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월 21일 일요일

그러나 기다리시는 주님

(사30:18-22)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정의의 하나님이심이라.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시온에 거주하며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백성아 너는 다시 통곡하지 아니할 것이라. 그가 네 부르짖는 소리로 말미암아 네게 은혜를 베푸시되 그가 들으실 때에 네게 응답하시리라. 주께서 너희에게 환난의 떡과 고생의 물을 주시나 네 스승은 다시 숨기지 아니하시리니 네 눈이 네 스승을 볼 것이며  너희가 오른쪽으로 치우치든지 왼쪽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말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바른 길이니 너희는 이리로 가라 할 것이며 또 너희가 너희 조각한 우상에게 입힌 은과 부어 만든 우상에 올린 금을 더럽게 하여 불결한 물건을 던짐 같이 던지며 이르기를 나가라 하리라.


본문의 말씀은 우리에게 위로를 준다.
우리는 참으로 패역하고 부정하며 죄성으로 가득하여 세상의 곤고함으로 힘들어 하는 인생들이다.
그러나 그런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긍휼과 자비를 베푸시는 주님의 사랑을 우리들에게 전하고 있다.

15절 말씀에 어떻게 주님을 섬겨야 하는지를 알려 주신다 
(15) 주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돌이켜 조용히 있어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거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고

주님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조용함, 잠잠함, 그리고 신뢰가 있는 구원받은 자들에게 주님은 힘을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신다. 하지만 그런 신실한 모습으로 주님앞에 나아가는 자는 무척이나 적다. 주님 앞에 조용히 나가 구원을 베푸신 주님의 사랑을 생각하며 주님의 사랑을 느껴야 하는데 우리의 삶은 그렇지 못하며 늘 바쁜 인생을 산다. 번잡한 삶은 곧 주님의 말씀 앞에 온전하게 나가지 못함을 의미하며 인생의 축복된 길로 인도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듣지를 못하여 자신의 소견대로 행함으로 많은 실패와 좌절과 곤고함이 따라올 수 밖에 없다. 저 잘났다고 저들의 길을 가며 주님을 멀리하며 세상에 취해 살며 온갖 죄악을 범한다. 입으로는 주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실상 그의 마음은 주님의 마음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며, 주님보다는 자신이 만든 세계에서 자신만의 우상을 섬긴다. 주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삶을 살게 되어 결국은 피페하고 곤고한 삶을 살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런 자들을 주님은 기다리신다. 은혜와 긍휼을 베푸시려고 주님은 기다리고 계신다.


그러나 기다리시는 주님
(18)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기다리고 계시는 주님 앞으로 나아가자.
(5:15) 그들이 그 죄를 뉘우치고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리라. 그들이 고난 받을 때에 나를 간절히 구하리라.

은혜와 자비가 풍성하신 주님은 나를 기다리고 계신다.
참고 참으시는 인내의 주님은 내가 다시 주님 앞으로 나오기를 기다리신다.

주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는 복이 있다.
죄악 가운데서 허덕이며 주님 앞으로 온전하게 나아가지를 못한다.
주님은 그런 내가 다시 주님 앞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신다.
주님은 내가 회복되기를 원하신다.
주님 앞으로 나왔을때 주님은 다시 나를 회복시키신다.

고난과 절망 가운데 있다면, 나의 힘으로는 어찌 할 수 없다면, 나를 도와줄 아무런 도움도 없다면, 홀로 외롭다면, 어디에서 주님의 사랑을 잃어 버렸는지를 생각을 해보자. 그런 나를 기다리시는 주님앞으로 나아가자. 사람들은 나를 버리고 무시하고 기다리지 않지만 주님은 나를 귀하고 사랑스럽다고 기다리신다. 나는 결코 이해 할 수 없는 놀라운 회복의 은총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나를 기다리시는 주님.
내가 어디에 있는지 나를 쳐다보시며 행여나 주님을 기억하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주님 앞으로 나아가는 나를 기다리시는 주님.
얼마나 주님 앞으로 나아가기에 실패를 하였던가!

나를 지금껏 기다리고 계시는 주님 앞으로 나아가자.
내가 죄악과 사망으로부터 돌아오기를 원해서 고난의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사랑.
나를 기다리셨던 주님의 사랑은 지금 이 시간 내게도 흐른다.
참으로 잘못된 나를 참고 또 참고 또 참으시며 기다리시고 살리신 주님께 두 손을 높이 올리고 주님을 찬양하며 감사하며 영광을 드립니다.


주님은 내가 다시 주님께 돌아오도록 환난과 고생을 허락하신다.
(20) 주께서 너희에게 환난의 떡과 고생의 물을 주시나

말씀에 쓰여진 대로 패역한 자에게는 환난의 떡과 고생의 물이 기다리고 있다.
주님을 떠나 있는 삶은 곧 피폐하고 곤고한 삶이 기다리고 있음을 의미한다. 주님은 내가 다시 주님앞으로 돌아 오도록 인생의 쓴맛을 맛보게 한다. 그와같은 곤고함이 없다면 잘난 나는 결코 주님 앞으로 나아갈 수 없기 떄문이다.

인생의 쓰라림을 겪을때 다시 주님 앞으로 나아간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황량한 광야에서의 40년의 쓰라리고 고통스러운 기간이 없었다면 그들은 결코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지도 못하고 결국 허무한 인생을 마쳤을 것이다.

주님은 나를 사랑하시기에 환난의 떡과 고생의 물을 허락하신다.
환난과 고생은 육신의 곤고함 뿐 아니라 영적인 곤고함도 의미를 한다.

(8:11)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육신적으로는 잘먹고 잘입고 풍요롭게 잘살지만 영적으로는 매우 메마르며 공허한 인생을 사는 이들은 너무나 많다. 육신의 곤고함보다는 영적인 곤고함이 더욱 견디기 어렵다. 육신적으로 많이 가진 자들이 영적인 곤고함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의 목숨을 끊는 것을 본다.

영적으로 충만한 삶을 살기를 축원합니다. 
비록 육신적으로는 힘이 들고 지치지만, 주님의 마음으로 충만한 영적인 인생들은 모든 것들을 견디어낸다. 그저 숙명적으로 체념하며 견디어 내는 것이 아니라, 기뻐하며 즐거워하며 희락 가운데서 비록 힘이 들지만 그와같은 환경을 주신 주님께 감사하며 복된 인생길을 간다.

육신적으로나 영적으로 환난의 떡을 먹고 고생의 물을 마실때 비로서 내게 베푸신 주님의 절실한 사랑을 기억해 내고 다시 주님앞으로 돌아가는 인생은 축복된 인생이다. 만일 환난과 곤고함이 없다면 주님 앞으로 나아가기 어려울 것이다. 세상이 주는 안락함에 머물며 여기가 좋사오니하며 그곳에 머물며 주님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죽을 병에 걸렸을때, 재정적인 어려움을 만났을때,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억울한 일들을 당했을때, 나의 힘으로는 어찌해 볼 수 없는 일들을 만났을때 제발 살려 달라고 전능하신 주님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던가!

주님께서 내 곁에 계시지 않는 것과 같은 공허함을 느끼지 않는가?
순간 순간 주님의 임재를 느껴야 한다. 그렇지만 영적인 곤고함으로 무디어져 있기 때문에 바로 내 안에 계신 주님을 느끼지 못한다. 주님의 임재를 충만하게 느껴야 하는 곳인 교회에서 온전하게 주님을 만나는 예배를 드리는가?


주님께 이 곤고한 영혼을 받아 달라고 간구를 해보자.
(3:1)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3: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주님을 찿기 보다는 보기에 좋아 보이는 세상것들애 마음이 빼았겨서 얻으려고 온갖 애를 쓰고 있다면 당신은 영적으로 곤고한 자들이며 죽은 자들이다. 그런 영적으로 공허하며 곤고한 자들의 결국은 파멸이다. 그와같은 멸망이 일어나기 전에 기다리고 계신 주님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3: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며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환난과 고생이 왔다면 기뻐하자.
나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인생의 위기와 왔다면 기뻐하자.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심의 증거이지 않겠는가.

환난과 고생은 주님께서 내게 주시는 축복이다.
징계를 통하여 나를 기다리고 계신 주님 앞으로 돌아오도록 일깨워 주는 귀한 축복이다.
은혜와 긍휼을 베푸시려고 기다리시는 주님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축복의 시간이다.
나를 내려놓고 기다리고 계시는 주님 앞으로 온전하게 나아가게 하는 구별된 때가 온것이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하나?

간구
(19) 그가 네 부르짖는 소리로 말미암아 네게 은혜를 베푸시되 그가 들으실 때에 네게 응답하시리라.

고난 가운데 있다면 왜 내가 고난 가운데 있는지를 생각해 보자.
그리고 주님께 나의 사정을 아뢰자. 지금의 모습 그대로를 주님께 아뢰자.

주님께 무엇이 잘못되었나 회개하며 용서를 구하여야 한다.
주님께 나의 빗장쳐져 있는 마음문을 열어야 한다. 내 마음이 열려 있을때 주님은 내게로 들어와 나와 함께 거하시며 미련하고 곤고한 나를 주님의 축복된 자녀로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환난의 떡이라 목에서 넘기기도 힘이 들며 물을 마셔도 갈증이 가시지가 않습니다.
주여 살려 주옵소서. 제가 죽게 되었읍니다.
주님 어디에 계십니까. 환난과 곤고가 저를 삼키려 하여 견딜 수가 없읍니다.
저를 건져주옵소서. 주님 앞에서 살기를 원합니다.
곤고함과 환난이 변하여 즐거움과 기쁨으로 회복되기를 간구합니다.

나의 마음을 주님께 토로하자.
주님은 그런 나를 보시며 결코 무시하지 않으신다.
나를 보듬어 안으시며 나를 위로하실 것이다.
주님은 나의 간구를 들으신다. 비록 한마디라 할지라도 주님은 들으신다.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21) 너희가 오른쪽으로 치우치든지 왼쪽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말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바른 길이니

내 귀에 들리는 소리.  바른 길을 알려 주신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자녀들.
(42:16) 내가 맹인들을 그들이 알지 못하는 길로 이끌며 그들이 알지 못하는 지름길로 인도하며 암흑이 그 앞에서 광명이 되게 하며 굽은 데를 곧게 할 것이라. 내가 이 일을 행하여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리니

주님은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자들을 이끄신다.
나는 결코 알지 못하며 이해할 수 없는 길이지만 그 길을 순종하고 따라가다 보면 결국은 축복의 길로 인도하신다고 약속을 하신다.

(16:13)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주님은 진리의 성령을 통하여 자신의 뜻을 성경에 기록하셨다.
주님의 자녀가 주님의 사랑이 담긴 성경을 가까이하고 늘 읽으며 묵상을 한다면 주님은 말씀을 통하여 자신의 뜻을 가르쳐 주신다.
 
말씀을 가까이 하여야 한다.
말씀에 나를 향하신 주님의 뜻이 담겨져 있다.
말씀을 통하여 온전하게 주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우게 한다.
말씀에는 주님의 사랑이 담겨져 있으며 주님께서 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는지를 알게 한다.

더러운 것을 버린다
(22) 또 너희가 너희 조각한 우상에게 입힌 은과 부어 만든 우상에 올린 금을 더럽게 하여 불결한 물건을 던짐 같이 던지며 이르기를 나가라 하리라

(7:26) 너는 가증한 것을 네 집에 들이지 말라. 너도 그것과 같이 진멸 당할까 하노라. 너는 그것을 멀리하며 심히 미워하라. 그것은 진멸 당할 것임이니라. 
내 주위에 혹 집에 부정한 것들이 있나 살펴보자.
그런 것들이 있다면 버려야 한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는 그런 것들을 가증하게 여기시기 때문이다.

부정한 것을 버려야 한다.
우선 내 마음에서 부정한 것을 버려야 한다.

매 순간 죄악된 것들이 나를 쓰러뜨리려 유혹을 한다. 눈으로 보지 말아야 할 것들 보며 귀로 듣지 말아야 할 것들을 하며 입술로 말해서는 않도는 것들을 말한다. 생각으로 죄악된 생각을 한다.

이런 더러운 죄악된 것들이 내 주위에서 얼씬거릴때 주님의 이름으로 버려야 한다.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내게 주는 저주의 생각은 떠나 갈지어다.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죄악된 것을 보고 듣고 말하려는 것들은 떠나갈지어다.
더러운 것은 떠나라고 그때마다 주님의 이름으로 선포를 하자. 예수님의 이름의 능력을 체험해보자.
내 주위에서 부정한 것들을 버릴 수 있도록 주님께서 도우신다.

버리는 훈련을 해야 한다.
날마다 하나씩 버리다보면 마지막 호흡을 할 때 버릴 것이 많이 남아 있지 않기를 간구한다.
마지막 호흡을 하고 홀가분하게 기다리고 계신 주님 앞으로 나아가는 복된 인생이기를 축원을 드립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지금껏 살면서 많은 환난과 고생이 있었읍니다.

육신적으로 고달팠었고 영적으로 황량한 곳을 지나기도 하였읍니다.

그런 환난의 떡을 먹으며 고생의 물을 마셔야 하는 곤고함이 있을때에 주님의 이름을 기억하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간구할 수 있었음은 제에게 주신 인생의 가장 큰 축복이었읍니다.

저를 연단시키시기 위한 환난과 고생의 징계의 시간이 없었다면 미련하고 제 자신이 가장 잘난것처럼 착각하는 저는 결코 주님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읍니다. 그런 저를 불쌍히 여기셔서 저를 때로는 견디기 힘든 환난의 떡과 고생의 물을 마시게 하셨읍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의 그런 고난의 과정은 실로 아름다운 시간이었읍니다. 그 시간에 주님을 만날 수 있었으며 주님께 죄악들을 회개하며 용서을 구할 수 있었읍니다.

죄악의 품성을 갖고 있어 늘 주님을 배신하고 온전하게 주님을 섬기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저에게 커다란 사랑을 주셨읍니다.

주님은 긍휼과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 이십니다.
앞으로의 삶에서 버리는 훈련을 잘 해내기를 소망합니다.
제 안에 쓸모없는 죄악들이 쌓이려 할 때마다 과감하게 버리기를 간구합니다.
매일 매일 제 안에서 더러운 것들을 버리려 합니다. 또한 제 주위에서 주님의 사랑을 가로막는 가증하고 더러운 것들을 버리려 합니다.

저의 눈이 뜨이게 하옵소서. 저의 귀가 열려 들려 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잘 알아 듣고 순종하는 복된 인생의 길을 갈 수 있도록 제 안에 계신 성령님 저를 도와주옵소서. 그것이 가장 인생의 큰 축복인 것을 깨달아 가는 실로 아름다운 축복의 호흡을 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18년 1월 7일 일요일

주만 의지하고


(26:11-15) 여호와여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평강을 베푸시오리니 주께서 우리의 모든 일도 우리를 위하여 이루심이니이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시여 주 외에 다른 주들이 우리를 관할하였사오나 우리는 주만 의지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그들은 죽었은즉 다시 살지 못하겠고 사망하였은즉 일어나지 못할 것이니 이는 주께서 벌하여 그들을 멸하사 그들의 모든 기억을 없이하셨음이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이 나라를 더 크게 하셨고 이 나라를 더 크게 하셨나이다. 스스로 영광을 얻으시고 이 땅의 모든 경계를 확장하셨나이다.


누구를 의지하는가
어려서는 부모를 의지한다. 커가면서 부모보다는 친구들을 의지한다. 장성해서 가정을 갖게 되면 배우자를 의지한다. 또한 세상을 의지하는 법을 배운다.

주님보다는 세상을 의지하기도 한다. 돈을 의지하기도 하고 명예를 의지하기도 한다. 권력이 지상최고의 것이라 여기는 자들도 있어 그것을 얻으려고 눈에 불을 켜고 몹쓸 짓을 해가며 얻으려고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다. 그런데 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나는 무엇을 의지할까?

저는 한가지를 깨달았는데 지금껏 살면서 저를 도우시는 분은 오직 주님 한분이라는 것이다.

내가 곤고함 가운데 처했을때 나의 형제들이나 부모나 친척들이나 친한 친구들은 나를 어느 정도는 도와줄 수는 있었지만 그 도움에는 한계가 있었다. 오직 내가 믿는 주님만은 아직까지 나를 버리지 않으시고 지금껏 나를 도와주시고 인도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나만의 고백이 아니고 많은 이들의 고백일것이다.

주님은 참으로 부족하고 죄성이 있는 나를 끊임없는 관심을 갖고 돌보신다. 쓰러지고 또 쓰러진 나를 싫증도 내지 않으시고 손을 잡아 다시 일으켜 세우시고 묻은 흙을 털어 주시고 혹 상처가 났으면 약을 발라 낫게 하시고 다시 생명의 길을 걷도록 축복하시며 인도하신다.


여호수아는 주님께서 맡기신 일들을 다 마치고 자신의 목숨이 다하였다는 것을 알고 유언을 한다.
(24:15)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모세의 뒤를 이어 받아 지도자의 길을 간 여호수아는 갖가지의 어렵고 힘든 문제를 만났다. 젊어서 정탐꾼으로 발탁되어 다른 11명의 정탐꾼과 함께 자신들이 유업으로 받을 가나안 땅이 어떤 곳인지를 살펴 보았다. 자신과 갈렙을 제외한 열명의 정탐꾼들은 비록 가나안 땅이 기름진 축복의 땅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그 곳에 거하는 거민들이 장대하여 메뚜기같은 자신들과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지레 겁을 먹고 그 곳에 가지 말자고 할 때에 여호수아와 갈렙은 여호와가 함께 하시는데 무엇이 두려운가 하며 백성들을 격려하였다. 그 후에 모세의 뒤를 이어 지도자의 길을 가며 수많은 결정의 시간에 오직 여호와의 뜻이 무엇인지를 물어가며 여호와를 의지하며 나아갈때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취할 수 있었다.

여호수아는 자신의 온 삶을 통하여 여호와께서 자신과 함께 하는 것을 경험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제 육신의 생명이 끊어지기 전에 자신의 후손들에게 오직 여호와를 섬기라고 유언을 남긴다.


사도바울은 실라는 귀신들려 점치는 여종의 귀신을 쫓아 낸일로 옥에 갖혔다. 매를 많이 맞고 옥에 갖힌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찬송할 때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문이 열렸다. 죄인들이 도망친 줄 생각하고 간수들이 자결하려고 하자 바울이 크게 소리 질러 우리가 여기에 다 있으니 자결하지 말라고 한다. 이말을 들은 간수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리자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16:31)’ 말한다.  이 일로 간수와 그의 가족을 구원을 받는다.  사도 바울은 비록 주님을 전한다는 이유로 박해를 받고 매를 맞고 옥에 갖혔지만 오직 예수를 믿고 의지하는 것이 인생의 가장 복된 선택임을 알기에 그런 상황에서도 주님을 믿으라고 선포할 수 있었다.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께서 이 땅에 그들과 함께 있을때에는 참 주님을 아직 만나지 못했다. 주님을 자신들과 민족을 구원할 육신적인 왕으로 생각을 해서 바로 주님이 잡혀 가시기 전까지도 주님께서 왕으로 옹립이 될때 자신을 주님의 오른쪽 왼쪽에 앉게 해달라고 간구를 하였다. 오천명을 먹이시고 병든 자들 낫게 하고 귀신들린 자를 온전케 하셨던 주님께서 맥없이 힘없이 십자가에서 달려 죽으시는 것을 보고 제자들은 주님이 자신들의 왕이 되어 새로운 왕국을 세우려던 마음의 중심이 무너지며 그동안 주님과 함께 하였던 시간들이 허탈하여 삶의 목적을 잃어 버리고 뿔뿔히 흩어져 버렸다.

그렇지만 그 후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을 하나 하나 찿아가셔서 제자들은 주님을 만날 수 있었다.

(24:30-32)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은 같이 걸어 가시는 변화된 주님을 알아 보지 못했다. 그러다가 주님께서 떡을 떼신 떡을 먹을 때에 제자들은 눈이 밝아져서 비로서 주님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왜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유를 비로서 마음에 새길 수 있었다.

주님을 다시 만난 사건을 통하여 제자들은 주님을 온전히 믿고 의지할 수 있었다. 제자들은 자신의 육신의 목숨보다 소중한 주님을 전하는 증인의 길을 가며 그토록 사랑하고 의지하는 주님을 위해 순교의 길을 갈 수 있었으며 교회의 초석을 세울 수 있었다.

참 주님을 만나셨읍니까?

말로만 듣던 주님을 만나셨읍니까?  눈이 밝아져 말씀으로 마음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하셨읍니까?

주님을 만나서 완전하게 변화된 삶을 사십니까?

어떤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축복의 은혜의 길로 인도하시는 주님을 온전히 의지하는가?

교회에는 가지만 주님을 만나지 못한 교인들은 무척이나 많다.

주님께서 주신 떡을 먹을때에 마음의 문이 열린다. 열린 마음안으로 주님께서 임하실 때에 비로서 주님을 알게 된다. 주님께서 임하신 자들만이 온전하게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게 된다. 놀라운 새생명의 회복이 시작되는 것이다.


본문의 말씀에서 왜 이사야 선지자가 여호와 만을 의지하게 된 이유가 있다.

여호와께서는 바로 나를 위하여 평강을 베푸셨으며 또한 모든 일이 바로 나를 위하여 이루셨음을 눈으로 보고 알았기에 세상의 왕이 아니라 오직 만왕의 왕이신 여호와만을 의지하겠노라고 다짐을 한다.

주님은 나를 평강으로 인도하셨다.

지금의 내가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은 보이지 않는 주님의 섭리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내게 일어난 모든 일들이 바로 나를 훈련시키고 인도하신 주님의 손길이었다.

 주님께서는 내게 혼란이나 환란이나 곤고함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축복은 곧 평강이다.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나타나는 징후가 있는데 곧 평강이다.

 야훼는 결코 주님의 자녀인 우리를 실망시키시지 않는다.

어떤 상황에 있든지 마음에는 따뜻한 평온함이 있는가?

거친 파도가 나를 뒤흔들어 대지만 흔들리지 않는 견고함이 있는가?

 겉으로 보이는 상황은 좋지 않지만 그 가운데서는 임하는 놀라운 주님께서 주시는 평강이 있다거센 바람이 불어 대지만 내 마음속에는 흔들리지 않는 평정함이 있는 것은 곧 주님께서 내 마음을 주장하시기 때문이다.

 
주님은 나를 살리시려고 모든 일을 이미 이루셨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하시며 죽으셨다. 모든 구속을 이루신것이다. 그런 주님을 진신된 마음으로 믿어 고백을 하면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구속은 바로 나에게도 선물로 주어져서 영생의 참된 복을 받게 된다.

나의 선한 행동으로 구원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다 이루신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의 선물이 주어지는 것이다.

(2:8-10)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는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시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나에게 구원을 선물로 주신 야훼이신 주님을 나의 목숨이 있을 때에 온전히 신뢰하며 의지해야 한다.

죽은 육신은 더 이상 주님의 이름을 부를수 없다.  나의 육신이 숨을 쉬고 있는 동안 마음껏 주님의 이름을 부르자. 지금 이 순간에 호흡을 하고 있다는 것이 축복이다. 커피를 마시며

나의 숨이 아직도 내 곁에 있을 때 주님을 온전히 예배를 드리자.

어떤 모습으로 예배를 드리는가?
주님을 만나셨읍니까?

주님께서 함께 하심을 느끼십니까?

교회에는 왜 가십니까? 누구를 만나러 교회에 가십니까?

주님의 임재를 느끼는 예배를 드리며 영광을 주님께 드립니까?

나의 삶 가운데 무엇이 가장 소중합니까?

그런데 주님이 가장 소중하다면서 주님이 조명되어 있는 말씀을 왜 가까이 하지 않습니까?



 온 땅과 온 하늘의 주관자이신 야훼 하나님,

온전히 주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우게 하옵소서. 저의 생각과 결심으로는 주님을 온전하게 의지할 수 없읍니다. 제 안에 계신 주님의 영이신 성령이여. 제가 온전하게 변화하여 저의 삶을 통하여 임재하시는 주님의 숨결을 느끼기를 원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저의 숨이 붙어 있는 동안에 주님의 이름을 마음껏 부르며 저의 모든 것이 변화하는 살아 역사하는 주님의 이름의 능력이 임하며 온전하게 저를 천국으로 인도하실 주님만을 의지하기를 간구합니다.

 주여 저를 도와주소서. 육신의 죽음이 와서 제가 더 이상 주님의 이름을 부르지 못하게 되기 까지 저의 영이 생명이신 주님을 온전하게 예배하며 저를 살리시는 주님의 은혜가 저의 삶 가운데서 역사하여 주님만을 의지하며 저의 영이 소생되기를 간구합니다.

 장차 저에게 임할 천국의 역동하는 생기가 오늘 지금 이 순간에도 경험하기를 간구합니다.

저를 살리신 예수님께 모든 영광을 드립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