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4월 23일 일요일

억지로 지게 된 십자가


(23:26) 그들이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것을 붙들어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따르게 하더라.
(27:32) 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에게 예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워가게 하였더라.
(15:21)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 그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성경에서 이름이 나오는 것은 큰 영광이라 생각한다. 권력자도 아니고 뛰어난 업적을 쌓은 것도 아닌 구레네 사람 시몬의 이름이 성경 이곳 저곳에서 언급이 된다. 억지로 예수님 대신에 십자가를 지었지만, 그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기뻐하시는 사람이었다.
이 말씀을 생각하며 주님께서 자신을 따르기 위해서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하신 말씀이 생각이 난다.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주님을 따르는 자들에게는 주님께서 각자에게 지워준 어려움과 문제들의 십자가가 있는데 그것을 온전하게 감당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부인하고 주님을 따라야 한다고 제자들에게 가르치신다.
이 말씀의 좋은 예가 시몬일 것이다.
누가복음에는 표현되어 있지 않지만 마27:32과 막15:21을 보면 시몬은 억지로란 단어를 삽입하여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었다고 부연하여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다.  시몬은 기꺼이 자신이 원해서 십자가를 대신 진 것이 아니라 자신의 뜻과는 상반되게 십자가를 억지로 지었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주님의 뜻
시몬은 억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는 사건을 통하여 주님을 만났고 그 후에는 완전하게 변화된 삶을 살며 주님께서 계신 천국을 소망하는 축복받은 인생의 길을 가게 된다.  시몬이 대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진 것은 구원을 얻게 하시는 이해 할 수 없는 주님의 전적인 은혜이다.  억지로 십자가를 대신 지었지만, 이 사건은 시몬은 이해할 수 없는 주님의 뜻이었던 것이다.
구레네는 현재 아프리카 북부에 있는 리비아의 수도인 트리폴리이다.  무슨 일인지 시몬은 그곳으로부터 예루살렘에 오게 되었다. 13:1의 말씀에서 시몬을 니게르 시몬이라 말한다. ‘니게르는 피부가 검은 아프리카인을 말한다. 아마 시몬은 아프리카의 피를 이어받은 혼혈 유대인이며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온듯 하다. 그런데 마침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구경을 하고 있었다. 피투성이의 처참한 몰골의 한 사내가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가다 너무나 힘이 들어 주저 앉아 있다. 아무리 군사가 채찍을 내리쳐도 너무나 지치고 힘도 없어 꿈적도 하지 않는다. 그러자 군졸 중의 하나가 갑자기 자신을 지목하여 끌어 내어 대신 억지로 십자가를 지게 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을 구경하다가 전적으로 타인에 의하여 부지불식간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게 된 시몬 
시몬은 자신이 자원해서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지 않았다.
예수님이 불쌍하고 가엽게 보여서 십자가를 대신 진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듣고 변화 받아서 십자가를 대신 진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형제요 친척이여서 십자가를 대신 진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제자여서 십자가를 대신 진 것이 아니다.
어쩌다가 그 시간에 그 자리에 있다가 뜻하지 않게 지목되어 십자가를 지게 되었다.
주님을 만나는 것은 나의 뜻대로 내가 원해서 만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생각지도 못한 장소와 때에 뜻밖으로 주님을 만나게 된다. 주님께서 나에게 베푸시는 은총이며 나를 택하신 주님의 뜻이다.
 자녀로 택하심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다.
시몬은 자신의 뜻은 아니었지만 주님을 만났고 택함으로 구원을 입었다.
시몬은 방관하며 구경하는 한 사람으로 피투성이가 된 예수님의 마지막 길을 보고 있다가 억지로 택함을 입었다. 시몬의 선한 행위로 주님의 택함을 받아 십자가를 지고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다 
시몬과 같이 우리 역시 주님의 은혜로 값없이 속량함을 받아 주님의 자녀가 되었다. 나의 어떤 선한 행위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닌 전전인 하나님의 은혜다.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마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8-9)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삶의 전환점
얼마나 축복을 받은 인생인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과 만난 후의 삶은 전적으로 다른 삶을 살았던 구레네 사람 시몬. 


시몬은 억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었다.
십자가를 지고 가면서 불평하고 욕도 하였을 것이다. 그러면서 내가 대신 진 십자가에 달릴 예수님이 누구인지 궁금했을 것이고, 예수님을 간혹 쳐다 보았을 것이며 예수님 역시 자신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가는 시몬을 쳐다 보았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자신을 알고 싶어하는 자에게는 우리 인간이 이해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누구인지를 알게 하신다.
(19:3) 그가 예수께서 어떤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19:5)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22:61-62)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더라.


공통으로 사용된 단어는 본다가 사용되었다.
예수님께서 누구인지를 보기를 원하는 자를 예수님께서 보실 때에 그에게는 축복이 임한다.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알고 싶었던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났고, 그 후의 그의 삶은 전적으로 바뀌었다.
삭개오가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보고자 해서 나무위에 올라가 있을때, 예수님께서 삭개오가 있는 나무 아래에 오셔서 삭개오를 보자 삭개오에게는 축복이 임했으며 그와 그의 집에는 구원이 임했다.


주님을 세번 부인한 베드로는 주님께서 자신을 쳐다 보시자 비로서 참된 주님을 만나게 되어 전적으로 변화를 받아 주님의 제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게 된다. 그전에는 무섭고 두려워서 사람들에게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였지만, 주님께서 쳐다 보시자 그는 변화를 받아 죽음도 두려워 하지 않는 주님을 복음을 전하는 주님의 제자로 바뀐다.


성경에는 기록이 되어 있지는 않지만 주님께서는 분명 자신의 십자가를 대신 진 시몬을 보셨을 것이다.
시몬은 그저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형수들을 구경하던 방관자의 하나였지만, 주님께서는 시몬을 자신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갈 자로 택하셨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과 만난 후의 전적인 다른 삶을 살게 된 시몬.
자신의 십자가를 대신 진 시몬을 바라 보신 예수님. 그는 전혀 생각지도 알지 못했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진 사건은 그의 삶의 전환점이었던 것이다.  주님을 만난 시몬은 그 후 전적인 삶의 변화를 경험하며 초대교회의 귀한 초석이 되었으며, 그로 인해 지금의 나에게도 복음이 전하여졌다.  시몬이 억지로 십자가를 진 것은 그의 삶에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축복이며 주님의 은혜였던 것이다.



변화된 시몬
주님의 십자가를 대신 진 시몬은 그 후 변화된 삶을 살게 된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었기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까지 지켜 보았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모습을 지켜 보았고, 얼마있지 않아 온 하늘과 땅을 캄캄하게 뒤덮는 깊은 어둠의 두려운 신기한 현상을 보았고, 예수님께서 강도와 제자와 하나님과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으며, 군사들이 수군거리는 것을 들었고,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고 돌무덤에 안치된 후 삼일 후에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졌는데 더욱 놀라운 일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고 그 후에 제자들 앞에 나타나셨다는 믿을 수 없는 놀라운 소식이 들리며 내가 대신 십자가를 진 예수님은 누구이신가 더욱 알고 싶어졌을 것이다.


십자가를 대신 진 시몬을 제자들은 보기를 원했을 것이다. 시몬 역시 자신이 대신 십자가를 진 예수에 대하여 알고 싶어서 제자들에게 찿아갔을 것이다.  시몬은 주님의 제자들과 대화를 나누며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었고 예수당의 일원이 되었을 것이며 그 후에 초대교회의 귀한 일군의 하나가 되었다.  그후 시몬은 안디옥 교회를 섬기게 된다.

11:19-21에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서 복음을 전파하며 수 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님께 돌아왔다고 전하고 있다.
(11:19-21)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예수님을 만나 변화된 시몬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대로 병든 자를 고치고 귀신들린 자를 고치고 주의 복음을 전파하는 전도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많은 이들이 주님의 품으로 돌아 오게 되었으며 안디옥교회의 초석이 되었다.
시몬은 주님의 제자의 삶을 살았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주의 복음을 전파하며 포로 된 자들을 자유케 하였으며 병든 자들을 고치며 천국을 선포하였다.
(4:18-19)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13:1에는 안디옥 교회의 사역자들을 소개하는데 곧 바나바, 구레네 사람 시몬과 루기오, 그리고 사울이 나온다. (13:1)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시몬은 안디옥 교회에서 선지자요 교사로서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섬겼다. 시몬은 사울과 바나바의 동역자였던 것이다.  사울은 이들과 친분을 가졌다.
사도바울은 로마서에서 루포와 그의 어머니 곧 시몬의 아내를 소개한다.
(16:13)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의 어머니는 곧 네 어머니니라.
특히 로마교회의 성도들에게 루포의 어머니를 너의 어머니라 소개를 한다. 그만큼 시몬과 사도바울은 친구처럼 지냈으며 초대교회에서 주님께서 귀하게 쓰신 종이었다.  그의 아들들인 루포와 알렉산더 역시 교회의 중요한 일군이 되었다. 그래서 마가는 시몬을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라고 소개를 한다.
(15:21)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 그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시몬은 성경에서 말씀하듯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억지로 대신 지었지만, 예수님을 만났다.  그 후에는 전적으로 변화된 삶을 살아 초대교회의 중요한 초석이 되었다. 그 후 시몬은 천국에서 많은 영혼들에게 귀감이 되었을것이다.

말씀을 정리하며,
이해할 수 없는 주님의 은혜가 지금의 우리에게도 임한다.
원하지 않는 십자가를 억지로 대신 지었는가?
전혀 원하지 않는 십자가를 대신 지게 하심은 주님의 은혜이다.
내게 억지로 지워진 십자가를 지고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자. 언젠가는 골고다에 이를 것이지 않겠는가. 그곳에서 내게 지워진 십자가를 내려놓고 예수님께서 계신 곳으로 나아가자.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님을 구경하던 구레네 사람 시몬은 주님의 택하심을 입었읍니다.
십자가를 대신 지게 된 것은 자신의 뜻은 결코 아닌 타인의 뜻이었읍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자신의 십자가를 대신 지게 하려는 주님의 뜻이었읍니다.
무거운 십자가를 대신 억지로 지게 된 시몬은 불평하고 원망하며 십자가를 지었지만
주님은 자신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힘들어 하는 시몬을 보시며 사랑을 베푸셨읍니다.
시몬은 십자가를 골고다까지 대신 지고 올라가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모습을 가까이서 목격을 하였읍니다. 두 손과 발을 못박히고 가시면류관을 쓰시고 온 몸이 피 범벅인 되어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모습은 참혹하였지만 그 가운데서 전해져오는 주님의 모습은 이해 할 수 없는 평온함과 권위가 있었읍니다.
온 하늘이 캄캄하게 어두워 지는 것을 보며 두려운 마음으로 과연 이가 누구인데 이같은 일들이 일어나는가 의아해 하였읍니다. 그래서 시몬은 주님이 누구인지를 알고 싶어 했으며 결국 시몬은 주님을 만났읍니다.
시몬은 주님께서 택하신 사람이었읍니다.
그 후에 그는 변화를 받아 안디옥 교회의 귀한 일군이 되었읍니다.
그가 전하는 주님의 복음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주님의 품으로 돌아갔으며,
오늘의 저에게도 복음이 전하여져서 주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의 근원이 되게 하셨읍니다.
시몬은 자신에게 억지로 지워진 십자가를 대신 지고 골고다에까지 지고 갔읍니다.
자신이 원하지 않는 십자가를 억지로 대신 지었읍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시몬에게는 무엇과도 바꿀수 없는 비교할 수 없는 축복이었읍니다.
저에게도 때로는 원치 않는 십자가가 억지로 지워집니다.
하지만 억지로 제가 대신 지는 십자가는 주님께서 베푸시는 은총이며 축복입니다.
억지로 진 십자가를 통하여 주님을 만나게 하옵서서.
억지로 지워진 십자가를 달게 지고 가는 훈련을 잘 받기를 원합니다.
저의 삶이 전적으로 변화받기를 원합니다.
제게 지워진 십자가를 달게 지고 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17년 4월 16일 일요일

부활절에 드리는 기도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 말씀을 이루시기위해 주님은 몸소 십자가에 달려 죽는 형벌을 마다하지 않으셨읍니다.


창에 옆구리가 찔림으로 심장이 터져 온 몸의 피를 다 쏟으셨으며, 몽둥이로 주먹으로 무지막지하게 맞으셔서 온 몸은 상하셨읍니다. 아무런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죽어야 하는 흉악한 죄인으로 징계를 받으셨으며, 끝에 쇠붙이들이 붙은 채짝을 맞음으로 온 몸은 성한 곳이라고는 찿아 볼 수 없이 갈기 갈기 찢겨나가셨읍니다.
저를 너무나 사랑하사 주님은 모든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읍니다.
주님께서 받으신 모든 형벌은 제 갈길로 가는 양과 같은 어리석은 저의 모든 허물과 죄악을 용서하시고 늘 고난 가운데 있는 지쳐있는 저에게 평강을 주시기 위함이셨읍니다. 또한 주님께서 받으신 고난으로 저의 연약한 육신의 질병은 고침을 받고 상처난 저의 영혼 또한 나음을 입었음을 확신합니다.


예수의 시체를 장사지내기위해 준비하러 온 여자들은 예수님의 시체를 찿지 못해 근심하고 있을때에 두 천사가 나타나서 어찌하여 살아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찿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을 말씀하신 예수님을 기억하라하며 기쁜 소식을 전하여 주었읍니다.


우리는 죽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하나님의 아들의 권세로 이기기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로 믿습니다. 저의 죄악과 허물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저의 마음에 늘 기억하기를 소망합니다. 저의 마음속에는 늘 살아계신 주님을 저의 생명을 속하여 주신 구세주로 기억을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시기를 평강이 있을지어다 그리고 그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멀씀하셨읍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관심은 두려워 떨고 있던 제자들의 평강이었읍니다.
그래서 첫마디가 너희는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며 제자들의 평강을 축원하셨읍니다.
부활의 신앙을 가진 저희 역시 주님꼐서는 저희의 평강을 간구하십니다. 주님께서 저의 삶을 주관하시고 인도하실 것을 믿습니다. 이제 얼마 있지 않아 곧 저희의 생명을 다 마치고 주님 앞으로 나아가기까지 이 땅의 삶이 때로는 어렵고 곤고할지라도 늘 평강을 갖기를 간구합니다.


평강을 마음을 갖고 주님의 성령을 충만하게 받기를 간구합니다.
제 안에 계신 성령께서 들려 주시는 주님의 뜻을 듣고 순종하며 저를 위하여 창에 찔리고 온 몸이 상하고 십자가의 징계를 받으시고 채찍에 맞으시고 결국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지만 삼일후에 하나님의 아들의 권세로 부활하신 주님을 제 마음속에서 항상 기억하며 어떤 환경에서도 주님께서 주시는 평강 가운데 거하기를 소망합니다.


저의 삶을 통하여 주님 홀로 영광을 받으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감사드리며 기도합니다. 아멘.

2017년 4월 2일 일요일

이에 스스로 돌이켜

(15:11-20)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나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읆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잘 알려진 탕자의 말씀이다.
세 사람이 나온다. 탕자, 형 그리고 아버지.
탕자는 세상에 나가 방탕하며 죄를 범하였고 결국은 지쳐서 돌아오는 모습이, 집에서 순종하던 형은 돌아온 동생을 아버지가 환대하며 맞아주자 분노를 하는 모습이, 아버지는 멀리 떠난 탕자를 무작정 기다리다 돌아오자 너무 기뻐서 다시 새옷을 입히고 반지를 끼우고 잔치를 벌이며 또한 한편으로는 화난 맏아들을 위로하며 다독거리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말씀이 이에 돌이켜이라고 생각을 한다.
이에 돌이켜‘he came to himself’ 혹은 ‘he came to his senses’으로 번역을 하였는데 어리석은 죄악된 모습으로부터 돌이켜 온전함으로 회복됨을 말한다.  탕자에게 이에 돌이켜의 순간이 없었다면 그는 아직도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라도 먹으며 탕자의 생활을 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 모두는 죄의 본성을 갖고 있기에 탕자인 죄인들이다. 그래서 어느 순간 이에 돌이켜의 결정적인 순간이 반드시 있어야 아버지의 품으로도 돌아 갈 수 있다.
이에 돌이켜는 회심의 이야기이다.
회심은 우리의 삶에 어쩌면 가장 중요한 시간이다. 
회심의 과정이 있어야지만 주님의 사랑을 깨닫고 영원토록 아버지가 계신 곳으로 회귀할 수 있다.

나의 인생에는 수많은 사건들이 있었다.
그 중에서 회심의 순간은 나의 인생에서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시간이었다.
영원한 생명과 사망 중에서 영원한 생명을 약속받는 시간이다.

본문의 말씀은 탕자가 아버지에게로 돌아가기로 결심한 순간이다.
한 잃어버린 영혼이 아버지의 사랑을 기억하고 되돌아 가는 순간이다.
영적각성의 시간이다.
진실한 마음으로 하는 회개의 순간이다.
지금껏 익숙한 모든 것으로부터 변화하여 주님 앞에 나아가도록 마음에 결심하는 시간이다.
나의 인생의 시간 가운데 가장 소중하고 잊을수 없는 시간인 것이다.
어찌 잊을수가 있는가? 내 생명이 사망에서 벗어난 시간인데!

여러분들도 그런 결코 잊을 수 없는 회심을 통해서 나의 영혼이 하나님 품 안에 안긴 구원받은 시간이 있었는가?
나에게도 주님 앞에 나아가게 하는 영적각성의 순간이 있었다.
탕자와 같이 세상에서 온갖 단맛 쓴맛을 먹고 마시며 즐기며 세상에 취해서 지쳐서 아무 생각이 없이 엎드려져 있었는데 갑자기 눈물이 나며 아버지여 제가 더 이상 이곳에 머물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더 이상 세상과 짝하여 가지 않게 해주세요. 제가 갈 곳이 없습니다. 제가 더 이상 가기도 싫습니다. 저를 건져 주옵소서하고 기도를 하였다. 무척이나 짧은 기도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으시고 그 후의 나의 삶은 180도 전환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주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필요없는 잔 가지들은 쳐주시고 사람들도 정리해 주셨다.
주님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나를 뒤돌아보는 순간이 있었는가?
세상이 주는 쥐엄열매를 먹다가 도무지 목에서 넘어가지 않았던 순간이 있었는가?
눈물 콧물을 흘리며 아 이제는 미련한 제가 주님 앞으로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저를 건져 주옵소서하며 결단하는 순간이 있었는가?
회심의 순간은 천둥이 치듯 내 마음 속에서 울리며 깊이 각인이 되는 순간이다.
왜냐하면 그 후로부터 나는 새 사람의 옷을 입기 때문이다.
생명과 사망의 갈림길에서 생명의 은총을 받은 내 생애의 가장 축복된 시간인 것이다.

주님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나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회심의 순간.
주님은 그 순간을 위해서 나를 강권적으로 인도하셨다.
(14:23)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주님의 강권하심이 없었다면 나와 같은 자가 어찌 주님의 집에 거할 수 있었을까?
주님은 지금도 강권적으로 주님의 천국잔치에 참여할 자들을 불러 모으신다.
주님은 탕자의 말씀을 하시기 전에 잃어버린 영혼에 대하여 비유로 말씀하셨다.
양 백마리 중에서 잃어버린 한마리의 양과 열 드라크마 중에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잃어버린 한 양이나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를 찿았을때 너무 기뻐서 사람들을 모아서 잔치를 하지 않겠느냐? 이와같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잃어버린 한 영혼을 찿았을때 천국에 있는 의인 아흔 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 기뻐하신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서 탕자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탕자의 비유를 통해서 잃어버린 한 영혼이 어떻게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 오는 지를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지금도 잃어버린 한 영혼을 찿고 계신다.
세상과 짝하여 살고 있는 잃어버린 영혼이 쥐엄열매를 먹다가 스스로 깨닫고 회개하고 주님 앞으로 나오는 영혼을 찿고 계신다.
탕자는 재물을 모아서 아버지의 집을 떠나 세상에 나아간다.
(13)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 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허랑방탕한 삶을 NIV에서는 wild living이라 번역하였다.
어떤 삶이 허랑방탕한 삶인가?  곧 형이 30절의 말씀에서 지적한 것과 같이 무위도식하며 거들먹 거리며 진정한 마음을 주는 사랑이 아니라 돈을 얻기 위해서 갖은 수단과 거짓으로 마음을 꾸미고 몸을 파는 창녀들과 함께 술에 쩔어 취하고 세상에 취한 삶이다.

탕자는 허랑방탕한 삶을 통하여 무엇을 얻었는가?
재산을 낭비하였고 (13), 그 결과 궁핍하여졌고 (14), 먹을 것이 없어서 돼지를 치는 일을 하게 되었는데 (15),  너무 배가 고파서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라도 먹으려고 했지만 정작 주는 자가 없는 지경에 까지 이르렀다 (16).
돈이 있을 때는 많은 이들이 자신의 주변에 있었으며 자신의 밸까지 빼어 줄 것 같이 얄량거리며 가장 친한 친구인듯 했지만, 돈이 다 떨어지고 돼지 치는 곳에 있자 친구들이라 믿었던 그들은 탕자를 마치 돼지처럼 취급하며 먹을 것도 주지 않고 도와 주지도 않는다. 세상은 그를 아무짝에도 쓸모없다고 외면하고 버린 것이다.  비로서 탕자는 아무도 자신을 진정으로 위해 주는 자가 없음을 깨닫고는 자신을 뒤돌아 보게 된다.  땅을 치고 가슴을 쥐어 박으며 원통해하며 후회하지만 상황은 전혀 바뀌지 않는다. 아무도 그 탕자를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 아무도 그에게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 조차도 먹을 것을 주지를 않는다.  얼마나 비참한 상태가 되었는가! 

그리고 탕자는 이렇게 말한다.
(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회심의 첫단계는 긍휼의 하나님에 대하여 깨닫는다.
탕자는 자신의 아버지의 집에 있는 품꾼이라도 굶주리지 않고 풍족한 모습을 비로서 깨닫는다.  그동안 모르고 있었던 아버지의 긍휼에 대하여 생각해 낼 수 있음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큰 축복이다.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라도 배를 채우려 하지만 그것마저 없어서 굶주리며 그토록 의지하던 세상은 자신을 버린 바로 그 순간에 탕자는 긍휼의 주님 앞으로 되돌아 갔다. 탕자의 인생 가운데 가장 중요하고 소중한 순간이다.  주님은 그런 상황 가운데 있는 탕자의 마음에 그 동안 새카많게 잊고 있었던 아버지와 끊임없이 자신을 사랑해준 아버지의 사랑에 대하여 생각나게 하신다. 그것이 곧 긍휼의 하나님께서 내게 베푸시는 은혜이다.

회심의 두번째 단계는 나의 죄를 자복하는 것이다.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아마도 탕자는 이 생각을 하며 땅을 치며 통곡을 하지 않았을까?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놓기까지 짝하며 의지하였던 세상은 자신을 철저하게 버렸고 돼지보다 못하게 취급됨을 인식하였을때, 비로서 아무 조건 없이 자신을 사랑해준 아버지의 사랑이 생각이 나서 얼마나 감사하며 미안하며 송구해서 자신의 죄를 자백하며 서럽게 통곡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한다.
나의 죄를 자백하며 땅을 치며 가슴을 치며 통곡하며 울었던 적이 있었던가?
(18: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자신의 죄를 아는데 어찌 눈을 들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수 있겠는가.  가슴을 치며 자신의 죄인됨을 용서하시는 주님을 찿는 마음을 주님은 결코 멸시하지 않으신다.

회심의 세번째 단계는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를 분명하게 아는 것이다.
(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내가 어디에 서있는지를 나의 영적인 상태가 어떤 지를 분명하게 아는 것이 우리에게는 필요하다.
내 자신은 나의 죄악됨을 너무나 잘 안다. 나는 감히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라 떳떳하게 부를 수 있는 행동들을 전혀 하지 못했다.

회심의 네번째 단계는 실행에 옮기는 것이다.
(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이에 돌이켜탕자는 비로서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았다.
그리고 자신이 그동안 정이 들고 익숙했던 세상의 죄악됨으로부터 발을 털고는 긍휼의 아버지께로 돌아가서 죄를 자복하고 받아 주면 품꾼으로 살기로 결심을 하고 발걸음을 옮긴다.  그의 인생의 새로운 출발이 시작된 것이다.

회심한 베드로의 경우를 보자.
베드로는 잡혀 가신 주님을 세 번 부인하고서 주님께서 자신을 바라보실 때에 비로서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는 회개하며 심히 통곡하며 영적인 각성을 한다.
(22:61-62)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베드로가 왜 심하게 통곡을 하였는가?
베드로는 주님께서 자신을 바라보실때 닭이 울기전에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하신 주님의 말씀이 생각이 났다. 결코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다던 자신이 주님을 세번 부인한 것이 너무나 미안하며 또한 주님을 구주로 믿고 따랐던 것이 실은 자신의 어떤 욕심을 이루고자 했던 자신의 진정한 죄악된 모습을 보고는 참을수가 없어 베드로는 심한 통곡을 하였다 
그런데 베드로는 고작 세 번 주님을 부인한 일로 그토록 참을 수가 없어서 심한 통곡을 하였는데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는 모르긴 몰라도 주님을 세번 아니 삼십번 삼백번 이상 부인하였을 것이다. 그런데도 심한 통곡은 커녕 나 잘 났다고 의시대며 나대지 않았던가!
베드로는 주님께서 자신을 보실 때에 회심한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났을때 회심하였다.
나무에 올라간 삭개오를 주님께서 이름을 부르시며 보실때 삭개오는 자신의 참된 모습을 보고 이에 돌이키며 회심한다.

회심할 때 반드시 주님의 임재가 있어야 한다. 
주님께서 회심하는 나를 쳐다 보고 계신다.
그리고 수반하는 것이 심히 통곡함이 따른다고 나는 생각을 한다.

진심으로 회심하며 통곡할 때 나의 영혼은 새롭게 태어난다.
육신이 새로이 태어 날 때 아기는 자신의 존재를 알리며 세상에 나왔다고 운다.
육신의 자신의 탄생을 알리며 울듯이 영혼도 새롭게 태어날 때의 기쁨을 알리는 것이 눈물을 흘리며 하는 통곡이라고 믿는다.
며칠이고 몇달이고 몇년이고 주님의 이름만 부르면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사랑을 베푸신 주님께 감사하며 눈물을 흘려 보았는가? 

회심하였는가? 
가슴을 두드리며 주님 제가 죄인입니다. 저의 죄를 회개합니다. 저의 죄를 용서하시니 감사합니다하며 눈물을 흘리며 심한 통곡을 한 적이 있는가?
뚜렷한 회심의 기억은 없지만 그저 교회에 다니다보니 자연적으로 믿어졌다고 믿는가?
조금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였으니 나는 구원을 받았다고 확신을 할 수 있을까?
인격적으로 임하시는 성령님에 관해 들은 적은 있어서 내게도 성령님은 그저 스쳐가듯이 잠잠하게 임하셨다고 믿는가?
나는 지적인 사람이라 성령께서도 표시가 안나게 임하신 것 같아하며 스스로 위안을 하는가?
세상의 삶과 주일 교회에서의 삶은 완전하게 다른데도 나는 진정한 주님의 자녀라고 말할 수 있는가?
참으로 주님앞에 뻔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는가?
주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내 마음에 계심을 확신하는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
주님을 만나 저 자신의 깊은 곳에 감추어진 죄악된 모습을 돌아보는 이에 돌이켜의 시간이 있어서 지금 주님 앞으로 나올 수 있었읍니다.
회심의 순간은 저희들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입니다.
회심을 통하여 저희의 영은 새롭게 각성하며 사망을 떠나서 비로서 생명으로 옮겨집니다.
스스로 돌이킬 수 있도록 제 마음을 인도하시는 주님의 은혜에 감사합니다.
돼지처럼 탐욕스럽게 세상과 짝하며 살다가 결국은 세상이란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게 해 주시는 시간입니다.
잃어 버렸던 한 영혼이 세상의 탐욕과 저주로 부터 벗어나 영원한 생명으로 전환하는 축복의 순간입니다.
저에게도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새 생명을 찿을 수 있도록 스스로 돌이키는 회심의 시간을 허락하여 주셨으니 주님의 은혜가 차고도 넘치나이다.
회심의 순간을 통하여 언제든지 주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특권을 주셨읍니다.
저에게는 영원한 생명의 증표가 제 마음속에 각인이 되어 있읍니다.
주여, 주님의 이름을 아는 자들 모두가 회심의 순간들을 경험하였으면 합니다.
저들 마음속 깊이 각인되는 회심의 순간들이 있었으면 좋겠읍니다.
베푸신 주님의 사랑이 너무가 고맙고 감사하고 송구해서 어쩌지를 못하고 가슴을 치며 울며 불며 통곡하는 영혼의 탄생의 시간들을 통과하였으면 합니다.  자신을 돌이키는 순간은 저희들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시간입니다. 
우리 모두가 구원받아 주님의 이름이 마음속에 새겨진 천국백성으로서 영생을 소유한 자들이기를 간구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