모든 것을 예비하시고 인도하시며 섭리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내일일도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여러 우연으로 우리를 섭리하시기 때문입니다님께서는 미련한 저희에게도 섭리를 베푸십니다.  

 


(6:24-27)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나님 아버지,


때로는 이해할 수 없는 어려움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저희가 원치 않는 방향으로 흘러 가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낙심하고 절망하고 마음에는 기쁨이 사라집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주님의 권능의 손길로 저를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며 섭리하시는 주님이 저와 함께 하시니 감사합니다.

 

저의 뜻대로 삶이 움직여지지 않는다해서 두려워 하지말고 섭리로 저를 인도하시는 주님을 기억하게 하옵소서.

 

저의 삶을 주관하시고 섭리하심에 감사와 영광을 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21년 9월 5일 일요일

베드로의 회심

 베드로의 회심

(18:25-27) 시몬 베드로가 서서 불을 쬐더니 사람들이 묻되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아니라 하니 대제사장의 종 하나는 베드로에게 귀를 잘린 사람의 친척이라 이르되 네가 그 사람과 함께 동산에 있던 것을 내가 보지 아니하였느냐 이에 베드로가 또 부인하니 곧 닭이 울더라

성경은 베드로의 세번 주님을 부인하는 사건을 사복음서에서 많은 부분을 할애하여 다루고 있습니다. 그만큼 이 사건을 통하여 우리에게 귀한 교훈을 주시고자 합니다. 베드로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배려와 관심이 있어 베드로는 소중한 회심의 시간을 겪어 주님께서 말씀하신대로 교회의 반석이 되어 많은 영혼을 주님 앞으로 데려오는 귀한 사역을 감당합니다.

 

이 사건은 우리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결코 주님을 부인하고 떠나지 않겠다고 다짐을 합니다. 하지만 상황에 따라 우리는 수없이 예수님을 배반하고 모른다고 저주까지 하며 맹세합니다. 하지만 그런 우리를 주님은 사랑하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를 살리시려 자신을 십자가에서 내어 주셨습니다.

 


베드로를 회심케하여 살리신 주님은 우리 역시 회심케하여 살리십니다.

회심의 사건은 나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어떤 사람인가?

우선 우리는 베드로가 어떤 성품을 가진 사람인줄을 살펴 보겠습니다. 나보다 낳은 사람인지 아니면 나보다 못한 사람인지 살펴 보겠습니다.

·                   예수님의 수제자: 변화산 사건 (모세와 엘리야의 현신을 목격)와 겟세마네 동산 (베드로, 야고보와 요한)에 동행

·                   책임감: 주님은 베드로를 교회의 반석이라 부르시며 양들을 맡기셨습니다

·                   마음이 가난함 (4:13): 베드로와 세례 요한은 미문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내가 있는 것은 없지만 나사렛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 걸어라하며 앉은뱅이를 불쌍한 마음으로 고쳐 주었습니다.

·                   우직하고 급한 성격: 베드로는 주님으로부터 “(16;18-19)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하는 주님의 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자신이 많은 고난을 받고 죽게 될 것이라 말씀하자 베드로는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16:22)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하며 결의에 찬 모습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이런 베드로의 모습을 보시고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하시며 베드로를 책망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인간적인 약점을 분명히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저를 좋게 보아도 제가 베드로보다 잘났다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인간적인 연약함을 가진 베드로를 제자로 부르시고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런 주님은 베드로를 사랑하사 베드로가 회심하여 온전한 모습으로 주님 앞에 서도록 인도하셨습니다.

 

부인하기 전의 베드로의 다짐
베드로가 세 번 주님을 모른다고 다짐하기 전에 베드로는 자신은 결코 주님을 버리지 않겠노라 가슴을 펴고 말했습니다.

(26:33)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26:35) 베드로가 이르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14:29) 베드로가 여짜오되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나이다
(14:31) 베드로가 힘있게 말하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
(22:33) 그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


베드로는 주님을 어떤 일이 있을지라도 감옥에 갈지어도 심지어 주와 함께 죽을지라도 주님을 결단코 부인하지 않을 것을 힘입게 선언합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바로 몇 시간 전에 가룟 유다의 배신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그가 주님을 부인할 수 있지 하며 그를 욕을 했지만 얼마 가지 못해 그들 역시 잡혀간 주님을 버리고 멀리 도망쳤습니다.
(14:50)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그나마 베드로는 대제사장과 친분이 있었던 요한을 따라 주님이 갇혀 있는 곳까지 들어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두렵고 초라한 모습으로 살펴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예언
(26: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14:30-31)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22:34) 이르시되 베드로야 내가 네가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13:38)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예수님은 베드로가 이른 아침 닭 울기 전에 자신을 세 번 부인할 것을 예언하십니다.

즉 베드로는 이미 예수님이 자신이 주님을 부인할 것을 말씀하셨기에 마음 속에 담아 놓았지만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순간에 주님의 말씀을 잊어 버리고 베드로는 주님을 베반했습니다.

 

베드로의 부인
첫번째 부인, 예수를 부인
(18:16-17) 베드로는 문 밖에 서 있는지라 대제사장을 아는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문지키는 여자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오니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하니 그가 말하되 나는 아니라

불을 쬐고 있는 베드로에게 한 여종이 베드로에게 “설마 당신은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는 아니죠?” 하며 묻는다. 이 질문에 베드로는 쉽게 ‘자신은 주님과는 아무 관련이 없으며 알지 못한다’라고 쉽게 부인합니다.

두번째 부인, 예수를 맹세하며 부인
(26:71-72) 앞문까지 나아가니 다른 여종이 그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되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매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불을 쬐고 있는 베드로에게 사람들이 당신은 갈릴리 사투리를 쓰며 예수와 함께 있는 것을 보았으니 그 도당이 틀림이 없다고 하자 베드로는 주님을 도무지 모른다고 맹세하며 부인합니다.

세번째 부인, 예수를 저주하며 맹세하며 부인
(26:73-74)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진실로 그 도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방한다 하거늘 그가 저주하여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곧 닭이 울더라

베드로에 의하여 귀가 잘린 자의 친척인 사람이 베드로를 쳐다보며 당신은 틀림없이 예수와 함께 있었다고 하자 베드로는 예수님을 저주하며 맹세하며 부인합니다. 점차로 부인하는 수위가 높아집니다.


베드로의 회심의 순간
(22:61-62)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하지만 그는 온전한 주님을 아직 만나지 못했습니다. 베드로는 잡혀가신 주님을 세 번 부인합니다. 닭이 울 때 주님은 베드로를 쳐다보십니다. 베드로는 주님께서 세 번 자신을 부인할 것이라는 말씀이 생각이 나서 심히 통곡합니다.

1.        주께서 보시니

예수님은 우리를 만나십니다.
내가 예수님을 찾아 만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사랑하는 제자가 세 번 자신을 부인할 것을 아십니다. 닭이 울자 고통과 시련 가운데 있었지만 예수님은 베드로를 쳐다보십니다. 베드로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과 위로가 느껴집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심령을 통찰하십니다.

나의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십니다. 나의 마음 깊은 곳에 숨겨진 비밀도 보십니다. 아무리 나를 포장해도 나의 악함과 죄악 됨을 주님 앞에 드러납니다. 베드로는 자신을 돌이켜 보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회심의 과정을 겪습니다.

어떻게 예수님을 만났는가?

·    부자청년
(10:21)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어떤 부자 청년이 달려와서 어떻게 영생을 얻어야 하냐고 물어보자 예수님은 그 청년을 보시며 말씀합니다. 비록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부자 청년은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갔지만 예수님의 하신 말씀이 생각이 나서 영생을 소유한 자로서 선한 일을 행하였을 것입니다.

·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 (24:15)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더니

·    사도바울: 주님을 믿는 자들을 찾아 핍박하러 올라가던 다메섹 노상에서 주님은 사울을 만나셨습니다.

·     모세, 기드온: 주님을 알지 못하고 전혀 생각지도 않았을 때 이들에게 주님은 찾아 오십니다

·     주님의 제자들: 주님은 삶의 현장에 있던 이들에게 다가오라고 말씀하십니다(1:17-18)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곧 그물을 버려두고 따르니라

·     주님은 나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121:3-9)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2. 생각나서 (Remember)

·  성만찬을 제정하시면서 주님은 이 일을 기억하라

·   이스라엘에게 전에 여호와의 권능으로 애굽에서 꺼내시고 구름 기둥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음을 기억하라
(5:15)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3.  심히 통곡하니라

심히 통곡함은 회심할 때 나타나는 신체의 현상입니다. 마치 아이가 어미 뱃속에서 나와 울음을 터뜨리는 것과 같습니다. 잠자고 있던 나의 영이 깨어난 순간 영이 감사하여 나의 육신이 심한 통곡으로 반응을 합니다. 진실한 회심의 순간 우리는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되어 통곡합니다.

베드로는 닭이 울 때 자신을 쳐다보시는 예수님을 보고 얼마나 미안하고 참으로 보잘 것 없는 자신을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 역시 죄 가운데 있는 저를 주님께서 쳐다보고 계심을 알 때에 얼마나 죄스러운 마음이 들며 나를 구원하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눈물이 나옵니다.

베드로의 부인의 사건을 통하여 얻는 진리

1.        우리는 실로 연약합니다.

우리는 마음 굳게 결단할 수 있습니다. 그럴듯하게 결단할 수는 있지만, 어려운 상황이 닥치면 인간 본성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자신은 살고자 목숨을 걸고 지키겠다고 다짐했지만, 예수를 저주하며 맹세하며 부인합니다. 예수님의 나라가 임하면 좌측 우측에 앉기를 원했으며 예수님을 자신의 목숨을 다하여 지키겠다고 다짐했던 예수님의 제자들도 뿔뿔이 흩어집니다.

우리가 가진 믿음은 실로 보잘것없습니다. 우리 역시 제자들에게 닥친 상황에서 주님을 안다고 용기있게 대답하기 무척이나 어려울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의 목숨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상황에 따라서 언제든지 주님을 배반할 수 있는 성정을 가졌습니다. 겉으로는 담대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내면은 실로 연약하여 깨지기 쉽습니다.

베드로의 부인과 회복의 은혜의 말씀은 목이 굳고 자신의 소견대로 행하며 죄악과 벗삼아 살고 있는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믿음은 실로 보잘 것 없습니다. 그래서 늘 쓰러지고 무너져 주님을 모른다고 시치미를 떼고 여러가지 이유를 대며 나를 정당화하며 부인합니다. 하지만 제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는 저의 연약함을 아시기에 다시 일으켜 세우시고 죄악에 대하여 생각나게 하시고 회심하게 합니다. 다시 일어나 남은 인생길을 가게 하십니다.

2.        주님은 언제나 나를 보고 계시며 도와주십니다.

회개하면 용서함을 받습니다. 하지만 회개하지 않고 인생의 마지막을 맞이할 수도 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죄악됨을 깨닫고 회심하였습니다. 하지만 가롯 유다는 예수를 판 것을 후회는 했지만 그는 회개하지 않고 목매어 죽었습니다.
(27:3) 그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이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예수님은 우리가 시험에 떨어지지 않도록 중보하십니다.

·                   베드로를 위하여
(22:31-32)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                   세상에 남겨진 우리를 위하여
(17:9) 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11) 나는 세상에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15)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존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주기도: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예수님 당시에도 구경꾼이 있었고 믿음의 자세를 가지고 주님을 만나기를 원했던 이들이 있었습니다.
구경꾼은 마음이 열리지 않아서 아무런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주님을 만나기를 진심으로 원하십니까!
예수님을 표면적으로 지식적으로 겉으로 보십니까? 아니면 예수님의 실재를 만나시기를 원하십니까!



 

하늘에 계신 아버지

 

베드로를 회심케하여 살리시고 교회의 반석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베드로를 살리시려 주님은 베드로를 쳐다 보셨습니다. 그 순간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한 말이 기억이 났습니다. 비록 순간적으로 자신은 살겠다고 주님을 저주하며 맹세하며 모른다고 했지만, 겉잡을 수 없는 감사함과 미안함과 죄스러움에 베드로는 심한 통곡을 하며 영혼이 깨끗이 씻겨지는 놀라운 일을 경험하였습니다. 그 후 베드로는 온전히 변화된 모습으로 주님께 맡기는 인생을 살 수 있었습니다.

 

살아계신 주님,

저와 함께 하시며 저를 의의 길로 인도하시니 참으로 감사를 드리며 저를 통하여 영광 받으소서.

예수님을 부인하여 죄악 가운데 있을 때마다 저를 쳐다보고 계시는 주님의 눈길을 느끼며 기억하게 하옵소서.

주님의 보호하심과 섭리함과 사랑함을 깨닫고 회심하여 다시 주님 앞으로 나아 가도록 이 종을 인도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