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8월 21일 일요일

영생의 확신


(요일5:10-16)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대하여 증언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새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14)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16)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그리하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그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하였는데 그렇다면 ‘영생’이란 무엇인가?
‘영생’이 있음을 나는 믿는가!?

우리 인간은 모두 언젠가는 반드시 죽는다.
어떤 모습으로 마지막 숨을 쉴지는 예상하지 못하지만 반드시 죽는다.
아무리 살려고 발버둥을 치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죽음을 막아 보려지만 비켜갈 수 없다.

기독교적인 의미에서 영생 곧 구원이란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속죄로 인한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현세와 그리고 다가올 내세를 포함한 영원한 생명을 의미한다고 본다.


A.     영생의 확신을 가진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11)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영생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며 영생은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증거가 있다.곧 예수 그리스도의 영인 생명이 있는 것이다.

주님은 요5:24에서 이런 말씀을 하신다.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또한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믿는 자는 영생을 이미 얻었다고 주님은 거듭해서 말씀하신다내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현재의 사건이지만 영생을 얻은 것은 과거의 사건이다즉 예수님을 믿음으로 내게 영생이 주어 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며 다 이루셨을때 이미  주어진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를 드리신다.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주님은 이 말씀을 통해서 영생을 얻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 지를 말씀하신다.
영생을 얻기 위해서 무엇을 알아야 함을 말하는가?첫째하나님께서 유일하신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한다.
둘째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어야 한다.
이 말씀이 내 마음에서 의심없이 믿어지는가?

영생은 곧 하나님과 예수님을 아는 것이다.
‘안다’는 지식적으로 아는 것과 체험적으로 아는 것을 의미한다.
지식적으로 아는 것을 의미한다면 열심히 성경을 읽고 공부하고 연구하면 될 것이다하지만 체험적인 경험이 없다면 지식에만 머물러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과 예수님을 알려면 늘 말씀에 머무르며 말씀안에 계신 하나님과 예수님을 만나고 또한 삶 가운데서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체험할 때 하나님과 예수님을 지식적으로 경험적으로 알아가게 될 것이다.  즉 영생의 본질은 예수님과의 전인격적인 교제를 통하여 예수님과 하나님을 알아가며 그 안에서 누리는 영원한 축복이다.


믿음의 선진 중에서 대표적인 분인 다윗을 보자.
다윗은 어려서부터 여호와를 의지하였으며 여러 위험 가운데서도 여호와의 도우심을 체험하며 여호와를 알아갔다그래서 다윗은 여러 시편에서 자신이 겪어서 아는 여호와를 찬양한다.  특히 시18에서 다윗은 자신이 아는 하나님에 대하여 말한다18편에는 다윗이 얼마나 여호와를 의지하엿으며 또한 하나님에 대하여 알려고 하였는지를 잘 말해주고 있다.

(18:1)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18:10) 그룹을 타고 다니심이여 바람 날개를 타고 높이 솟아오르셨도다.
(18:31) 여호와 외에 누가 하나님이며 우리 하나님외에 누가 반석이냐.

우리도 다윗과 같이 내가 아는 하나님에 대하여 또한 주님에 대하여 내 자신만의 언어로 말할 수 있을까?

하나님께서 온 천하를 창조하신 유일하신 하나님 이심이 잘 믿어지지 않으며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동정녀를 통하여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음도 잘 믿어지지 않는다그리고 나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죄를 속죄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음은 더욱 더 믿겨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속에는 어둠의 죄성이 남겨져 있어서 거룩한 하나님을 부인하도록 인도를 하기 때문이다.

불신이 가득한 우리에게 주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는 방법을 제시하신다.
(14:7)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주님을 알아야 한다주님을 아는 것이 곧 유일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도무지 인간의 지식과 상식과 경험으로는 믿을 수 없지만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이 믿어지는 것이 은혜이다

또한 주님은 우리에게 자신의 이름의 능력과 권세를 주셨다.
예수님의 이름에는 놀라운 능력이 있다.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0: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우리는 영생을 받았다.


B.     영생의 확신을 가진 자는 담대하게 하나님께 간구한다.
(14)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믿음생활의 근본은 ‘영생의 확신이 있는가’ 라고 생각한다.
영생의 확신이 있다면 담대할 것이다이 땅에서 만나는 여러 어려움과 환난 가운데서도 꿋꿋하게 주님을 믿고 의지하는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을 것이다왜냐하며 주님의 섭리하심으로 결국은 주님의 땅으로 인도하실 것임을 믿기 때문이다.

영생의 확신을 가진 자의 대표적인 자인 스데반의 담대함을 보자.
그는 주님을 증거하다가 신성모독이라 주장하는 자들이 던진 돌에 맞아 죽어 가면서 담대하게 자신의 영혼을 주님께 부탁드리며 자신을 돌로 친 자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간구하며 죽었다.
(7:59)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어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베드로의 모습은 어떠한가.
예수님의 형제인 사도 야고보가 순교한다그리고 베드로는 옥에 갖히게 된다자신 역시 날이 밝으면 순교할 것을 아는 베드로는 그런 가운데서도 깊은 잠을 잔다깊이 잠든 베드로를 깨우기 위해서 천사는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서 깨웠다.  죽음의 공포를 이겨낸 담대한 모습이다.
(12:1-2) 그 때에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에서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12:5-6)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헤롯이 잡아 내려고 하는 그 전날 밤에 베드로가 두 군인 틈에서 두 쇠사슬에 매여 누워 자는데 파수꾼들이 문 밖에서 옷을 지키더니 홀연히 주의 사자가 나타나매 옥중에 광채가 빛나며 또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이르되 급히 일어나라

영생의 확신이 있는 자는 담대하게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
죽음은 모든 인생이 언젠가는 반드시 거쳐할 하나의 관문일 뿐이며 그 너머에는 영생이 기다리고 있음을 믿기에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그저 담담하게 죽음을 맞이 할 뿐이다.

또한 영생의 확신이 있는자는 담대하게 주님의 뜻을 하나님께 간구한다.
우리의 삶이란 고통과 좌절과 실망의 연속이다.  아무리 열심히 믿음 생활을 해도 내 안에 영생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불안하고 초조하고 때론 근심 가운데 살 수 밖에 없다.

과연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는가?
나는 주님을 아는가?
내가 이런 저런 죄를 짓는데 나는 과연 천국에 갈 수 있을까?
나의 마음은 왜 이리도 불안하며 평안하지가 않는가.
누가 나에게 조금만 잘못을 해도 눈에 불을 키고 달려든다.
모든 것을 다른 이의 탓으로 돌리며 불평한다다른 이들에게 나의 억울함과 사정을 알아 달라고 호소한다심리학자나 상담가들은 상대방이 말하는 사정을 잘 들으라고 한다그런데 근본적인 문제는 내 마음속에 참된 평강과 감사함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내 마음에 영생에 대한 확신이 있다면 담대하게 주님의 뜻대로 하나님께 간구한다.
주님의 뜻대로 간구를 하였기에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응답해 주신다

주님께서 내 안에 충만히 계시기에 현재에 닥친 절망과 곤고함이나 환난에 결코 연연해 하지 않고 오히려 의연하게 주님의 자녀로서 대처할 것이며담대하게 하나님께 나의 처지를 아뢰며 인도해 달라고 간구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죽어도내일 죽어도 내가 갈 곳이 어디인지를 알며 확신하기에 조금 일찍 주님 앞에 간다 한들 아쉽지가 않을 것이다단지 지난 날이 후회스럽고 아직 내게 맡겨진 일들을 온전하게 해내지 못했다는 자책감은 들겠지만그래도 주님을 의지하기에 이내 마음에는 평강과 나를 지금까지 살펴주신 주님의 섭리함에 감사하며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담대하게 하나님께 간구할 것이다.

지금도 나는 주님의 임재를 그리워한다.
내 삶이 얼마나 남았을까 떄로는 생각을 하지만 그렇다고 전전긍긍해 하지 말자.
또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미리 근심하지 말자.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는가.
(6;34) 그런즉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오늘 한 날의 근심과 괴로움은 한 날로 족하다고 말씀하지 않는가.

오늘 하루의 은혜로 족하다.
내일은 또 다른 오늘이지 않겠는가.
내일이 나의 삶의 종말일지라도 두려워하지 말자.

육신의 종말은 나만 겪어야 하는 것이 아닌 모든 이들이 반드시 겪어야 하는 관문이며 또 다른 세계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이 세상과는 다른 그 곳에 가면 어떤 일이 있을까 기대가 되지 않는가!  지금까지 우리의 육신이 겪었던 이 땅의 삶과는 전혀 다른 은혜의 세상이 기다린다.  그곳에 가면 나는 무슨 일을 할까?

나는 가끔가다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우주는 너무나 크며 수를 셀 수 없는 은하수들이 있으며 각각의 은하수에는 셀 수 없는 수많은 각각의 별들이 있다하나님께서 허락을 하신다면 나는 천국에서 우주를 탐구하는 존재가 되고 싶다고 생각을 할 때가 있다생각만해도 기대가 된다.

주님의 은혜에 감사할 뿐이다.
영생의 확신을 주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담대하게 나를 통하여 주님의 뜻이 이루어 지기를 하나님께 간구한다.


C.     영생의 확신을 가진 자는 이웃의 영생을 간구한다.
(16)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주님은 우리에게 큰 계명을 주셨다.
(22:37-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제 자신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12:30-31)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그렇다면 나의 이웃은 누구인가?
어떤 이가 예수님께 이렇게 물어본다.
(10:29)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서 여짜외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이렇게 물어보자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들으신다.  강도 만나 가진 것을 빼앗기고 맞아서 거의 죽게 된 자를 제사장레위인 그리고 사마리안인이 만나는데 유대인이며 종교 지도자인 제사장과 레위인은 못본 체하고 피하여 지나가지만 이방인인 사마리아인은 그를 불쌍히 여겨 상처를 치료하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며 떠날 때 주막 주인에게 돈을 주며 잘 보살펴 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이렇게 물으신다.
(10:36-37)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나 자의 이웃이 되겠는냐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같이 하라 하시니라.

바로 나와 가까이 있는 사람만이 내 이웃이 아니라생판 모르는 가난하고 초라한 자들도 나의 이웃이며 이들을 못본 체하며 지나지 말고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

영생의 확신이 있는 자는 가까이 있는 이웃 뿐 아니라 스쳐 지나가는 불쌍한 자들에게도 자비를 베푼다왜냐하면 그의 마음에는 주님의 영이 거하시기에 긍휼과 자비와 사랑의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세계를 품고 열방을 품고 모든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나오다가 만난 불쌍한 자들을 불쾌하다고 머리를 돌리고 못본 척 하고 지나가지 말자그런 행위가 제사장이나 레위인과 다른 것이 무엇인가.  그것보다는 오늘 내가 스쳐 지나가며 만난 알지 못하는 불쌍한 이들에게 자비를 베풀며 그의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주님께 간구해 보자.  그것이 더욱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며 또한 영생에 가까운 길이지 않겠는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또한 주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 이미 영생을 주셨다.
영생의 확신을 갖고 더욱 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 가며어지럽고 혼란스러운 이 땅에서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담대하게 주님의 뜻을 간구하며나와 가까운 나의 이웃 뿐만 아니라 스쳐 지나가는 불쌍한 자들의 영생을 위하여 간구하는 인생의 축복과 그리고 하나님께거 계신 천국에서 주님과 함께 하는 영생의 축복을 받기를 간구한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영생이란 곧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아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유일하신 하나님을 알아 가기를 원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깊이 알기를 원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주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영생의 구원을 약속하셨읍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에 대하여 성경에 자세하게 일러 주셨읍니다.
말씀 안에 계신 주님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아 가기를 원합니다.
시편에 기록된 다윗의 고백과 같이 저 역시 제가 아는 하나님에 대하여 저 만의 찬양을 드리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을 알아가는 것이 인생에서 가장 축복된 삶임을 깨닫습니다.

우리에게 영생의 확신이 있다면 우리는 더욱 더 담대하게 이 땅을 살아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생의 확신이 있는 자는 이 땅에서의 삶 보다는 주님께서 함께 하시는 영원한 삶의 세계를 더욱 그리워 할 것이기 때문이기에 이 땅에서 미련을 갖지 않을 것입니다.
온갖 혼잡함과 더러움과 엮겨운 냄새가 진동하는 곳에서 저희는 살고 있읍니다.
그 가운데서 주님의 거룩한 향기를 내뿜으며 주위를 정화시키기를 원합니다.
이 세상에 너무 연연해 하지않도록 저희를 인도하심에 감사드립니다.
이제 얼마 후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있는 곳에
저 역시 믿음이 선진들과 함께 할 것이라는 사실에 가슴은 벅찹니다.

영생의 확신이 있는 자는 나의 이웃을 돌아보게 됩니다.
저 멀리 있는 자들이 아니라 바로 제가 오늘 스치며 만나는 저의 이웃들에게 주님의 자비를 베풀며 따뜻한 한 마디를 하며 그들에게 제가 갖고 있는 영생의 확신을 나누어 주는 도구로 저를 사용하옵소서.

저에게 영원한 기쁨과 찬양이 있는 곳에서의 영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저의 찬양을 받아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아멘.

2016년 8월 7일 일요일

주님과의 사귐

(요일1:5-10)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사귐관계, Fellowship은 우리의 삶에 참 밀접하게 관련이 되어있다.
우리의 인생은 관계속에서 시작하고 관계에서 끝이 난다.
서로 모르는 사람끼리 만나 맺어지는 부부관계.
부모과 자녀와의 관계
형제 자매간의 관계
친구간의 관계
사람과의 관계
관계 속에서 태어나 관계 속에서 죽어 간다관계는 인간의 본질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흔히 인성이 먼저 되어야 한다고 한다.
올바른 인성을 갖고 있을 때 올바른 사람과의 관계가 형성이 될 것이지만 올바른 관계를 가지려면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 하며 그 과정에서 마음은 병이 든다아무리 노력해도 인간간의 관계는 완전하지 않고 언제 허물어질지 모른다왜냐하면 완전한 인성을 가진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성경은 완전한 사귐에 대하여 말씀한다곧 주님과의 사귐이다.

그래서 교회는 관계에 대하여 강조를 한다.
그래서 각 교회마다 각가지의 fellowship program을 한다,
부부와 자녀간의 fellowship.
교인과의 fellowship.
세상사람들과의 fellowship.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주님과의 fellowship.

어떤 이들은 주님과의 교제가 무엇인지를 경험해 보지 않아 그저 막막히 그런 것이 있는가 한다.
그래서 주님과 교제를 나누는 것이란 열심히 교회에 나오고 헌신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또 어떤 이들은 주님과 깊은 교제를 나눈다고 말한다그런데 실생활은 주님의 자녀로서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행동들을 한다본문에서 말하듯이 그는 하나님과 교제하고 있다고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어둠에 거하기에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참 성도로서 주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는 사람들은 자신을 잘 나타내지 않아 겉모습만 보고 그가 주님과 깊은 교제 가운데 있음을 알 수 없을 경우가 많다.

주님과의 사귐.
주님과의 교제.
주님과의 관계.
자신과 가족의 영혼 구원을 위해 교회에 다니는 참성도라면 누구나 주님과의 깊은 사귐을 나누기를 원할 것이다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는 가짜 신자거짓된 성도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믿음 생활을 하는 성도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주님과의 깊은 사귐 즉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주님과의 친밀한 사귐이란 무엇인가?  본문에서 잘 가르쳐 주신다.

A.     빛 가운데 거하라
주님과의 교제에 가장 필요한 것이 곧 빛에 거해야 한다고 말한다.
(5)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하나님은 빛이시다주님 또한 빛이시다.
주님은 빛이신데 그렇다면 사울과 같이 강렬한 빛으로 나타나신 주님을 보았는가?
저는 빛으로 오신 주님을 아직 눈으로 보지 못하였다.

하나님께서 빛이심이 이해가 가는가.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왜 그럴까!  빛에 대한 고정관념이 있어서 그럴 것이다.

저는 주님이 빛이심을 이렇게 이해한다.
빛의 개념을 더욱 확대해 보자.
물리시간에 빛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는 것을 배웠을 것이다빛은 파장이며 많은 빛의 파장들이 있다고 배우지 않았는가.  Frequency 곧 파장은 반복적이며 일정한 진폭을 말한다.그리고 각 빛에는 고유의 파장이 있다.  빛 가운데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영역을 가시영역이라 한다그런데 눈에 보이는 가시영역의 빛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다양한 빛이 훨씬 더 많고 영역은 거의 무한대이다.  적외선, x, Gamma멀리 떨어진 우주에 있는 인공위성과의 통신을 가능케 하는 무척이나 빠른 파장을 갖고 있는 전파들 그리고 아직 발견되지 않은 영역의 파장들과 그리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하나님 고유의 빛의 파장.


사람들에게 비추는 생명의 빛은 곧 우리가 사랑하는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요한복음에서 주님을 생명의 빛이라고 소개를 한다.
(1:4-5)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였더라.

빛에 거한다는 것은 곧 주님 안에 거함을 말한다.
내 생명 안에는 어둠 아니면 빛이 거한다.
그것을 믿는가!
내 안에 빛이 거함이 믿어지는가!
만일 믿어지지 않는다면 나의 신앙생활을 다시 점검해 보아야 한다.
나의 영생이 걸린 아마도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자녀이면 그 안에는 주님이신 생명의 빛이 거한다.
그 생명이 빛이 나타나는 곳이 있는 데 바로 나의 눈을 통하여 내 안에 계신 주님의 빛이 나타난다.
(6:22-23) 눈은 마음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11:34)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

나의 눈은 내 몸의 등불이다그래서 내 속에 있는 것을 비춘다.
내 눈으로부터 생명의 빛이 나타나는가?
어떤 사람의 눈에서는 따뜻한 온화한 사랑의 느낌을 느낄 수 있지만,
어떤 사람의 눈에서는 독기가 서려 있음을 보며 왠지 모르게 섬뜩할 때가 있지 않는가.

사람들이 나의 눈으로부터 무엇을 느낄 수 있을까?
빛을 느낄까 아니면 어둠을 느낄까?


B.     빛 가운데 행하면
성경은 어떻게 하는 것이 주님과의 사귐을 갖게 하는 지를 가르치고 있다.
(6-7)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온 세상은 제각각의 파장으로 온통 뒤덥혀 있음을 알고 있는가.
내가 깨어 있거나 자고 있을 때에도 내 주위로 온통 빛의 파장으로 뒤덮혀 있음을 이해하는가.
각종의 파장으로 뒤덮혀 있는 곳에서 내가 원하는 Source와 연결되기 위해서는 동기화가 필요한 것이다.

빛으로 쓰이는 문명의 이기들을 예로 들어보자.
의료에 요긴하게 쓰이는 x-ray,
어두운 곳에서도 부딪히지 않고 길을 정확하게 아는 박쥐와 같이 항공운항을 가능하게 하는 Radar.
얼마전에 2006년에 발사된 New Horizon위성이 지금에야 명왕성을 통과하며 사진을 보냈다어떻게 약 50Km 떨어진 곳으로부터 전송된 사진을 받아을 수 있을까?
반가운 사람들과 매일 소식을 전하는 Cellphone.
내가 있는 곳의 위치를 정확하게 아는 GPS.
모든 문명의 유익한 기기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파장 곧 빛을 사용한다.

이런 기기들과 연결되어 유용하게 쓰기 위해서는 동기화가 되어야 한다.
한 예로Drama를 집에서 볼 수 있게 하는 TV.  TV Station은 자신의 고유의 파장으로 방송의 내용을 출력한다그것을 각 TV 안에 있는 Decoder가 내가 원하는 program을 보내고 있는 방송국과 synchronize되도록 해 준다.

마찬가지로 빛이신 주님과의 사귐을 갖기 위해서는 주님과 동기화가 되어야 한다.
내가 주님과 연결되어 친밀한 교제를 나누기 위해서는 주님과의 channel에 맞출 수 있는 Synchronization (동기화)가 반드시 맞추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동기화가 맞지 않다면 원치않는 수신을 하게 되어 잡음으로 가득하게 될 것이다성경은 주님과의 사귐을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빛이신 주님과의 Channel에 동기화를 시켜야 하는지를 말씀한다

본문 말씀에는 두가지 행함이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어둠 가운데서의 행함’ 또 다른 하나는 ‘빛 가운데서의 행함’.
주님과의 사귐을 갖기 위해 주님과 동기화 되기 위해서는 ‘빛 가운데서의 행함’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한다.

어둠에 속한 자들을 옛사람이라 부르며 세상에 속한 행실을 한다.
빛에 거하는 자들을 새사람의의 거룩한 옷을 입은 자라고 말하며 거룩한 행실을 한다.

1.      어둠에 행하면
(6)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어둠에 거하는 자들은 어떤 행동들을 하는가.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사단은 거짓의 아비이다.
그래서 거짓을 조심해야 한다.
만일 믿는 자가 거짓으로부터 자유로운 자가 있다면 그는 실로 천국이 가까운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또한 이어지는 요한 일서의 말씀을 통해서 보면
     헹제를 미워한다
(요일2:9-11)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또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

눈이 멀었으니 나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빛이 보이겠는가?
눈이 멀었으니 나로부터 내 안에 계신 주님의 거룩한 빛이 발산이 되겠는가?
눈이 멀었으니 보이는 것은 캄캄한 어둠 뿐이다.

     세상의 것들을 사랑한다.
어둠에 거하는 자들은 옛사람의 속성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육신에 속한 자들이며 세상의 것들을 사랑 할 수 밖에 없다.
(요일2:15-16)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2.      빛 가운데 행하면
(7-8)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①.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빛에 거하는 자는 주님과의 사귐을 나누며 또한 성도간의 교제를 나누게 된다.
‘서로 사귐’은 일방적인 통행이 아니라 쌍방향을 의미한다.
주님과의 사귐은 일방적인 짝사랑의 사귐이 아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듯이 우리 또한 나의 사랑을 고백하며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
주님과의 사귐을 위해서 주님께서는 주님의 영이신 성령을 우리의 마음속에 보내 주셨다.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은 누구보다 하나님의 사정과 나의 사정을 잘 아시기에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해준다.

②.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십자가에서 쏟으신 주님의 거룩한 보혈이 나의 모든 죄를 깨끗히 씻겨 주신다.
그리고 주님과의 교제 가운데 있는 자는 죄의 문제를 해결 받았기에 천국을 소망하게 된다는 것이다성경에서 특히 사복음서는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님께서 바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시고 온갖 고통과 비난을 받으시며 끝내는 십작가에 달려 모든 피를 흘리시며 죽으셨다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하신 것이다.
우리는 거듭해서 반복적인 죄를 짓지만 결국은 어느 순간 그 죄에서 자유롭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나의 마음속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무조건적인 용서가 있기 때문이다.


빛에 거하여 주님과 사귐을 갖기 위해서는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빛의 행실이 따라야 한다.
즉 행함이 반드시 있어야 함을 강조한다.

빛의 자녀로서 온전한 행실을 하는 자는 주님과의 온전한 사귐을 나누게 되며 주님의 거룩한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하게 씻겨준다그렇지 않고 주님과의 사귐을 갖기 원한다며 빛에 거하는 행동을 하지 않고 어둠의 행실을 한다면 그 사람은 거짓을 하는 것이며 진리 가운데 있지 못한다고 말한다.


C.     빛에 거하려면
빛에 거하는 자만이 주님과의 온전한 사귐을 나눌 수 있다.
그렇다면 주님과의 온전한 사귐에는 무엇이 필요한가?  죄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회개’를 한다는 것이다.
(8-9)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빛에 거하기를 원하는 심령은 죄에 대하여 민감하게 반응한다.
사도바울은 나는 곤고한 자라고 고백한다.  사람들이 주님안에 깊이 거하면 거할 수록 죄성에 대하여 민감하게 반응한다반대로 육신안에 거할 수록 죄성에 대하며 둔하게 반응한다왜냐하면 반복된 죄성이 내 몸에 습관적으로 굳어져 내 몸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이다.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어떤 결과가 초래되는가.
(10)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회개치 않는 영혼에는 말씀이 거하지 않는다.
말씀 곧 주님께서 그 안에 계시지 않는 다면 그 영혼은 결국 어디에 가게 되는가?
(15: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온전한 회개를 하나님께서는 들으시고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며 모든 불의함으로부터 나를 정결하게 하신다.  우리는 회개를 하며 주의 보혈로 깨끗하게 씻어 달라며 용서를 구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간구한다.
이는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공의로우시며 심판주이시며 주권자인 주님을 인정하는 행위이다.

그런데 사람에게는 언제나 회개할 시간과 여유가 주어지지 않는다.
각 사람의 마지막은 어떤 모습으로 오게 되는 지를 모른다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이 죽기전까지 먹고 마시며 떠들며 다투며 기쁨을 누리려고 한다그러다가 전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자신의 마지막을 맞는 이들도 부지기수이다평소에 자신의 죄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회개하며 용서를 구한 영혼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자신의 마지막을 맞이 하더라고 준비가 되었 있지만그렇지 않고 회개를 통한 죄사함이 없는 영혼은 밖에 버려져서 불에 타오를수 밖에 없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여

이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간의 사귐의 관계가 있읍니다.
부부의 관계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
교회에서 교인간의 관계
올바른 관계도 있지만 왜곡되어 나의 심령을 해치는 잘못된 관계도 있읍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주님과 사귐이 있다고 하면서
실은 잘못된 주님과의 사귐이 너무나 많이 있읍니다.
왜냐하면 저희들 마음속에는 거짓의 영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다니면서 수없이 들었던 주님과의 교제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보지도 않았고
또한 저의 마음속에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를 못했읍니다.
너무나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그것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귐이라고 착각을 많이도 했읍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와 올바른 사귐을 하시고자 하십니다.
빛이신 주님안에 거하며 주님과의 사귐을 갖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곧 죄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회개하며 용서를 구할 때
저는 빛이신 주님의 파장에 동기화가 되어
주님과의 사귐을 갖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죄는 저와 주님과의 사귐을 가로막는 거친 갈림돌입니다.
저에게 시간이 주어진 오늘이 바로 죄에 대하여 용서를 구할 때 입니다.
오늘은 또 주어지지 않습니다.
제게 허락된 시간이 늘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달아
늘 죄에 대하여 민감하게 반응하여 용서를 구하는 심령이 되도록
제 안에 계신 성령님 강팍한 저의 마음을 만져 주옵소서.

빛이신 주님과의 온전한 사귐을 갖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곧 저의 인생의 목표가 되게 하옵소서.
그리할때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제 안에 계신 주님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