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0월 27일 일요일

독사의 자식들아

(마12:33-37) 나무도 좋고 열매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열매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열매로 나무를 아느니라.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방으리라.


욕.
우리는 어려서부터 욕을 배우며 살아 왔읍니다.
자신의 불만족을 표출하는데 욕을 사용합니다. 차마 입에 담기도 험한 욕들도 많이 있읍니다. 인격을 무시하며 함부러 내밷는 욕으로 상대방은 깊은 상처를 입기도 합니다. 정신학적으로 건강한 욕은 자신의 stress를 푸는 좋은 처방제라고도 합니다. 하지만 되도록이면 욕을 먹지 않고 욕을 하지 않는 인생이었으면 합니다.

욕은 우리 인간들만이 쓰는 전유물이 아닙니다. 주님도 욕을 하십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욕을 하신다는 것은 심각한 상태임을 말해 줍니다. 주님께서는 다음의 상황에서 욕을 하셨읍니다.

하나는 마23:33에서 주님은 불법을 행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욕과 저주를 하셨읍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불쌍한 영혼들을 구하는 도구로 사용되어지는 목사가 아닌 자신의 이익을 삼키는 종교지도자로서의 목사들에게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하시며 욕을 하셨읍니다. 그것도 모자라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저주하셨읍니다. 목사들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 지를 잘 살펴 보아야 합니다. 만일 자신이 땅에 속한 이익을 취하려고 주님의 이름을 이용하고 있다면 분명 주님께서는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하시며 욕을 하실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본문에서 악한 마음이 담긴 악한 말을 하는 자를 주님께서는 "독사의 자식들아" 하시며 욕을 하십니다. 악한 말을 하는 자들에게 경고를 하십니다.


말은 나의 뜻을 나타내며 상대방과 교통합니다. 선한 말이 있으며 악한 말이 있읍니다. 때로는 포장해서 말을 하기도 하지만, 말은 나의 내면에 담긴 것을 담아냅니다. 우리는 매일 매일 누군가와 혹은 자신에게 혹은 주님께 말을 합니다.

아름다운 말로 상대방의 기분을 좋게 만듭니다.
함부로 말을 하여 듣는 이가 마음에 상처를 입습니다.
남을 정죄하는 말로 내가 그들보다 형편이 좋다는 착가을 하기도 합니다.
듣기에 거북한 말로 상황을 엉망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기도로 나의 사정을 주님께 고하며 주님과 대화를 나누기도 합니다.

말은 우리와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죽기 전까지 우리의 삶을 좌지우지하는 원동력이기도 하지만 나와 남을 해치는 양날을 가진 날카로운 칼이기도 합니다.

야고보서 3:6에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을 수레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또한 8절에는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하시며 우리가 하는 말을 경계하라고 하십니다.

말은 나를 살리기도 하지만 지옥으로 인도하기도 합니다.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우리는 어떻게 구분합니까?
대부분의 사람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첫인상을 통하여 대강 짐작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본 첫인상은 잘못된 판단의 경우가 참으로 많이 있읍니다. 좋은 사람이라고 봤는데 나중에 보니 정말로 형편이 없는 사람도 있읍니다. 반대로 좋지 않게 봤는데 후에 보니 너무나 좋은 사람임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주님은 사람을 볼 때 좋은 열매를 맺었는지 나쁜 열매를 맺었는지 그 열매를 보라고 하십니다. 즉흥적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말고 충분한 시간을 통하여 그 사람이 맺는 열매를 보라고 하십니다. 좋은 열매를 맺었는지 나쁜 열매를 맺었는지를 알 수 있는 방법으로 그 사람의 말을 보라고 하십니다.

사람은 가식적이며 위선적인 말로 자신을 포장할 수 있읍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자신 안에 있는 말을 내밷습니다.
항상 함부로 말을 하십니까. 그렇다면 당신의 안은 정돈되지 않은 상태일것입니다.
항상 더러운 말을 입에 달고 삽니까. 그렇다면 당신의 안은 냄새나며 더러울 것입니다.
입만 뻥끗하면 남을 탓하며 정죄하십니까. 주님께서는 당신의 회개를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형편은 어렵지만 기쁜 마음으로 감사하다고 하십니까. 주님의 기쁨이 임할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연의 아름다움를 고백합니까. 당신의 마음 또한 아름다울 것입니다.


악한 열매는 땅의 것이며 정욕으로부터 오며 귀신의 것입니다. 하지만 선한 열매는 위로부터 내려 옵니다.
(약3:14-27)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려 거짓말하지 말라.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시기와 다툼의 마음은 누가 줍니까. 곧 내 마음의 조그만 틈에서 역사하는 악한 영이 심어준 것입니다. 악한 영은 내 안에 정욕의 생각을 품게 합니다. 분리의 영이 임하게 되면 혼란과 다툼이 있읍니다. 주님을 믿는 가정에 분리의 영이 임하게 되면 정욕과 혼란과 다툼이 있읍니다. 이를 지혜롭게 대처하지 못하면 그 가정은 깨어집니다. 악한 영은 우리가 나쁜 열매를 맺게 합니다.

(마7: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보다 중요한 것은 나쁜 열매를 맺으면 찍혀 불에 던져진다는 것입니다. 불에 던져지는 곳은 생각하기에도 끔찍한 결코 가지 말아야 할 장소인 지옥입니다. 나쁜 열매를 맺으면 지옥 불에 던져지게 됩니다. 나쁜 열매를 맺는 자들은 더럽고 냄새나는 악한 말을 합니다.

반대로 선한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사이며 선물입니다.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선한 열매의 특징은 성결하며 화평하며 관용이 있으며 양순하며 긍휼과 편견과 거짓이 없음니다. 주님을 믿는 이들은 선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선한 열매를 맺는 자들은 그들의 입에서 은혜의 말을 합니다. 한마디를 해도 상대방의 용기를 북돋아주며 주위를 환하게 평안의 길로 인도합니다.


(눅6:45)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내가 선한 열매를 맺고 있는지 아니면 악한 열매를 맺고 있는지를 알려면 내가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십시요. 내 마음에 쌓아둔 것이 입을 통하여 나오는 말은 중요합니다. 내 마음에 담긴 말을 합니다. 한번 내 뱉은 말은 주어 담을 수도 없읍니다. 사랑과 은혜와 기쁨과 감사의 말을 합니까 아니면 저주의 말을 하며 정죄하며 험담을 하며 더러운 말을 합니까.

악한 말을 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악한 말은 상대방의 마음을 상하게 합니다.
악한 말은 나 자신을 해칩니다.
악한 말은 나를 육신적으로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병들게 합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나의 악한 말을 기뻐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악한 말로 나는 지옥불에 던져 질 수도 있음을 마음에 새겨 두어야 합니다.

남을 해치며 나를 상하게 하는 악한 말을 하였다면 주님께서 "독사의 자식아" 하시며 욕을 하실지도 모릅니다.
사람이 하는 욕을 들을 수는 있지만 결코 주님께서 하시는 욕을 듣지 않도록 늘 깨어 근신하며 입에 재갈을 물려 깨끗히 걸러 낸 은혜로운 말을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욕을 듣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만일 악한 말을 주저없이 하셨다면 회개하셔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육신적으로 건강하게 살라고 악한 말을 하지 말라고 명하십니다.
늘 마음이 선한 마음을 갖도록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하셔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이 내 안에서 살아 역사하여야 합니다.
늘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하며 수시로 주님께 나의 사정을 아뢰이십시요.
긍휼과 자비의 주님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성령께서 저를 도우실것입니다.

우리는 한 입으로 찬양과 감사를 하며 한편으로는 저주와 악한 말을 합니다. 결코 허공에서 사라지는 빈 말은 없읍니다. 우리는 우리가 한 모든 말에 책임이 있읍니다. 나를 살리며 또한 나의 가까운 자들에게 살리는 말을 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의 남은 짦은 시간에 내 안에 주님의 선함이 충만함으로 선한 말을 되도록이면 많이 풍성하게 쓰시는 축복이 임하기를 간구합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창조하실때에 우리에게 하나님을 찬양하며 감사를 표현할 수 있도록 입과 혀를 주셨읍니다.
그렇지만 악이 저희 안에 공존함으로 저희는 악의 모습을 닮아 주님께 감사하며 은혜를 표현해야 하는 저희의 입술로 더러운 말을 하며 저를 어둠으로 끌어 내리려 합니다.

오호라 저는 곤고한 자입니다. 주님의 긍휼과 자비로 어쩔 수 없이 악한 열매를 맺게하는 저의 입술을 지켜 주옵소서. 선한 열매를 쌓을 수 있도록 성령이여 저를 도와주시고 인도하옵소서.

늘 말씀 안에 거하기를 간구합니다. 말씀의 능력으로 저를 깨끗게 하사 저의 입술을 통하여 주님을 찬양하며 저 뿐아니라 저와 가까운 가족들과 이웃들을 살리는 선한 말을 하는 주님의 선한 능력이 임한 도구로 저를 사용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19년 10월 6일 일요일

얼굴을 가린 수건

(고후3:14-18)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는니라.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수건을 모세의 율법을 종교적으로 형식적으로 따르며 예수님을 부인하는 유대인들의 완고한 마음이라 표현을 합니다. 유대인의 완고한 마음은 지금도 예수님을 부인하며 받아들이지 못하게합니다.

또한 이 수건은 우리가 갖고 있는 완고한 마음 즉 종교적인 행위, 가식, 어리석은 고집으로 말할 수 있읍니다. 나의 완악한 마음은 주님 앞으로 나아감에 방해가 되며 걸림돌이 되어 주님과 온전한 교제를 나누지 못하게 합니다. 주님 앞으로 나아감에 방해가 되는 완고함이 주님 안에 온전히 거하게 되면 자유롭게 되어 주님의 영광에 이르게 되라고 권면을 합니다.

수건으로 덮혀 있으면 우리는 가식적으로 나를 나타내려고 합니다. 또한 사람들 특히 교인들을 종교적인 행위의 잣대로 평가를 합니다.


완고한 마음
(14)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사도 바울은 본문의 말씀에서 모세의 율법을 고집하여 예수님을 받아 들이지 못하는 완고한 마음을 수건으로 비유합니다. 성경을 통해서 주님의 영광을 보아야 하는데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구약 성경의 참된 의미를 모르고 있기에 주님의 영광을 볼 수가 없었읍니다.

수건은 우리의 완고한 마음으로 인한 위선적인 모습 혹은 종교적인 행위를 나타내며 이러한 가식적인 행위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아가는데 방해가 되어 주님의 영광을 볼 수 없게 합니다. 나의 완고한 마음로 인해 덮힌 수건은 나를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을 가로 막아 나에게 비추시는 주님의 영광을 볼 수 없게 합니다.

“완고”는 자기중심적인 뜻을 갖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마음이 둔하다”,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완악하다”의 뜻으로 사용되었읍니다.

내 자아가 강하기 때문에 나의 생각과 지식이 나를 지배합니다. 내가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이 최선이라 믿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잣대를 용납할 수 없읍니다. 주 안에서 자유하라 하셨지만 나의 어리석은 완고함과 가식은 나를 더욱 나 중심적으로 옭매며 속박합니다.


완고함으로 망한 자들이 있읍니다.

(출11:10) 모세와 아론이 이 모든 기적을 바로 앞에서 행하였으나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 자손을 그 나라에서 보내지 아니하였더라.

여호와께서 여러 재앙으로 징조를 보이셨지만 완악한 바로왕은 이스라엘을 보내지 않다가 결국은 자신의 첫아들을 포함한 모든 백성의 첫아들과 모든 가축의 첫 태생을 잃고서야 비로서 이스라엘을 내보냈읍니다. 바로와 애굽은 완악함으로 너무나 귀하고 소중한 것들을 잃었읍니다.

(삼상25:3) 그 사람의 이름은 나발이요 그의 아내의 이름은 아비가일이라. 그 여자는 총명하고 용모가 아름다우나 남자는 완고하고 행실이 악하며
(삼상25:37-38) 아침에 나발이 포도주에서 깬 후에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 일을 말하매 그가 낙담하여 몸이 돌과 같이 되었더니 한 열흘 후에 여호와께서 나발을 치시매 그가 죽으니라


완고한 나발은 먹을 것을 주어 자신과 함께 한 이들을 도와달라는 다윗을 알아 보지 못하고 돕지를 않습니다. 이것을 안 그의 아내인 아비가일은 일이 잘못되었을 알고 자신의 가족들이 살기 위해서 급히 먹을 것을 준비하고 다윗에게 나아가 용서를 구합니다. 다윗은 아비가일에게 만일 급히 와서 용서를 구하지 않았다면 한 사람도 남겨 두지 않았을것이라 말합니다. 술이 깬 후에 그것을 안 나발은 너무나 놀라 상심하여 근심하다 결국 죽게 됩니다.

완고함은 결국은 나를 해치며 망하게 합니다. 주 앞에 나아가기를 원하면서도 완고하다면 수건으로 가려져 있기 때문에 결코 주님에게서 나오는 영광의 빛을 볼 수 없게 됩니다. 완고함으로부터 벗어나서 부드러운 마음을 가지시기를 축원드립니다.


(행28:27) 이 백성들의 마음이 우둔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오면 내가 고쳐 줄까 함이라.

(요 12:40)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였음이더라.


성경에서 마음이 완고한 자를 우둔하다고 합니다. 곧 완고한 자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마음이 완고하여 어리석은 자는 주님의 영광을 볼 수가 없읍니다. 나의 완고함으로 내 마음이 둔하여져 있으면 들을 귀는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어 하나님을 깨달아 알을 수 없고, 볼 수 있는 눈은 있지만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기이한 일들을 볼 수 없게 됩니다. 아무리 마음으로 하나님을 깨닫기 원하지만 나의 완고함과 말씀에 대한 둔함으로 인해 주님을 통하여 비쳐 주시는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볼 수 없어 하나님께서 나를 고쳐주시는 긍휼의 은혜가 임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죄희의 잘못됨을 고쳐주셔야 합니다. 그렇지만 저희가 어리석어 완고하다면 주님으로부터 고침을 받을 수가 없읍니다

나의 어리석은 완고함으로 인한 수건이 나를 덥고 있는 한 나는 주님의 영광 앞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수건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영광의 빛을 가로막습니다. 주님의 빛에는 생명이 있고 자유함이 있는데, 영광의 빛이 수건으로 가리워져 있음으로 우리는 참된 생명, 참된 자유를 누릴 수가 없습니다.


주 안에 있는 자유

(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마음이 어리석어 완고한 자는 고침을 받아야 합니다. 계속해서 완고하다면 결국 망합니다. 망하기 전에 고침을 받아야 삽니다. 살기 위해서는 주님의 은혜가 임해야합니다. 육신의 마지막이 이르기전에 마음의 완고함을 치유받으십시요.

주님 앞에 나아감에 방해가 되는 어리석은 완고함은 주님 안에 온전하게 거하게 되면 자유가 임합니다. 생명을 회복하게 하는 주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은혜를 입기를 원한다면 우선 나의 어리석은 완고함을 내버려야 합니다.

16절에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말씀하시듯이 우리의 완고함을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고 주 앞에 신실한 마음으로 다가가면 나를 덮고 있던 수건은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벗겨져서 주님의 영광 앞에 나아가게 합니다.

18절의 말씀과 같이 우리를 덮고 있던 수건이 벗겨 진다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우리의 본성이 빛이신 주님의 형상을 닮아 변하여 영광에 이르게 됩니다.

(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18) And we all, who with unveiled face contemplate the Lord’s glory, are being transformed into his image with ever-increasing glory, which comes from the Lord, who is the Spirit.


18절에 “주의 영광을 보매”에서 “보매”는 NIV에서 “contemplate”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이 단어의 뜻은 “look thoughtfully for a long time”입니다. 즉 주님을 오랫동안 깊게 생각하며 쳐다본다는 뜻입니다.

나를 덮고 있던 수건이 벗겨지기를 원하십니까. 어리석은 완고함이 벗어지기를 원하십니까.
오래동안 주님만을 생각하며 바라보며 깊은 교제를 나누는 것을 배우십시요. 주님과의 깊은 교제를 계속해서 나누다보면 어느듯 나를 덮고 있었던 나의 교만과 가식과 완고함은 벗겨져 있어 주님의 영광의 회복의 은혜가 임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영과 육은 변화하여 하나님의 형상대로 회복하여 영광의 몸을 입게 됩니다.

우리는 흔히 은혜받은 사람의 얼굴에서 광채가 날 때가 있음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안에 있어 하나님과 교제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이 그 얼굴에 나타나게 됩니다. 저 뿐 아니라 주님을 믿는 우리 모든 성도들의 얼굴게서 주님의 영광의 빛이 나타나기를 간구합니다.

나를 덮고 있는 가식과 완고함의 수건을 벗어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주님을 통하여 비추시는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 주님의 영광의 빛에는 생명이 있고 자유함이 있는데, 이 영광의 빛이 수건으로 가리워져서 있는 한 우리는 참된 생명과 참된 자유를 누릴 수가 없게 됩니다.


(사 6:9)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완고함은 우리를 망하게 합니다.
저의 어리석은 완고함은 고쳐주시는 주님의 도움을 받지 못하게 막습니다.

혹 앞뒤로 꽉 막혀 있읍니까. 병으로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읍니까. 더 이상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까.
혹 마음이 완고한지 살펴보십시요. 어리석으며 죄악된 완고함을 내려 놓으시기를 간구합니다. 주님의 은혜로 완고함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완고함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어 주님께서 고쳐주시는 은혜를 입으세요. 오직 그것만이 살 길 입니다.

완고함으로 벗어나 주님의 영광을 보고 들으며 주님을 알아가는 복된 인생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

참으로 저는 가식적이며 마음이 완고합니다. 저에게는 저를 감싸며 나타내려는 헛된 가식이 있읍니다. 또한 사람들을 종교적인 잣대로 판단하려고 합니다. 저의 마음을 덮고 있는 수건입니다.

저와 주님의 영광의 빛을 가로막는 수건을 벗어 버리기를 원합니다.
주의 영광의 빛 가운데 거하기를 원합니다.
날마다 영광의 주님의 형상을 닮아가기를 소원합니다.
저를 덮고 있는 이 쓸데 없는 수건을 내어 버리게 하옵소서.
나의 못된 자아와 잘못된 기준과 나의 가식으로 저울질하는 저의 완고함과 우둔함을 내려 놓기를 원합니다. 가식적이며 어리석은 완고한 나 중심적인 것들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데 전혀 필요가 없고 무거운 짐이 될 뿐입니다. 저의 어리석은 완고함을 벗어 버리고 자유롭게 되어 주님께서 고쳐 주시는 은혜가 임하기를 간구합니다.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
저를 기뻐하시며 기다리고 계시는 아버지 앞에 나아가 영광의 빛 가운데 거하기를 원합니다.
주님은 이 모든 은혜를 이미 저에게 베풀어 주셨읍니다.
주님 저를 도와주소서. 저를 덮고 있는 이 수건을 벗어 버리기를 원합니다.
주의 능력이 제게 임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