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9월 28일 일요일

믿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표적


(16:17-18)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 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마가복음은 권능을 가지신 주님께서 일하신 사역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다.
그래서 유독 귀신들린 자를 낫게 하시고 병든 자들을 낫게 하신 이야기들이 많이 들어 있다.
주님은 부활하신 후에 얼마동안 이 땅에 머무시며 많은 일들을 하셨다.
그리고 이제 하늘에 승천하시기 전에 복음전파와 믿는 자들에게 따르는 표적을 말씀하신후에 하늘로 승천하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

영적이며 실체적인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많은 성도들이 영적인 이야기를 한다고 하면 긍정적으로 받아 들이는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대다수의 신자들은 무조건 이단시하거나 광신자로 취급을 하며 도무지 믿으려고 하지 않는다이들은 너무나 고상한 신앙생활을 추구하려고 한다.

그 결과 주님을 믿는다고 하는 신앙인들은 너무나 나약한 신앙생활을 한다.

영적인 표적에 너무나 거부감을 갖지 말아야 한다.
거부감을 갖게 된 이유가 영적인 능력을 가졌다는 사람들이 그 주신 능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영적인 능력을 갖고 있다는 자들이 믿음이 온전하게 성숙하지도 않았는데 자신의 어떤 이기적인 목적으로 영적인 능력을 잘못된 방향으로 변형되어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때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다.
즉 사람들에게는 신적인 모습이 있다는 것이다그것이 죄의 속성으로 인해 많이 가려져 있어 자신에게 하나님께서 은사로 주신 어떤 능력이 있는지 모른다주님을 믿는 자녀들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 각인되어 있다얼마나 놀라운 일인가내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각인되었다는 사실이!


믿는 자들에게 나타나는 표적들

1.     귀신을 쫓아냄
주님은 귀신들린 자들을 낫게 하셨다.
주님의 제자들역시 귀신들린 자들을 낫게 하였다.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사단을 이기셨다
예수께서 사단을 이기셨으므로 사단은 번개가 떨어지듯 떨어졌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사단은 영원한 형벌에 처하게 된다.

재림하시전까지 사단은 역사를 한다그래서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는 마귀를 대적하여야 한다.
우리의 삶의 긍극적의 목적은 구원이다.
사단은 내가 구원을 얻지 못하도록 계속해서 참소한다.
항상 나를 참소하는 존재인 사단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않된다.
그리고 악한 원수 마귀는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자를 찿고 있다.

(벧전 5:8) 근신하라 깨어라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자를 찿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이 말씀에는 대적 마귀에게는 한계가 있음을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대적 마귀는 두루 다니며 삼킬자를 찿아야 한다.
사단은 한 곳에 머무르고 있다면 다른 곳의 사정을 알 수 없는 제한적인 지혜를 갖고 있다.
하나님께서 사단에게 물으신다하나님께서 어디에 있었느냐 하고 물으실 떄 사단은 이곳 저곳을 두루 다녀 왔다고 대답을 한다즉 여기 있을 때는 저기 일을 모르고저기 있을 때는 여기 일을 모름을 나타낸다.

그리고 사단은 우리의 몸은 죽일수는 있지만 영혼을 죽이지는 못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몸과 영혼을 능히 영원한 불못에서 멸하실수 있기 때문에 사단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섬겨야 한다.
(마 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사단은 어떤 방법으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려 하며 어떻게 든지 막으려고 한다.
사단에게 질질 끌려 나니는 신앙생활에서 벗어나서 사단을 대적해서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간교한 마귀로 부터 이기기 위해서는 영적으로 잘 무장하고 있어야 한다.

(엡 6:12-13)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늘 말씀안에 거하기를 힘쓰며 기도해야 한다.
근신하라깨어라대적하라.
성령의 권능을 갖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마귀를 대적하며 이 땅에 삶을 승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드려야 한다.


2.     새방언
“새로운”의 원어의 뜻은 전혀없는 새로운혹은 지금까지 존재해 왔던 것과 비교할때 전혀 질적으로 새롭고 더 훌륭한 것이라는 뜻을 나타내다

주님은 “새로운” 표현을 좋아 하셨다.
그래서 “새 포두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않는다” 그리고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라고 주의 복음을 비유로 표현하셨다.
그리고 주님은 새무덤에 장사되셨다.


신약에서 예수님의 구원역사과 관련된 것들은 새로운 것으로 전환이 되며 회복된다.
·         새언약 (마 26:28; 고전11:25; 8:8): 시내산의 언약이 주님의 살과 피로 인해 새로운 언약으로 완전하게 되었다.
·         새계명 (13:34, 요일2:7)
·         새교훈 (막 1:27)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전의 랍비의 교훈과는 사뭇 틀리다.
·         새이름 (계 2:17)
·         새노래 (계 5:9)
·         새로운 피조물이라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갈 6:15, 고후 5:17)
·         새사람 (고후 4:16, 골 3:10)
·         새하늘과 새땅 (계 21:1)
·         새예루살렘

우리들이 사용하는 말 역시 새로운 언어로 변화를 한다.
바벨탑 사건때에 하나님 께서는 인간의언어를 혼잡하게 하심으로 사람들을 흩어 버리셔서 더이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대적하지 못하도록 하셨다그리고 주님께서 성령을 선물로 주신 후로 우리의 말을 성령께서 은사로 주신 말 즉 방언으로 성령안에서 하나의 언어가 되게 하셨다.

방언은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중의 하나이다.
(고전12;10) 어떤이에게는 능력 행함을어떤이에게는 예언함을어떤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어떤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오순절날 다락방에 모인 사람들에 주신 방언은 실제로 각국의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이었고 그래서 여러 나라에서 모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었다고 말하는 신학자들도 있다또 어떤 신학자들은 이때 주신 방언은 천국의 언어로서 성령이 모든 믿는 사람들안에 거하시기 때문에 그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천국의 언어를 이해했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방언은 성령의 은사중의 하나이다.
사도바울은 방언은 하나님과 영으로 비밀을 말한다고 하였다.
(고전14:2)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그리고 자신이 각종 방언을 말한다고 하셨다.
(고전14:18)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왜 방언 말하는 것에 대하여 의심을 하는가?
방언의 은사는 이미 끝이 나서  더 이상 방언을 주시지 않는다라고 주장을 하기도 한다.
(고전13:8-10)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에언도 페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고전13:12)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그들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음으로 인해 부분적으로 행하는 모든 것들이 폐하게 되어 방언도 예언도 그쳤다고 주장을 한다하지만 사도바울이 이 고린도서를 쓸 때에 이미 주님은 이 땅에 오셨다가 부활하셨다그렇다면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로는 모든 예언과 방언은 폐하여 졌어야 했으므로 사도바울은 방언과 예언을 할 수 없었고 지식도 폐하여졌어야 하지만 사도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회심하고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자로 살며 온갖 영적인 경험을 하였고 그리고 신약성경의 대부분을 썼고 특히 고린도전서에서 방언의 유익에 대하여 말하며 방언과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

과연 예수님이 부활하신후 2,000년동안 방언과 예언과 지식이 폐하여 졌을까?
어떻게 방언과 예언과 지식의 시대가 끝이 났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내 자신의 일도 어떻게 될지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확신한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고전 14:39)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좀 더 마음을 열자.
하나님의 세계는 우리가 아는 만큼이나 적지 않다.
하나님의 세계는 우리의 상상의 한계를 뛰어넘어 깊이과 높이과 길이와 넒이를 가늠조차 할 수 없다
마치 우주의 크기와 깊이를 우리는 결코 알수 없듯이.
우리가 보는 우주는 우리의 능력의 한도내에서만 보는 매우 제한적이다.
끝이 어디인지를 도무지 알 수 없는 어마어마한 우주를 창조하신 권능의 하나님을 과연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는가?

제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하여 제한하지 말자.

방언의 유익은 참으로 많이 있다.
방언은 나를 내가 알지 못하던 또다른 하나님의 영적인 세계로 인도할 것이다.

또한 방언은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므로 다른 사람들 앞에서 방언으로 말하고 기도하는 것은 억제하고 삼가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고전14:26)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3.     상하지 않음
독사에 물려도 상하지 않으며 독을 마셔도 해함을 받지 않는다.

사도바울이 탄 배가 파선하여 한 섬에 피신하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불을 쬐다가 독사에게 물렸다.
사도바울은 아무러지 않게 물린 뱀을 털어 내었고 원주민들은 사도바울이 어떻게 되는지를 궁금해 하며 지켜보았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 나지 않자 그들은 사도바울을 신으로 섬기려 하였다.

또한 뱀이나 독은 이 세상의 악한 것들을 의미하는 듯 하다.
주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보고 독사의 자식들아 말씀하셨다.
(마 23;33)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마 7:10) 생선을 달라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뱀은 악하고 위험스러운 것을 말한다.

믿는 자녀들은 날마다 세상의 악한 것들을 대면하여야 한다.
악하고 독한 것들은 믿는 자녀를 쓰러 뜨리려 하고 이용하려고 한다.

주님은 자녀들에게 악하고 독한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셨다.
(눅 10:19)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밞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4.     아픈자를 낫게 함
주님은 주님앞에 나온 모든 병든자들을 낫게 하셨다.
제자들 역시 가는 곳곳마다 안수하여 병든 자들을 낫게 하셧다.

주님은 우리를 낫게 하시려고 십자가에서 온몸이 찔리셨고 상하셨고 징계를 받으셨고 채찍에 맞으셨다.
(사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병에 걸렸는가?
나의 사랑하는 이웃이 병에 걸렸는가?그렇다면 서로 중보하며 기도하라.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긴다면 여호와의 빛이 치료하는 광선이 되어 병이 낫게 될 것이다.

(약 5:16)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말 4:2)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울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병에 걸렸다면 기도를 해야 하고 또한 세상의 의술에도 의존할 수 있다.
세상의 의술의 지식 또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들이다.
무조건 기도의 힘으로만 낫게 다는 신념도 귀중하지만 세상의 의술의 도움을 받는 것도 또한 하나님 께서 허락하신 것이다그리고 세상의 의술에는 고칠수 있는 한계가 있다.
그 한계를 뛰어넘는 것이 주님께서 주신 병을 낫게 하는 능력일 것이다.

더 이상 의존할 곳이 없는가그렇다면 오직 주님의 손길에 의지할 수 밖에 없지 않는가
주님께 지친 나의 육신과 영혼을 맡기자그리고 분명하게 알아야 하는 것은 각자에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이땅의 연수가 있다는 것이다주님의 은혜로 병이 나음을 입을수는 있지만 영원토록 육신이 산다는 뜻은 아니다언젠가는 나의 육신이 생명이 다하는 그날에는 모든 병에서 자유롭게 되어서 고통이 없는 하나님께서 계신 하늘 나라로 갈 것이다.

2014년 9월 21일 일요일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15:39) 백부장이 그렇게 운명하심을 보고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백부장은 예수님을 보고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하고 고백할 있었을까?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아는 것이 마가복음의 주제이기도 하다.
(1: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백부장은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이다.
그는 처음에 주님을 박을때 죄인 중의 한사람으로 생각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주님은 죄가 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결국 백부장은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고백하는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백부장은 그와같은 고백을 있었을까?
어떤 주님을 백부장은 만났던 것일까?

1.     주위사람들의 말을 들음
백부장은 주위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들었다.
(27:40)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27:42)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15:32) 이스라엘의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가 보고 믿게 할지어다.
(23:35) 만일 하나님의 택하신 그리스도이든 자기도 구원할찌어다.
(23:37)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어든 네가 너를 구원하라.
(23:39)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사람들은 흔히 다른 이에 대하여 말할때 험담하기를 좋아한다. 없는 것도 있는 것처럼 말하며 좋지 않게 말한다. 특히 그가 범죄자라면 더욱 나쁜 점만 들춰내서 이야기를 한다. 그가 행했던 좋은 일들도 분명히 있었을텐데 사람들은 악한 행위만을 더욱 크게 부풀려서 말들을 하기를 좋아한다. 그것이 사람의 악한 본성중의 하나이다.

주님은 범죄자로서 십자가에 달리셨다.
“그당시 십자가형은 법정 최고형으로서 고통스럽게 긴시간동안 고통스럽게 인간의 정신과 육체의 한계를 느끼며 죽이는 가장 지독한 형벌이었다. 과거 로마에서는 반항한 노예로 시작해서 반역자 등의 중죄인을 십자가에서 죽였다.

사람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보면서 욕을 하거나 험담을 하지 않았다.
십자가에 달려 죽는 자들은 범죄자들인데 사람들은 주님의 잘못한 일에 대하여 말하지 않고 하나같이 주님에 대하여 이야기하며 “하나님의 택하신 자”, “하나님의 아들”, “이스라엘의 왕”, “유대인의 왕”, “그리스도”라고 말했다. 악한 본성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기에 남의 잘못한것에 더욱 열을 내어 말들을 하기를 좋아하는데도 이들은 주님의 조그마한 실수나 잘못을 찿을 없었던 것이다.

이를 들은 백부장은 당연히 주님에 대하여 의아심을 갖고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면서 점점 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예수가 누구인가 궁금증을 가졌을 것이고 점차로 주님을 경외함으로 바라보게 되었을 것이다

주님에 대하여 어떤 말들을 사람들로부터 듣는가?
나는 어떤 말들을 주님에 대하여 사람들에게 말하는가?
이런 말들을 듣고 말하면서 안에는 주님에 대하여 알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는가?

과연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일까?
과연 주님은 창조주일까?
과연 주님은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일까?
과연 주님은 나를 구원할 메시야일까?
그런 주님이 십자가에서 참혹한 모습으로 죽어야 했을까?

주님에 대하여 궁금증을 갖는다면 더욱 관심을 갖고 주님에 대하여 쓰여진 말씀을 읽고 싶지 않겠는가.
주님에 대하여 알고 싶습니다.
성령님 저에게 주님에 대하여 조명하여 주옵소서.
나의 깨달음으로 깨달아 알게 하신다.

주님 이외의 것들은 헛된 사람과도 같이 바람과 같이 사라져 버리는 미련한 것을 알아야 한다
(1:17) 내가 다시 지혜를 알고자 하며 미친 것들과 미련한 것들을 알고자 하여 마음을 썻으나 이것도 바람을 잡으려는 것인 줄을 깨달았도다.

내가 영원토록 있는 길은 주님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는 말씀을 가까이 하는 것이다.
(119:144) 주의 증거들은 영원히 의로우시니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하사 살게 하소서.


2.     주님의 말씀
백부장은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모든 대화를 들을 있었다.
주님께서 하나님께 드린 대화, 주님께서 어머니와 친구에게 하시는 말씀,  죄수들과의 대화, 그리고 주님께서 하신 말씀.  모든 대화를 가장 가까이서 들을 있었다. 백부장은 주님의 표정 하나 하나를 자세하게 있었고, 주님께서 힘들어 하시는 것도 있었다.
십자가에서 주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은 신적인 권위를 갖고 있다.

·         저들의 죄를 사하소서.
·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어머니라.
·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         내가 목마르다.
·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          이루었다.
·         아버지여 영혼을 받으소서.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는 용서의 주님.
부모와 자식과 형제와 제자를 사랑하신 사랑의 주님.
나와 같은 육신을 갖고 있어 뼈가 부숴지는 고통을 느끼는 주님.
모두가 자신을 버린 절망의 외로움 가운데서 모든 것을 이루신 주님.
모든 것을 아버지의 손에 맡기는 순종의 주님.

나는 어떤 주님을 만난는가?
주님을 만난 기억이 있는가?


3.     자연현상
성경에는 하늘이 어두워졌고, 지진이 났으며, 성전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졌으며, 무덤에서 자던 자들이 부활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백부장은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주변의 자연의 현상을 목격할 있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오전 9시였고, 12시부터 땅이 어두워졌고 주님께서 운명하신 오후 3시까지 어둠은 지속되었다. 그리고 주님께서 운명하실 땅을 뒤흔드는 지진이 있었다.
이를 백부장은 경외함과 심한 두려움으로 바라볼 밖에 없었을 것이다.

땅이 어두워진일에 대하여 생각해보자.
(27:45)  육시로부터 땅에 어둠이 임하여 구시까지 계속하더니
(15:33)  육시가 되매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23:44) 때가 육시쯤되어 해가 빛을 잃고 땅에 어둠이 임하여 구시까지 계속하더니

59:2 땅이 어두움에 덮일 것을 말씀하고 있다
(59:2) 보라 어두움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우려니와

훤한 대낮에 햇빛을 가리고 어둠이 세시간동안 임하기 위해서는 두가지의 가정이 있을수 있는데 그중에 하나는 일식이고 다른 하나는 구름이 해를 가렸을 것이라 가정해 있다.
어떤 성경학자들은 땅에 어두움이 임한 것이 일식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일식이 3시간 동안 지속하기 위해서는 지구는 자전과 공전을 멈추어야 하고 또한 제자리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물론 하나님께서 기적을 베푸시면 불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하늘에 빽빽한 구름으로 가득차서 해의 빛을 가렸을 것이라고 상상해보자.
빽빽한 구름이 3시간동안 주님께서 달리신 골고다 주위에 머물며 햇빛을 가림으로 땅은 심한 어두움으로 뒤덥혔다.

빽빽한 구름은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한다.
(19:9) 내가 빽빽한 구름가운데서 네게 임함은 내가 너와 말하는 것을 백성들이 듣게 하며
(19:16) 셋째 아침에 우레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매우 크게 들리니 진중에 있는 모든 백성이 떨더라.
(삼하22:12) 그가 흑암 모인 물과 공중의 빽빽한 구름으로 둘린 장막을 삼으심이여
(18:11) 그가 흑암을 그의 숨는 곳으로 삼으사 장막 같이 자기를 두르게 하심이여 물의 흑암과 공중의 빽빽한 구름으로 그리하시도다.

마치 사랑하는 아들 주님의 죽음을 지켜보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임재를 상징하는듯 하다.
사랑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앞에 아무 말씀을 하시지 않으셨지만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슬퍼하셨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는 시간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임재하시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위로하셨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임하게 된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으면 그곳에는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사랑이 임한다.

하나님의 임재가 나에게 임하였는가?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빽빽한 구름으로 가득차서 세상 것들은 보이지 않고 가운데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이 보이는가?


4.     하나님의 선택
하나님께서는 백부장을 자신의 자녀로 선택하셨다.
백부장이 주님의 십자가의 형을 담당한 것이 우연이었을까?
아마 하나님은 백부장을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것을 보고 변화하라고 보내셨을것이다.

하나님의 선택은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이시다.
(18:4)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터지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좋은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

나는 어떤 그릇으로 빗어 지기를 원하는가?
백부장과 같이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바로 시각 그곳에 서있는 그릇이 되고 싶지 않는가?

주여 저를 아름다운 그릇으로 빗으소서.
저는 주님의 것이며 주님의 손에 있어 아름다운 그릇으로 다시 빗어지기 원하나이다.
저를 받으소서.


말씀을 정리하면

백부장은 유대인이 아니라 로마사람이다.  이방인인 것이다.
아마 백부장은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전혀 모르고 있다가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는 형을 직접 지휘하면서 예수가 누구인가 궁금증을 가졌을 것이다. 어떤 죄를 지어서 이처럼 참혹한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렸을까 생각하였을 것이다. 십자가에 달려 죽는 이들은 대개가 반역을 하였거나 극악한 일을 저질렀을때 십자가 형을 선고받았다. 십자가형은 사람을 오랜 시간동안 고통을 주면서 죽이는 잔인한 형벌이다. 그래서 아마 백부장은 예수님을 그와 같이 극악한 죄를 지은 죄인으로 예수님을 취급하여 함부러 대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백부장은 이상한 느낌을 감지하였던 것이다.
점차로 그의 마음속에는 의아함이 들기 시작하였다. 백부장은 주님이 누구인지를 전혀 알지 못했지만 주위사람들이 “저이가 자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대. 그런데 어쩌다가 십자가에 달렸어.  불쌍한 사람이네” 하면서 수군거리는 말을 들을 있었다.

비록 주님이 참혹한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리셨지만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권위를 갖고 계셨다.
많은 말씀을 하시지는 않으셨지만 말씀에는 신적인 권위가 있었다. 주님과 어머니와 제자와 대화를 하셨고, 죄수들과 말씀을 나누었고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께 말씀하셨다.
백부장은 주님의 대화를 통해서 예수가 보통 죄수들과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을 충분하게 느꼈을 것이다 주님의 한마디 한마디 말씀에는 거부할 없는 어떤 권위가 있어 말씀이 내마음에 깊이 파고 든다.

그리고 땅도 하늘도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후에 변하기 시작하였다.  땅과 하늘이 캄캄하게 어두워졌다.
주님께서 운명하실 때에 땅도 울면서 진서리를 치며 흔들어 댔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서 백부장은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되었다.

백부장은 참으로 복받은 사람이다.
그는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죽는 모습을 가장 가까이서 사람이다.
비록 주님의 모습이 몸이 찢기고 피로 엉겨붙어 있어 몰골이 처참했지만 그는 그런 주님의 모습 저너머에 계시는 주님의 실체의 모습을 만날수 있었다. 십자가에 달린 주님을 보면서 과연 이이가 누구인가? 깊이 생각할 있었고 주님 주위에서 일어난 일들을 보면서 과연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메시야임을 마음속에 심을 있었다. 그는 주님을 실질적으로 만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진실로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고 고백할 있었다.

주님을 만난 이후의 삶은 주님께 사로잡혀 주님을 따르는 완전히 변화된 삶을 살았을 것이라 생각을 한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님을 직접보고 체험하여 주님을 구세주로 받아 들였는데 어찌 그의 삶이 변하지 않을수가 있었겠는가?

주님의 제자들 역시 백부장과 같은 질문을 가졌었다.
주님께서 파도와 바람을 말씀으로 잠재우자 제자들은 심히 두려워하며 “아! 이가 누구인가? 하며 주님의 정체성에 대하여 질문하였다 제자들은 주님을 삼년간 같이 동거동락하였지만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님을 알아 보지 못했지만, 어느 순간 제자들의 마음이 밝아져서 제자들은 주님의 실제를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주님을 알기 위해서는 실질적인 주님을 만나는 체험이 있어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님을 주일날 교회에 출석해야지만 만난다고 생각을 하는 하다
그래서 교회를 벗어나면 주님을 떠난 삶을 당연시 여긴다. 세상에 속해 있는 자들은 주님을 만날 없다.

주님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물어보신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냐 하느냐 ? (8:27)
그리고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물어보신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8:29)
주님의 관심사는 사람들보다는 제자들에게 있다.
그리고 주님의 관심사는 제자인 바로 나에게 있다.

나에게 주님은 어떤 분이신가?
만일 주님께서 나에게 “너는 나를 누구라 생각하느냐? 이렇게 물어보신다면 주님을 몰랐던 백부장이  주님을 경험한 “주님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고 고백하였듯이 또한 그렇게 고백할 있겠는가?

(4:41) 이가 누구이신가?

주님의 제자들이 심한 파도와 바람에 의하여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울때에 바람과 파도를 잠잠케 하시는 주님을 보가 했던 말이다. 주님의 제자가 되어 3년간 동거동락하며 주님과 함께 하였지만 제자들은 주님의 실체를 깨닫지 못했다. 그러다가 비로서 때가 되어 제자들은 주님의 실체를 깨닫게 되고 Who is this? 하며 반문하게 된다.

백부장이, 제자들이 주님의 실체를 만났듯이, 우리 역시 주님의 실체를 만나야 한다.
두두려 맞아서 온몸이 멍이 들어 퉁퉁붓고,  몸에 피로 얼룩져 있고, 벌거 벗은 채로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모습 너머에 감추어진 주님의 실체를 만나야 한다

그래서 실체적인 주님을 만나 입으로부터 “아! 주님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하는 진실된 고백을 하는 축복을 받자. 
 제목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15:39) 백부장이 그렇게 운명하심을 보고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백부장은 예수님을 보고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하고 고백할 있었을까?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아는 것이 마가복음의 주제이기도 하다.
(1: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백부장은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이다.
그는 처음에 주님을 박을때 죄인 중의 한사람으로 생각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주님은 죄가 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결국 백부장은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고백하는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백부장은 그와같은 고백을 있었을까?
어떤 주님을 백부장은 만났던 것일까?

1.     주위사람들의 말을 들음
백부장은 주위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들었다.
(27:40)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27:42)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15:32) 이스라엘의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가 보고 믿게 할지어다.
(23:35) 만일 하나님의 택하신 그리스도이든 자기도 구원할찌어다.
(23:37)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어든 네가 너를 구원하라.
(23:39)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사람들은 흔히 다른 이에 대하여 말할때 험담하기를 좋아한다. 없는 것도 있는 것처럼 말하며 좋지 않게 말한다. 특히 그가 범죄자라면 더욱 나쁜 점만 들춰내서 이야기를 한다. 그가 행했던 좋은 일들도 분명히 있었을텐데 사람들은 악한 행위만을 더욱 크게 부풀려서 말들을 하기를 좋아한다. 그것이 사람의 악한 본성중의 하나이다.

주님은 범죄자로서 십자가에 달리셨다.
“그당시 십자가형은 법정 최고형으로서 고통스럽게 긴시간동안 고통스럽게 인간의 정신과 육체의 한계를 느끼며 죽이는 가장 지독한 형벌이었다. 과거 로마에서는 반항한 노예로 시작해서 반역자 등의 중죄인을 십자가에서 죽였다.

사람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보면서 욕을 하거나 험담을 하지 않았다.
십자가에 달려 죽는 자들은 범죄자들인데 사람들은 주님의 잘못한 일에 대하여 말하지 않고 하나같이 주님에 대하여 이야기하며 “하나님의 택하신 자”, “하나님의 아들”, “이스라엘의 왕”, “유대인의 왕”, “그리스도”라고 말했다. 악한 본성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기에 남의 잘못한것에 더욱 열을 내어 말들을 하기를 좋아하는데도 이들은 주님의 조그마한 실수나 잘못을 찿을 없었던 것이다.

이를 들은 백부장은 당연히 주님에 대하여 의아심을 갖고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면서 점점 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예수가 누구인가 궁금증을 가졌을 것이고 점차로 주님을 경외함으로 바라보게 되었을 것이다

주님에 대하여 어떤 말들을 사람들로부터 듣는가?
나는 어떤 말들을 주님에 대하여 사람들에게 말하는가?
이런 말들을 듣고 말하면서 안에는 주님에 대하여 알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는가?

과연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일까?
과연 주님은 창조주일까?
과연 주님은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일까?
과연 주님은 나를 구원할 메시야일까?
그런 주님이 십자가에서 참혹한 모습으로 죽어야 했을까?

주님에 대하여 궁금증을 갖는다면 더욱 관심을 갖고 주님에 대하여 쓰여진 말씀을 읽고 싶지 않겠는가.
주님에 대하여 알고 싶습니다.
성령님 저에게 주님에 대하여 조명하여 주옵소서.
나의 깨달음으로 깨달아 알게 하신다.

주님 이외의 것들은 헛된 사람과도 같이 바람과 같이 사라져 버리는 미련한 것을 알아야 한다
(1:17) 내가 다시 지혜를 알고자 하며 미친 것들과 미련한 것들을 알고자 하여 마음을 썻으나 이것도 바람을 잡으려는 것인 줄을 깨달았도다.

내가 영원토록 있는 길은 주님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는 말씀을 가까이 하는 것이다.
(119:144) 주의 증거들은 영원히 의로우시니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하사 살게 하소서.


2.     주님의 말씀
백부장은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모든 대화를 들을 있었다.
주님께서 하나님께 드린 대화, 주님께서 어머니와 친구에게 하시는 말씀,  죄수들과의 대화, 그리고 주님께서 하신 말씀.  모든 대화를 가장 가까이서 들을 있었다. 백부장은 주님의 표정 하나 하나를 자세하게 있었고, 주님께서 힘들어 하시는 것도 있었다.
십자가에서 주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은 신적인 권위를 갖고 있다.

·         저들의 죄를 사하소서.
·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어머니라.
·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         내가 목마르다.
·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          이루었다.
·         아버지여 영혼을 받으소서.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는 용서의 주님.
부모와 자식과 형제와 제자를 사랑하신 사랑의 주님.
나와 같은 육신을 갖고 있어 뼈가 부숴지는 고통을 느끼는 주님.
모두가 자신을 버린 절망의 외로움 가운데서 모든 것을 이루신 주님.
모든 것을 아버지의 손에 맡기는 순종의 주님.

나는 어떤 주님을 만난는가?
주님을 만난 기억이 있는가?


3.     자연현상
성경에는 하늘이 어두워졌고, 지진이 났으며, 성전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졌으며, 무덤에서 자던 자들이 부활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백부장은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주변의 자연의 현상을 목격할 있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오전 9시였고, 12시부터 땅이 어두워졌고 주님께서 운명하신 오후 3시까지 어둠은 지속되었다. 그리고 주님께서 운명하실 땅을 뒤흔드는 지진이 있었다.
이를 백부장은 경외함과 심한 두려움으로 바라볼 밖에 없었을 것이다.

땅이 어두워진일에 대하여 생각해보자.
(27:45)  육시로부터 땅에 어둠이 임하여 구시까지 계속하더니
(15:33)  육시가 되매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23:44) 때가 육시쯤되어 해가 빛을 잃고 땅에 어둠이 임하여 구시까지 계속하더니

59:2 땅이 어두움에 덮일 것을 말씀하고 있다
(59:2) 보라 어두움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우려니와

훤한 대낮에 햇빛을 가리고 어둠이 세시간동안 임하기 위해서는 두가지의 가정이 있을수 있는데 그중에 하나는 일식이고 다른 하나는 구름이 해를 가렸을 것이라 가정해 있다.
어떤 성경학자들은 땅에 어두움이 임한 것이 일식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일식이 3시간 동안 지속하기 위해서는 지구는 자전과 공전을 멈추어야 하고 또한 제자리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물론 하나님께서 기적을 베푸시면 불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하늘에 빽빽한 구름으로 가득차서 해의 빛을 가렸을 것이라고 상상해보자.
빽빽한 구름이 3시간동안 주님께서 달리신 골고다 주위에 머물며 햇빛을 가림으로 땅은 심한 어두움으로 뒤덥혔다.

빽빽한 구름은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한다.
(19:9) 내가 빽빽한 구름가운데서 네게 임함은 내가 너와 말하는 것을 백성들이 듣게 하며
(19:16) 셋째 아침에 우레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매우 크게 들리니 진중에 있는 모든 백성이 떨더라.
(삼하22:12) 그가 흑암 모인 물과 공중의 빽빽한 구름으로 둘린 장막을 삼으심이여
(18:11) 그가 흑암을 그의 숨는 곳으로 삼으사 장막 같이 자기를 두르게 하심이여 물의 흑암과 공중의 빽빽한 구름으로 그리하시도다.

마치 사랑하는 아들 주님의 죽음을 지켜보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임재를 상징하는듯 하다.
사랑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앞에 아무 말씀을 하시지 않으셨지만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슬퍼하셨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는 시간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임재하시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위로하셨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임하게 된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으면 그곳에는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사랑이 임한다.

하나님의 임재가 나에게 임하였는가?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빽빽한 구름으로 가득차서 세상 것들은 보이지 않고 가운데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이 보이는가?


4.     하나님의 선택
하나님께서는 백부장을 자신의 자녀로 선택하셨다.
백부장이 주님의 십자가의 형을 담당한 것이 우연이었을까?
아마 하나님은 백부장을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것을 보고 변화하라고 보내셨을것이다.

하나님의 선택은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이시다.
(18:4)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터지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좋은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

나는 어떤 그릇으로 빗어 지기를 원하는가?
백부장과 같이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바로 시각 그곳에 서있는 그릇이 되고 싶지 않는가?

주여 저를 아름다운 그릇으로 빗으소서.
저는 주님의 것이며 주님의 손에 있어 아름다운 그릇으로 다시 빗어지기 원하나이다.
저를 받으소서.


말씀을 정리하면

백부장은 유대인이 아니라 로마사람이다.  이방인인 것이다.
아마 백부장은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전혀 모르고 있다가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는 형을 직접 지휘하면서 예수가 누구인가 궁금증을 가졌을 것이다. 어떤 죄를 지어서 이처럼 참혹한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렸을까 생각하였을 것이다. 십자가에 달려 죽는 이들은 대개가 반역을 하였거나 극악한 일을 저질렀을때 십자가 형을 선고받았다. 십자가형은 사람을 오랜 시간동안 고통을 주면서 죽이는 잔인한 형벌이다. 그래서 아마 백부장은 예수님을 그와 같이 극악한 죄를 지은 죄인으로 예수님을 취급하여 함부러 대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백부장은 이상한 느낌을 감지하였던 것이다.
점차로 그의 마음속에는 의아함이 들기 시작하였다. 백부장은 주님이 누구인지를 전혀 알지 못했지만 주위사람들이 “저이가 자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대. 그런데 어쩌다가 십자가에 달렸어.  불쌍한 사람이네” 하면서 수군거리는 말을 들을 있었다.

비록 주님이 참혹한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리셨지만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권위를 갖고 계셨다.
많은 말씀을 하시지는 않으셨지만 말씀에는 신적인 권위가 있었다. 주님과 어머니와 제자와 대화를 하셨고, 죄수들과 말씀을 나누었고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께 말씀하셨다.
백부장은 주님의 대화를 통해서 예수가 보통 죄수들과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을 충분하게 느꼈을 것이다 주님의 한마디 한마디 말씀에는 거부할 없는 어떤 권위가 있어 말씀이 내마음에 깊이 파고 든다.

그리고 땅도 하늘도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후에 변하기 시작하였다.  땅과 하늘이 캄캄하게 어두워졌다.
주님께서 운명하실 때에 땅도 울면서 진서리를 치며 흔들어 댔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서 백부장은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되었다.

백부장은 참으로 복받은 사람이다.
그는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죽는 모습을 가장 가까이서 사람이다.
비록 주님의 모습이 몸이 찢기고 피로 엉겨붙어 있어 몰골이 처참했지만 그는 그런 주님의 모습 저너머에 계시는 주님의 실체의 모습을 만날수 있었다. 십자가에 달린 주님을 보면서 과연 이이가 누구인가? 깊이 생각할 있었고 주님 주위에서 일어난 일들을 보면서 과연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메시야임을 마음속에 심을 있었다. 그는 주님을 실질적으로 만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진실로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고 고백할 있었다.

주님을 만난 이후의 삶은 주님께 사로잡혀 주님을 따르는 완전히 변화된 삶을 살았을 것이라 생각을 한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님을 직접보고 체험하여 주님을 구세주로 받아 들였는데 어찌 그의 삶이 변하지 않을수가 있었겠는가?

주님의 제자들 역시 백부장과 같은 질문을 가졌었다.
주님께서 파도와 바람을 말씀으로 잠재우자 제자들은 심히 두려워하며 “아! 이가 누구인가? 하며 주님의 정체성에 대하여 질문하였다 제자들은 주님을 삼년간 같이 동거동락하였지만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님을 알아 보지 못했지만, 어느 순간 제자들의 마음이 밝아져서 제자들은 주님의 실제를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주님을 알기 위해서는 실질적인 주님을 만나는 체험이 있어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님을 주일날 교회에 출석해야지만 만난다고 생각을 하는 하다
그래서 교회를 벗어나면 주님을 떠난 삶을 당연시 여긴다. 세상에 속해 있는 자들은 주님을 만날 없다.

주님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물어보신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냐 하느냐 ? (8:27)
그리고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물어보신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8:29)
주님의 관심사는 사람들보다는 제자들에게 있다.
그리고 주님의 관심사는 제자인 바로 나에게 있다.

나에게 주님은 어떤 분이신가?
만일 주님께서 나에게 “너는 나를 누구라 생각하느냐? 이렇게 물어보신다면 주님을 몰랐던 백부장이  주님을 경험한 “주님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고 고백하였듯이 또한 그렇게 고백할 있겠는가?

(4:41) 이가 누구이신가?

주님의 제자들이 심한 파도와 바람에 의하여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울때에 바람과 파도를 잠잠케 하시는 주님을 보가 했던 말이다. 주님의 제자가 되어 3년간 동거동락하며 주님과 함께 하였지만 제자들은 주님의 실체를 깨닫지 못했다. 그러다가 비로서 때가 되어 제자들은 주님의 실체를 깨닫게 되고 Who is this? 하며 반문하게 된다.

백부장이, 제자들이 주님의 실체를 만났듯이, 우리 역시 주님의 실체를 만나야 한다.
두두려 맞아서 온몸이 멍이 들어 퉁퉁붓고,  몸에 피로 얼룩져 있고, 벌거 벗은 채로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모습 너머에 감추어진 주님의 실체를 만나야 한다

그래서 실체적인 주님을 만나 입으로부터 “아! 주님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하는 진실된 고백을 하는 축복을 받자. 


 
사랑하는 아버지.

자신의 임무에 충실하던 백부장이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을때에도
그는 주님이 그저 극악한 형벌을 받아야 하는 죄인이로만 알았읍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주님이 하시는 말씀을 들으며
주님의 표정 하나 하나를 보면서 주님에 대하여 생각해 있었읍니다.
그리고 하늘이 캄캄하게 어두워지고 주님이 운명하실때 땅이 뒤흔들리는 것을 보고
그는 “과연 주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었읍니다”하고 고백할 밖에 없었읍니다

주님에 대하여 전혀 아는 것이 없었지만
그는 주님의 실체를 만나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날 있었던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계획이셨고 하나님의 주권이었읍니다.

주여 제가 주님의 참된 모습을 보기를 원합니다.
바로 저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만나기를 원합니다.
주의 자녀로 다시 태어 나기를 원합니다.
주여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사랑하는 아버지.

자신의 임무에 충실하던 백부장이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을때에도
그는 주님이 그저 극악한 형벌을 받아야 하는 죄인이로만 알았읍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주님이 하시는 말씀을 들으며
주님의 표정 하나 하나를 보면서 주님에 대하여 생각해 있었읍니다.
그리고 하늘이 캄캄하게 어두워지고 주님이 운명하실때 땅이 뒤흔들리는 것을 보고
그는 “과연 주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었읍니다”하고 고백할 밖에 없었읍니다

주님에 대하여 전혀 아는 것이 없었지만
그는 주님의 실체를 만나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날 있었던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계획이셨고 하나님의 주권이었읍니다.

주여 제가 주님의 참된 모습을 보기를 원합니다.
바로 저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만나기를 원합니다.
주의 자녀로 다시 태어 나기를 원합니다.
주여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