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2월 29일 일요일

축복받는 올바른 부부생활

한 해가 저물어 가고 또 다른 한 해가 우리를 기다립니다.
가정은 평안하셨읍니까? 평탄한 한 해가 오기를 바라십니까?
우리의 선조들이 썼던 말 중에 "가화만사성 (家和萬事成)" 즉 "가정이 화목하면 모든 일이 뜻대로 이루어진다"의 뜻을 갖고 있읍니다. 선조들은 경험에 의해서 가정이 화목해야 이 땅의 삶이 평안함을 깨달았읍니다.

대부분의 우리는 가정의 울타리 안에 거하고 있읍니다. 어떤 가정은 든든한 울타리가 쳐져 있는가하면 어떤 가정은 금방 허물어질듯한 울타리로 쳐있는 가정도 있읍니다. 든든한 울타리가 쳐져 있는 가정의 남편과 아내는 서로를 원망하지 않으며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함으로 그 가정은 평안의 축복이 임합니다. 하지만 남편과 아내가 제대로 서있지 못하면 서로 원망하며 불평하며 신뢰가 깨져서 그 가정은 흔들릴 수 밖에 없으며 제대로 일도 풀리지 않습니다.

만일 남편과 아내가 자신의 위치에서 벗어나 있어 가정이 허물어질 정도로 흔들리고 있다면 회개하여 새 해를 맞이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내년에 더 나아지고자 기대한 일들은 결코 이루어 지지 않을 것입니다.

성경에는 남편과 아내가 어떤 일들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으며 축복의 길로 인도합니다.
한 가정에서 아내와 남편이 제대로 서있는다면 그 가정에는 주님의 약속한 축복이 임합니다.


아내들에게
(벧전3:1)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실을 봄이라.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에 아내에 대하여 이처럼 말씀합니다.
(엡5:21-22)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골3:18)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벧전에서는 순종이라고 표현을 했지만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에서는 복종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읍니다. 복종이라는 단어에는 강한 의미가 있으며 부드럽게 말하면 순종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내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남편에 대한 복종입니다. 성경에는 남편들아 아내에게 복종하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끊임없이 주님께 순종하라고 가르침을 받았읍니다. 그래서 주님께 순종하라는 말은 부담감없이 받아 들이지만 남편에게 순종하라는 말은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성경 여러 곳에서 아내들은 주님께 순종하듯이 남편에게도 복종해야 한다고 가르침니다.

남편에게 순종하기가 무척이나 어려우시겠지만 남편에게 복종하는 법을 배우십시요. 그래야 가정은 평안해지며 주님으로부터 오는 복을 받을 준비가 됩니다. 그 이유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가 됨이기 떄문입니다. 요사이는 아내가 남편의 머리가 되어 아내가 남편의 복종을 요구하는 가정이 많이 있읍니다. 하지만 이는 분명하게 잘못된 것이며 주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으십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듯이 아내는 복종의 성품을 배워야 합니다. 못나고 어리석은 남편이지만 주님께서는 그 아들을 한 가정의 가장으로 삼으셨고 그 아들이 부족하기에 돕는 배필로 아내를 주셨읍니다. 아내는 남편을 복종하며 도와야 하는 사명을 갖고 있읍니다.

(창3:16)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아내가 남편의 머리가 되어 남편을 다스리는 것이 아닌 남편이 아내를 다스리며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는 가정이 성경에서 말하는 옳바른 가정인 것을 잊지 마십시요.


남편들에게

(벧전3:7)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성경은 아내에게 요구하는 것이 남편에게 복종하는 한가지를 요구하시지만 남편에게는 여러가지를 요구하십니다. 남편은 뻣나가기 쉽고 어리석고 부족한데도 가정의 머리이기에 더욱 큰 책임을 요구하십니다.

지식을 따라

아내에 대하여 배워야 합니다. 나와는 생각하는 것도 많이 다르고 말하는 법도 다른 아내를 배워 깊은 이해심을 가져야 합니다. 남자는 여자와 무척이나 다릅니다. 생각하고 행동하고 말하는 방식도 너무나 다릅니다. 대부분의 남자는 단순하게 표면적으로 생각합니다. 남편은 표면적으로 받아 들이기에 아내가 말하고 있는 이면에 갖고 있는 본래의 생각을 이해하기 어렵지요. 분명히 아내는 이렇게 말했지만 실은 다른 것을 갖고 말하고 있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됩니다. 저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지만 남편은 아내에 대하여 사랑의 마음을 갖고 이해하려고 배워야 합니다. 남편이 아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아내는 괴로워 합니다.

(골3:19)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성경은 분명하게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히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남편은 아내를 사랑의 마음과 지식으로 배워 이해하고 괴롭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내와 동거하고
서로의 몸을 주장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고전7:2-5) 음행을 피하기 위하여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 남편은 그 아내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아내는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그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 (fasting and prayer) 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가 절제 못함으로 말미암아 사탄이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어느 정도 결혼 생활을 한 가정에서 부부가 각각의 방을 쓰는 가정이 늘고 있읍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듯이 매일 매일 금식하며 기도하기 위하여 각방을 쓴다면 무슨 문제가 있겠읍니까, 하지만 그렇지 않은 갖가지 이유로 각방을 쓴다면 왜 그런지 근본적인 이유를 찿아야 합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주님은 우리를 너무나 잘 아시기에 부부가 되면 금식과 기도가 아니면 각방을 쓰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자기 몸을 주장하지 말라는 것은 정상적인 성생활을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부부가 정상적인 성생활을 하지 못하게 되면 사탄은 남편이나 아내의 틈을 비집고 들어와 가정을 파탄내려고 합니다. 정상적인 성생활을 통하여 음란함을 버려 사탄의 시험을 막아야 합니다.

(살전4:4)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대할 줄을 알고
each one of you to know how to possess his vessel in sanctification and honor


'아내를 대하다'로 번역을 했지만 이는 '아내를 취하다'로 번역을 하는 것이 보다 이해가 쉽습니다.
즉 남편은 아내와 관계를 할 때에는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대하라고 권면을 합니다. 남편과 아내의 거룩하게 구별된 건강한 성생활은 가정을 건강하도록 인도하는 중요한 요소중의 하나입니다.


귀히 여기라 (giving honor)

아내는 연약한 그릇이기도 하지만 또한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동역자이기에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고려청자나 이조백자를 다룰때 매우 조심하여 세심하게 다릅니다. 손에서 미끌어져 떨어 뜨리면 값으로 환산할 수 없는 귀한 그릇이 산산조각이 납니다. 남편은 연약한 아내를 귀한 그릇을 다루듯이 떨어 뜨릴까 깨질까 귀하게 세심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또한 아내를 남편과 동등한 동역자로 주님께서 주셨읍니다. 하나님은 아내를 돕는 배필로 주셨읍니다. 아내는 남편의 종속물이 아닙니다. 아내는 남편과 대등한 위치에 있는 동역자 입니다. 그래서 남편은 주님께서 교회를 사랑하사 자신을 주심과 같이 아내를 사랑하라고 권면하십니다.

(엡5:25-27)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아내를 귀하게 여기고 주님이 교회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아내를 사랑하십시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함이라
남편이 아내를 지식을 따라 품에 안으며 귀하게 여겨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기도가 막히지 않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는 많은 기도제목들이 있읍니다.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해결 할 수 없는 일을 만나면 기도합니다. 그런데 드리는 기도가 막힐 수 도 있다고 말씀합니다. 만일 드리는 기도가 어떤 이유로 막혔다면 곧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가 올라 가지 못하면 아무리 간절하게 기도해도 응답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기도가 막힌 것입니다.

저의 예를 들면 아내와 크게 다투게 되면 일단 마음에는 평강이 없어지고 미움과 분노가 거주하게 됩니다. 이는 결코 주님의 마음이 아니라 사탄의 조종을 받는 악한 영이 내 안에서 역사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기도하기가 무척이나 힘이 듭니다.


어려운 일들이 해결이 되지 않는다면 기도가 막혔다고 생각을 하십시요. 그리고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를 살펴 보십시요. 아내와의 관계가 어떠한지를 살펴 보아야 합니다.

(민30:5) 그러나 그의 아버지가 그것을 듣는 날에 허락하지 아니하면 그의 서원과 결심한 서약을 이루지 못할 것이니 그의 아버지가 허락하지 아니하였은즉 여호와께서 사하시리라.
(민30:8) 그러나 그의 남편이 그것을 듣는 날에 허락하지 아니하면 그 서원과 결심하려고 경솔하게 입술로 말한 서약은 무효가 될 것이니 여호와께서 그 여자를 사하시리라


남편은 한 집안의 가장이며 아버지이며 머리입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이자 남편에게 귀한 권한을 주셨는데 곧 딸이나 아내가 하나님께 서원한 것을 무효화시킬 수 있는 권세를 주셨읍니다. 그만큼 남편은 권세를 갖고 있읍니다.

남편들이여 힘을 내십시요. 의기소침하지 마세요. 주저않지 마시고 일어나세요.
지난 날에도 있었지만 앞으로도 온갖 어려움들은 기다리고 있읍니다. 남편이 일어나야 온갖 어려움을 뚫고 나아길 수 있읍니다. 뚫고 나아갈 힘을 주님은 남편에게 주셨읍니다.

기도가 막히지 않기 위해서 아내를 지식을 따라 아내를 이해하며 동거하며 깨질까 염려하며 같은 은혜를 받을 동역자로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가정에 평강의 축복이 임한다면 드리는 기도는 막힘이 없이 공중의 권세를 뚫고 나아가 하늘 아버지의 보좌 앞에 상달됩니다. 그러면 남편의 기도는 응답을 받습니다. 기도의 응답을 받는 순간에 그 가정에는 주님께서 베푸시는 이해할 수 없는 기적들이 임합니다. 기적의 소유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합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한 해를 떠나 보내며 또 한 해를 맞이 하면서 가정의 중요성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었읍니다.
주님께서 각 가정을 맺어 주셨읍니다. 어떤 가정은 잘 세워지고 있지만 또 어떤 가정은 이기적이고 정욕적인 잘못된 선택으로 울타리가 거의 무너져 버린 가정이 있으며 이미 깨진 가정도 있으며 다시 소망을 품고 새로이 맺어진 가정들도 있읍니다.

한 가정이 잘 세워져야 주님의 약속된 축복이 흘러 나갑니다. 하지만 깨어지는 소리가 크게 들리며 울타리가 무너지고 있는 가정은 주님의 약속된 축복이 막혀 어렵고 버거운 삶을 살 수 밖에 없읍니다.

한 가정이 올바르게 세워지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아내와 남편이 마땅하게 지켜야할 규범을 주셨읍니다. 규범을 지키는 것이 축복의 비밀임을 마음 깊은 곳에 잘 간직하여 앞으로 다가올 새해에는 주님께서 베푸시는 놀라운 기적의 소유자들이 되어 주님을 더욱 깊이 사랑하며 주님의 뜻을 헤아리는 한 해가 되도록 은혜를 베푸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19년 12월 24일 화요일

바로 내 곁에 계시는 하나님

(신4:7)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그에게 기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 하심과 같이 그 신이 가까이 함을 얻은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


저는 얼마전에 성경을 읽다가 큰 은혜를 받았읍니다.
그전에는 제 눈에 뜨이지 않았던 말씀이었읍니다. 그동안 성경을 몇번이나 읽으면서도 그저 스쳐갔던 말씀이 그 날따라 갑자기 제 마음에 커다란 감동을 주었읍니다.

HE is near me whenever I pray to HIM.
하나님께서 제가 기도할 떄마다 저의 기도를 들으시고 바로 제 곁에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저는 매일 매일 주님께 기도를 드립니다.
하루를 시작하며 기도를 합니다. 차에 앉아 운전하기 전에 저의 영혼을 주님의 손에 올려 드린다고 기도합니다. 말씀을 보며 말씀의 은혜를 간구하는 기도를 합니다. 식사하기 전에 귀한 음식을 주셔서 감사드리며 기도를 합니다. 어떤 일을 하기 전에 저에게 지혜를 달라고 기도 합니다. 잠자리에 들어서 오늘을 지켜 주셔서 감사드리며 푹 자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저의 드리는 모든 기도가 주님의 뜻에 맞는 기도를 저는 드리지 못합니다. 만일 제가 주님의 뜻에 맞는 기도를 드렸다면 저의 모든 기도는 응답을 받았을겁니다. 하지만 저의 영혼과 육신의 연약함으로 아직도 저는 저의 소견대로 뜻을 이루어 달라는 청원기도를 드립니다. 즉 잘못된 기도를 하고 있을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주님의 뜻과는 상반된 기도를 하는 저를 인정하시며 바로 제 곁에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짧은 기도일지라도 바로 제 곁에서 저의 기도를 들으시며 함께 하신다고 약속을 하시니 너무 감사할 따름입니다.

시145편은 다윗의 찬송시입니다.
(시145:18-19)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 그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의 소원을 이루시며 또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사 구원하시리로다

여호와로부터 나의 마음에 합한 자라고 (행13:22; 삼상13:14) 불리운 다윗은 힘이 들고 온갖 어려움이 자신의 길을 가로막을 떄마다 진실된 마음으로 여호와의 얼굴을 구하며 간구하였읍니다. 기적처럼 자신을 지키시고 보호하고 섭리하시는 여호와의 손길을 다윗은 몇번이나 체험하였기에 베푸신 은혜에 감사하며 찬양할 수 있었읍니다.

저 또한 지금까지의 짧지 않은 인생 길에서 주님의 보호하심과 섭리하심이 있었기에 지금 제가 설 수 있었읍니다. 저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이 되지 않는 인생의 위기가 찿아 왔을 때에 주님께 기도하였읍니다. 비록 그 기도가 매우 짧은 기도였을지라도 주님께서는 저의 진실된 마음을 기다리셨읍니다. 진실되고 절실한 마음으로 드리는 저의 기도를 들으시고 주님의 방법으로 주님의 때에 섭리하셨음을 지금은 조금 이해를 합니다.

주님께 간구하는 모든 자, 믿음이 큰 자나 믿음이 적은 자나, 부한 자나 가난한 자나, 지위가 높은 자나 낮은 위치에 있는 자나, 진실된 마음으로 드리는 간구를 주님은 바로 곁에서 들으십니다.

드리는 기도가 주님의 뜻에 맞지 않는 기도를 했을 때에도 주님께서는 들으십니다. 혹 잘못된 기도를 한다고 해서 걱정하지 마세요.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잘못된 간구를 하며 악한 행실을 하는 우리를 대신하여 기도를 하십니다.

(롬8:26)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육신의 연약함을 갖고 있기에 주님의 뜻을 온전히 간구하지 못합니다. 주님의 뜻과는 전혀 다른 제 뜻을 이루어 달라고 기도하는 경우가 참으로 많이 있읍니다. 잘못된 기도를 할지라도 내 안에 계신 성령께서 탄식하시며 주님께 신원을 하십니다.


다윗이 체험한 주님을 만나세요.
다윗은 온갖 어려움을 겪었읍니다.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위기도 몇번이나 있었읍니다. 여자와의 잘못된 관계로 인하여 자식을 잃었으며 왕궁에서 쫓겨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방황해야 하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읍니다. 자신의 생명을 해치려는 어려움이나 혹은 자신의 어리석음으로 인한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다윗은 여호와의 얼굴을 구하였읍니다.

주님을 만나는 길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안에 있으면 세상사람이 기적이라 부르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기적의 체험이 다른 이들에게만 나타난 체험이라고 생각을 해서 믿어지지 않습니까. 주님께서 행하시는 이해가 가지 않는 놀라운 기적의 경험이 다른 이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바로 당신에게도 주님의 기적은 임하십니다. 언제 어디서나 진실된 마음으로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간구할 때에 주님은 바로 곁에서 바라 보시며 기적을 행하십니다.


(약4:8) 여호와를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주님을 가까이 하십시요. 주님의 영이신 성령께서는 자신을 반기지 않는 자에게는 가까이 하지 않으시며, 가까이하고자 하는 자에게 가까이 하십니다. 성령께서 제 안에서 역사하지 않으시면 주님의 기적은 우리에게 임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자신을 가까이 하라고 권면을 하십니다. 주님을 가까이 하라는 말씀은 우리의 삶을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어떤 삶을 사시기를 원하십니까? 주님께서 베푸시는 기적을 체험하시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주님의 도움이 없이 자신의 힘으로 이 땅의 온갖 어려움을 헤쳐 나가지만 결국은 실패하는 인생을 살기를 원하십니까? 그 선택은 바로 우리의 몫입니다.


너무나 어려운 일을 당하셨읍니까?
주님께서는 과연 어디에 계십니까?
주님께서 저와 함께 계시지 않은듯 생각을 하십니까?

가만히 주님께 기도하세요.
매우 짧은 기도일지라도 진실함이 담겨 있는 기도를 하는 바로 그 자리에 주님께서는 함께 계시며 기도를 들으십니다.

주님을 가까이 하도록 하세요. 주님의 역사는 바로 저에게도 임합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놀라운 일들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베푸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드리며 영광을 올려 드리세요.



하늘에 계신 아버지

저희의 삶을 주관하시고 섭리하시는 주님.
오늘도 저는 주님께 기도를 드립니다. 바로 곁에 계시며 저의 기도를 들으시는 주님.

저의 소견대로 드리는 잘못된 기도를 할 때도 들으시고 저를 위로하시는 고마우신 주님.
주님의 뜻대로 드리는 기도를 들으실 떄는 기뻐하시며 품에 안으시는 주님.

그리고 무엇보다 연약한 저를 위하여 탄식하시며 저를 대변하시는 성령님의 은혜가 늘 함께 하시기에 저는 참으로 큰 은혜를 받은 축복의 종입니다.

주님을 가까이 하며 기도하는 저와 함께 하시며 저를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주님의 은혜에 고맙고 감사를 드리며 모든 영광을 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2019년 11월 17일 일요일

허락하지 않으신 기업

(신2:4-7) 너는 또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세일에 거주하는 너희 동족 에서의 자손이 사는 지역으로 지날진대 그들이 너희를 두려워하리니 너희는 스스로 깊이 삼가고 그들과 다투지 말라. 그들의 땅은 한 발자국도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세일 산을 에서에게 기업으로 주었음이라. 너희는 돈으로 그들에게 양식을 사서 먹고 돈으로 그들에게서 물을 사서 마시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시고 네가 이 큰 광야에 두루 다님을 알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을 너와 함께 하셨으므로 네게 부족함이 없었느니라


여호와께서는 광야길을 가는 이스라엘을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지키시며 인도하셨읍니다. 여호와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으로 이스라엘은 앞을 가로막는 적들을 떄로는 실패할 때도 있었지만 결국 물리치고 앞을 향하여 나아갈 수 있었읍니다. 여호와의 도우심을 받는 이스라엘을 가로막는 적들은 모두 산산히 부서졌읍니다. 이스라엘은 가로막는 모든 적들을 진멸하고 차지할 수 있었지만,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이 취하지 말아야 할 대상들을 말씀하십니다. 에서의 후손인 에돔 족속, 롯의 후손인 모압 족속과 암몬 족속의 땅을 허락하시지 않으셨읍니다. 비록 이들 족속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지만 그들의 땅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허락하시지 않으셨읍니다. 이들 족속들이 앞을 향하여 가는 이스라엘을 가로막았지만 취하도록 허락하지 않으셨으며 조심하여 길을 돌아가도록 명하셨읍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만일 먹을 것 마실 것이 필요하면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사서 먹고 마시라고 하십니다. 이에 이스라엘은 그들보다 연약한 그들을 힘으로 제압하고 진멸할 수 있었지만, 그들과 싸우지 않고 해치지 않고 길을 우회하여 돌아갔읍니다.

여호와께서 허락하신 기업과 허락하시지 않은 기업이 있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보이는 모든 것을 주시지 않으셨읍니다. 그런데 마치 주변의 것들이 내 것처럼 보여 착각 속에서 취하려고 합니다. 특히 상대가 자신보다 연약해 보이거나 실제로 약한 것을 알면 업신여기며 힘으로 제압하여 차지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허락되지 않은 것을 차지하려다가 큰 어려움을 겪으며 심지어는 목숨을 잃기도 합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차지하려고 하지 마십시요.

여호와께서 허락하시지 않은 것을 취하려 했던 예를 보겠읍니다.

(민22:12)하나님이 발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 그들은 복을 받은 자들이니라.

발락 왕은 영험이 있다고 알려진 발람 선지자를 초청을 해서 이스라엘을 저주하라고 합니다. 저주를 하면 부귀와 영광을 주겠노라고 약속을 합니다. 그런데 발람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으심을 알고 있었읍니다. 그런데도 발람은 이스라엘을 저주하여 그 대가로 부귀와 영광을 차지하려고 이스라엘을 세번이나 저주하려고 하였지만 여호와께서는 그의 입을 묶으셔서 저주 대신에 축복의 말을 선포하도록 하셨읍니다. 이 사건 후에 발람은 고향을 떠나 유리하다가 민31:8에 "또 브올의 아들 발람을 칼로 죽였더라" 기록된 바와 같이 여호와께서 허락하시지 않은 것을 가지려고 애를 썻던 발람은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발람이 주님의 자녀들을 저주하려고 했지만 주님께서는 발람의 입을 막으셨다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흡족하게 들지 않고 탐탁하게 보여도 주님의 자녀들을 저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마음껏 퍼부은 저주가 만일 내게로 되돌아 오면 큰 일입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천국복음을 전하라고 내보시며 "(마10:12-13)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하지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하셨읍니다. 만일 내가 빈 평안을 받을 만한 사람이면 그에게는 평안이 임합니다. 그렇지 않고 평안을 받을 만한 그릇이 않되면 그를 위하여 빈 평안이 내게 임합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퍼부운 저주가 그 사람에게 임하지 않고 내게로 다시 되돌아 올 수 있으니 주님의 자녀에게 저주를 하지 마십시요. 주님의 자녀는 주님께서 다스리십니다.


아간의 예를 보겠읍니다.
(수7:21) 내가 노략한 물건 중에 시날 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그 무게가 오십 세겔 되는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 가졌나이다. 보소서 이제 그 물건들은 내 장막 가운데 땅 속에 감추었는데 은은 그 밑에 있나이다.

아간은 여호와께서 허락하시지 않은 전리품이 탐이 나서 취하고 자신의 장막 안에 파묻었읍니다. 그 일로 인해 이스라엘은 아이를 공격하다 몇몇이 죽어 실패합니다. 이에 이스라엘의 마음이 녹아 물과 같이 됩니다. 여호와께서는 이 일을 추궁하십니다. 아무도 모르게 감추었지만 여호와께서 간섭하심으로 아간의 범죄는 낱낱이 드러납니다. 진노하신 여호와께서는 아간과 그의 자녀들을 돌로 치게 하시고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불사르게 하십니다. 그 위에 돌무더기를 크게 쌓고 그 곳의 이름을 '아골 골짜기'라 부릅니다. 여호와께서 허락하신 것을 취한 아간은 자신 뿐 아니라 자신의 가족과 모든 소유물까지 여호와의 저주의 심판을 받아 잃었읍니다.

'아골 골짜기'는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은 저주의 장소입니다. 여호와께서 허락하시지 않은 것을 취했을때 그 곳은 저주의 장소가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남의 것이 더 좋아 보여서 취하려고 합니다. 그들에게도 소중한 그들의 것을 차지하려고 합니다. 세상의 부귀와 영광과 가치는 실로 헛된 것입니다. 목숨을 잃으면 그 어느 것 하나도 가지고 갈 수도 없음을 알면서도 가진 자는 더 많이 가지려고 하며, 높이 올라 갈수록 더 높이 올라 가려고 아둥바둥거립니다. 그 길을 여호와께서 허락하시지 않으셨는데도 무리하며 취하려고 합니다. 특히 나보다 연약해 보이는 자들을 업신여기며 그들의 것을 빼앗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여 애지중지 모았지만 내 것이라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정한 시간이 이르면 공중에 티클들이 날리듯 없어져 버리며 자신도 돌이킬 수 없는 아골 골짜기에 있게 됩니다.


반대로 믿음의 조상 이삭은 자신에게 허락하지 않은 기업임을 깨닫고 포기하였읍니다.
(창26:22) 이삭이 거기서 옯겨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다투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르호봇이라 하여 이르되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아브라함의 모든 것을 이어받은 이삭은 우물을 팝니다. 그 당시 우물은 매우 중요한 삶의 원천이었으며 축복의 근원이었읍니다. 수많은 목축과 사람의 생명선인 끊치지 않는 풍부한 물의 근원인 우물은 매우 중요한 기업의 중심이었읍니다. 우물을 파려면 그곳의 땅을 알아야 합니다. 어느 곳에 물이 흐르는지 짐작을 해서 땅을 깊이 파 물길을 찿아 내야 합니다. 이삭은 우물을 파는 것에 대한 지식이 있었읍니다. 그래서 공을 들여 이삭이 우물들을 팠더니 블레셋 사람들이 자신의 것이라며 다툽니다. 이삭은 자신이 판 우물을 달라며 다투는 블레셋과 더 이상 싸우지 않고 내어 줍니다. 많은 종들과 가솔을 거느린 이삭은 마음을 먹으면 블레셋과 타투어 자신의 권리를 지킬 수도 있었지만 이삭은 블레셋과 다투지 않고 우물을 내어 줍니다.

어찌보면 열심히 노력하여 삶의 중요한 생명줄인 우물을 팠지만 다른 이가 달라고 하자 순순히 내어 준 이삭이 무척이나 어리석게 보일지도 모르겠읍니다. 하지만 이삭은 그 땅은 여호와께서 자신에게 허락하지 않은 기업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리고나서 다른 곳에서 우물을 팠을 때 더 이상 블레셋과 시비가 없자 여호와께서 자신에게 주신 기업임을 알고 그곳의 이름을 '르호봇'이라 하며 기뻐합니다.

주님의 자녀는 나에게 허락되지 않은 기업에 욕심을 내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너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을 탐내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보다 연약한 상대를 함부로 대하지 말고 설령 그의 것이 내게 좋게 보여도 그것을 억지로 취하지 말고 돌아가라고 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

이 땅은 끊임없이 내 것이 아닌데도 좋아보여서 내 것으로 만들려는 전쟁의 연속입니다. 나에게 허락하신 기업이 아닌데도 눈독을 들이고 차지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읍니다.

이는 우리의 마음 가운데 탐욕이 있기 때문입니다. 탐욕은 주님께서 주신 마음이 아닙니다.
먹음직하고 보암직한 것이 내것이라 생각되어 탐내지 않도록 저의 마음을 주장하옵소서.
주님께서 저의 마음과 생각을 주관하옵소서.

제게 허락하시지 않은것을 취하면 저에게 어려움이 다가올 수도 있음을 경계하게 하옵소서.
십계명에서 이르신 대로 나의 이웃의 것을 탐하지 말라고 하셨읍니다. 이를 지키기 위해서 주님을 사랑하며 그리고 저와 저의 이웃을 제 몸처럼 아끼며 사랑하라 하셨읍니다. 정결한 마음으로 사랑할 수 있도록 성령이여 제 안에서 운행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19년 10월 27일 일요일

독사의 자식들아

(마12:33-37) 나무도 좋고 열매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열매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열매로 나무를 아느니라.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방으리라.


욕.
우리는 어려서부터 욕을 배우며 살아 왔읍니다.
자신의 불만족을 표출하는데 욕을 사용합니다. 차마 입에 담기도 험한 욕들도 많이 있읍니다. 인격을 무시하며 함부러 내밷는 욕으로 상대방은 깊은 상처를 입기도 합니다. 정신학적으로 건강한 욕은 자신의 stress를 푸는 좋은 처방제라고도 합니다. 하지만 되도록이면 욕을 먹지 않고 욕을 하지 않는 인생이었으면 합니다.

욕은 우리 인간들만이 쓰는 전유물이 아닙니다. 주님도 욕을 하십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욕을 하신다는 것은 심각한 상태임을 말해 줍니다. 주님께서는 다음의 상황에서 욕을 하셨읍니다.

하나는 마23:33에서 주님은 불법을 행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욕과 저주를 하셨읍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불쌍한 영혼들을 구하는 도구로 사용되어지는 목사가 아닌 자신의 이익을 삼키는 종교지도자로서의 목사들에게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하시며 욕을 하셨읍니다. 그것도 모자라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저주하셨읍니다. 목사들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 지를 잘 살펴 보아야 합니다. 만일 자신이 땅에 속한 이익을 취하려고 주님의 이름을 이용하고 있다면 분명 주님께서는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하시며 욕을 하실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본문에서 악한 마음이 담긴 악한 말을 하는 자를 주님께서는 "독사의 자식들아" 하시며 욕을 하십니다. 악한 말을 하는 자들에게 경고를 하십니다.


말은 나의 뜻을 나타내며 상대방과 교통합니다. 선한 말이 있으며 악한 말이 있읍니다. 때로는 포장해서 말을 하기도 하지만, 말은 나의 내면에 담긴 것을 담아냅니다. 우리는 매일 매일 누군가와 혹은 자신에게 혹은 주님께 말을 합니다.

아름다운 말로 상대방의 기분을 좋게 만듭니다.
함부로 말을 하여 듣는 이가 마음에 상처를 입습니다.
남을 정죄하는 말로 내가 그들보다 형편이 좋다는 착가을 하기도 합니다.
듣기에 거북한 말로 상황을 엉망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기도로 나의 사정을 주님께 고하며 주님과 대화를 나누기도 합니다.

말은 우리와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죽기 전까지 우리의 삶을 좌지우지하는 원동력이기도 하지만 나와 남을 해치는 양날을 가진 날카로운 칼이기도 합니다.

야고보서 3:6에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을 수레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또한 8절에는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하시며 우리가 하는 말을 경계하라고 하십니다.

말은 나를 살리기도 하지만 지옥으로 인도하기도 합니다.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우리는 어떻게 구분합니까?
대부분의 사람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첫인상을 통하여 대강 짐작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본 첫인상은 잘못된 판단의 경우가 참으로 많이 있읍니다. 좋은 사람이라고 봤는데 나중에 보니 정말로 형편이 없는 사람도 있읍니다. 반대로 좋지 않게 봤는데 후에 보니 너무나 좋은 사람임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주님은 사람을 볼 때 좋은 열매를 맺었는지 나쁜 열매를 맺었는지 그 열매를 보라고 하십니다. 즉흥적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말고 충분한 시간을 통하여 그 사람이 맺는 열매를 보라고 하십니다. 좋은 열매를 맺었는지 나쁜 열매를 맺었는지를 알 수 있는 방법으로 그 사람의 말을 보라고 하십니다.

사람은 가식적이며 위선적인 말로 자신을 포장할 수 있읍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자신 안에 있는 말을 내밷습니다.
항상 함부로 말을 하십니까. 그렇다면 당신의 안은 정돈되지 않은 상태일것입니다.
항상 더러운 말을 입에 달고 삽니까. 그렇다면 당신의 안은 냄새나며 더러울 것입니다.
입만 뻥끗하면 남을 탓하며 정죄하십니까. 주님께서는 당신의 회개를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형편은 어렵지만 기쁜 마음으로 감사하다고 하십니까. 주님의 기쁨이 임할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연의 아름다움를 고백합니까. 당신의 마음 또한 아름다울 것입니다.


악한 열매는 땅의 것이며 정욕으로부터 오며 귀신의 것입니다. 하지만 선한 열매는 위로부터 내려 옵니다.
(약3:14-27)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려 거짓말하지 말라.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시기와 다툼의 마음은 누가 줍니까. 곧 내 마음의 조그만 틈에서 역사하는 악한 영이 심어준 것입니다. 악한 영은 내 안에 정욕의 생각을 품게 합니다. 분리의 영이 임하게 되면 혼란과 다툼이 있읍니다. 주님을 믿는 가정에 분리의 영이 임하게 되면 정욕과 혼란과 다툼이 있읍니다. 이를 지혜롭게 대처하지 못하면 그 가정은 깨어집니다. 악한 영은 우리가 나쁜 열매를 맺게 합니다.

(마7: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보다 중요한 것은 나쁜 열매를 맺으면 찍혀 불에 던져진다는 것입니다. 불에 던져지는 곳은 생각하기에도 끔찍한 결코 가지 말아야 할 장소인 지옥입니다. 나쁜 열매를 맺으면 지옥 불에 던져지게 됩니다. 나쁜 열매를 맺는 자들은 더럽고 냄새나는 악한 말을 합니다.

반대로 선한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사이며 선물입니다.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선한 열매의 특징은 성결하며 화평하며 관용이 있으며 양순하며 긍휼과 편견과 거짓이 없음니다. 주님을 믿는 이들은 선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선한 열매를 맺는 자들은 그들의 입에서 은혜의 말을 합니다. 한마디를 해도 상대방의 용기를 북돋아주며 주위를 환하게 평안의 길로 인도합니다.


(눅6:45)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내가 선한 열매를 맺고 있는지 아니면 악한 열매를 맺고 있는지를 알려면 내가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십시요. 내 마음에 쌓아둔 것이 입을 통하여 나오는 말은 중요합니다. 내 마음에 담긴 말을 합니다. 한번 내 뱉은 말은 주어 담을 수도 없읍니다. 사랑과 은혜와 기쁨과 감사의 말을 합니까 아니면 저주의 말을 하며 정죄하며 험담을 하며 더러운 말을 합니까.

악한 말을 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악한 말은 상대방의 마음을 상하게 합니다.
악한 말은 나 자신을 해칩니다.
악한 말은 나를 육신적으로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병들게 합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나의 악한 말을 기뻐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악한 말로 나는 지옥불에 던져 질 수도 있음을 마음에 새겨 두어야 합니다.

남을 해치며 나를 상하게 하는 악한 말을 하였다면 주님께서 "독사의 자식아" 하시며 욕을 하실지도 모릅니다.
사람이 하는 욕을 들을 수는 있지만 결코 주님께서 하시는 욕을 듣지 않도록 늘 깨어 근신하며 입에 재갈을 물려 깨끗히 걸러 낸 은혜로운 말을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욕을 듣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만일 악한 말을 주저없이 하셨다면 회개하셔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육신적으로 건강하게 살라고 악한 말을 하지 말라고 명하십니다.
늘 마음이 선한 마음을 갖도록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하셔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이 내 안에서 살아 역사하여야 합니다.
늘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하며 수시로 주님께 나의 사정을 아뢰이십시요.
긍휼과 자비의 주님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성령께서 저를 도우실것입니다.

우리는 한 입으로 찬양과 감사를 하며 한편으로는 저주와 악한 말을 합니다. 결코 허공에서 사라지는 빈 말은 없읍니다. 우리는 우리가 한 모든 말에 책임이 있읍니다. 나를 살리며 또한 나의 가까운 자들에게 살리는 말을 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의 남은 짦은 시간에 내 안에 주님의 선함이 충만함으로 선한 말을 되도록이면 많이 풍성하게 쓰시는 축복이 임하기를 간구합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창조하실때에 우리에게 하나님을 찬양하며 감사를 표현할 수 있도록 입과 혀를 주셨읍니다.
그렇지만 악이 저희 안에 공존함으로 저희는 악의 모습을 닮아 주님께 감사하며 은혜를 표현해야 하는 저희의 입술로 더러운 말을 하며 저를 어둠으로 끌어 내리려 합니다.

오호라 저는 곤고한 자입니다. 주님의 긍휼과 자비로 어쩔 수 없이 악한 열매를 맺게하는 저의 입술을 지켜 주옵소서. 선한 열매를 쌓을 수 있도록 성령이여 저를 도와주시고 인도하옵소서.

늘 말씀 안에 거하기를 간구합니다. 말씀의 능력으로 저를 깨끗게 하사 저의 입술을 통하여 주님을 찬양하며 저 뿐아니라 저와 가까운 가족들과 이웃들을 살리는 선한 말을 하는 주님의 선한 능력이 임한 도구로 저를 사용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19년 10월 6일 일요일

얼굴을 가린 수건

(고후3:14-18)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는니라.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수건을 모세의 율법을 종교적으로 형식적으로 따르며 예수님을 부인하는 유대인들의 완고한 마음이라 표현을 합니다. 유대인의 완고한 마음은 지금도 예수님을 부인하며 받아들이지 못하게합니다.

또한 이 수건은 우리가 갖고 있는 완고한 마음 즉 종교적인 행위, 가식, 어리석은 고집으로 말할 수 있읍니다. 나의 완악한 마음은 주님 앞으로 나아감에 방해가 되며 걸림돌이 되어 주님과 온전한 교제를 나누지 못하게 합니다. 주님 앞으로 나아감에 방해가 되는 완고함이 주님 안에 온전히 거하게 되면 자유롭게 되어 주님의 영광에 이르게 되라고 권면을 합니다.

수건으로 덮혀 있으면 우리는 가식적으로 나를 나타내려고 합니다. 또한 사람들 특히 교인들을 종교적인 행위의 잣대로 평가를 합니다.


완고한 마음
(14)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사도 바울은 본문의 말씀에서 모세의 율법을 고집하여 예수님을 받아 들이지 못하는 완고한 마음을 수건으로 비유합니다. 성경을 통해서 주님의 영광을 보아야 하는데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구약 성경의 참된 의미를 모르고 있기에 주님의 영광을 볼 수가 없었읍니다.

수건은 우리의 완고한 마음으로 인한 위선적인 모습 혹은 종교적인 행위를 나타내며 이러한 가식적인 행위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아가는데 방해가 되어 주님의 영광을 볼 수 없게 합니다. 나의 완고한 마음로 인해 덮힌 수건은 나를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을 가로 막아 나에게 비추시는 주님의 영광을 볼 수 없게 합니다.

“완고”는 자기중심적인 뜻을 갖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마음이 둔하다”,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완악하다”의 뜻으로 사용되었읍니다.

내 자아가 강하기 때문에 나의 생각과 지식이 나를 지배합니다. 내가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이 최선이라 믿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잣대를 용납할 수 없읍니다. 주 안에서 자유하라 하셨지만 나의 어리석은 완고함과 가식은 나를 더욱 나 중심적으로 옭매며 속박합니다.


완고함으로 망한 자들이 있읍니다.

(출11:10) 모세와 아론이 이 모든 기적을 바로 앞에서 행하였으나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 자손을 그 나라에서 보내지 아니하였더라.

여호와께서 여러 재앙으로 징조를 보이셨지만 완악한 바로왕은 이스라엘을 보내지 않다가 결국은 자신의 첫아들을 포함한 모든 백성의 첫아들과 모든 가축의 첫 태생을 잃고서야 비로서 이스라엘을 내보냈읍니다. 바로와 애굽은 완악함으로 너무나 귀하고 소중한 것들을 잃었읍니다.

(삼상25:3) 그 사람의 이름은 나발이요 그의 아내의 이름은 아비가일이라. 그 여자는 총명하고 용모가 아름다우나 남자는 완고하고 행실이 악하며
(삼상25:37-38) 아침에 나발이 포도주에서 깬 후에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 일을 말하매 그가 낙담하여 몸이 돌과 같이 되었더니 한 열흘 후에 여호와께서 나발을 치시매 그가 죽으니라


완고한 나발은 먹을 것을 주어 자신과 함께 한 이들을 도와달라는 다윗을 알아 보지 못하고 돕지를 않습니다. 이것을 안 그의 아내인 아비가일은 일이 잘못되었을 알고 자신의 가족들이 살기 위해서 급히 먹을 것을 준비하고 다윗에게 나아가 용서를 구합니다. 다윗은 아비가일에게 만일 급히 와서 용서를 구하지 않았다면 한 사람도 남겨 두지 않았을것이라 말합니다. 술이 깬 후에 그것을 안 나발은 너무나 놀라 상심하여 근심하다 결국 죽게 됩니다.

완고함은 결국은 나를 해치며 망하게 합니다. 주 앞에 나아가기를 원하면서도 완고하다면 수건으로 가려져 있기 때문에 결코 주님에게서 나오는 영광의 빛을 볼 수 없게 됩니다. 완고함으로부터 벗어나서 부드러운 마음을 가지시기를 축원드립니다.


(행28:27) 이 백성들의 마음이 우둔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오면 내가 고쳐 줄까 함이라.

(요 12:40)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였음이더라.


성경에서 마음이 완고한 자를 우둔하다고 합니다. 곧 완고한 자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마음이 완고하여 어리석은 자는 주님의 영광을 볼 수가 없읍니다. 나의 완고함으로 내 마음이 둔하여져 있으면 들을 귀는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어 하나님을 깨달아 알을 수 없고, 볼 수 있는 눈은 있지만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기이한 일들을 볼 수 없게 됩니다. 아무리 마음으로 하나님을 깨닫기 원하지만 나의 완고함과 말씀에 대한 둔함으로 인해 주님을 통하여 비쳐 주시는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볼 수 없어 하나님께서 나를 고쳐주시는 긍휼의 은혜가 임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죄희의 잘못됨을 고쳐주셔야 합니다. 그렇지만 저희가 어리석어 완고하다면 주님으로부터 고침을 받을 수가 없읍니다

나의 어리석은 완고함으로 인한 수건이 나를 덥고 있는 한 나는 주님의 영광 앞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수건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영광의 빛을 가로막습니다. 주님의 빛에는 생명이 있고 자유함이 있는데, 영광의 빛이 수건으로 가리워져 있음으로 우리는 참된 생명, 참된 자유를 누릴 수가 없습니다.


주 안에 있는 자유

(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마음이 어리석어 완고한 자는 고침을 받아야 합니다. 계속해서 완고하다면 결국 망합니다. 망하기 전에 고침을 받아야 삽니다. 살기 위해서는 주님의 은혜가 임해야합니다. 육신의 마지막이 이르기전에 마음의 완고함을 치유받으십시요.

주님 앞에 나아감에 방해가 되는 어리석은 완고함은 주님 안에 온전하게 거하게 되면 자유가 임합니다. 생명을 회복하게 하는 주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은혜를 입기를 원한다면 우선 나의 어리석은 완고함을 내버려야 합니다.

16절에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말씀하시듯이 우리의 완고함을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고 주 앞에 신실한 마음으로 다가가면 나를 덮고 있던 수건은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벗겨져서 주님의 영광 앞에 나아가게 합니다.

18절의 말씀과 같이 우리를 덮고 있던 수건이 벗겨 진다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우리의 본성이 빛이신 주님의 형상을 닮아 변하여 영광에 이르게 됩니다.

(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18) And we all, who with unveiled face contemplate the Lord’s glory, are being transformed into his image with ever-increasing glory, which comes from the Lord, who is the Spirit.


18절에 “주의 영광을 보매”에서 “보매”는 NIV에서 “contemplate”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이 단어의 뜻은 “look thoughtfully for a long time”입니다. 즉 주님을 오랫동안 깊게 생각하며 쳐다본다는 뜻입니다.

나를 덮고 있던 수건이 벗겨지기를 원하십니까. 어리석은 완고함이 벗어지기를 원하십니까.
오래동안 주님만을 생각하며 바라보며 깊은 교제를 나누는 것을 배우십시요. 주님과의 깊은 교제를 계속해서 나누다보면 어느듯 나를 덮고 있었던 나의 교만과 가식과 완고함은 벗겨져 있어 주님의 영광의 회복의 은혜가 임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영과 육은 변화하여 하나님의 형상대로 회복하여 영광의 몸을 입게 됩니다.

우리는 흔히 은혜받은 사람의 얼굴에서 광채가 날 때가 있음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안에 있어 하나님과 교제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이 그 얼굴에 나타나게 됩니다. 저 뿐 아니라 주님을 믿는 우리 모든 성도들의 얼굴게서 주님의 영광의 빛이 나타나기를 간구합니다.

나를 덮고 있는 가식과 완고함의 수건을 벗어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주님을 통하여 비추시는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 주님의 영광의 빛에는 생명이 있고 자유함이 있는데, 이 영광의 빛이 수건으로 가리워져서 있는 한 우리는 참된 생명과 참된 자유를 누릴 수가 없게 됩니다.


(사 6:9)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완고함은 우리를 망하게 합니다.
저의 어리석은 완고함은 고쳐주시는 주님의 도움을 받지 못하게 막습니다.

혹 앞뒤로 꽉 막혀 있읍니까. 병으로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읍니까. 더 이상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까.
혹 마음이 완고한지 살펴보십시요. 어리석으며 죄악된 완고함을 내려 놓으시기를 간구합니다. 주님의 은혜로 완고함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완고함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어 주님께서 고쳐주시는 은혜를 입으세요. 오직 그것만이 살 길 입니다.

완고함으로 벗어나 주님의 영광을 보고 들으며 주님을 알아가는 복된 인생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

참으로 저는 가식적이며 마음이 완고합니다. 저에게는 저를 감싸며 나타내려는 헛된 가식이 있읍니다. 또한 사람들을 종교적인 잣대로 판단하려고 합니다. 저의 마음을 덮고 있는 수건입니다.

저와 주님의 영광의 빛을 가로막는 수건을 벗어 버리기를 원합니다.
주의 영광의 빛 가운데 거하기를 원합니다.
날마다 영광의 주님의 형상을 닮아가기를 소원합니다.
저를 덮고 있는 이 쓸데 없는 수건을 내어 버리게 하옵소서.
나의 못된 자아와 잘못된 기준과 나의 가식으로 저울질하는 저의 완고함과 우둔함을 내려 놓기를 원합니다. 가식적이며 어리석은 완고한 나 중심적인 것들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데 전혀 필요가 없고 무거운 짐이 될 뿐입니다. 저의 어리석은 완고함을 벗어 버리고 자유롭게 되어 주님께서 고쳐 주시는 은혜가 임하기를 간구합니다.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
저를 기뻐하시며 기다리고 계시는 아버지 앞에 나아가 영광의 빛 가운데 거하기를 원합니다.
주님은 이 모든 은혜를 이미 저에게 베풀어 주셨읍니다.
주님 저를 도와주소서. 저를 덮고 있는 이 수건을 벗어 버리기를 원합니다.
주의 능력이 제게 임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19년 9월 15일 일요일

로뎀 나무 아래에서

(열왕기상19:3-8) 그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 곳에 머물게 하고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서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않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 자더니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여호와의 천사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 먹으라 네게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음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엘리야는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It is enough)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라고 절망 가운데서 말합니다. 우리는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을 때 혹은 더 이상 무엇을 할 수 없어 한계에 다다랐을 때 'It's enough'라 말합니다.

모든 소망을 잃어 버렸을때 사람은 일어설 힘도 없이 좌절하고 절망합니다.

앞이 가로막힐 때 극심한 절망 가운데 거할 때가 있읍니다.
도무지 헤쳐 나갈 길이 없어 절망하여 산다는 것에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해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끊습니다.
불치의 병에 걸려 죽을 날이 얼마남지 않았음에 절망합니다.
가진 모든 것을 잃어 버리고 앞으로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하나 앞이 캄캄하며 절망합니다.
내가 그토록 원하던 것을 바로 내 눈 앞에서 빼았겼을 때 절망합니다.
사랑하는 이가 나로부터 떠났음을 알고 세상이 꺼진듯이 절망합니다.
나의 명예와 이름이 끝없는 나락에 빠져 세상으로부터 손각락 질을 받을 때 좌절하며 절망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이가 어려움에 처했지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함을 보며 절망합니다.

절망은 우리가 극복을 해야 합니다. 절망 가운데 있다면 사람은 침체됩니다. 하루빨리 절망의 자리에서 나와야 합니다.

엘리야는 로뎀 나무 아래에서 차라리 죽기를 원하며 일어설 힘도 없는 절망을 경험합니다. 너무나 실의에 빠져 일어설 힘도 남아 있지 않는 모든 것을 체념한 상태가 되었읍니다. 그런 절망 가운데 있는 엘리야를 여호와는 보살피시며 다시 일어서게 하십니다. 로뎀 나무 아래에서 죽기를 바랐던 엘리야는 주님의 손길로 쉼을 얻고 기력을 회복하고 소망을 얻고 다시 광야 길을 갈 수 있었읍니다.

로뎀 나무 아래에서 주님의 손길을 만나십시요.
엘리야가 로뎀 나무 아래에서 어떻게 절망을 극복하고 새소망을 품게 되었는지 말씀을 보겠읍니다.


영과 육이 소진

(왕상17:1)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말하되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엘리야의 간구대로 사마리아 땅에 수년동안 비가 오지 않습니다. 기근이 심하자 비를 간절하게 원하는 아합 왕을 만난 엘리야는 아합에게 바알의 선지자 사백오십명과 이스라엘 자손들을 갈멜산에 모이게 하고 자신이 섬기는 여호와와 바알신과 비가 내리도록 겨루어 보자고 합니다. 그러면서 '언제까지 머뭇머뭇거리며 이방신을 섬기겠느냐' 이스라엘 자손에게 묻습니다.

(왕상18:21)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

엘리야는 사백오십명의 바알의 선지자들에게 서로의 예물을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불을 붙이지 않고 준비하여 간구할 때 불로 응답하는 신이 곧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이에 백성들이 옳은 말이라고 대답합니다.

사백오십의 바알 선지자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자신의 몸에 피가 나도록 상하기까지 바알의 이름을 미친듯이 부르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읍니다. 이에 엘리야는 송아지의 각을 떠서 나무 위에 올려 놓고 물을 세 번 붇게 하여 물로 흥건하게 합니다. 그리고 여호와께 간구합니다. 이에 여호와께서는 불을 내려서 물로 흥건한 나무와 번제물을 태웁니다. 이것을 본 백성들은 '여호와 그는 하나님'입니다 고백을 합니다. 그리고 바알의 모든 선지자들을 죽입니다. 그리고 그토록 원했던 큰 비가 내립니다.

엘리야가 바알의 선지자들을 죽였다는 소식을 들은 이세벨은 엘리야를 반드시 죽이겠다고 선언을 합니다. 엘리야는 놀라운 여호와의 임재를 경험하였지만 아합과 이세벨이 자신의 목숨을 위협하자 브엘세바로 도망을 갑니다. 그리고 광야로 들어가 로뎀 나무 아래에서 엘리야는 극심한 절망에 빠집니다. 너무나 지쳐서 일어설 기력도 없읍니다. 차라리 자신의 생명을 거두어달라고 합니다.

엘리야는 큰 선지자입니다. 바로 얼마 전에는 사르밧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렸읍니다. 그리고 수년동안 비가 오지 않음을 바알의 선지자와 겨루어서 여호와의 불이 내리는 놀라운 일도 경험합니다. 그런 그가 아합과 이세벨이 자신을 죽이겠다고 하자 자신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다가 탈진하여 극심한 절망과 좌절을 경험합니다.

여호와의 종으로서 여호와의 음성을 듣고 쓰임을 받은 엘리야 이지만 생명을 위협받을때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에 절망에 휩싸입니다. 엘리야도 그런데 하물며 그보다 믿음도 너무나 적고 연약한 우리들은 얼마나 더 많은 경우 극심한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 거리겠읍니까.


어찌할 수 없는 절망 가운데 있읍니까? 그래도 형편은 욥보다 훨씬 나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녀들과 재물과 건강 이 모든 것을 순식간에 잃어버린 욥은 죽기를 바라며 이렇게 탄식을 합니다.

(욥3:20-22) 어찌하여 고난 당하는 자에게 빛을 주셨으며 마음이 아픈 자에게 생명을 주셨는고 이러한 자는 죽기를 바라도 오지 아니하니 땅을 파고 숨긴 보배를 찿음보다 죽음을 구하는 것을 더하다가 무덤을 찿아 얻으면 심히 기뻐하고 즐거워하나니



절망이 심하면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합니다.
(마27:5)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놓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가롯 유다는 예수를 은 삼십에 팔아 넘깁니다. 재리에 밝았지만 유다는 재물에 예수를 판 것은 아니었읍니다. 예수가 정죄됨을 보고 유다는 예수를 판 것을 뉘우쳐서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었읍니다. 그리고 유다는 자신의 꿈과 이상이 산산조각이 난 것을 알고 그는 심한 절망감에 빠져서 스스로 목매어 죽습니다. 가롯 유다는 예수를 판 것을 뉘우쳤지만 회개하고 주님께 용서를 구하지는 않았읍니다.

(행16:27) 간수가 자다가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복고 죄수들이 도망한 줄 생각하고 칼을 빼어 자결하려 하거늘
(행16:33) 그 밤 시각에 간수가 그들을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어 주고 자기와 그 온 가족이 다 세례를 받은 후


사도바울이 갖힌 감옥의 간수는 지진이 나서 옥문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 줄로 생각한 간수는 칼을 뻬아 자결하려고 합니다. 이에 사도바울은 큰 소리로 우리가 여기 있으니 죽지 말라고 합니다. 은혜를 입은 간수는 사도바울을 데려다가 맞은 곳을 씻겨주고 온 가족이 세례를 받습니다. 사도바울을 만난 간수에게는 사도바울이 갖힌 감옥이 로뎀 나무 아래였읍니다.

극심한 절망 가운데서 차라리 죽는 것이 낳겠다고 체념하십니까. 다시 한번 주님의 도우심을 간구하세요.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끊는 일은 하지 마세요. 그곳은 로뎀 나무 아래입니다. 기다리신 주님을 만나십시요. 도우시는 주님의 손길을 의지하세요. 모든 것을 잃어버려 극심한 절망으로 영과 육이 탈진하여 털썩 주저앉은 곳이 로뎀 나무 아래입니다. 하지만 그곳은 전화위복의 장소입니다. 로뎀 나무 아래에서 기다리셨던 주님을 만나 지쳐있는 영과 육이 다시 힘을 얻으십시요.


구운 떡과 물

극심한 절망 가운데 있으면 온 몸의 기력이 빠져서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도 없고, 눈도 캄캄해져서 주위가 보이지 않습니다. 주저앉아 일어설 생각도 하지 못합니다. 온 마음이 새깧맣게 타들어 갑니다. 살고 싶은 마음이 없어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로뎀 나무 아래에서 죽고 싶어할 정도로 극심한 절망 가운데 있던 엘리야에게 여호와는 천사를 보냅니다. 천사는 일어설 기력도 없는 엘리야에게 구운 떡과 물을 주어 먹게 합니다. 힘과 용기과 희망을 줍니다. 다시 여호와의 일을 할 수 있도록 기력을 보충하게 해 주십니다. 엘리야는 힘과 용기와 희망을 얻어 일어나서 사십 주야를 광야 길을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게 하시고 여호와는 엘리야에게 담대하게 새로운 소명을 담당할 수 있도록 엘리야를 만져 주십니다.

일어설 기력이 없는 엘리야에게 천사가 구운 떡과 물을 주어 먹고 마시게 하였듯이, 절망 가운데 있어 음식을 먹어도 모래 씹는 것 같아 먹고 마시기 싫어도 먹고 마셔야 합니다. 구운 떡과 물을 먹고 마셔 기력을 회복하십시요. 남은 광야 길을 가야 합니다. 로뎀 나무 아래에서 기력을 회복하십시요. 일어나서 광야 길을 다시 가십시요. 여호와께서는 새로운 소명을 주사 새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로뎀 나무 아래는 주님의 도우심을 느끼는 은혜의 장소입니다.

(사43:18-19)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새 일을 행하실 여호와를 믿고 의지하며 앞으로 나아가십시요. 생각하기도 싫은 지겨웠던 지난 날을 기억하지 마십시요. 여호와께서 막혔던 곳에 길을 내시고 앞으로 나아 가게 하사 새 일을 행하사 감사하며 드리는 저희의 찬양의 예배를 받으실 것입니다.


두려워 말라

절망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가져다 줍니다.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적을 만났을때 우리는 두려워하며 절망합니다.
(출14:10) 바로가 가까이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들 뒤에 이른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출애굽한 이스라엘 뒤로 애굽 군대가 바짝 추격해 옵니다.앞에는 홍해 바다가 가록막고 있고 뒤로는 강한 애굽 군대가 바로 코 앞에 있읍니다. 400여년간 노예로 지냈으니 제대로 된 무기도 없고 훈련도 받지 못한 그야말로 오합지졸입니다. 그런 이스라엘이 죽게 되었다고 살려 달라고 여호와께 간구합니다.

이에 여호와는 여호와의 사자인 천사를 보내어 곤경에 처한 이스라엘을 구원하십니다.
(출14:19-20) 이스라엘 진 앞에 가던 하나님의 사자가 그들의 뒤로 옮겨 가매 구름 기둥도 앞에서 그 뒤로 옮겨 애굽 진과 이스라엘 진 사이에 이르러 서니 저쪽에는 구름과 흑암이 있고 이쪽에는 밤까지 밝으므로 밤새도록 저쪽이 이쪽에 가까이 못하였더라.

주님께서는 자신의 자녀가 어려운 일을 만났을떄 주님의 사자인 천사들을 보내어 도우심을 믿으십시요. 천사는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지금도 제 주위에는 제가 천국에 가기까지 저를 지키고 도와주는 천사가 있음을 저는 믿습니다.

너무나 힘이 들어 좌절하셨읍니까. 눈 앞이 캄캄하십니까. 일어설 기력도 없으십니까. 힘을 내십시요. 그곳이 바로 주님을 만날 로뎀 나무 아래입니다. 주님께서 돕는 천사들을 보내십니다.


우리는 아무리 염려하고 두려워해도 형편은 결코 낳아지지 않으며 그 일이 해결되지 않았음을 경험으로 압니다.

(사41:10)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광야 길을 가면서 두려워하지 맙시다. 혹 절망 가운데서 모든 것을 체념하고 좌절한 로뎀 나무 아래에서 도우시는 주님의 손길을 느끼십시요. 한 번 살고 죽는 것은 여호와의 주권이십니다. 모든 것을 여호와의 손에 올려 드리고 의지하며 남은 광야 길을 갑시다. 주님께서는 자녀인 우리와 함께 하시며 도우십니다. 주님의 강한 오른 손으로 붙드시고 도우시는 여호와께 찬양을 드립니다.



야훼 하나님

연약한 저희들은 때로는 절망이 너무나 커서 모든 것을 체념하고 차라리 죽기를 바랄 때가 있읍니다.
저희 힘으로는 어찌해 볼 수 없는 너무나 크고 강한 벽을 맞닥뜨릴때 저희는 실망하고 좌절하여 모든 것을 체념합니다. 바로 그 곳에서도 저희와 함께 하시며 긍휼과 자비를 베푸시는 주님의 손길을 바라며 의지합니다.

엘리야가 살아가야 할 모든 희망을 잃고 체념하여 절망하여 차라리 죽게 해달라고 로뎀 나무 아래에 지쳐 쓰러져 있을때 주님께서는 천사를 보내셨읍니다. 천사의 보살핌으로 엘리야는 구운 떡과 물을 마시고 기력을 회복하고 다시 살아가야 할 희망과 소망을 품고 광야 길을 가서 여호와의 신이 계신 호렙산에 이르러 새 소명을 받았읍니다.

저희도 때로 어찌해 볼 수 없는 벽에 부딪혀 절망으로 육신이 탈진하여 로뎀 나무 아래에 있거든 주님 저희를 만나 주옵소서. 주님의 은혜로 돕는 천사들을 보내어 저희로 먹고 마시게 하사 기운을 내어 다시 남은 광야 길을 갈 수 있도록 저희를 인도하옵소서.

짧고 짧은 저희의 인생 길을 가면서 이제는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여호와의 손길을 의지하며 새 일을 행하실 주님의 은혜에 늘 거하기를 간구하옵니다. 저희에게 주님의 자비와 긍휼을 베푸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19년 8월 25일 일요일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의 축복

(시25:12-15)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누구냐 그가 택할 길을 그에게 가르치시리라. 그의 영혼은 평안히 살고 그의 자손은 땅을 상속하리이다.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 내 눈이 항상 여호와를 바라봄은 내 발을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실 것임이로다.



경외를 위키백과에서는 이렇게 정의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라 (fear of God)라는 말은 신을 존경하고, 두려워하고, 그리고 순복하라는 특별한 의미이다. 일신교의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신의 심판, 지옥 그리고 신의 전능함을 두려워해야 하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라고 신10:12-13에서 가르치고 있읍니다.

(신10:12-13)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여호와를 사랑하며 마음과 뜻을 다하여 섬기며 여호와의 말씀대로 살려고 합니다. 그렇게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행복케 하시는 여호와의 은혜가 임합니다.


본문의 말씀은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며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베푸시는 축복을 말씀하고 있읍니다. 어떤 축복이 기다리고 있는지를 보겠읍니다.

1. 택할 길을 인도
(12) 택할 길을 그에게 가르치리라

인생은 수많은 선택이 있읍니다. 우리는 지금껏 수많은 선택을 했읍니다. 올바른 선택 혹은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인생은 사뭇 다른 길을 갑니다. 올바른 선택은 우리의 삶의 질을 좌우합니다. 매번 올바른 선택을 하였으면 우리의 삶은 지금보다 더욱 나을 수도 있었겠다고 생각을 합니다.

(사48:17-18) 너희의 구속자시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이신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는 네게 유익하도록 가르치고 너를 마땅히 행할 길로 인도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네가 나의 명령에 주의하였더라면 네 평강이 강과 같았겠고 네 공의가 바다 물결 같았을 것이며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여호와의 은총으로 삶의 선택의 순간 올바른 선택을 하도록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가르쳐주십니다. 만일 성령께서 내주하시지 않으면 그는 인간적인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읍니다. 하지만 성령께서 내주하시는 이는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올바른 선택을 하게 됩니다. 때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이해하지 못할 때도 있읍니다. 하지만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선택한 길은 후에 돌이켜 보면 올바른 길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앞으로 남은 인생도 수많은 선택을 해야 합니다.
여호와를 온전하게 경외하여 성령의 도우심으로 마땅히 가야 하는 길을 택하도록 가르침을 받는 인생은 참으로 복 된 인생입니다.


2. 영혼의 평안
(13) 그의 영혼은 평안히 살고

아무리 육신이 잘나 보여도 육신은 오래 가지 못합니다. 얼마있지 않아 노화되어 결국은 흙으로 되돌아 갑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영혼은 영원토록 존재합니다. 영원토록 존재하는 우리는 영혼은 너무나 소중합니다.

여러분의 영혼은 편하십니까?
육신은 어디 아픈데는 없는데 영혼은 불안하며 무언가가 짖눌러 가슴이 답답하십니까?

영혼의 잘 됨의 축복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요삼 2)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나를 가로막는 장애물들로 인하여 마음이 상합니다. 헤쳐 나갈 일로 인하여 두려워합니다. 어찌 할 바를 몰라 안절부절하며 마음은 새까맣게 타들어 가며 나의 육신도 상하게 합니다.

더러운 생각을 합니다. 음란한 생각, 저주의 생각, 거짓의 생각들로 인하여 내 마음 속 깊은 곳에는 냄새나고 더러운 오물들로 차있어 정결하여야 하는 나의 소중한 영혼을 더럽힙니다.

주님께서 택하신 주님의 자녀에게는 주님의 영인 성령께서 내주하십니다.
제 안에 계신 성령꼐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더러운 저의 영혼을 깨끗하게 말갛게 씻겨 주시며 저의 영혼을 평안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3. 후손의 축복
(13) 그의 자손은 땅을 상속하리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의 자손들은 땅을 기업으로 상속받습니다.

(사65:23) 그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겠고 그들이 생산한 것이 재난을 당하지 아니하리니 그들은 여호와의 복된 자손이요 그들의 후손도 그들과 같을 것임이라

아무리 잠도 제대로 자지못하고 땀 흘리며 열심히 일했지만 비바람에 열매가 제대로 맺지 못하거나 열매를 맺었지만 다른 이들이 취하면 그동안 수고한 모든 것들이 허사가 됩니다. 주님께서는 여호와를 믿는 복된 자녀들과 그의 후손들이 갑작스런 재난을 당하지 않도록 지켜 주십니다.

(시37:25)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의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우리 모두는 우리의 후손들이 잘 되기를 바랍니다. 이제는 자신의 길을 열어 나아가야 할 나이들이 되었읍니다. 제가 자손을 위하여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여호와를 경외하며 잘 섬기는 것입니다.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다고 하셨읍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저의 간구를 여호와께서는 들어 주시고 후손들을 축복의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4. 언약을 보이심
(14)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

"언약"을 KJV에서는 "the secret of the LORD"라 번역을 하였읍니다.
여호와의 친밀함으로 여호와의 얼굴을 구하며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여호와의 친밀함으로 감추어진 비밀을 알게 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여호와의 친밀함은 여호와의 밀접한 교제를 말합니다. 나의 마음의 뜻대로가 아닌 여호와의 뜻을 따라가는 교제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친밀한 교제를 나눌수 있도록 길을 만들어 주셨읍니다. 곧 성령의 감동하십으로 지어진 성경을 우리에게 주셨읍니다. 성경에는 주님의 비밀들이 담겨져 있읍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함으로 주님과 교제를 나누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도바울은 엡1에서 성도들이 여호와의 비밀을 알기를 구하기를 간구합니다.
(엡1:17-1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셔서 주님의 감추어진 비밀들을 알도록 인도하십니다.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통하여 확실한 구원을 알게 되고 주님께서 정하신 여호와의 비밀을 깨달아가십시요. 주님께서 풍성한 기업의 축복 가운데 지혜로운 인생길을 가도록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끄십니다.


5.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심
(15) 내 발을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실 것임이로다

여호와의 얼굴을 구하며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물은 인생길에서 만나는 불가항력적인 장애물을 의미합니다. 나의 힘과 능력으로는 어찌해 볼 수 없는 장애물들을 만났을 때 여호와의 능력은 그물에서 벗어나도록 인도하십니다.

언제 어디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 지를 모릅니다. 천재지변, 사람과의 위험한 상황, 뜻하지 않은 일로 인생의 마지막을 맞이할지라도 언제든지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준비된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며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사방에는 두렵고 사나운 짐승들이 있어 주님을 믿는 자녀들을 해치려고 합니다. 하지만 사나운 짐승들은 주님의 자녀를 해칠 수 없읍니다. 이를 천로역정에서 잘 표현하고 있읍니다. 천로역정에 순례길을 가는 자들을 해치려는 사나운 짐승들이 있어 울부짖으며 찢으려 달려 들때 무서워 옴짝달짝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그때 순례자의 눈이 열려 사나운 짐승들이 단단한 사슬에 묶여있는 것을 봅니다. 사슬에 묶여 있어 무서운 큰소리로 바로 코 앞에까지 달려들며 위협하지만 더 이상 해칠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이에 순례자는 마음놓고 통과할 수 있어 다음의 순례의 길을 갈 수 있었읍니다.

사나운 짐승들은 결코 주님을 믿는 자녀들을 해칠 수 없읍니다. 겁박할 수는 있지만 결단코 주님을 믿는 자녀들인 우리들을 해칠 수 없읍니다. 주님께서 사나운 짐승들을 사슬로 묶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환난 가운데 있으십니까?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벗어날 수 없는 그물에 가두어졌읍니까?

저는 시편 91편의 말씀이 참 좋습니다.
시91편에는 저를 모든 환난과 곤고함으로부터 지키시고 보호하시며 구원을 약속하시는 주 여호와의 사랑의 말씀이 저에게 세상을 이겨낼 용기과 평강의 은혜를 줍니다.

(시91:2-3) 나는 여호와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이는 그가 너를 새사냥꾼의 올무에서와 심한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임리로다.

(시91:9-11)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시라하고 지존자를 너의 거처로 삼았으므로 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네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니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주님은 저의 피난처시요 저를 지키시는 요새이십니다 고백하며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주님의 은혜를 기다리는 저에게 주님께서는 올무과 심한 전염병으로부터 지키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또한 천사들을 보내사 저의 모든 길에서 저를 지켜 주신다고 약속합니다. 제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지금도 바로 제 곁에는 주님께서 보내신 천사들이 함께 있어 저의 가는 길을 보호하며 지켜줌을 믿습니다. 저는 참으로 주님의 축복을 받았음에 감사합니다.

여호와는 우리를 지키시는 거룩한 산성이요 요새이십니다.
우리의 삶은 그리 녹록하지 않습니다. 원치 않는 어려운 곳을 통과해기도 합니다. 나의 힘으로는 결코 막아낼 수 없는 사나운 짐승들이 해치려 달려 들기도 합니다. 두려워하지 맙시다.

(딤후2:26)그들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따르게 하실까 함이라.

여호와를 경외하며 섬기는 자에게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신다고 약속을 하십니다. 이 말씀대로 주님께서 저를 지켜주심을 저는 믿습니다.


어떠한 모습으로 주 여호와를 섬기십니까?
마음과 뜻을 다하여 여호와를 섬기며 말씀대로 살려고 하십니까?
물론 섬김으로 구원을 받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주님을 사랑하며 경외하는 자들은 여호와께서 정하신 말씀대로 살려고 하며 그 가운데서 삶의 의미를 찿으며 또한 자신이 가진 것에 만족하며 주님께서 베푸시는 섭리의 은혜에 기뻐하며 여호와의 얼굴을 항상 구하며 여호와를 경외합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오늘은 여호와를 경외하신 자들에게 약속하신 축복의 말씀을 주셨읍니다.
수많은 선택의 갈림길에서 올바른 선택을 하게 하는 축복.
너무나 소중한 저의 영혼의 잘됨의 축복.
사랑하는 후손의 축복.
창조주이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이신 주님의 비밀을 더욱 알게하는 축복.
사방에 쳐진 그물에서 건져주시는 축복.

이 땅에서 사는 우리에게 필요한 축복들을 여호와의 얼굴을 구하며 경외하는 저희에게 이미 주셨음에 감사드리며 영광을 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19년 8월 4일 일요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는니라

(마4:17)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서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천국이 있음을 믿습니까?
택함을 받지 못한 자들이 가는 곳이 지옥이 있음을 믿습니까?
천국과 지옥이 생각으로 지어낸 허구의 장소라고 생각을 하십니까?
성경에는 실지로 존재하는 천국과 지옥이 있다고 말하고 있읍니다.

천국이 실질적으로 존재함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왜 천국이 없는 것처럼 살고 계십니까?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천국에 대하여 많은 말씀을 하셨읍니다.
주님은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시면서 '천국' 혹은 '하나님 나라' 이란 단어를 많이 사용하셨읍니다.

주님은 천국에서 오셨읍니다. 그 누구보다 천국에 대하여 잘 아십니다. 천국은 어떤 곳이며 천국에는 어떤 자들이 가는 지를 주님은 자녀들에게 들려 주십니다.

(마4: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악한 것을 고치시니


주님은 이 땅에 사는 자들 모두 천국에 가기를 원하십니다. 주님께서 이곳 저곳을 다니시며 만나는 모든 사람들의 병과 악한 것을 고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하셨던 이유가 모든 사람들이 천국에 들어 가는 것을 원하시기 때문이셨읍니다.

주님의 길을 예비하던 세례요한은 광야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선포하였읍니다.
주님께서도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선포하시며 천국복음을 전파하셨읍니다.
천국에는 죄가 남아 있으면 들어 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거듭해서 저희들에게 "회개하라" 말씀하십니다.

천국에 들어갈 준비를 하셨읍니까?
천국을 소망하십니까?
이제 얼마남지 않은 이 땅의 삶이 끝날 때 어디에 서 계시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은 천국에 가고자 하는 우리에게 너무나 쉬운 해결책을 제시하십니다. 곧 죄를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내 안에 천국 복음이 있어야 합니다. 천국 복음을 받아 들이기 위해서는 우선 필요한 것이 내 안에 있는 죄에 대한 회개를 해야합니다. 내 안에 있는 죄로 인한 사망의 효력이 상실돠기 위해서는 우선 나의 죄를 들어내어 용서를 구하는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교회에는 왜 나오십니까?
곤고한 영혼의 쉬임을 얻기 위해서 교회에 나오십니까?
사람들과 교제를 나누기 위해서 교회에 가십니까?
세상 말로 줄을 잘 타기 위해서 교회에 가십니까?
내가 잘 나 보이기 위해서 교회에 나오십니까?
교회에 가면 천국에 가는 ticket를 준다고 해서 교회에 가십니까?

교회에 다니는 많은 분들이 천국에 갈 의향이 전혀 없는 것처럼 행동을 합니다. 그런데도 자신은 교회에 다니니까 천국에 갈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을 합니다. 열심히 헌금하니까 누구보다 열심으로 헌신을 하니까 천국에 갈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진리는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니 큰 문제입니다. 열심히 교회에 출석을 하고 헌신하며 헌금했는데도 천국에 가지 못하면 모든 것이 허사입니다.

교회에 다니면 천국에 간다고 보장이 됩니까?
직분을 맡으면 천국에 갑니까?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며 헌신하면 천국에 갑니까?


성경은 그렇지 않다고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우선 하나님의 전적인 택하심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은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이십니다. 그리고 택한 자들은 죄에 대한 회개의 관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각성의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 십자가가에 달린 두 죄인 중의 하나는 죽음 바로 직전에 영혼의 각성을 경험합니다.
그는 십자가에 달려서도 주님을 욕하고 주님을 비방 하였읍니다. 하지만 죽음 직전에 비로서 자신의 죄를 깨닫고 주님께 자신의 영혼을 부탁합니다.

(눅23:40-43)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십자가에 달려 구원받은 죄인은 주님으로부터 천국에 들어 갈 것이라는 말씀을 듣고 자신의 삐뚤어진 죄악의 지나간 날들을 회개하며 죽음을 맞이하였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주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자신이 주님을 세번 부인했던 것이 닭이 울 때 깨달아졌읍니다.
(눅22:61-62)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자신의 죄악됨을 깨닫고 그는 심한 통곡을 하였읍니다. 바로 그 순간이 베드로의 영혼이 비로서 각성한 시간이라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그 사건 이후로 베드로는 자신도 결국 십자가에 죽게 될 것을 알면서도 천국 복음을 전하는 제자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읍니다.


저는 진실된 회개에 반드시 따르는 것이 통곡과 눈물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주님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저의 죄를 용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찔끔 찔끔 흘리는 눈물이 아니라 콧물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자신의 죄의 용서함을 받은 은혜에 너무나 황송하고 감사해서 주님의 이름만 부르면 몇날이고 몇달이고 몇년이고 쏟아내는 눈물의 경험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나의 진홍과 같은 죄를 용서하신 주님의 은혜에 너무나 감사해서 흘리는 통곡과 눈물.
나를 주님의 자녀로 택하신 이해할 수 없는 주님의 은혜에 너무나 감격해서 흘리는 눈물.
참으로 부족한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주님의 사랑에 너무나 감사해서 흘리는 눈물.
진정한 평강의 축복이 있는 천국에서 살게 해 주신 은혜에 감격하여 흘리는 걷잡을 수 없는 눈물.


회개의 경험을 하셨읍니까?

사도바울과 같이 갑자기 훤한 빛과 음성이 들려서 각성하는 경험은 아니어도 자신의 영혼을 깨웠던 뚜렷하게 기억하는 회심의 사건이 있으십니까?

아이가 어미의 뱃속에서 자연분만으로 태어나게 되면 그 순간 울음을 터뜨립니다. 육신이 태어날때 울음으로 자신의 탄생을 알리듯이, 영이 새롭게 태어날 때에 육신은 통곡과 눈물로 반응을 합니다. 자신의 모든 죄가 용서함을 받았음을 본인의 영은 인지를 합니다. 그래서 너무나 고맙고 부끄럽고 감격해서 몇날이고 몇달이고 몇년이고 눈물과 통곡으로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잠자고 있었던 죽어 있었던 자신의 영혼이 깨어나는데 잠잠하게 경험하였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혹은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회개하였던 순간이 있었던 것 같다고 말을 합니다. 잠깐 눈물을 흘렸으니 회개하였다고 하기도 합니다.

자신의 영혼이 깨어난 회개의 순간은 자신에게만큼은 뚜렷하게 각인이 된 시간입니다. 만일 뚜렷하게 기억이 나는 회심의 시간이 없었다면 당신은 구원을 받지 못한 불쌍한 영혼일 수도 있읍니다. 그렇다면 아무리 오랫동안 교회에 다녔어도 천국에는 갈 수 없읍니다.

회개의 사건을 경험하지 못하셨읍니까?
어쩌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일것입니다.
주님께 간구하세요. 저의 모든 죄를 회개하고 용서받는 회심의 사건을 경험하기를 간구하십시요.

(눅17:21)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불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회개하는 영을 주님께서는 불쌍히 여기시며 은혜를 베푸십니다.

지금도 기억에 뚜렷하게 남겨진 회심의 사건을 경험하셨읍니까?
그랬지만 우리는 오늘도 수 많은 죄를 짓습니다. 생각으로 행동으로 말로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죄를 짓습니다. 죄로 가득한 이 땅에서 죄에 만연되어 죄가 죄인지도 모르게 살아 갑니다. . 죄를 짓는 순간에는 천국을 경험할 수 없음은 당연합니다. 내 마음속에 죄로 인한 거짓과 분노와 미움과 저주가 있는데 어떻게 그와는 정반대인 천국의 삶을 경험하겠읍니까.

그래서 주님은 우리들 마음에 회개의 영을 주셨읍니다. 성령님은 죄에 대하여 민감하게 반응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아무렇지 않게 행했던 죄가 죄인줄을 깨달아 알게 해 주십니다.

(요13:9-10)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죄를 지을 떄마다 회개하여 용서를 구하십시요. 회심을 경험한 자들은 이미 모든 죄의 용서함을 받았읍니다.
발을 닦아 주려는 주님에게 베드로는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달라고 할 때에 주님은 이미 깨끗게 된 자는 다시는 온 몸을 닦을 필요가 없이 더러워진 발만을 씻으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매일 매일 회개하십시요. 왜냐하면 우리는 순간 순간 나도 모르게 죄를 짓기 때문입니다. 그 때마다 주님의 이름으로 죄의 용서함을 받으십시요. 그럴때 우리는 우리의 삶 가운데서도 장차 갈 곳인 천국이 이미 내 안에 임하였음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이 말씀이 주님의 음성으로 들리시기를 축원드립니다.
회심의 사건을 경험하지 못하였다면 주님에게 가난한 마음이 되어 주님의 자비와 긍휼의 은헤가 임하기를 간구하십시요. 인생의 가장 중요한 순간을 경험하시기를 축원을 드립니다.

그리고 죄 사하심의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신 분들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순간 순간 죄를 지을 때마다 회개하며 씻겨 달라고 용서를 구하십시요. 주님은 십자가에서 저의 모든 죄를 이미 용서하셨읍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죄를 지을 때마다 죄를 회개하여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자비와 긍휼의 은혜로 충만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존귀하신 주님을 우리에게 보내 주셨음을 감사드립니다. 주님의 은혜로 저 같은 자도 천국을 소유할 수 있게 자비를 베푸시니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사랑이 너무나 크옵니다.

교회를 오래 다녔지만 아직도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한 이들이 너무나 많이 있읍니다. 저들에게 은혜를 베푸사 참된 마음으로 주님을 구주로 영접하며 지나온 날들의 깊이 새겨진 죄들을 전심으로 회개하여 주님의 용서함을 받는 놀라운 회심의 사건을 경험하도록 은혜를 베푸소서.

이 땅에서도 천국을 경험하는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주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셨듯이 늘 죄 가운데 있는 제가 죄를 범할 때마다 회개하는 회개의 영으로 충만케 하옵소서. 아무리 사소한 죄일지라도 주님께 용서를 구하며 회개하게 하옵소서. 죄로부터 자유로운 인생에게 주시는 인생의 참된 복인 천국을 육신이 있는 이 땅에서도 경험하게 하사 기쁨과 평강의 축복으로 충만하게 하옵소서.

회개를 통하여 천국을 저에게 허락하신 만유의 주이시며 만왕의 왕이신 주님께 모든 영광을 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19년 7월 14일 일요일

불법을 행하는 자


(마7:21-23)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교회에는 왜 다시십니까?
곤고한 영혼의 쉬임을 얻기 위해서 교회에 나오십니까?
아니면 천국은 무엇이며, 이 땅에서 천국을 미리 경험하기 위해서 교회에 오십니까?

교회에서는 천국 복음이 선포되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알지만 나만은 제외이기를 원하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육신의 마지막을 맞이 합니다. 그 후에는 천국과 지옥의 두 갈림이 있읍니다.

천국 복음을 전하는 사명이 목사들에게 주어졌읍니다.
오늘의 말씀은 주님의 천국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가진 목사들에게 주시는 경고의 권고의 말씀입니다.

많은 목사들은 사람들에게 진리인 말씀의 깊이를 탐구하며 주님의 마음으로 말씀을 전하기 보다는 이렇게 살지 말아야 한다는 훈계의 말씀을 전하기를 좋아 합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온갖 부정한 일을 저지르며 죄악 가운데 살고 있기 때문에 올바르게 살라는 훈계의 말씀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적용되며 공감합니다. 하지만 그런 말씀은 교회에서 새삼스럽게 듣지 않아도 여러 매체를 통하여 알고 있읍니다. 목사 자신도 지키기 어려운 잘못을 지적하는 훈계의 말씀을 전하면서 겉으로는 자신은 그런 잘못과는 무관한 척 거룩한 척을 합니다.

불법을 행하지 말라고 가르치지만 실상 자신은 더욱 큰 불법을 행합니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선포하지만 형편이 좋지 않은 이웃들은 거들떠 보지도 않습니다.
간음하지 말라고 선포하지만 실상 자신은 음욕에 묶인 감추어진 삶을 살며 자신의 육신을 더럽힙니다.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고 선포하지만 교회의 돈이 자신의 것인양 온갖 부정한 방법으로 재산을 축적합니다.
주님과 같이 낮아지라고 선포하지만 실은 자신은 왕같은 대접을 받아야 속이 후련합니다.


(마23:33) 뱀들와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주님도 욕을 하십니다. 그것도 모자라 저주하시며 그 대상은 외식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하셧읍니다.

주님은 마태복음 23장 전체에서 외식하며 불법을 행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곧 지금의 목사들에게 경고의 말씀을 주십니다.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명이 주어진 목사들은 마23장의 말씀을 늘 가까이 해야 합니다. '화 있을진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하시는 주님의 경고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온전하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할 수 있읍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도 모르게 사탄의 꾀임에 넘어가 화 있을진저 하시는 주님의 저주의 말씀을 들을 수 밖에 없읍니다. 늘 깨어 있어서 경계해야 합니다.

윗자리에 앉으려는 선생, 천국 문을 닫아 다른 이들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자,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 외식하는 자, 눈먼 인도자, 깨끗한 척 하지만 실은 방탕과 탐욕으로 가득한 자, 속은 썩어 문드려져 있지만 겉은 멀쩡하게 보이는 회칠한 무덤 같은 목사들에게 경고의 말씀을 하시며 이들을 뱀이며 독사의 새끼라고 하시며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고 하십니다.

천국 복음을 전하는 사명이 주어진 목사들은 늘 넘어지지 않을까 경계하여야 합니다. 사탄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우선 목사들을 넘어 뜨리려 합니다. 많은 이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주어야 하는 목사들이 먼저 고꾸라지면 많은 이들도 같이 넘어 뜨리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외식하며 불법을 행하며 영원한 불못인 지옥을 향해 가고 있는 목사들이 누구인지를 봅시다.

주여 주여 하는 자

주님의 이름은 참으로 소중합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신 주님의 이름에는 권능이 있읍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를 때 주님을 생각합니다.

우리는 누구의 이름을 부를때 그 사람을 생각합니다.
우리는 소중한 사람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이름을 함부로 남용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나 입버릇처럼 '주여' 하는 분들도 많이 있읍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를 때 조심하십시다.
특히 불법을 행하는 선지자의 특징 중의 하나가 "주여 주여"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이 외람되이 사용되어서는 않됩니다.
주님의 이름에는 능력이 있읍니다. 아무때나 ''주여 주여' 하면서 남발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함부로 "주여 주여" 하면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게 되면 주님에 대한 경외심과 참 사랑이 희석 될 수 밖에 없읍니다. 저희들에게 주신 주님의 이름은 참으로 소중합니다. '주여' 하며 주님을 부를 때 주님을 생각하며 불러 봅시다.


선지자 노릇하는 자

주님은 본문의 말씀을 하시기 바로 전에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고 하셨읍니다.
(마7: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거짓 선지자들은 양의 옷을 입었지만 노략질하는 이리라고 하십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양의 모습으로 교묘하게 감추어져 있지만 그들의 열매로 판단하라고 하십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거짓 선지자들은 찍혀 불에 던져지게 됩니다.

선지자 노릇하는 자들은 교회에서 직분을 맡은 자들을 말하며 대표적으로 목사들이 있읍니다. 목사들은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행여나 높은 위치에서 선지자 노릇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붙여주시는 성도들에게 의의 길로 천국으로 인도하는 주님께서 인정하시는 훌륭한 목사들도 있읍니다. 하지만 목사중에는 주님과의 마음이 가난했던 첫사랑을 잊어 버리고 자신의 이름과 사리사욕을 채우는 삯군이 된 목사들도 있읍니다.

저는 한국의 큰 교회의 목사들의 잘못된 행위들을 보면서 혹 그들이 거짓 선지자 노릇을 하고 있지나 않은지 염려가 됩니다. 참 배짱도 크다고 생각을 합니다. 분명 그들도 자신이 주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음을 누구보다 더 인식하고 있을 터인데도 무시하고 자신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그들을 볼 때 배짱이 보통 큰 게 아니라고 생각을 합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큰 교회에서 목사들이 가장 잘못되는 경우 중의 하나가 부정직한 재물의 취득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올바른 방법으로 재산을 축적하는 것은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교회의 재산을 마치 자신의 재산처럼 유용하며 착복하며 횡령한 것은 분명 잘못된 재산 축적이며 교회를 잠시 대표하는 목사가 결코 해서는 않되는 일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치부한 재산을 교묘한 방법으로 뺴돌립니다. 정당한 방법으로 모은 재물은 교묘하게 빼돌릴 필요가 전혀 없으며 구태여 숨기지 않아도 됩니다. 그들도 자신이 치부한 재물이 잘못된 것을 알기에 교묘하게 위장하여 빼돌립니다. 교회는 개인의 재산이 아닙니다. 교회는 주님이 주인이며 주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하는 곳입니다. 만일 교회의 재산을 착복하였고 자신의 죄를 회개한다면 착복한 재산을 교회에 환원해야 합니다. 회개도 하지 않고 배상도 하지 않는다면 그는 불법을 행한 거짓 선지자입니다.

또 다른 죄는 교만하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왕으로 받듬으로 인해 자신이 무엇이나 된 줄로 착각하여 자신이 없으면 않되는 듯 교만하여 집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니 교만을 경계하라고 거듭해서 말씀을 전하는 이가 실은 그 누구보다 더 교만하니 주님의 마음은 어떠하시겠읍니까.

큰 교회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기에 잘못된 것들이 나타나기 쉽습니다. 하지만 표면에 잘 드러나지 않지만 규모가 적은 많은 교회에서도 선지자 노릇을 하고 있는 목사들이 있읍니다. 자신이 교회의 주인인양 거들럭 거리며 우습지도 않은 행동들을 합니다. 목사들은 자신을 주님의 거울에 비쳐보아 행여나 자신이 불법을 행하는 선지자 노릇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를 살펴 보아야 합니다. 얼마후면 받을 심판이 너무나 엄정하기 때문입니다. 일생을 주님을 섬긴다고 했지만 주님께서 나는 너를 도무지 모른다고 하시면 큰 일이 아닙니까.


권능을 행하는 자

주님의 종은 결코 교만하지 않고 늘 겸손합니다. 자신을 들어내지 않고 낮은 위치에서 섬기려고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듯이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너희도 거저 주어라"의 말씀대로 재물따라 권능을 행하지 않습니다.

(마10:8)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 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주님은 천국 복음의 확장을 위하여 열 두 제자를 둘씩 짝으로 보내시며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십니다 (마10:1). 그러면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놀라운 권능을 행할 때 재물을 받지 말고 거저 행하라고 분부하십니다.

주님께서 주신 권능은 대단합니다. 죽은 자들이 살아나며 고칠 수 없는 병들이 나으며 귀신들이 떠나가는 기적적인 치유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사람들은 그런 대단한 권능을 행하는 자들에게 필사적으로 다가 옵니다. 그들의 연약함을 치유받기 위해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제자들 앞에 서려고 합니다. 그래서 가장 쉬운 방법으로 재물을 갖고 나옵니다. 재물로 제자들의 마음을 사려고 합니다. 놀라운 주님의 권능을 재물로 사려고 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제자들에게 결코 재물에 유의하지 말라고 주의를 줍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권능을 행하는 자들이 있읍니다. 놀라운 치유의 역사가 일어 납니다. 의술로 고칠 수 없어 절망한 자들에게 살 수 있다는 소망을 줍니다. 사람들은 그를 통하여 놀라운 권능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을 보고 그 사람을 주님의 종이라고 치켜 올리고 왕처럼 대접하며 우상화합니다.

사람이 우상화가 되면 재물과 명예가 따라 옵니다. 능력을 행하는 주님의 종이라고 소문이 나면 사람들이 돈을 싸갖고 와서 자신에게 먼저 안수해서 낮게 해달라고 새치기해서라도 머리를 들이 밉니다. 그러면서 그는 점차로 타락해져 갑니다. 결국은 주님과의 첫사랑을 잊어 버리고 자신은 특별한 사람이며 자신을 통하여서만 주님의 능력이 나간다고 착각하여 교만하여져서 주님의 종으로서 아니라 사람들의 왕으로서 삶이 변질하고 맙니다. 주님은 그런 이들을 보며 불법을 행하는 자야 내게서 떠나 영원한 불못이 있는 지옥으로 떠나가라 하십니다.

재물을 탐하는 선지자들은 거짓 선지자입니다. 권능을 행하는 주님의 종들은 결코 재물을 따라가서는 않됩니다. 능력을 받은 진실된 주님의 종이라면 주님의 마음으로 주님의 뜻대로 권능을 행하여야 합니다. 재물을 따라 가게 되면 결국은 파멸에 이르게 됩니다. 자신이 이전에 그토록 열정적으로 전파하였던 주님은 그를 모른다고 하시니 그는 영원한 불못으로 갈 수 밖에 없읍니다.


내게서 떠나

주여 주여하며 선지자 노릇하며 주님의 이름으로 능력과 권능을 행하며 많은 명성을 얻고 재물을 획득했지만 주님은 나는 너를 모른다고 하시며 '불법을 행하는 자야 내게서 떠나가라'고 명령하십니다.

주님으로부터 떠나 가는 곳은 어디입니까? 곧 천국과 반대인 영원한 불이 타는 지옥입니다.

(마25: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눅13:27) 그가 너희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내게서 떠나 가라 하리라


참으로 무서운 말씀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처음에는 주님을 전한다고 열심으로 섬겼지만 후에 변질된 줄을 알면서도 내가 지금까지 주님을 위해서 일을 했으니 이해하실꺼야 하며 점차로 나락에 빠져들어가 회개할 기회를 잃어버린 자들에게 주님은 '나는 너를 도무지 모르니 불법을 행한 자야 내게서 떠나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하신다면 어찌합니까.

사람들에게 왕같은 대접을 받고 온갖 부귀 영화를 누렸으며 많은 재물도 모았고 명예도 있지만 불법을 행하였느니 내게서 떠나 영원한 불에 들어 가라 명합십니다. 주여 제가 주님의 이름으로 다른 이들은 할 수 없는 병이 나으며 귀신이 떠나가는 권능을 행하였읍니다 하고 변명을 하지만 주님은 나는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내게서 떠나 가라 하십니다. 아무리 발버둥을 치고 후회해도 되 돌릴 수 없습니다.


이제 잠시 후면 우리는 한 사람도 예외없이 주님 앞에 서게 됩니다.
꺼떡하면 주여 주여 하던 자들, 자신의 이름을 내세우고자 했던 거짓 목사들, 주님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함으로재물과 부와 명예와 교만을 함께 얻은 자들에게 "불법을 행한 자야, 나는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내게서 떠나라"하는 말을 만주의 주이며 만왕의 왕이신 주님으로부터 들으면 않됩니다.

사람의 부귀와 영화는 잠시뿐입니다. 우리 대부분은 지금껏 살아온 시간보다 훨씬 짦은 시간 만이 남아있읍니다. 곧 시들어 버립니다. 시들어 버려 땅에 떨어져 흙으로 돌아가기 전에 주님께서 기뻐하시며 인정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목사는 직분으로만 목사가 아니라 실질적인 주님의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천국을 소망하며 천국 시민에 합당한 주님의 자녀로서 살아서 장차 주님 앞에 섰을때 '나의 사랑하는 아들아 딸아 네가 그동안 말씀의 종이 되느라 수고하였구나 이제 나의 영광의 빛으로 가득한 영원한 평강의 축복이 있는 천국에 들어가라'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천국에 대하여 수많이 선포하셨읍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주님의 복음을 선포하는 선지자들 지금의 목사들에게 경고의 말씀을 하십니다.

겉으로는 주여 주여 부르지만 속에는 이리가 있는 거짓 선지자들은 결국 주님으로부터 떠나서 영원한 불못이 있는 곳으로 갈 수 밖에 없읍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하며 선지자 노릇을 하며 명예와 재물과 아울러 교만을 함께 얻었읍니다. 하지만 그 영광은 영원토록 지속되지 않습니다.

주님의 뜻을 행하는 목사가 되기를 간구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마음으로 주님의 뜻을 전할 수가 있읍니다. 사람들에게 맞춰진 달콤한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닌 사람의 영과 육을 꽤뚫으며 도려내는 말씀을 전하는 도구로 사용되어 지기를 간구합니다. 재물을 따라가지 않도록 인도하옵시고 교만을 먹는 거짓 선지자이며 삯군인 목사가 되지 않도록 저를 늘 일깨워 주옵소서. 자신만 멸망의 길로 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도 함께 멸망으로 인도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도록 저를 가르쳐 주옵소서.

주님은 더욱 큰 책임을 목사들에게 물으십니다.
온전한 사명을 감당하여 천국 복음을 선포하며 많은 이들을 의의 길로 인도하는 길에서 자신을 십자가에서 죽이며 주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주님의 사명자들이 되시기를 간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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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22일 토요일

행진하는 모든 길에서 보았더라


(출40:36-38) 구름이 성막 위에서 떠오를 떄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 앞으로 나아갔고 구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에는 떠오르는 날까지 나아가지 아니하였으며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에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서 그들의 눈으로 보았더라
.


출애굽을 하고 광야생활을 시작하면서 야훼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임재를 상징하는 성막을 만들게 하십니다.
백성들은 자신을 이끄시는 야훼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성막에 필요할 예물들을 만듭니다. 모두가 한 마음으로 성막을 지을 재료들을 충분하게 만들었읍니다. 그래서 모세는 더 이상 예물을 가져오지 말라고 합니다. 그 만큼 이스라엘 자손들은 때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부인하기도 하였지만 그들의 마음 속에는 자신들을 이끄시고 선한 길로 인도하시는 야훼 하나님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있었읍니다. 그래서 그들은 전심을 다하여 야훼께서 임재하실 처소의 재료들을 예물로 드릴 수 있었읍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가 되어 만든 성막이 완성이 되어 야훼 하나님께 봉헌을 하였읍니다. 그리고 전적인 광야 생활이 시작이 됩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40여년의 광야 생활을 하면서 여러 사건들을 만납니다. 그들의 앞길을 가로막는 자들과 목숨과 나라를 건 전쟁을 하여야 했으며 더위와 추위를 견디어 내어야 했읍니다. 여호와를 배역하며 불평하기도 하였지만 그들은 결코 야훼의 명이 없이는 한발작도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읍니다. 한 곳에 오래동안 머물기도 하였고 며칠 지나지 않아서 진을 헐기도 해야 했읍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밤낮으로 보면서 그들은 여호와의 임재를 느끼며 볼 수 있으니 얼마나 축복된 인생들입니까.

드디어 40여년에 이르는 광야 생활을 마치고 가나안을 바라 보는 곳에 이르렀읍니다. 지난 날을 회상하며 출애굽기는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서 그들의 눈으로 보았더라"하면서 끝을 맺습니다.

우리는 출애굽기를 읽으면서 한가지를 깨달아 알 수 있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나오기 전이나 나온 후에 끊임없이 야훼 하나님께 불평을 합니다. 마실 물이 없어 죽게 되었다고, 이방신을 섬기기도 하였으며, 강한 적이 가로막으면 죽게 되었다고 불평하였읍니다.

구름이 떠오르면 진을 헐고 행진하여야 하였으면 구름이 머물면 가던 길을 멈추고 구름이 떠오를 때까지 무작정 기다렸읍니다. 번거롭고 불안정한 삶이었는데도 이스라엘 자손은 이것에 대하여만큼은 야훼 하나님과 모세에게 결코 불평하지 않았읍니다. 성경 어디에서나 이스라엘이 불만 불평하였다는 구절을 찿을 수 없읍니다. 왜냐하면 비록 패역한 이스라엘 이었지만 그들은 구름 기둥과 불 기둥으로 여호와의 임재를 매일 보았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 중심에는 야훼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지켜 주신다는 확신이 있었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길을 가면서 항상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을 보았읍니다.
야훼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직접 볼 수 있는 이들은 축복된 인생입니다.


우리는 두 눈으로 혹은 마음으로 온갖 것들을 봅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온갖 형형색색의 색깔들이 있읍니다.
이른 아침에 해가 떠오르면 그리고 저녁에 노을이 지는 광경을 보며 아름답다고 합니다.
인적이 드문 곳의 한밤중에는 하늘에 빼곡하게 차있는 별들을 보며 경이로운 생각을 가집니다.
갖가지의 곤충들이 기어다니는 모습을 봅니다.
벌새가 쉬임없이 날개짓을 하며 단물을 빨아 먹는 모습을 봅니다.
사람마다 모두 다른 모습을 가졌음을 봅니다.
새로운 것을 보려고 여행을 갑니다.

본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사물을 보고 마음에 새깁니다. 보이는 것은 거짓이 아닌 부인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눈으로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눈으로 보이는 사물 외에도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도 있다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 가운데 계시는 주님을 바라보세요. 우리는 보이지 않는 주님을 찬양하며 경배하며 예배를 드리며 영광을 드립니다. 온전한 마음으로 진정과 신령을 다하여 주님께 예배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십시요.
지금껏 어떤 길로 다니시다가 지금에 이르렀읍니까? 떄로는 잘못된 길 죄악의 길로 가기도 했지만 야훼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하심으로 지금의 제가 있을 수 있었읍니다. 아직도 많이 연약하지만 이제 잠시후면 광야 길을 마치고 주님과 함께 할 것을 저는 믿습니다. 야훼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 하시며 저를 의의 길로 인도하심을 매일 매일 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믿음

야훼 하나님의 임재는 광야를 지날 때 구름 기둥과 불 기둥으로 보이셨읍니다. 하지만 지금은 야훼 하나님의 임재가 구름 기둥으로 불 기둥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야훼 하나님의 임재가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지금도 저희와 함께 하심을 우리는 믿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매우 중요합니다. 보고 믿는 믿음보다 보지 않고도 믿는 믿음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요20: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예수님과 함께 하였던 제자 도마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수 없었읍니다. 그래서 자신은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보아야지만 믿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며칠 후에 나타나신 주님은 도마에게 자신의 손과 옆구리에 손을 내밀어 확인하라고 하시며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하십니다. 우리 가운데 예수님을 직접 본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예수님을 믿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우리를 복되도다 하시며 축복하십니다.

모세는 두려워말고 여호와께서 이르시는 구원을 보라고 말합니다.
(출14:13)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우리는 인생의 앞 길을 한치 앞도 볼 수 없읍니다.

얼마전에 제가 아는 내과 의사가 척추 디스크 수술하려 한국에 가서 CT를 찍었는데 췌장암 3기라는 진단을 받은 후에 3일 후에 죽었읍니다. 디스크 수술을 해서 허리가 아픈 것을 치료하려고 갔던 길이 그의 인생의 마지막이 되었읍니다. 그는 자신이 죽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였을겁니다.

사람들은 제각각의 길을 가면서 생명을 위협하는 험한 길로 갈 수도 있고 깊은 구렁에 빠질 수도 있읍니다.
하지만 구름 기둥으로 불 기둥으로 인도하는 주님의 자녀들은 모든 길에서 주님께서 함께 하심을 마음에 믿으며 구원을 이루시는 주님을 두 눈으로 봅니다. 저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었던 수많은 사건 가운데서 주님은 저와 함께 하시고 구원의 길로 인도하셨음을 봅니다.

시편 기자는 시편 123편에서 이렇게 찬양합니다.
(시123:1-2) 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 같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같이 우리의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기다리나이다.

어디를 보십니까? 결국은 실의와 좌절케 하는 세상을 바라보지 말고 하늘 보좌에 계시는 주님을 바라보세요. 주님의 은혜는 높고 크십니다. 나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며 은혜를 베푸시는 주님을 바라봅시다.


야훼 하나님께서는 주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빛으로 보입니다.
성막 위에서 구름 기둥과 불 기둥으로 자신의 임재의 영광을 보여주신 야훼 하나님께서는 빛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 가운데 계십니다.

주님은 이 땅에 빛으로 오셨읍니다.
(요8:12)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요1:4-5)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야훼 하나님의 영광을 본 사람들이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읍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은 구름 기둥과 빛 기둥 가운데 계신 야훼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읍니다.

하나님은 제단을 쌓은 아브라함에게 후손의 축복을 약속하시고 횃불로 보이셨읍니다
(창15:17)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출애굽한 후 석달이 지나 시내 광야에서 하나님은 빽빽한 구름과 불 가운데서 나타나셨읍니다.
(출19:9)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빽빽한 구름 가운데서 네게 임함은
(출19:18) 시내 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언약궤를 새로 지은 성전에 모신 후에 솔로몬과 제사장에게 보이셨읍니다.
(왕상8:10-11) 제사장이 성소에서 나올 때에 구름이 여호와의 성전에 가득하매 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말미암아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성전에 가득함이었더라.

야훼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선지자로 부를 때에 이사야는 환상으로 성전에 연기로 충만하였음을 보았읍니다.
(사6:1-4) 내가 본 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 성전에 연기가 충만하더라

에스겔이 환상을 볼 때에 구름과 불에 둘려 쌓여 계신 야훼 하나님을 보았읍니다.

야훼께서는 자신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빛으로 빽빽한 구름으로 여호와의 영광을 보여주십니다.
가끔가다가 느끼지 않습니까? 저에게 환히 비쳐지는 주님의 영광의 빛을 느낍니다. 두 손을 하늘을 향하여 들고 두 눈을 감고 주님을 불러 보세요. 매우 밝은 영광의 빛이 느껴집니다. 빛에는 주님의 자비와 긍휼과 사랑과 은혜가 있읍니다. 우리는 빛의 자녀이기 때문에 주님의 빛을 느낍니다.

(엡5:9)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주님을 사랑하며 주님의 인치심을 받은 자들을 빛의 자녀라 불립니다. 빛의 자녀는 빛의 자녀답게 빛의 열매를 맺으며 살아야 합니다. 빛 가운데에서 행하여 그 빛을 보면서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


출애굽의 마지막 절은 광야에서 항상 함께 하신 야훼 하나님의 영광을 "그들의 눈으로 보았더라"하며 끝을 맺습니다. 비록 험하고 위험한 광야 길에서 아무런 도움도 받을 수 없었지만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하시며 인도하셨읍니다. 때로는 죄 가운데서 주님을 배역하였어도 매일 매일 보이는 주님의 임재의 영광을 보면서 주님에 대한 신뢰와 믿음을 회복하고 그들은 다시 주님 품으로 되돌아 올 수 있었읍니다. 이스라엘의 광야에서 함께 하셨던 야훼 하나님의 영광이 바로 우리의 인생 광야에서도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지식에 계신 분이 아니십니다. 바로 제 안에서 저의 삶에 직접 관여하십니다.
(요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이 말씀은 무엇을 말하고 있읍니까? 곧 말씀이 육신이 되신 주님이 바로 제 안에 계심을 보라고 말합니다. 제 안에 계신 주님의 영광을 바라 보십시요.

(출33:14)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우리의 광야 길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읍니다. 지금껏 잘 견디어 내었듯이 앞으로 남은 인생 길도 주님께서 저와 함께 하실 것이기에 저는 견디어 낼 것입니다. 비록 제 눈에는 잘 보이지 않지만 야훼 하나님께서는 저보다 앞서 가시며 저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며 저를 편히 쉬게 하십니다.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얼마나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까. 피곤한 인생 광야길에서 들려 주시는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오늘도 이 말씀을 의지하며 또 하루를 삽니다. 힘을 내세요. 용기를 가지세요. 주님께서 바로 제 안에 계시며 저를 쉬게 하시며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는 주님의 영광을 봅니다.


야훼 하나님 아버지
제 눈이 밝아져서 저를 둘러싼 야훼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보기를 간구합니다.
주님의 영광의 빛에는 자비와 긍휼이 있으며 저를 무한하신 주님의 사랑으로 이끄십니다.
저의 인생 광야길을 가면서 저와 함께 하시며 저를 구름 기둥으로 불 기둥으로 지키시는 주님의 은혜에 감사합니다.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주님의 말씀을 의지하며 오늘 또 하루를 삽니다. 눈을 하늘을 향하여 들고 긍휼과 자비의 주님을 봅니다.
저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주님께 모든 영광을 드립니다.

예수 그릐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19년 6월 2일 일요일

하나님의 이름 야훼

(출34:5-7)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에 강림하사 그와 함께 거기 서서 여호와의 이름을 선포하실새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헤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And the LORD passed by before him, and proclaimed, The LORD, The LORD God, merciful and gracious, longsuffering, and abundant in goodness and truth, keeping mercy for thousands, forgiving iniquity and transgression and sin, and that will by no means clear the guilty



하나님을 얼마나 아십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잘 모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단지 나의 지식과 상식의 범위 내에서 이해하며 안다고 합니다.
야훼 하나님은 우리의 지식을 뛰어 넘습니다. 우리는 야훼 하나님을 극히 너무나 제한적으로만 알 뿐입니다. 마치 밤하늘에 보이는 별들의 끝을 도무지 알 수 없는 것과도 같다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는 우주의 끝이 얼마만큼인지를 도무지 알 수 없읍니다. 아무도 그 곳에 간 적도 없고 갈 수도 없읍니다. 그런데도 우주의 크기가 얼마만하다고 아는 척하며 말하는 것은 우리의 생각 뿐이며 얼마든지 심각한 오류가 있기 마련입니다.

야훼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어떤 분이심을 우리에게 알려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렴풋이나마 야훼 하나님께서 어떠한 분이심을 막연하게나마 압니다.

모세는 출애굽한 후에 야훼 하나님의 명령하신대로 시내 산에 올라 40일을 지냅니다. 야훼 하나님께서는 성막을 어떻게 짓고 어떻게 제사를 드려야 하는 지를 상세하게 말씀을 하십니다. 그리고 야훼 하나님께서 친히 쓰신 십계명의 두 돌판을 주십니다. 모세는 기쁜 마음으로 산을 내려 갑니다. 그렇지만 산 아래의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가 더디 내려옴을 보고 우상을 만들어 크게 소리지르며 이방신에게 제사들 드립니다. 모세는 이를 보고 크게 격노하여 두 돌판을 산 아래로 던져 깨뜨립니다.

야훼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돌판 둘을 준비하여 다시 시내 산에 오르라고 명령하십니다. 이에 모세는 십계명을 새길 두 돌판을 준비하여 등에 짊어지고 시내 산에 올라갑니다. 야훼 하나님께서는 구름 가운데 강림하시고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선포하시며 자신은 어떤 하나님이심을 말씀하십니다.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헤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선포하십니다.

야훼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심을 이 땅을 살아 가는 저희에게 늘 기억되기를 간구합니다.
야훼 하나님을 가만히 불러 보세요. 나를 사랑하시는 야훼 하나님의 마음이 조금이나마 느껴집니다.


야훼

야훼는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을 부를때 그 사람의 이름을 부릅니다. 이름을 부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가 떠오릅니다.
예를들어 미국의 대통령이나 한국의 대통령의 이름을 부르게 되면 그 분의 모습과 행동과 말들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또한 가까운 사람들의 이름을 부르게 되면 그 사람들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사람의 이름에는 중요한 의미가 담겨져 있읍니다. 하나님 또한 자신의 이름을 갖고 계십니다. 되도록이면 하나님을 부를 떄 '야훼 하나님' 하면서 불러 봅시다. 보다 선명하게 야훼 하나님께서 내게로 다가오지 않겠읍니까.

YHWH.
오래전의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야훼'라고 발음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자신의 이름을 분명하게 말씀하셨읍니다.
그런데 문제는 고대의 히브리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감히 부르지도 않았고 또한 최초로 기록된 성경에는 모음이 없어서 정확한 발음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부를 수 없어서 아도나이(주님)라고 불렀읍니다. 그러다가 후에 유대인들은 맛소라 본문에 의지하여 성경을 통일하면서 YHWH에 모음을 첨가하여 YaHWeH (야훼)로 표기했읍니다. 또한 'I AM WHO I AM' 의 히브리어인 '예흐예 아쉐르 예흐예"의 예흐예에서 '여호와'가 유례가 되었읍니다. 따라서 '아도나이', '주님 (LORD)', '여호와' 혹은 '야훼' 모두 하나님의 이름이지만 정확하지않습니다. 그 중에서 "야훼"가 보다 하나님의 이름에 가까울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이 '야훼'라고 소개하십니다.
마치 우리가 사람들을 처음 만날때 서로 이름을 소개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만나시면서 자신의 이름이 야훼이심을 말씀하십니다. 우리도 야훼 하나님께 저의 이름과 이러한 성품들을 갖고 있다고 한번 자신을 소개해 보세요.

하나님의 이름은 '야훼'이십니다.
야훼 하나님. 우리의 생명의 근원이시며 우리의 삶과 죽음을 주관하십니다.
야훼 하나님은 전혀 모순도 없으며 흠도 없으시며 완전하십니다. 온 우주를 창조하신 전지전능하신 창조주이십니다.



자신의 이름이 '야훼'임을 알려 주신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어떤 속성들을 갖고 계신지를 우리에게 알려 주십니다. 야훼 하나님께서 어떠한 속성을 갖고 계신지를 안다는 것은 우리에는 큰 축복이며 은혜입니다.

자비롭고 은혜로운 (merciful and gracious)

야훼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성품 중에서 자비를 가장 먼저 언급하셨읍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에게는 야훼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야훼 하나님의 자비가 없었다면 우리는 구원의 은혜를 결코 받을 수가 없읍니다.

(시78:38) 오직 하나님은 자비하시므로 죄악을 덮어 주시어 멸망시키지 아니하시고 그의 진노를 여러 번 돌이키시며 그의 모든 분을 다 쏟아 내지 아니하셨으니 그들은 육체이며 가고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바람임을 기억하셨음이라.

사람들은 다른 이들의 죄를 들추어 내는 것을 좋아합니다. 다른 이의 약점이나 잘못함이나 죄악됨을 보면 까발리려고 합니다. 그렇지만 자비하신 야훼 하나님은 우리의 죄악을 덮고는 나는 도무지 모른다고 하십니다. 야훼 하나님은 우리의 죄악됨을 보시고 분노하시면 견디어 낼 육신이 없음을 잘 아십니다. 자비하심으로 나의 죄를 덮고 또 덮으시는 야훼 하나님의 긍휼의 사랑은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우리는 야훼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받을 자격이 없읍니다. 하지만 야훼께서는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셨읍니다. 야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자비는 어떤 대가를 내야하는 것이 아닌 무조건적인 선물로 은혜로 베푸셨읍니다. 야훼께서 저를 택하시고 자비를 베푸심은 절대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longsuffering, slow to anger)

(눅18:7)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노하시를 더디하시는 야훼 하나님의 성품은 우리 인간의 성품과 가장 비교되는 성품일 것입니다.
참고 참으시는 야훼 하나님의 성품으로 인해 우리는 오늘도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하며 살아 갑니다..

참고 참으시는 야훼 하나님.
우리 인간들은 너무나 쉽게 분노합니다. 아무리 자제한다 하지만 어느 순간에 이르면 분노합니다. 내 마음에서는 성령께서 화내지 말라고 말씀하시지만 저는 분노하고 맙니다. 쉽게 분노함은 하나님의 속성과는 전혀 맞지 않습니다. 쉽게 분노할수록 주님의 성품과는 반대이며 하나님의 나라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오늘도 저는 또 어떤 일로 분노할지 모릅니다. 분노하기 전에 다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과연 이 일이 내가 분노해야 하는 일인지를 생각해봅시다. 야훼 하나님께서는 제가 죄를 범할 때마다 분노하시지 않으셨읍니다. 그런데 저는 누가 저에게 조금만 잘 못해도 분노하며 함부로 악한 말을 쏟아 낼 때 그곳은 악한 기운들로 가득하게 됩니다.

쉽게 분노할 때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망가뜨립니다. 만일 제가 야훼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주님의 자녀라 한다면 저는 분노를 가라 앉힐수 있는 주님의 사랑이 담겨져 있읍니다.

야훼 하나님은 저의 완악함을 보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오랫동안 참고 또 참으십니다. 저는 오늘도 여김없이 순간 순간 죄를 범합니다. 만일 야훼 하나님께서 분노하심을 참지 않으셨으면 저는 이미 오래전에 멸망하였을 겁니다. 하지만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야훼 하나님이시기에 저는 회개할 시간을 갖습니다.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생명을 버리기까지 저를 사랑하신 주님의 은혜로 오늘도 저는 살아 갑니다.



인자와 진실이 많은 (abundant in goodness and truth)


인자를 KJV에서는 Goodness (선함)으로 번역을 하였읍니다.
주님은 "나는 선한 목자이다 (I am the Good Shepard)" 선언하십니다.

(요10:14)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선한 목자이신 주님은 자신의 이름을 알며 따르는 양들을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시며 사나운 짐승으로부터 지키십니다. 주님의 선하심은 한계가 없으십니다.

저의 삶을 되돌아보아도 선한 목자이신 주님의 보호하심이 있었기에 지금의 제가 있읍니다. 저의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주님께서는 지금껏 저를 주님의 선하심으로 저를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셨읍니다.

또한 주님은 요14:6에게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요14:6)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주님은 진리이십니다.
진리이신 주님이 선포하신 말씀에는 거짓이 없읍니다. 주님의 말씀은 우리를 결코 해하지 않습니다. 진리이신 주님의 말씀은 우리가 마땅히 가야하는 인생의 길을 제시하며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이 선포하신 진리의 말씀을 늘 가까이 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의 진리는 저를 변화시킵니다.

(엡3:16)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저의 겉모습은 시간이 지날수록 낡아지지만 저의 속사람은 야훼 하나님의 끊임없이 흐르는 샘의 은혜로 인해 늘 새로워 집니다. 지금껏 저를 주님의 선하심과 진실하심으로 인도하신 주님의 은혜가 저의 남은 호흡에도 함꼐 하실 것을 저는 믿습니다.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Keeping mercy for thousands)

주님의 사랑은 영원합니다.

야훼 하나님께서는 출애굽한 후에 광야에 들어서자 선민으로서 반드시 지켜야할 십계명을 선포하십니다. 특히 제 2계명인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고 말씀하신후에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에 이르기까지 은혜를 베푸신다고 약속을 하십니다.

(출20:6)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주님은 천대에 이르는 후손의 영원한 축복을 약속하셨읍니다.
우리 모두는 우리의 후손들이 주님의 축복을 받아 영적으로 육신적으로 어려움 없이 풍요로운 삶을 살기를 간구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잘 믿고 순종하여 나 뿐 아니라 소중한 후손 역시 주님의 풍요로운 축복을 받는 은혜를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Forgiving iniquity and transgression and sin)


야훼 하나님은 용서의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형제가 범한 죄를 7번에 70번까지라도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마18: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사람들은 한번 두번 용서할 수는 있어도 그 이상 용서하기 위해서는 대단한 인내와 관용이 필요합니다. 우리 대부분은 상대의 거듭된 죄악됨을 용서할 마음의 그릇이 너무나 적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서로 어떻게 용서해야 하는 지를 말씀하셨읍니다.
(마18:36)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우리가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은 내가 야훼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기 위해서는 먼저 내게 잘못한 나의 형제들을 용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의 형제들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주님께서도 저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입으로 상대방을 용서했다고 말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가식적으로 우리는 용서했다고 얼마든지 말할 수 있읍니다. 하지만 그것은 참 용서가 아니며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용서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용서는 나의 마음으로부터의 용서가 있어야 합니다. 마음으로부터 용서를 하였다면 내 안에는 앙금이 남아있지 않게 되며 자유케 됩니다.

사람들은 일흔 번이 아니라 일곱번 용서하는 것도 무척이나 힘이 듭니다.
그런데 저는 수많은 죄악을 저지릅니다. 말로써 상대방을 정죄하며 비판하며 거짓을 말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수많은 죄악된 생각을 하며 주님께 죄를 범합니다. 그런데도 야훼 하나님께서는 저의 모든 죄악들을 수없이 용서하십니다.

(사43:25)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나를 사랑하시는 야훼 하나님께서는 저의 죄악됨을 일곱 번에 일흔 번 뿐 아니라 그 이상도 저를 용서하시며 "나는 너의 죄를 도무지 기억하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하여 야훼 하나님은 친히 육신을 입으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땅에 오셨읍니다. 모든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하여 야훼 하나님는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를 받으셨읍니다. 이제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씻기시고 용서하신 주님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모든 죄가 용서를 받는 길이 열렸읍니다.


환난 가운데 있던 시편기자는 시86에서 이렇게 간구합니다.
(시86:5) 주는 선하사 사죄하시를 즐거워하시며 주께 부르짖는 자에게 인자함이 후하심이니이다.
(시86:15) 그러나 주여 주는 긍휼히 여기시며 은혜를 베푸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와 진실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시오니

환난 가운데서 건지시는 야훼 하나님.
주께 부르짖는 영혼을 불쌍하게 여기시고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은혜를 베푸십니다.

야훼 하나님께서 저를 수없이 용서하셨듯이 저 또한 저의 이웃들을 마음으로부터 용서하게 하옵소서 늘 간구해야 합니다. 저에게 죄악을 범한 이웃들을 마음으로 용서를 할 수만 있다면 저는 자유로울 것입니다. 보다 세상은 밝아질 것입니다. 미움이 없으니 제가 거하는 곳곳마다 천국의 기쁨을 누릴 것입니다. 저의 마음을 아프게하는 못된 짓을 아무 생각도 없이 행하는 이웃을 용서하기를 기뻐하는 저를 분명 야훼 하나님께서는 보시고 저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며 주님의 인자함으로 충만할 것입니다. 참으로 복된 인생일 것입니다.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by no means clear the guilty)

야훼 하나님는 우리의 죄악됨을 공의로서 심판하시는 심판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성도들은 주님의 재림을 기다립니다. 주님은 재림주로 모든 것들을 엄격하고 공의롭게 심판하십니다.
주님의 재림이 우리가 사는 동안 임할는지 아니면 우리의 육신이 땅에 묻혀 있을 때에 임할는지는 알 수 없읍니다. 주님의 재림의 날이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가 살아 호흡을 하는 동안 신랑으로 오실 주님을 맞이할 신부의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나의 인생의 마지막이 언제 갑지기 임할지를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눅21:34-36)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 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이 날은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로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골3:5-6)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야훼 하나님은 우리의 잘잘못을 반드시 하나님의 기준대로 심판하십니다.
행여나 죄악 가운데서 회개할 시간도 없이 뜻하지 않는 마지막을 맞아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지 않도록 늘 깨어있어 준비하여 약속된 성도의 축복을 받으세요. 땅의 지체에게 속한 악한 성품들이 나타나지 않도록 늘 깨어 있어 조심해야 합니다. 저의 마지막이 갑자기 임할지라도 항상 준비된 성도의 삶을 살도록 해야 합니다.


야훼 하나님의 이름에는 저희를 사랑하시는 무한한 사랑이 담겨져 있읍니다.
자비롭고 은혜로우신 야훼 하나님.
노하시를 더디하시는 야훼 하나님.
인자와 진실이 충만하신 야훼 하나님.
영원한 사랑의 야훼 하나님
용서하시는 야훼 하나님.
심판하시는 야훼 하나님.

야훼 하나님을 잊지 말고 늘 마음에 깊이 새기며 하루 하루의 삶 가운데서 천국을 경험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인생 여러 여정길에서 야훼 하나님을 만나시기를 간구합니다. 만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심을 깨달아가는 축복의 삶을 사시기를 간구합니다.



야훼 하나님,

야훼 하나님의 이름을 되새기어 봅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이름입니다.

주의 자비는 너무나 커서 저같은 죄인을 위해서 피를 흘리셨읍니다. 저는 늘 주님의 자비를 간구합니다.
주의 은혜로 말미암아 저같은 자도 구원의 은총을 입고 천국을 바라봅니다.
노하시를 더디하시는 야훼 하나님께서는 늘 패역한 죄 가운데 있는 저를 보시며 참고 또 참으시며 온전한 주님의 자녀로 소생시키십니다.
인자와 진실이 충만하신 야훼 하나님께서는 저를 세속적인 길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영원한 진리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야훼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이 땅의 어떤 사랑과 야훼 하나님의 사랑을 비교할 수 있겠읍니까.
용서의 야훼 하나님께서는 마음에 담기에도 너무 부끄러운 저의 모든 죄를 십자가에서 이미 용서하셨읍니다.
장차 모든 악과 선함을 공의로 심판하시는 야훼 하나님는 만주의 주이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온 우주의 주제이십니다.

저희들에게 귀하신 이름을 주신 야훼 하나님. 모든 영광을 받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19년 5월 11일 토요일

가장 존귀한 어머니 마리아


(눅1:38)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이번 주는 어머니 주일로 기념하며 어머니의 수고와 눈물에 감사를 드립니다.

성경에는 많은 어머니들이 기록되어 있읍니다.
최초의 어머니인 하와, 석달된 아기를 강물에 떠내려 보내야 했던 모세의 어머니, 눈물로 기도했던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 죽은 아이를 살려 달라고 선지자 엘리야에게 부탁하는 어머니, 세례 요한의 어머니.

많은 어머니 중에 가장 존귀한 축복을 받은 어머니는 바로 예수님의 어머니일 것 입니다.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한 마리아는 큰 축복을 받은 분 입니다. 마라아의 영성을 본 받는 어머니의 축복을 받으시기를 축원드립니다.


마리아는 어떤 영성을 갖고 있었는지를 생각해봅니다.

세상의 기준과는 다르다

(48)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마리아는 환희의 찬가에서 자신은 비천한 출신이라고 고백을 합니다.

흔히 훌륭하고 존귀한 사람은 가문과 부와 권세의 배경을 갖고 있읍니다. 이런 훌륭한 배경을 갖고 있지 않고 존귀한 자가 되면 '개천에서 용이 났다'고 표현을 합니다. 그만큼 배경이 뒷밭침을 하지 않으면 존귀한 사람이 되기가 어려운 것이 현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의 가문은 그다지 내세울것이 없읍니다. 그래서 눅1:27에 단지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라고 소개가 됩니다. 예수님의 아버지인 요셉의 가문은 마1에 기록된대로 아브라함으로 후손인 다윗 왕의 혈통을 이어받은 명망이 있는 가문입니다. 하지만 마리아의 가문은 내 세울것이 없는 가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로서 택하실 때에 마리아의 가문이나 학식이나 재력이나 권세를 보지않고 여호와께서는 마리아의 순결한 마음을 보셨읍니다.
(삼상16:7)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여호와께서는 내 안을 보십니다.
(마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리아는 마음이 청결한 사람이었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택함을 받았읍니다. 이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었읍니다. 예수님을 잉태하고 낳은 순결한 마리아는 하나님을 매일 매 순간 느낄 수 있었읍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는 자들은 정결한 마음을 가진 자들이 택함을 받고 쓰임을 받습니다.
천국을 경험하는 어머니의 축복이 임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

마리아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갖고 있었읍니다. 천사가 예수님의 잉태됨을 알려 주었을때 마라아는 그 말을 그대로 받아 들이고 의심하지 않고 믿었읍니다. 표징을 구하지도 않았읍니다.

누가 저에게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전해 준다면 고지 곧대로 믿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래서 표징을 구하며 확인을 하려고 합니다.

제사장 사가랴에게 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나서 아들 세례 요한을 낳을 것이라 알려 주었읍니다. 나이가 많이 들어 자식을 낳을 수 없었던 사가랴는 믿을 수 없어서 표징을 구합니다. 이에 천사는 증거로서 사가랴가 요한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말할 수 없게 합니다.

기드온의 예를 보면 비천한 기드온에게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라는 소명을 전해 줍니다. 그렇지만 자신의 형펀을 너무나 잘 아는 기드온은 의심하며 표징을 구합니다. 이에 여호와는 바위 위에 놓은 국물을 부은 무교병과 고기를 불에 타서 사릅니다. 그러자 기드온은 자신에게 소명을 맡기신 이가 여호와 임을 확인하고는 "여호와 살롬"이라고 하였읍니다 (삿6:24).

마리아는 천사가 전하여 준 지극히 높은 이의 아들이 성령의 능력으로 자신안에 잉태함을 그대로 믿었읍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라고 고백할 수 있었읍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현실을 생각하지도 않았으며 근심도 하지 않았읍니다. 마리아의 인생에서 갸장 큰 역동적이며 감동적인 고백이었을 것입니다.

(39) 빨리

빨리는 마리아의 흔들리지 않은 믿음의 행동이었읍니다. 이 구절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빨리"라는 단어가 없어도 이 구절을 이해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읍니다. 하지만 성경은 구태여 "빨리"라는 단어를 삽입함으로 마리아의 흔들리지 않은 믿음을 표현합니다.

그 당시에 혼인한 여인이 간음을 하다 잡히면 돌로 쳐죽이는 형벌을 받았읍니다. 마리아는 혼인을 약속한 처녀가 정혼한 자가 아닌 관계로 인한 잉태함의 결과가 무엇인지를 알면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근심하지도 않았읍니다. 왜냐하면 그녀 안에는 성령으로 잉태된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아들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천사의 계시 후에 마리아는 다른 것은 생각지도 않고 빨리 천사가 알려준 대로 엘리사벳에게로 달려 갑니다. 그리고 환희의 찬가(46-55)를 부릅니다,

마리아는 세상을 바라보지 않았읍니다. 세상의 편견에 좌우되지 않았읍니다. 마리아의 마음에는 온통 잉태된 예수님으로 가득해 있었읍니다.

어머니는 세상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존귀한 생명의 잉태의 소식보다 더욱 기쁜 소식은 없습니다. 주님을 믿는 어머니의 마음에는 참 생명이 임재합니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집니다.


마음에 품고

(늑2:19)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새기어 생각하니라
양 떼를 지키던 목자들에 천사가 나타나서 아기 예수의 탄생을 말하여 줄때 하늘이 열려 수믾은 천군 천사가 찬송하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합니다. 이에 목자들은 구유에 누이신 아기 예수를 찿아와서 자신들이 경험한 놀라운 일들을 전해 줍니다. 마리아는 목자들의 말을 듣고 마음에 간직합니다.

(눅2:51) 예수께서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어머니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12살 난 예수는 온가족이 유월절을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 갔다가 예수만 남겨 두고 집으로 돌아 갑니다. 하루 후에 예수님을 찿지 못하자 예수를 찿으러 예루살렘에 다시 올라갑니다. 그리고 예수가 성전에서 선생들과 대화하는 모습을 봅니다. 예수의 부모는 예수에게 한참을 찿았다고 하자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까" 하며 자신의 신성을 말합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 옵니다. 마리아는 아들인 예수가 한 모든 말들을 마음에 두며 새깁니다. 마리아는 마음에 자리잡고 있는 아들 예수를 생각하며 늘 기도하였을 것입니다. .

어머니들은 자식에 관하여 마음에 깊이 둡니다. 아마도 어머니의 마음을 차지하는 가장 큰 부분은 바로 자녀에 관한 일들일 것 입니다. 자녀를 위하여 기도하는 어머니의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마리아는 주님을 마음에 품었읍니다.
주님은 곧 말씀 자체이십니다. 주님을 마음에 깊이 생각하며 새기기 위해서는 늘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말씀안에 계시는 주님의 숨결을 듣기를 간구합니다.


고난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 예수의 정결의식을 드리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성전에서 의롭고 경건한 성령으로 충만한 시므온을 만납니다. 시므온은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눅2:34-35) 시므온이 그들에게 축복하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게게 말하여 이르되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가장 존귀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 마리아.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마리아 이지만 모든 일들이 평안하지만 않았읍니다. 지극히 놓으신 하나님의 아들의 잉태함을 알고 기뻐하여 환희의 찬가를 불렀읍니다. 아기 예수가 점점 자라며 여늬 아이와는 다른 인성과 지성과 지혜가 있음을 보고 마음에는 기쁨이 가득하였읍니다. 하지만 얼마못가 마리아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모진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달려 죽는 모습을 보아야 했읍니다.

우리는 흔히 예수님을 잘 믿으면 늘 행복하고 기쁨으로 가득해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어려운 일도 없고 늘 모든 일들이 순조로이 나아갈 것이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일지라도 고난을 받았어야 했읍니다. 가슴이 찔리는 고통을 통과해야 했읍니다.

어머니들은 많은 고통을 통과합니다. 자녀로 인해 남편으로 인해 가족과의 관계로 인해 재물로 인해 그 외에 여러가지 이유로 마음을 칼로 찌르는 듯한 고통을 받습니다.

고통 가운데 있는 마리아를 예수님은 바라 보십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순간 고통은 사라지고 평강이 옵니다.

고난은 반드시 있읍니다. 고난 가운데서 예수님과 함께 하는 평강이 임하시기를 간구합니다.
고난 가운데 계십니까. 주님을 바라보세요. 고난 저너머의 참된 평강이 다가옵니다.


부모 공경

(요19:26-27)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자녀는 어머니에게 효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하셨읍니다.

십계명의 제 네번째 계명은 부모에게 순종하라 입니다. 첫번째 두번쨰 그리고 세번째 계명은 하나님에 관한 계명입니다. 그리고 네번째로 부모에 순종하라는 계명을 주셨읍니다.

부모를 순종하는 자에게는 여호와는 장수의 축복을 약속하십니다.
(신5:16)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

마리아의 노년은 평안하였읍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기 바로 전에 어머니 마리아를 사랑하는 사도 요한에게 부탁하였읍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 순교하였읍니다. 요한은 마리아가 죽기까지 어머니로서 모셨읍니다.

주님의 은혜를 받은 어머니들은 삶의 평강이 임합니다.
우리 자녀들은 부모를 공경하여야 합니다. 내가 아무리 잘 나 보여도 나를 나주신 나이들어 힘 없으신 부모님께 순종하고 자녀의 도리를 다하며 부모를 사랑합시다. 그런 모습을 보시고 여호와께서 기뻐하십니다.


남편들에게

예수님의 아버지인 요셉은 의로운 사람입니다.
(마1:19)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예수님의 아버지인 요셉은 자신과 정혼한 마리아가 잉태한 사실을 알고 가만히 끊고자 합니다. 자신과 결혼을 약속한 사랑하는 처녀가 잉태했다고 하니 얼마나 괘씸하고 마음에 상처를 입었겠읍니다. 요셉이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꿈에 나타나서 잉태된 아이는 사람이 아니라 성령으로 잉태된 자이며 이름을 예수라고 하라고 알려 줍니다. 요셉은 이 후에 마리아를 데려왔지만 아이를 낳기까지 동침하지 않고 돌보아 주며 보호합니다.

마리아에게는 의로운 남편 요셉이 있어 마리아를 지키고 보호하며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읍니다. 존귀한 마리아에게는 존귀한 남편이 있읍니다.

모든 남편들은 자신의 아내를 돌보고 지키고 보호해야 합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이번 주는 어머니 주일로 기념하며 보냅니다.
저를 낳으시고 기르신 어머니를 생각하며 감사함을 드립니다. 어머니의 희생적인 숭고한 사랑이 있어서 제가 오늘에 이를수 있었읍니다.

말씀을 통하여 무조건적인 순종을 배우기를 간구합니다.
마리아는 천사가 잔헤즌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의 잉태 소식을 듣고 주변의 상황에 전혀 개의하지 않고 기쁨으로 받아들이며 생명의 환희의 찬가를 부를 수 있었읍니다.

주님의 어머니 였지만 마음을 찌르는 고난을 겪어야 했읍니다. 우리 역시 이 땅의 여정을 가면서 저희의 마음을 찌르는 고통의 시간들이 있읍니다. 주님께서 주신 인내로 견디어 내며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며 천국의 기쁨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고결하고 순전한 마리아의 영성을 배우며 주님을 늘 품에 안고 살아가도록 저의 삶을 인도하시며 자비와 긍휼을 베풀어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19년 5월 5일 일요일

끊이지 않는 등불

(출27:20) 너는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감람으로 짠 순수한 기름을 등불을 위하여 네게로 가져 오게 하고 끊이지 않게 등불을 켜되 아론과 그의 아들들로 회막 안 증거궤 앞 휘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여호와 앞에 그 등불을 보살피게 하라.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대대로 지킬 규례이니라.


여호와께서는 광야 생활을 시작하면서 성막을 만드십니다. 그리고 성막 안에는 성소와 지성소가 있읍니다. 지성소에는 여호와의 임재를 의미하는 언약궤가 있읍니다. 그리고 지성소와 성소 사이에는 휘장이 쳐져 있읍니다. 이 휘장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실때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졌읍니다. 성소에는 세가지의 성물이 있읍니다. 진설병을 올려 놓는 떡상, 향을 사르는 분향단 그리고 일곱 촛대가 있는 등대가 있읍니다.

여호와께서는 모세에게 성소에 있는 등대에 순수한 감람유로 만든 기름으로 등불을 밝히고 끊이지 않도록 명령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광야의 길을 가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순결한 기름으로 성소에 있는 등불을 끊이지 않고 항상 켜놓으라 명하십니다.


순결한 기름
(레24:2)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불을 켜기 위하여 감람을 찧어낸 기름을 네게로 가져오게 하여 계속해서 등잔불을 켜 둘지며

등잔불을 켜기 위하여는 기름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공교하고 아름다운 등잔이라도 기름이 없으면 불을 켤 수 없읍니다. 언제라도 등잔을 밝히기 위해서는 기름이 항상 준비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열처녀의 비유를 들며 천국에 대하여 말씀하시며 기름의 중요성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마25:1-3) 그 떄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이하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그 중의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라.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괴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놓고 함께 가져갔더니

열 처녀 가운데 다섯은 미련한 자요 다섯은 슬기로운 자라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미련함과 슬기로움의 기준은 세상에서 말하는 기준과는 사뭇 다릅니다. 주님의 나라에서 미련함과 슬기로움의 기준은 세상의 재물이나 권세나 지식이나 명예가 아닙니다. 단지 기름이 준비되어 있으면 슬기로운 자요 기름이 없으면 미련한 자라고 합니다.

미련한 자는 등불에 쓸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자를 말하며 슬기로운 자는 등불에 쓸 기름을 준비한 자를 말합니다.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등불의 불을 밝혀야 하는데 기름이 없으면 등을 갖고 있다하더라고 불을 밝힐 수 없읍니다. 등불을 밝힌 자들만이 혼인 잔치에 들어가서 즐거움에 참여할 수 있읍니다. 만일 내게 기름이 없어 등불을 밝힐 수 없다면 비록 등을 갖고 있지만 혼인 잔치에 참여할 수 없어 성문 밖에서 슬퍼서 이를 갈고 원통해 할 수 밖에 없읍니다.

천국은 지식이나 명예나 권세나 재물로 가는 곳이 아닙니다. 가진 것 없고 곤고한 삶을 살지라도 그 사람 안에 등불을 밝힐 기름이 준비되어 있으면 슬기로운 자로서 천국을 소유한 자입니다.

기름은 성령을 의미합니다.
주님을 믿는 자에게 성령의 기름이 준비되어 있으면 그는 슬기로운 자이며 신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합니다. 그렇지만 주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성령의 기름이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그는 신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할 수 없읍니다.

그러므로 내 안에 성령의 기름이 준비되어 있는지를 항상 살펴 보아야 합니다. 나의 마지막이 언제 임할 지를 저는 알 수 없읍니다. 갑자기 세상의 마지막을 맞이 할 때 내 안에 성령의 기름이 없으면, 저는 아무리 교회에 규칙적으로 열심히 나갔어도 결코 구원을 받을 수 없읍니다. 주님은 나는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라 하십니다. 주님의 자녀됨을 인정받지 못한 자들은 신랑의 혼인 잔치에 참여 할 수 없어 성 밖에서 이를 갈며 슬퍼할 수 밖에 없읍니다.

성령의 기름으로 내 마음의 등을 항상 켜놓아야 합니다. 그래서 빛의 자녀로 살아가야 합니다.
떄로는 좌절과 실패와 슬픔을 경험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믿음을 버려서는 않됩니다. 그럴수록 어려운 광야길을 가는 동안 나와 함께 하시며 인도하시는 야훼 주님의 임재에 감사하며 끊임없이 주시는 성령의 기름으로 내 안의 불을 환하게 비쳐야 합니다.

내 안에서 성령의 불이 지속적으로 비추어 준다면 우리는 고난의 광야길에서 주님을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생수를 주시고, 만나를 주시고, 구름 기둥과 불 기둥으로 지키시는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렇지 않고 기름을 준비하지 못하고 불평만 하다가는 주님의 임재를 느낄 수 없어 결국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게 됩니다.

열 처녀의 비유를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신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령의 기름이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등을 밝힐 기름이 준비되었읍니까?

순결한 기름은 이렇게 얻어집니다. 우선 잘 익은 olive들을 수확해서 고루 고루 빻습니다. 그리고 껍질들을 걸러 내면 순결한 기름이 만들어 집니다.

껍질은 내 안에 있는 죄성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시간이 아직도 남아 있을 때에 등을 밝힐 순결한 기름을 준비해야 합니다. 정한 기름을 드리기 위해서는 내 안에 있는 죄의 껍질들을 제거해야 합니다. 갈5:19-21에서 성령의 열매와는 반대가 되는 육체에 속한 성품들을 언급합니다. 이러한 육체에 속한 죄성들을 빻아내야 합니다.

(갈5:19-21)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와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내 안에 자리잡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게 하는 불순한 죄성들을 빻아 걸러내어 성령의 도우심으로 순결한 기름을 준비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모든 불순불들을 성령의 물로 씻김을 받고 성령의 불로 태워져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정결한 기름으로 주님께 드리는 둥을 켤 수 있읍니다.


등불을 켜되

순결한 기름으로 붙여진 등불은 성막 안을 환하게 비춥니다. 어둠을 비추며 감추어진 것들을 드러내는 빛은 주님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이 빛이라고 요8:12에서 선포하십니다.
(요8:12)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구약에는 아론의 혈통을 받은 자손들만이 성소 안의 등불을 밝힐 수 있었읍니다. 하지만 에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 후에는 주님을 믿는 자녀들은 모두 제사장이 되었읍니다. 주님의 인침을 받은 주님의 자녀들은 제사장이 되었기에 등불을 밝혀야 합니다. 우리는 등불을 밝혀야 하는 임무를 부여받은 주님의 자녀들입니다.

주님의 거룩한 빛이 비쳐지는 곳에 어둠은 물러갑니다. 빛으로 충만한 주님의 자녀들이 있는 곳에는 주님의 사랑으로 가득합니다.

빛 가운데서 행하세요.
(요일1:7)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모든 죄에서 사함을 얻은 자들은 빛 가운데서 행하여야 합니다.


끊이지 않고

등불의 불은 꺼지면 않됩니다. 끊임없이 등잔의 불은 사방을 밝혀야 합니다.

광야길을 가면서 무엇이 중요합니까?
곡식이 많은 것이 중요합니까? 곡식이 창고에 많아서 다 먹지 못하면 그 곡식은 결국은 썩습니다.
집이 큰 것이 중요합니까? 비록 남루해 보일지라도 밤에 두 발을 쭉벋고 편히 쉴 장막이 있으면 충분합니다. 좋은 차가 중요합니까? 좋은 차가 없어도 이곳 저곳을 다니기에는 건강한 두 다리로 충분합니다. 금은이 있어야 합니까? 금은은 없어도 사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광야를 지나면서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며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광야를 갈 수 없습니다. 광야 길에서 저와 동행하시는 주님을 만나세요.

주님과 동행하는 삶은 나를 버리는 훈련입니다. 나를 버림은 곧 나의 뜻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나의 자아의 겸손함을 배우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듯이, 나 또한 주님을 위하여 죽어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나를 죽여야 합니다.

나는 죽고 주님께서 사신 광야길.
야훼이신 주님과 함께 하는 광야 길에는 주님의 축복이 있읍니다.
생수를 마시고, 매일 필요한 생명의 떡인 주님의 말씀을 먹으며, 구름 기둥으로 불 기둥으로 지켜 주시는 길에 옷과 신발이 헤어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광야길을 축복으로 인도하시는 야훼이신 주님의 은총으로 가득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 안에 성령의 기름으로 충만하여 끊임없이 어둠을 밝히시기를 축원을 드립니다.
광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끊임없는 주님과의 동행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연단과 고난의 광야 가운데 있지만 저를 먹이시고 입히시고 잠잘 곳을 예비하시고 주님을 바라 볼 수 있게 하시니 참으로 감사들 드립니다.

어둠 가운데서 길을 훤히 비추는 등잔의 불이 끊어지지 않기를 간구합니다.
광야 길을 가는 동안 주님의 임재를 더욱 깊이 느끼기를 간구합니다.
광야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주님을 더욱 알기를 원합니다.
광야를 가며 참된 저의 모습을 보게 하소서.

저의 눈을 열어 주옵소서. 방황하지 말고 불평과 불만하지 않게 되기를 원합니다. 늘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빛의 자녀로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만을 바라보기를 간구합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길에서 저를 십자가에 내려 놓는 훈련을 잘 감당할 수 있기를 간구합니다.
저와 항상 함께 하시는 주님과 동행하는 법을 깨닫도록 인도하옵소서.

오늘도 저를 광야 길로 이끄시니 감사합니다 .
야훼이신 주님께서 저와 함께 하신것 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19년 4월 21일 일요일

살아 나셨느니라


(마28:6-7)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 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HE is not here. for HE is risen, as HE said. Come, see the place where the LORD lay. And go guickly, and tell HIS disciples that HE is risen from the dead; and behold, HE goes before you into Galilee. There shall you see HIM.




오늘은 부활절 입니다.
우리 주님을 믿는 자녀들에게는 가장 성스러운 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주님의 부활함이 없다면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지금도 세상은 주님의 부활을 부인합니다. 주님의 부활이 거짓이라고 속입니다.

하지만, 주님을 믿는 저는 예수 그리스도 이신 주님께서는 저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음을 흔들림 없이 믿습니다. 저를 위하여 부활하신 주님을 찬양하며 모든 영광을 드립니다.


여기 계시지 않고 (HE is not here)

여인들은 안식후 첫날 새벽에 향품을 예수께 바르기 위해서 무덤으로 왔읍니다. 무덤을 가로막았던 심히 큰 돌은 굴려져 있고 무덤은 열려 있읍니다. 무덤 안에 들어가니 주님은 계시지 않고 천사가 있읍니다. 천사가 주님은 "여기 계시지 않다" 라고 여인들에게 말합니다.

여기 계시지 않다.
얼마나 놀라운 소식입니까!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지 전에 십자가에 달려 죽고 삼일후에 다시 사신다고 했으니 마음 속으로는 설마 설마 했읍니다. 그런데 사실이었던 겁니다. 주님은 무덤에 계시지 않고 다시 사셨읍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은 주님의 시신을 안치한 무덤은 텅 비어 있읍니다. 주님은 무덤에 계시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음부에 내려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셨읍니다. 사망의 권세를 이기셨기에 더 이상 죽음은 주님을 가두어 둘 수 없읍니다. 주님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읍니다. 우리는 죽은 주님을 경배함이 아니라 다시 사신 영원토록 살아 계신 주님을 경배합니다.


말씀 하시던 대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에게 임할 일을 이미 제자들에게 말씀해 주셨읍니다.
(마16:2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서 나타내시니

(마10:17-19)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실 때에 열두 제자를 따로 데리시고 길에서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고 조롱을 받고 채찍질을 당하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을 말씀하신대로 주님은 고난과 핍박을 받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삼일 후에 다시 살아나셨읍니다.

주님은 곧 말씀이십니다. 말씀은 진리입니다.
(눅24:6)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주님은 어떻에 말씀했는지를 기억하라고 하십니다.
말씀이 기억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반복해서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반복해서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으면 우리의 기억에서 점차로 잊어 버립니다.
주님께서 바로 저를 위해서 고난과 핍박을 받으셨음은 바로 저를 살리시기 위함이셨읍니다. 이를 기록한 말씀을 늘 가까이 해서 우리는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순간 순간 마다 말씀을 가까이 해서 주님께서 행하신 사랑을 기억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아 나셨느니라 (HE is risen)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주님의 부활하셨음을 알았지만,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무덤을 지켰던 군인들을 매수하여 주님의 제자들이 시체를 도둑질하였다고 거짓 증거하게 하였읍니다. 그래서 오늘까지도 주님의 부활이 거짓인 것처럼 사람을 의심하게 하고 믿음을 빼앗아 주님의 자녀가 되지 못하게 히여 사탄의 자녀가 되게 합니다.

주님의 부활은 사실입니다.
주님의 부활의 사건은 인류를 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한 사랑과 긍휼과 자비로 충만하신 하나님의 계획이셨읍니다. 사탄이 막으려고 사람들을 사용하였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해 졌읍니다. 주님의 부활의 사건은 저와 같이 미련하고 죄악된 인생을 구원하여 천국의 소망을 품고 이 땅에서 살아가게 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무한하신 은혜입니다.


와서 보라 또 빨리 가서

주님의 천사는 와서 "그가 누우셨던 것을 보라"라고 말하고 이어서 빨리 가서 제자들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하라고 권면합니다.

제자의 삶은 주님의 부활하심을 몸소 체험하고 시간을 지체하지 말고 주님께서 다시 살아나셨음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는 사명을 부여받았읍니다.

주님의 자녀들이 다시 사신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명을 온전하게 감당하기 위해서는 주님께서 겪으셨던 일들을 직접 보아야 합니다. 주님을 온전하게 믿기 위해서는 십자가게 달려 죽으시고 다시 사신 주님을 만난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주님을 만난 경험이 없으면 믿음은 흔들리기가 너무나 쉽습니다.

다시 사신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우리는 주님께서 부활하신 곳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을 보고 만나야 합니다. 오직 다시 사신 주님을 와서 본 성도들은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이 세상을 이기며 전도자로서 사명을 감당할 수 있읍니다.

참된 주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서는 다시 사신 주님을 만난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다시 사신 주님을 만난 경험이 있으십니까? 아니면 있는듯 한 것 같기도 하십니까? 주님을 만난 경험은 우리의 기억 깊은 곳에 선명하게 남아 있을 수 밖에 없읍니다.

다시 사신 주님을 만나셔야 합니다. 주님 앞으로 나아 와서 다시 사신 주님을 보세요. 구원의 확신을 갖고 천국을 소망하는 성도의 삶을 살아 가시도록 축원을 드립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경에서 말씀하신대로 고난과 핍박을 받으시고 저와 같은 죄인들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읍니다. 그리고 다시 살아 나셨읍니다.

다시 사신 주님을 와서 보고 만나십시요. 만난 주님을 빨리 가서 전하는 전도자의 사명을 감당하며 이 땅에 살아 가는 것을 축원합니다.

다시 사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은 바로 저를 위하여 다시 살아나셨읍니다.
다신 사신 주님을 찬양하며 모든 영광을 드립니다.
저의 삶 가운데서 다시 사신 주님을 전하는 사명을 온전하게 감당하기를 간구합니다.
주님 앞에 가기까지 늘 주님과 동행하여 다시 사신 주님을 전하는 사명을 감당하게 하옵소서.
저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사신 주님의 은혜에 참으로 감사합니다.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드립니다. 아멘.

2019년 3월 31일 일요일

여호와 닛시

(17:8-16) 그 때에 아말렉이 와서 이스라엘과 르비딤에서 싸우니라.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우리를 위하여 사람들을 택하여 아말렉과 싸우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 꼭대기에 서리라.

여호수아가 모세의 말대로 행하여 아말렉과 싸우고 모세와 아론과 홀은 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가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홀이 한 사람은 이쪽에서 한 사람은 저쪽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 여호수아가 칼날로 아말렉과 그 백성을 쳐서 무찌르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 내가 아말렉을 없이하여 천하에서 기억도 못하게 하리라. 모세가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 이르되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과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하였더라.

 여호와 닛시의 뜻은 여호와의 군기 (Lord my banner)” 입니다 

이스라엘이 기적적인 여호와의 간섭으로 출애굽을 한 후에 처음으로 한 전쟁이 아말렉과의 전쟁이었읍니다. 이스라엘은 전쟁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읍니다. 430년간 애굽에서 종살이를 했기 때문에 군사훈련을 받지 못했고 변변한 창도 칼도 없었으며 병거는 더더구나 없었읍니다. 이스라엘은 전쟁에 싸워본 경헙을 가진 자도 없었고 단지 성을 쌓기 위해 돌을 나르며 육축을 돌보는 일을 했기에 전쟁에 적합한 군대와는 거리가 먼 이들이었읍니다.

그런 오합지졸과 같은 이들이 강한 아말렉 군대를 만났읍니다. 결코 이길 수 없었던 아말렉을 이겼읍니다. 전쟁에서 이긴 후에 모세는 자신들을 아말렉으로부터 지켜주신 여호와께 단을 쌓고 예배를 드린 후에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부릅니다.

아말렉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을까요?
(25:17-18) 너희는 애굽에서 나오는 길에 아말렉이 네게 행한 일을 기억하라. 곧 그들이 너를 길에서 만나 네가 피곤할 때에 네 뒤에서 떨어진 약한 자들을 쳤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아말렉은 일행에서 힘이 약해 뒤에 처진 자들을 쳤읍니다. 아말렉은 아직 광야생활에 익숙하지 못한 이스라엘의 진중에서 힘이 없어 뒤에 처진 자들을 쳤읍니다.

아말렉은 나의 약한 부분을 지속적으로 치고 들어옵니다. 아말렉은 끊임없이 틈만 나면 나의 약한 부분을 건듭니다. 제가 영적으로 견고하게 서있지 않을때 교묘하게 저의 약한 곳을 파고 듭니다.  

나의 약한 부분은 어디일까요? 곧 연약한 육체의 소욕을 말합니다.
(5: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은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며 영에 속하지 못하게 합니다. 육체의 소욕을 따르면 땅의 지체가 행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이를 골3:5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3: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성령의 소욕에 거하여야 하는데 이를 방해하고 땅의 지체에 속하도록 이끌게 하는 것이 제가 부딪쳐서 이겨내야 하는 아말렉입니다. 저를 가로막는 아말렉은 저의 약점을 너무나 잘 압니다. 제가 영적으로 연약할 때마다 저의 약한 부분인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정욕과 탐심과 거짓으로 치고 들어오는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이겨야 합니다. 육신의 소욕을 행함으로 땅에 속한 지체가 되도록 아말렉은 지속적으로 제가 어둠에 속하도록 끊임없이 권고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저의 약한 곳을 치고 들어오는 아말렉을 이길 수 있읍니까?

손을 들면
(11)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

모세가 손을 들고 있으면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이겼지만 손을 내리면 졌읍니다. 하루종일 손을 들고 있을 수 없어서 모세를 앉히고 아론과 홀은 곁에 서서 모세의 여호와께로 향한 두 팔을 붙들어 해가 지도록 모세의 손이 내려오지 않게 하여 결국 아말렉과의 싸움에서 이겼읍니다.

여호와께 향한 손을 들고 있으면 우리는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이길 수 있읍니다. 그렇지 않고 여호와께로 향한 손을 내리게 되면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지게 됩니다.

우리는 매일 매일을 아말렉과의 전쟁을 치릅니다. 저를 해하려고 저를 치고 올라오는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모세가 여호와께로 향한 손을 내리지 않았듯이 우리 또한 여호와께로 향한 손을 지속적으로 들고 있어야 합니다.

여호와께로 향한 손이 내려지지 않게 되기 위해서는 예배의 회복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중심으로  여호와께 진정과 신령으로 드려지는 예배의 회복이 있어야 합니다. 습관적으로 드려지는 에배 가운데 주님의 임재가 있을수 없으며 주님께서 함께 하시며 아말렉을 이기는 역사는 이루어 지지 않습니다. 주님의 임재가 없다면 우리는 나를 가록막는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결코 이길 수 없읍니다.  


귀에 외워 들리라
(1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

여호와께서는 모세에게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이기게 하신 여호와의 행하심을 책에 기록하여 늘 기억하라고 명하셨읍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도 이 말씀이 기록된 성경이 전해졌읍니다.

참 우리는 복된 자들입니다. 지금도 성경을 구하기 어려우며 마음대로 성경을 읽지 못하는 곳도 많은데 저희들은 말씀을 마음만 먹으면 가까이 하며 묵상하며 말씀이 귀에 쟁쟁할 수 있으니 얼마나 복된 인생들니까.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들을 기록한 말씀인 성경을 늘 가까이 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는 말씀을 통하여 저를 향하신 여호와의 뜻을 전해 주십니다. 말씀의 회복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말씀은 저를 살립니다. 말씀에는 죽어가는 저의 영혼을 살리는 여호와의 권능이 담겨져 있읍니다. 말씀안에 감추어진 여호와의 권능의 능력을 캐내어가는 축복된 영혼이기를 축원드립니다.
저의 평생에 여호와께서는 저를 여호와 닛시의 축복으로 인도하심을 저는 믿습니다. 그런 여호와 앞에 나아가는 길을 말씀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여호와 닛시
(15) 모세가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

저의 인생에서 만나는 아말렉. 적은 너무나 강하여 도저히 승산이 없는 싸움입니다. 저는 질 수 밖에 없읍니다. 여호와께서 손을 들어 주지 아니하시면 전쟁에서 패할 수 밖에 없읍니다

여호와께서는 제가 어떤 아말렉을 만날지를 잘 알고 계십니다.
여호와께 향한 손을 높이 들고 소리치며 앞을 하하여 나아갑시다.

(삼상17:47)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여호와 닛시.
전쟁은 여호와께 속하였읍니다. 겉으로보면 사람끼리의 전쟁인 것 같지만 여호와께서 간섭하시며 인도하십니다. 또한 저의 연약함을 치고 들어 오는 영적 전쟁에서 이겨야 합니다. 모든 전쟁에서 주님께서 저와 함께 하시므로 저를 가로막는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이미 이겼읍니다    

(33:20) 우리 영혼이 여호와를 바람이여 그는 우리의 도움과 방패시로다.
저의 영혼은 늘 주님을 바랍니다. 주님을 향한 저를 주님은 긍휼히 여기시며 자비를 베푸십니다. 제가 연약하여 아말렉이 저를 쓰러뜨리고자 마구 엄습할 때에 제 안에 계시는 주님은 제게로 날라드는 모는 화살을 방패로 막으시고 저를 보호하십니다. 저는 여호와 닛시라 부르며 저를 지키시는 주님께 영광과 감사를 드립니다.

닛시깃발이라는 단어가 시60:4에 쓰였읍니다.
(60:4) 주를 경외하는 자에게 깃발을 주시고 진리를 위하여 달게 하셨나이다.

주님께서는 주님을 경외하는 저에게 여호와 닛시여호와의 깃발을 주셨읍니다.
주님을 경외하십니까. 그렇다면 여호와의 깃발을 주셨읍니다. 여호와의 깃발을 소유한 자들은 이 땅에서 이미 승리를 약속받았읍니다.

여호와 닛시.
놀라운 축복을 주신 여호와여 모든 영광을 받으소서.

 
여호와 하나님,

오늘도 어김없이 아말렉은 저의 약한 부분을 치고 들어 올 것입니다. 저 혼자의 힘으로서는 결코 저를 끌어 내리려는 아말렉을 이길 수 없읍니다. 아말렉은 저를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저의 연약한 부분을 계속해서 건드리며 저를 넘어뜨리려 합니다.

오직 제 안에 계신 주님의 은혜로 저는 아말렉을 쳐 낼수 있읍니다. 여호와의 은혜가 오늘도 저와 함께 하심으로 저는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승리합니다.  저를 가로막는 아말렉을 쳐내신 여호와의 은혜에 감사합니다. 저는 두 손을 높이 여호와께로 햫하고 여호와 닛시하며 승리의 개가를 부르게 하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에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