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9월 17일 일요일

여호와의 날


(2:12-22) 대저 여호와의 날이 모든 교만한 자와 거만한 자와 자고한 자에게 임하리니 그들이 낮아지리라...

(17) 그 날에 자고한 자는 굴복되며 교만한 자는 낮아지고 여호와께서 홀로 높임을 받으실 것이요

(19) 사람들이 암혈과 토굴로 들어가서 여호와께서 땅을 진동시키려고 일어나실 때에 그의 위엄과 그 광대하심의 영광을 피할 것리라

(22)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

 

여호와의 날 곧 주님의 재림의 날을 말한다.
지금 세상을 둘러보면 마지막 때의 징조가 보이지 않던가!

사방에서 홍수로 물난리가 나서 살던 집들이 물에 잠기며 떠 내려간다. 기상 radar로 기상 관측을 한 후로 가장 강력한 폭풍우가 몰아친다. 한 곳에서는 기근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어 가고 있고, 또 다른 한 곳에서는 산사태로 잠을 자다가 흙 돌맹이에 파묻혀 생매장을 당한다. 지진으로 땅이 마구 흔들려 무너져 내려 많은 이들이 두려워 갈팡질팡하며 어쩔 줄을 모른다. 그동안 잘 있던 땅이 갑자기 깊이 꺼지며 집과 사람이 함께 땅 깊이 파묻혀 버린다. 곳곳에서 전쟁으로 많은 이들이 죽어 간다. 마치 계시록에서 천사가 나팔을 하나씩 불 때 온 세상에 재앙이 임하는 상황을 연상하게 된다. 하늘과 땅과 바다에 불가피한 재앙이 임한 후에 주님의 재림의 날이 임할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여호와의 날을 KJV에서는 “the day of the LORD”로 번역을 하였는데 주님께서 지정하신 한 날을, NIV에서는 “a day in store”로 번역을 하여서 여호와께서 예비하신 한 날을, NLT에서는 “a day of reckoning”으로 사용하여 여호와께서 셈하시는 한 날을 나타내며, ASV에서는 “a day of JEHOVAH”로 사용하여 여호와께서 정하신 한 날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특히 a day of reckoning의 뜻을 살펴보자.
‘reckoning’셈하다의 뜻을 갖는다.  여호와께서 정하신 한 날이 임하는데 그 날에는 여호와께서 우리가 행한 일들을 셈하신다.  여호와 날은 모든 자들에게 임한다. 특히 이 날은 인생을 의지하던 우상을 숭배하던 교만한 자들과 거만한 자들과 자고한 자들에게는 피하고 싶은 날일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모든 자들과 셈하신다.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여호와께서는 빠짐없이 셈하신다.

여호와의 날에 사람들은 바위 틈새에 있는 굴이나 땅을 파서 만든 토굴이나 깊은 굴 같이 땅 깊은 곳으로 숨지만 땅이 진동하며 마구 흔들어 대니 얼마나 황망하며 두려울까. 자신들이 그토록 갖기를 원하며 우상으로 삼았던 세상의 영광과 부귀와 명예는 아무런 도움도 주지를 못한다. 아무리 그것들에 의지하지만 아무런 쓸모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은 그리 오래지 않는다. 쓸데없는 것들을 추구했던 인생의 허무함을 알았지만 되돌리기에는 이미 너무나 늦어 버렸다.

여호와의 진노 앞에서 피하려고 하지만 아무리 피하려고 하지만 여호와의 영광 앞에 두려워 떨 수 밖에 없는 연약한 인생들이여!  여호와의 날은 반드시 임한다.

여호와의 위엄과 영광앞에 설 수 있는 인생들은 아무도 없다.

세상에 속한 이들이 갖기를 원하는 것들은 높고 높은 백향목, 높은 산과 솟아 오른 언덕, 높은 망대와 견고한 성벽, 다시스의 모든 배와 아름다운 조각들이며 이런 것들을 추구하는 교만한 자와 거만한 자와 자고한 자에게 여호와의 날이 임하여 낮아진다고 말씀한다. 가장 좋은 것이라 여겨지는 것을 갖기 위해서 사람들은 존귀한 자아를 허무한 세상의 것들에게 팔아 버리지 않았던가. 마치 에서가 순간의 만족을 위해 그의 장자권을 야곱에게 헐 값으로 팔아 치웠듯이 인생들은 잠시 동안의 만족을 위해 존귀한 자신을 세상에 내어 놓았다. 그래서 그토록 원하던 것들을 온갖 수단으로 막상 얻었지만 가진 것이 그리 대단하지 않고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려지만 더 이상 올라 갈 곳이 없어서 허무함에 사로 잡힌다.

나를 구원해 줄 최고로 알았던 것들이 실상은 병에 걸린 나의 생명을 한 시라도 더할 수 없다.  인생의 쾌락을 재물로 사서 즐길 수는 있지만 결코 오래 지속되지 않고 곧 실증을 내어 또 다른 괘락을 찿지만 아무것도 남은 것은 없고 영혼은 황폐해지고 육신은 망가질 대로 망가져서 결국 인생의 마지막을 맞이 한다. 아무리 지난 날을 후회하지만 다시 되돌아 갈 수 없다.


교만한 자와 거만한 자와 자고한 자에게 여호와의 날이 임한다.
(12) 대저 여호와의 날이 모든 교만한 자와 거만한 자와 자고한 자에게 임하리니 그들이 낮아지리라

나는 교만한 자가 아니던가!
누가 나보다 잘 난척 하면 속으로 웃기고 있네 하지 않았던가. 아무리 잘봐도 나보다 나아 보이는 것이 하나도 없다고 스스로 자긍하지 않았던가.

나는 거만한 자가 아니던가!
나보다 초라하고 없어 보이는 이들을 보면서 업신여기지 않았던가. 그들 위에 군림하려고 하지 않았던가.
내가 그들보다 조금 더 지식이 있다고 가르치려고 하고 거만하게 굴지나 않았던가.

나는 자고한 자가 아니던가!
여기 있어도 척, 저기 있어도 척한다.  쥐뿔도 없으면서 잘난 척 하지 않았던가. 아무것도 없으면서 있는 척, 잘난 척, 똑똑한 척, 교양이 있는 척하지 않았던가. 교회에서도 깊은 믿음도 영성도 없으면서 마치 믿음이 있는척 영성이 있는 척 하면서 경건한 성도의 흉내를 내며 자신보다는 실로 경건한 자들을 핍박하며 판단하지 않았던가. 여호와 앞에 섰을 때에도 구원받을 만한 성도인 척하지나 않을까!

나는 결코 교만하지 않았으며 거만하지도 않았고 자고해 본 적도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인생이 있는가!1

(6:16-19)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것 곧 그의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예닐곱 가지이니 곧 교만한 눈과 거짓되 혀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과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과 및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이니라.

(16:18)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4:6)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러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여호와께서 지금 당장 너는 어떻게 살았는가 셈하신다면 나는 어떤 모습으로 여호와앞에 설 수 있을까?
내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다른 이들은 잘 모르지만 내 자신은 잘 안다.


(22)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
22절에서는 인생을 의지한 자들은 셈할 가치도 없으시다 여호와께서는 말씀하신다.

146에 인생을 의지하는 자들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한다.
(146:3-5)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할지 말지니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

출세를 하려면 줄을 잘 서야 한다며 동아줄인지 썩은 줄인지를 분별하려고 한다. 동아줄로 알고 갈아 탔지만 깊이 썩은 줄 인것을 나중에 알고 후회하지만 이미 늦었다. 그리고 지금은 동아줄이지만 언제 썩은 줄로 변할지를 모른다. 인간을 의지하는 것은 결코 오래 지속되지를 못한다.  여호와를 의지하는 것보다 눈에 보이는 권력자를 의지하며, 재력이 있는 자를 의지하며, 어려움이 왔을 때 사람을 의지한다. 하지만 그들 역시 연약한 인간일 뿐이며 죽으면 흙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는 자들을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


여호와께서 재림하시는 한 날.
여호와께서 천군 천사와 함께 임하시는 날.
이 땅의 모든 육신들은 이 장엄한 광경앞에 아무런 말도 없이 두려움으로 쳐다 보게 될 것이다.
성도의 신앙을 지킨 이들은 들림을 받아 신부가 되어 신랑이신 예수님을 맞이 할 것이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로 주님의 신실한 성도들은 주님의 날이 임하기를 기다려왔다.
지금의 우리 역시 주님의 재림을 기다린다. 혹 주님의 재림이 나의 생명이 끝나기까지 임하시지 않을지라도 주님의 자녀인 자들은 여호와의 날의 두려움을 알기에 혹 죄악의 길에 서지 않을까 자신의 모습을 보려고 한다.


성경은 주님께서 우리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시간에 오실 것을 말씀한다.


(살전 5:2) 주의 날이 밤에 도적같이 이룰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벧후3:10)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날을 우리는 모른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몇 날에 예수님께서 재림하신다고 말들을 한다.
그렇지만 주님은 우리들에게 분명하게 그와 같은 말에 현혹되지 말라고 말씀하시며 하루 하루 최선을 다해 주님의 날을 예비하라고 말씀하신다.

주님의 날은 도둑같이 임하신다.
도둑은 자신이 언제 당신 집에 들어가 귀중한 것들을 훔칠 것이라고 공포하지 않는다. 그것을 안다면 그 시간에 깨어서 불을 환히 켜놓고 도둑이 들어 오지 못하도록 예비할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시각에 오신다.
사람들이 자신의 뜻대로 살며 자신의 정욕과 소욕을 만족시켜려고 이리 저리 정신없어 할 때에 주님은 이 땅에 재림하신다.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이 땅에는 전에는 결코 볼 수 없었던 지구의 격변이 일어난다. 우리의 지식으로는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다. 온 땅과 바다가 뜨거운 불에 녹는 모습을 생각해보라. 그 안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참으로 두려운 일이 일어난다!

온 땅과 바다가 녹아 없어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의 새 창조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에 관하여는 사65:17과 계21:1에 기록이 되어 있다.

(65:17)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21: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새 창조는 무엇을 의미할까 
우리가 사는 지구는 없어지고 그 곳에 새로운 땅과 새 하늘이 만들어 지는 것인가?
아니면 주님께서 예비하신 하나님의 나라 곧 천국을 의미하는 것일까?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일들은 우리의 지식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주님의 택함을 입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은 모두 구원을 받아 새 땅과 새 하늘과 새 예루살렘에서 살게 될 것이다.


여호와의 날이 바로 지금 임하시면 어떻게 하나!
나는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토록 무섭고 두려운 일들이 일어날 터인데 나는 과연 혼인 잔치에 참여하는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같이 내가 갖고 있는 등잔에 기름이 충분하게 예비되어 있는가?

어떻게 여호와의 날을 준비해야 할까?
성경은 해답을 명확하게 우리에게 준다.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때란 여호와의 날 곧 주님의 재림을 말한다.
여호와의 날을 준비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니다. 단지 말씀을 읽고 듣고 지켜 행하는 것이다. 여호와의 날이 언제인지 알 수는 없지만 하루 하루 순간마다 여호와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켜 행하다보면 예상하지 못한 시간에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 준비된 다섯 처녀와 같이 기쁨과 환희로서 신랑이신 주님을 맞이할 것이다.  여호와의 마음이 새겨진 말씀을 늘 가까이 하자. 오직 그 길만이 나의 주님과 함께 하는 영생을 준비하는 최선의 방법일 것이다.

(2:28-31)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 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어지고 달이 핏빛같이 변하려니와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또한 성령께서 자녀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셔서 장래 일을 예언하며 꿈을 꾸며 이상을 보며 여호와의 크고 두려울 날이 임하기 전에 예비케 하실 것이다. 그래서 우리 믿는 자들은 성령의 충만을 간구해야 한다.

주여! 여호와의 날을 준비하기를 원합니다. 제게도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베푸소서하며 간구하자.
사랑이 많으신 주님께서는 반드시 여호와의 날을 준비하기를 원하는 성도에게 은혜와 자비를 베푸실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

여호와꼐서는 한 날을 여호와의 날로 정하셨읍니다. 주님께서 패역한 이 세상을 심판하시려고 다시 오시는 한 날인 여호와의 날이 반드시 임할 것이라고 우리에게 말씀을 합니다.

여호와의 날이 임하기 전에 세상에는 많은 징조들이 보일 것이니 잘 준비하여 신랑으로 오시는 주님의 재림을 맞이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온 땅과 온 바다에 임하실 여호와의 날의 징조를 보고 두려움으로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거룩하고 구별된 성도가 되도록 인도하옵소서. 여호와의 날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두려움으로 바위로 땅밑으로 숨을 때를 찿지만 결코 피할 수가 없는 무서움을 겪는 날이지만, 주님을 믿는 자들에게는 그토록 기다리던 신랑이신 주님을 만난 축복의 날이요 기쁨과 환희가 감사가 넘치는 날입니다.

호흡을 의지하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고 교만하지 말고 오직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가 복이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저희 인생은 참으로 연약하며 안에는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참된 진실함이 없읍니다. 그런데도 너는 나 여호와가 인정한 의로운 자라 하십니다.

인생을 심판하시고 구원하시려고 이 땅에 다시 오실 주님을 축복합니다.

주여 저의 두 손을 높이 들고 저를 사랑하시기에 다시 오실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을 합니다.

때가 가까우니 너희는 말씀을 읽고 듣고 잘 지켜 행하라는 계시록의 말씀과 같이 늘 말씀 안에 거하기를 원합니다. 소생케 하는 말씀의 능력이 임하기를 간구합니다.

제가 들고 있는 등잔에 성령의 기름으로 충만하여 도적같이 임하시는 신랑이신 주님을 만나기를 열망합니다.
마라나타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17년 9월 3일 일요일

주홍같은 죄


(1:18-20)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 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켜지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우리가 그토록 꺼려하는 죄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모든 이들은 죄에 대하여 깊이 물들여져 있다.  본문의 말씀과 같이 죄에 염색이 되어 있어 죄에 대한 말씀을 꺼려하며 멀리하려고 한다. 교회에서 죄악에 대하여 지옥에 대하여 설교를 하면 거북하게 여기고 사람들이 싫어 하기 때문에 되도록 하지 않는다 한다. 대신에 마음을 가볍게 하는 희망적인 설교를 하는 교회가 바람직하고 다닐 만한 좋은 교회라고 한다.
찌들고 병든 마음에 희망을 주어 오직 잠시 뿐이지만 즐거움을 갖게 하는 것도 좋겠지만 그보다는 나의 죄의 심각성에 대하여 깊이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인생이란 내 뜻대로 되어 가는 것은 없고 언제 무슨 일이 어떠한 모양으로 내게 다가올 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깨어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잠자고 있는 안일한 영혼들이여. 제발 깨어나기를 축원을 드립니다.

(18)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죄의 색깔을 주홍 (scarlet) 같으며 진홍 같이 붉다고 한다.
히브리 문화에서 scarlet double-dyed가 된 것을 말하며 이는 죄가 우리의 마음속에 깊이 색인된 것을 의미하며 물로는 씻겨질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


죄는 내 안에 깊이 새겨져 있다. 쉽게 지울 수 없다.
없어졌다고 생각을 하지만 언제 어디서나 기회만 되면 죄는 슬그머니 머리를 내밀고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진홍과 같이 붉은 것은 십자가에서 흘리신 주님의 보혈을 의미한다.


또한 주님은 십자가에 달리실 때 홍포를 입으셨다.
(27:28)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자의가 아닌 타의로 홍포를 입으신 주님은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고 십자가에서 달려 보혈을 흐리시며 돌아가신 주님을 의미한다.


나의 죄가 주홍과 같이 염색이 되어 있어 지워지지 않지만, 오직 주님의 보혈로 나의 모든 죄는 깨끗하게 될 수 있다. 곧 나를 위해 십자가에 지신 주님의 사랑이 내게 흘러 넘치기에 나의 모든 죄는 용서함을 받는다.

양털과 같이 희게 된다는 것은 염색하기 전의 상태를 말한다.
양에서 양털을 벗겨 낸 뒤에는 깨끗하게 씻긴다. 더러운 것들과 냄새나는 것들을 물로 깨끗하게 씻어내면 하얀 양털이 되면 원하는 색깔을 입히기 위해서 염색을 한다.


주홍과 같이 붉은 죄로 염색이 되어 있는 나를 주님의 보혈의 능력으로 용서함을 받는다.
(9:14)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모든 죄 값을 치루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
나의 심령을 깨끗하게 하는 주님의 보혈의 능력을 온전하게 믿어 전혀 흔들림 없이 나의 호흡이 마치는 순간까지도 구원의 은총이 내게서 떠나지 않기를 간구한다.  늘 죄 가운데서 허덕이는 나를 살리시려고 보혈의 능력을 베푸신 은혜와 자비와 사랑의 예수님께 늘 감사하며 우리의 인생길을 가자. 그런 모습으로 사는 것이 나에게 끝이 없는 은혜를 베푸신 주님께 은혜를 조금이나마 갚는 길이지 않겠는가!


왜 죄의 문제가 반드시 해결되어야 하는가?
영혼의 구원과 이 땅의 육신의 삶에 밀접한 영향을 주기 떄문이다.


알게 모르게 주님을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들이나 많은 간구를 한다.
어려운 일을 만났을때, 낫지 못할 병에 걸렸을때, 죽음의 위험이 다가왔을때, 어떤 삶의 목적이 있을때에 주님을 믿는 자는 주님에게 기도하며, 주님을 믿지 않는 자들은 어떤 것들을 향하여 간곡한 간구를 한다.

그런데 모든 간곡한 간구가 응답을 받는가?
여호와께서는 주님을 믿는 자들이 드리는 모든 간구를 들으시고 응답을 하시는가!
그렇지 않음을 말씀하고 있다. 여호와께서는 모든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는 것을 명심하여야 한다.


우리들은 흔히 이렇게 생각한다.
우리가 원하는만큼 죄 가운데 있으며 즐기다가 언젠가는 주님 앞으로 돌아가 용서를 구하면 죄사함을 받아 천국의 소망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사람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


사람이 원하는 때에 아무때에나 여호와 앞에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또 자신을 구원해 달라고 용서를 구한다고 해서 용서함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구원이 그리 쉽게 내가 원한다면 어디서나 어느때에나 얻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여호와께서는 악인의 기도는 듣지 않으신다.
만일 내가 죄악 중에서 여호와께 기도를 드리는데 여호와께서 듣지 않으시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가?
여호와로부터 아무런 기도의 응답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며 나의 삶은 아무런 변화가 없다는 것을 말한다.


여호와께서 죄악 가운데 있는 자들의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고 성경 곳곳에서 기록하고 있다.
(27:9) 환난이 그에게 임할 떄에 하나님이 어찌 그 부르짖음을 들으시랴
(66:18)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1:28) 그 때에 너희가 나를 부르리라. 그래도 내가 대답지 아니하겠고 부지런히 나를 찿으리라. 그래도 나를 만나지 못하리니
(28:9) 사람이 귀를 돌이키고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
(3:44) 주께서 구름으로 스스로 가리우사 기도로 상달치 못하게 하시고
(11:11)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리니 그들이 피할 수 없을 것이라. 그들이 내게 부르짖을 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할 것인즉

나의 삶 가운데 늘 희락과 기쁨만이 있을까?
언젠가는 피하여서 가고 싶은 장애물을 반드시 만난다.

믿지 않는 자들도 너무나 절박할 때 나도 모르게 하나님을 찿는다.
환난 중에서 간구하지만 환난은 변하지 않는다.
죽음이 바로 코 앞에 다가와서 죽지 말게 해 달라고 간구하지만 죽음은 곧 나를 영원한 어둠으로 데리고 간다.
악한 일들이 나를 해하는 것을 보면서 간구하지만 악한 일은 나를 피해서 가지 않는다.
절망 가운데서 간구하지만 절망은 더욱 심한 절망으로 다가온다.

아무리 눈물을 흘리며 가슴을 치며 간구하지만 여호와께서 듣지 않으시면 어떻게 하나?
그러면 어찌하여야 할까 

우리는 나의 죄를 나 스스로 깨끗하게 씻을 수 없다.
내가 아무리 열심으로 죄를 깨끗하게 씻는다 할지라도 나의 죄를 결코 씻어 낼 수 없다.
오직 여호와께서만이 나의 죄를 깨꿋하게 씻어내실 수 있으시다.

(51:1)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요일1:7)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곧 나와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는 죄악을 가슴을 치며 눈물 콧물을 흐리며 진실된 마음으로 회개하고 주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아야 한다.

 
(19)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주님을 자원하여 즐겨하며 순종하는 자들에게는 주님께서는 땅의 아름다운 소산의 축복을 약속하신다.
자원하는 심령으로 이웃을 주님의 사랑을 베풀며 돌보아 주는 것을 주님은 기뻐하신다. 비록 늘 죄악 가운데 있지만 주님의 보혈로 주홍과 같은 붉은 죄를 깨끗하게 씻겨 양털과 같이 하얗게 하신다. 그리고 각자에게 허락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이 땅의 축복을 베푸신다.

하지만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켜지리라.
주님을 거절하는 것도 내가 원해서 하는 것이다. 주님을 거절한다는 것은 이 땅에서 나의 힘으로 살아가야 함을 의미한다. 주님의 섭리함이 없는 삶은 얼마나 곤고한 삶일까?

나의 자원하는 심령에 따라서 주님의 축복과 저주가 임한다.
주님 앞에 나가기 위해서 해야 할 일들이 있다.
우선 내가 원하여 스스로 자진하여 나를 깨꿋게 해야 한다.
깨끗게 되는 것을 내 자신이 원하지 않는다면 깨끗하게 될 수 없다. 땀이 나고 냄새가 나지만 게을러서 혹은 피곤하여 씻지를 않으면 깨끗하게 될 수 없다. 깨끗하게 되기 위해서는 우선 내 자신이 원해야 한다.

(51:10-12)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우선 내 자신이 원하여 나를 깨끗하게 하려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죄악 가운데 있다면 죄악을 멀리하여 버리고 어떻게 하는 것이 선한 일인가를 배워 행하고 거짓된 일을 떠나서 올바른 일을 행하며 억압받고 어려운 이웃들을 돌보아 주며 사랑을 해야 한다.

억지로 주님 앞에 서려고 하지 말라.
억지로 주님을 예배하지 말고 남들에게 보여주려고 주님을 섬기지 말라.
(빌레몬14) 너의 선한 일이 억지 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라.


주님은 자원하는 심령을 기뻐하신다.
스스로 원해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고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이웃을 사랑하도록 하자.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여호와 앞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우선 자원하는 심령이 있어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주 앞에 나아가기 위하는 저의 마음이 우선되어야 합니다억지로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항상 즐거운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기를 원합니다저의 주변을 돌아보아 더러운 것들은 더 이상 행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저를 우선 깨끗하게 하고 어려운 이웃들을 주님의 마음으로 돌보기를 원합니다. 주님 실수과 많고 항상 실패하는 저를 도와주옵소서.
지워질 수 없는 진홍과 같이 붉은 죄를 주님앞에서 회개하고 용서를 구합니다.
흰 눈과 같이 하얀 양털과 같이 저의 죄악들을 씻겨 주옵소서. 저의 죄악들을 기억도 하지 않으신다고 약속을 하시니 인애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을 배반하지 않도록 저를 도와 주옵소서. 언제 어디서나 주님을 배반하려는 습성을 가지 저입니다. 죄악으로 주님을 배반하려고 할 때마다 제 안에 계신 성령님 저를 깨우치소서.
주님 앞에 나아감을 즐겨하는 심령을 갖기를 원합니다.  더 이상 죄악으로 주님을 배반하지 않도록 저를 인도하사 제게 약속하신 이 땅의 소산의 축복과 영생의 축복을 함께 누리는 복된 성도의 은혜를 받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