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2월 19일 일요일

예수님의 탄생소식



(2:8-14)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이 말씀을 대부분 Christmas 때에 선포를 하며 주님의 탄생을 생각하게 한다.
그런데 이 말씀은  Christmas 때에만 들려 주는 말씀이 아니라 우리의 삶 가운데서 늘 기억하고 감사를 해야 하는 말씀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탄생소식을 천사들을 통하여서 몇몇의 사람들에게 미리 알려 주셨다.
여호와께서는 자신이 행하시고 자는 일들을 택한 자들에게 미리 알려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3:7)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자신이 행하시려는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창18:17)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는냐
여호와께서는 세상을 구원하실 예수님의 오심에 대하여 미리 몇몇의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 사가랴 - (1:15) 이는 그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 마리아 - (1:31) 보라 네게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 요셉 -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 동방박사 - (2:2)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 목자들 - (2:11)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 시므온 - (2:34)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 안나 선지자 - (2:38)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하니라.
첫째, 예수님의 탄생소식은 큰 기쁨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자신의 아들이 모든 인간의 죄를 담당하시고 속죄하시고 하나님 아버지와 인간과의 관계를 회복하려는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너무나 기뻐하셨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아들로 태어나심을 모든 피조물들에게  얼마나 선포하시기를 원하셨을까?
온 천군 천사와 거룩한 자들과 인간 모두들에게 아기 예수 나심을 선포하시기를 원하셨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에게 이처럼 크나큰 기적의 일을 선포하였다가는 혼란만이 있었을 것이며 온 인간의 죄를 사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인간들이 온전히 받아 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없어 오직 선택된 몇몇의 사람에게만 이 놀라운 소식을 전하여 주었다.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죄를 용서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다는 소식은 천국의 성도들과 천사들에게는 너무나 기쁜 큰 소식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의 탄생소식을 전하는 천사는 너무나 기뻐하며 목자들에게 기쁜 소식이라며 예수님의 탄생을 전하여 준다. 그러는 순간 하늘이 열리며 온 천성의 성도들과 천사들은 한 목소리로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찬양하며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하며 영광을 돌린다.
천사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이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큰 기쁨이라는 것을 잘 안다. 그러기에 천사는 목자들에게 예수님의 탄생소식을 전하여 주며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고 말한다.
우리 또한 아기 예수의 탄생을 진심으로 기뻐하는가?
예수님의 탄생과 예수님의 오심이 내게도 가장 큰 기쁨의 소식이기를 간구한다.
그런데 나는 이 말씀을 묵상하며 그리 큰 기쁨을 느끼지 못한다. 
예수님의 은혜를 입고 변화를 받고서 예수님의 이름만 되뇌어도 눈물이 주루르 흘렸는데 지금 이 말씀을 읽으면서 예수님의 이름을 불러보지만 전과 같은 뜨거운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왜 그럴까?
나의 믿음이 많이 무디어져 있기 때문이다.
다시 믿음이 회복되어 주님의 이름만 불러도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리며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기쁨으로 가득하기를 간구한다.
어떨때 우리는 기뻐하는가?
두가지의 기쁨이 있을 것이다. 세상의 기쁨과 예수 안에서의 기쁨.
세상의 기쁨은 자신의 이익을 구한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욕구가 성취되었을때 기뻐한다.
운동선수가 자신의 노력으로 자신이 원했던 결과를 얻었을때 기뻐한다.
배불리 먹고 등이 따스한 곳에 누워서 기뻐한다.
그토록 원하던 많은 재물을 갖고는 기뻐한다.
원하는 연인을 맞이할 때 기뻐한다.
다른 이들을 통치하며 자신의 영향력아래에 둘 수 있는 권세를 차지했을때 기뻐한다.
세상을 바라본다면 온전한 기쁨을 찿을 수 없음은 자명하지 않던가.
세상은 온갖 탐욕과 음모과 속임과 교만과 거짓이 교묘하게 숨겨져 있다. 그래서 세상의 것을 추구하게 되어 얻게 되면 기뻐할 수는 있지만 그 기쁨은 일시적인 것이요 곧 없어지는 희미한 안개와도 같은 허무함만을 가져다 준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기쁨은 세상이 말하는 기쁨과는 사뭇 다르다.
주님은 우리에게 항상 기뻐하라고 말씀하신다.
(살전5:16) 항상 기뻐하라.
(4: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주님은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항상 기뻐할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신다.
(15:10-11)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 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내가 주님안에 온전히 거하며 주님의 계명을 지키려 할 때에 내 마음에 계신 주님의 기쁨으로 나 역시 기쁨으로 충만케 되리라고 약속을 하신다. 
(5:22-24)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주님안에 온전하게 거할 때 우리는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된다. 성령의 열매 가운데 희락이 있다.  주님의 사랑안에 거하여 늘 기뻐하며 성령의 열매를 맺는 자들의 특징은 곧 모든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것이다. 
십자가에 나를 못박은 자들은 마음이 가난할 수 밖에 없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이미 천국의 축복을 받았기에 늘 주님의 은혜에 감사할 뿐이다.
지금껏 나의 삶을 지켜 주시고 섭리하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기뻐하자.
지금의 내가 된 것은 모두 다 주님의 은혜인 것이다.
나의 마음의 상태를 바꾸어서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는 방법을 배워나가자.
(33:21) 우리 마음이 그를 즐거워함이여. 우리가 그의 성호를 의지하였기 때문이로다.


둘째, 예수님의 세이름
천사는 목자들에게 탄생하신 아기 예수의 세 이름을 가르쳐준다.
(11)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시니라.
(KJV) For unto you is born this day in the city of David a Saviour, which is Christ the Lord.
(NIV) Today in the town of David a Savior has been born to you. He is the Messiah the Lord.



또한 마태복음에서도 천사는 예수의 탄생을 알리며 예수님의 이름을 가르쳐준다.
(1:21-23)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성경은 두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의 이름에 대하여 설명해 준다.
예수님의 이름이 갖고 있는 의미에 대하여 알아보자.

1. 구주 (Savior)
Savior 곧 구주는 나의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신 자를 말한다.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마태복음에서 이른바와 같이 예수의 이름의 뜻은 죄에서 구원하실 구주이심을 말한다.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신 주님.
나를 살리시려고 십자가에 달려 대신 죽음으로 모든 죄값을 치뤄주신 예수님.
아기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인간에게는 역사를 뒤바꾼 놀라운 사건이며,
하나님에게는 죄로 인해 단절되었던 인간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거룩한 시간이었다.
첫 인간인 아담의 범죄함으로 인해 하나님과 단절되었던 관계가 하나님 이신 아들 예수그리스도의 순종하심으로 인해 다시 회복된 거룩한 사건이었다.
2. 그리스도 (Christ = Messiah)
주님은 기름부음을 받으신 왕중의 왕이시요 만주의 주로 이 땅에 오셨다.
(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사람들은 인간 예수를 자신의 굶주림을 해결하며 로마에 속박되어 있는 이스라엘을 회복시켜줄 능력있는 왕으로 삼기를 원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시며 병든자와 귀신들린 자를 낫게 하시는 것을 보면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자신과 나라를 회복하실 메시야로 보고 예수님을 왕으로 삼기를 원했지만, 예수님께서 나귀타고 예루살렘성에 입성하는 것을 보고 그들은 자신의 생각이 좌절된 것을 알고 예수님을 자신의 육신적인 왕으로 삼고자 하는 욕망이 증오로 변하여 결국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하였다.
하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첫 인간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죄로 인한 사망의 권세를 깨시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몸소 인간이 되셔서 죄 있는 모습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사망의 권세를 깨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심으로 우리역시 우리의 육신은 죄로 인해 죽어 흙으로 돌아가게 되지만 하나님의 심판 때에 이르면 성도인 우리의 죽은 몸이 예수님과 같이 부활하여 살아있는 영성체로 변화하여 영원토록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다스리스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함께 하도록 하셨다.
3. 주 (Lord)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이신 주님.
모든 주권을 갖고 계시는 전능자이신 주님.
나의 생명과 죽음과 영생의 key를 갖고 계신 주님  
또한 나의 생명의 주인이며 다스리시는 통치자이시다.
4. 임마누엘
1:23의 말씀과 같이 임마누엘은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말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사 하늘에 올라 하나님 아버지의 보좌우편에 앉으시고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하나님을 주님의 자녀의 마음에 보내 주셨다. 주님의 이름을 믿고 시인하며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인생들은 주님의 자녀가 되어 선물로 보내신 성령하나님이 내주하신다. 곧 예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며 임마누엘의 약속을 이루셨다.
내 안에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 얼마나 놀라운 기쁜 소식인가.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두 손을 높이 들고 찬양하며 춤을 추고 싶지 아니한가 

셋째, 찬양
(13)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KJV) And suddenly there was with the angel a multitude of the heavenly host praising GOD
(NIV) Suddenly a great company of the heavenly host appeared with the angel, praising GOD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자신의 아들인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그 무엇보다 기뻐하셨다.
온 우주 만물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하심을 기뻐하여 찬양을 하였다. 모든 하늘나라의 거룩함들이 드리는 장엄한 찬양.  온 하늘과 땅을 뒤흔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빌어 탄생하심을 기뻐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리는 장엄하고 웅장한 너무나 아름다운 천상의 화음. 
한번 생각해 보자.
수많은 거룩한 성도들과 천사들이 함께 모였으니 얼마나 장엄한 광경이며 들리는 찬양은 얼마나 아름다왔을까? 우리는 너무나 아름다운 성악을 들을때 천상의 소리라며 감탄을 한다. 그런데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너무나 아름다운 천상의 찬양이 웅장하게 온 땅에 울려 퍼지니 얼마나 장엄하였을까.  도무지 표현할 수가 없다.
천상의 존재들과 마찬가지로 나의 여호와에 대한 마음이 표출되어 나타나는 것이 찬양일 것이다.
하늘의 성도들과 천사들은 어떤 내용으로 찬양을 하였는가?
(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천군과 성도들은 땅에 사는 성도들의 평강을 위하여 주님을 보내신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며 찬양하였다.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고 찬양을 하였는데, 땅에 사는 우리는 예수님의 탄생으로 인한 평화가 있는가?
많은 것들이 우리의 마음의 평화를 갖지 못하도록 방해를 하고 막고 있다.
세상의 것은 우리에게 근심과 분노와 거짓과 교만을 잉태하게 한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속으로부터 평강을 빼앗아 가 버린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탄생보다 더 중요하고 소중한 것은 없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나의 모든 죄는 용서를 받았고, 주님께서 내 마음속에 거하시게 되었다.
우리의 마음속에 아기 예수님의 탄생하심의 감격과 기쁨이 늘 있다면, 이 세상의 어떤 장애물도 능히 감당할 수 있으리라. 늘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하며 찬양함으로 나의 마음속에서는 주님의 주시는 평강으로 가득차는 축복으로 가득하기를 축원한다.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들에 베푸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우리 모두가 멸망치 않고 영생을 받기를 원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께  모든 기쁨으로 영광을 드리며 찬양을 드리자.  그것이 우리 인생의 본분일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성경에 여러 선지자들을 통하여 약속하신대로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보내 주셨읍니다.
온 천상의 존재들에게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큰 기쁜 순간이었읍니다.
하늘이 열리고 온 천상의 존재들과 천군 천사들이 기뻐하며 예수님의 이 땅에 태어나심을 찬양하는 모습은 저희들은 보지는 못했지만 실로 장엄한 광경이었을 것입니다.
천사는 예수님의 탄생하심을 전하면서 큰 기쁜 소식이라 하였읍니다.
예수님의 탄생하심이 저에게도 가장 큰 기쁜 소식이기를 원합니다.
저의 마음이 회복되기를 원합니다.
저를 위하여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
저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려 오신 구원자이신 예수님.
만왕의 왕이시요 만주의 주로 오신 예수님.
말씀으로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신 예수님.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을 제 마음에 내주하시며 저를 천성으로 인도하시며 섭리하시는 임마누엘이신 예수님.
저에게 예수님은 실로 아름다우신 이름입니다.
저의 온 맘과 정성을 다하여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저의 찬양과 감사과 기쁨을 받으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17년 2월 5일 일요일

아버지의 사랑


(11:1-9)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거늘 선지자들이 그들을 부를수록 그들은 점점 멀리하고 바알들에게  제사하며 아로새긴 우상 앞에서 분향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에브라임에게 걸음을 가르치고 내 팔로 안았음에도 내가 그들을 고치는 줄을 그들은 알지 못하였도다.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그들을 이끌었고 그들에게 대하여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 같이 되었으며 그들 앞에 먹을 것을 두었노라. 그들은 애굽 땅으로 되돌아 가지 못하겠거늘 내게 돌아 오기를 싫어하니 앗수루 사람이 그 임금이 될 것이라

내 백성이 끝끝내 내게서 물러가나니 비록 그들을 불러 위에 계신 이에게로 돌아오라 할지라도 일어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나의 맹령한 분노를 나타내지 아니하며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님이라. 네 가운데 있는 거룩한 이니 진노함으로 네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호세야서는 특별한 말씀인듯하다.
하나님께서 호세야를 불러 처음하신 말씀이 음란한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라는 것이었다.
호세야는 여호와의 말씀하신대로 음란한 여인을 아내로 맞이 하였고 세 아이를 낳았는데 첫째 아이의 이름을 이스르엘 (폐하다), 둘째는 로루하마 (용서하지 않다), 그리고 세째는 로암미 (내 백성이 아니다)로 이름을 주신다. 그리고 그 후에 아내는 집을 나가 다시 음란한 삶을 살지만 호세야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값을 치루고 아내를 다시 집으로 데리고 온다.

호세야서를  통해서 끝없이 음란한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의 모습을 본다.
음녀와 같은 이스라엘은 계속해서 거듭된 죄악을 범하지만 차마 내쳐 버릴 수 없으신 하나님의 아프신 사랑이 호세야서 전반에 걸쳐서 나온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런 음녀와 같은 나의 신랑이 되시겠다 약속을 하신다.
(2:19)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흏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아버지의 구구절절한 사랑의 고백이다.
나를 너무나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사랑앞에 나는 가슴이 먹먹하다.

 
나를 어떻게 사랑하시는 지를 말씀을 통하여 살펴보자.

(3) 내가 에브라임에게 걸음을 가르치고 내 팔로 안았음에도
I taught Ephraim also to go, taking them by their arms
I took Israel by the arm and taught them to walk

(1:31)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 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내 아이들이 어렸을 때 걸음마를 가르친다고 두 팔을 붙잡고 아이가 걷는 것을 돌보았던 것을 생각해보면 지금도 웃음이 나오며 그 시절이 그립다. 아버지가 아이에게 한없이 줄 수 있는 사랑이다. 그저 아이가 귀엽고 사랑스러워 두 손을 꼭쥐고 행여 넘어질 까 뒤에서 또는 앞에서 보살펴 주었다.  어느정도 걸음이 익숙해 지면 두 팔을 꼭 잡는 대신 살며시 쥐고는 뒤뚱거리다 넘어지려 할 때는 꼭 잡아 넘어지지 않도록 하지 않았던가.  아이를 두 팔로 품안에 꼭 안을때 아이의 따스한 체온을 느끼며 두 빰에 뽀뽀를 하기도 하고 눈을 마주치며 두 손으로 아이를 높이 올리며 아이가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며 아이와 교류하며 사랑을 주었다.

4절은 그들 앞에 먹을 것을 두었노라로 번역을 했지만, NIVI bent down to feed them’이라 번역을 했다.  부모가 어린 자녀에게 음식을 먹이려고 무릎을 굻어 앉아 주는 모습이다. 나 역시 아이에게 무엇을 먹이려면 허리를 숙이고 숟가락으로 입에 넣어 주지 않았던가.  어린 아이를 볼 때 서서 보는 것이 아니라 무릎을 꿇고서 그 아이와 눈높이를 같이 해 보자.  그러면 서서 내가 보았던 것과는 사뭇 다른 그 아이가 보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는 나와 눈높이를 맞추신다.



하나님 아버지는 나와 눈높이를 맞추신다. 아버지는 나와 눈높이를 같이 하시며 하나님의 자리에서 나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있는 그 곳에서 내가 보는 것을 보시며 이해하신다.
하나님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시는 것이 마치 어린아이가 걸음마를 배울때 손을 잡아 주며, 몸을 숙여서 눈을 맞추고 숟가락으로 먹여주는 부모와도 같은 사랑을 주신다. 여호와의 사랑과 보살핌은 우리를 상하게 하지 않으신다.


(32:10)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같이 지키셨도다. 마치 독수리가 자기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자기의 새끼위에 너풀거리며 그의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의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같이 여호와께서 홀로 그를 인도하셨고 그와 함께 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

여호와를 만난 자는 인생 광야 길을 가는 동안 여호와께서는 독수리가 자기 새끼를 훈련시키려고 떨어 뜨린 새끼를 날개로 살포시 받으시며 또한 그를 온갖 사나운 짐승들로부터 지키시고 마치 눈동자처럼 지키신다.
여호와를 만났는가?
여호와를 만난 자에게 약속하신 눈동자처럼 지키시는 여호와의 축복이 임하기를 간구를 한다. 오직 여호와 만을 믿고 의지하며 그분의 사랑안에 기대자. 결코 나를 붙드시고 실망시키지 않는 여호와의 사랑의 은혜안에 거하자.


(3) 내가 그들을 고치는 줄을 그들은 알지 못하였도다
but they knew not that I healed them.

여호와는 나의 상처를 싸매시며 치료하시며 낫게 하신다.

(15:26) 나는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30:17)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들이 쫓겨난 자라 하며 찿는 자가 없는 시온이라 한즉 내가 너를 치료하여 네 상처를 낫게 하리라.

제가 아팠을때 하나님께서 주셨던 말씀이다.
(57:18) 내가 그의 길을 보았은즉 그를 고쳐 줄 것이라. 그를 인도하며 그와 그를 슬퍼하는 자들에게 위로를 다시 얻게 하리라.
여호와께서 나를 고쳐 줄 것이고 나로 인해서 슬퍼하는 자들에게 위로를 주실 것이라고 약속의 말씀을 주셨다.

육신의 아픔만을 치료하시겠다고 말씀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영적인 아품도 치유하시는 하나님.
몸이 아플때 하나님께 낫게 해 달라고 간구를 한다. 또 나의 마음이 아플때 공허를 느낄때 여호와를 찿는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나의 영과 육이 아프다고 울면서 간구를 할 때 들으시고 응답해 주신다.  응답을 받았을때는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며 영광을 올려 드린다.

(1:2)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그런데 그 날이 오래 가지를 못한다.
여호와께서 나의 상처를 싸매시고 치료하셨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나를 양육하시는 여호와의 손길을 잊어 버리고 거역한다.  얼마못가 하나님의 긍휼의 사랑을 잊어 버리고 다시 세상의 방식대로 세상의 소욕대로 세상의 기준으로 판단하고 절제를 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사랑을 잊어 버린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분명 마음에 어떤 감동을 주시는데 순종하지를 않는다. 왜냐하면 나의 자아가 나의 소욕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8)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불붙듯 하도다.
How shall I give thee up, Ephraim?  How shall I deliver thee, Israel.

아드마와 스보임은 소돔과 고모라 근처에 있던 성읍이며 소돔과 고모라와 함께 멸망당했다 (29:23).

아버지의 자식을 포기할 수 없는 사랑의 고백이다.

5-7절을 보면 어찌할 수 없이 패역한 우리에 대하여 말씀한다.
넘어질까 손으로 안으시며 허리를 굽히고 눈을 맞추며 먹을 것을 주시며 사랑을 베푸시지만 자녀들은 그런 아버지의 사랑을 버리고 세상에 머물기를 원한다. 세상의 소욕대로 욕망대로 자신을 내 맡기고 그 가운데서 위로를 얻으려고 애지중지하며 집착하던 성읍이 깨지는 아픔을 겪으며 좌절한다. 그런데도 아버지 앞으로 나아갈 마음이 없는 패역한 자식들이지만 그래도 내칠수 없으신 아버지의 사랑.

누가복음을 보면 탕자를 포기하실 수 없으셨던 아버지의 사랑의 이야기가 있다.
자신의 집을 떠나 세상으로 떠난 탕자가 마음을 돌이키고 이제나 올까하여 성문쪽을 바라보는 아버지.
결국 온갖 고생을 하다가 돼지가 먹는 열매를 먹으면서 비로서 아버지의 사랑이 있는 곳으로 가야겠다는 영적인 각성을 한다.  다시 돌아간 아들은 더 이상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탕자가 아닌 아버지의 아들로서의 지위를 회복한다.  세상은 그런 아들을 보면서 탕자라고 불렀지만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이 탕자라고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아버지의 눈에는 말을 잘 듣지는 않았지만 사랑하는 아들일 뿐이다. 그래서 그토록 기다리던 아들이 다시 집으로 돌아 왔을때 아버지는 좋은 옷을 입히고 좋은 음식을 먹이며 기뻐하였던 것이다.

 나 역시 내가 보기에도 탕자와 같은 모습이 아니었던가.
그렇지만 내가 벗나가고 죄악의 길을 갔었을지언정 여호와 하나님의 눈에는 나는 사랑스런운 자녀인 것이다.
그래서 때로는 채찍으로 징벌을 하시지만,  자신의 피로 사신 사랑하는 자녀인 나를 결코 버리시지 않으셨다.
나는 마땅히 멸망을 당할 수 밖에 없지만 여호와께서는 나를 택하사 나를 끝까지 보호하시고 인도하실 것을 믿는다.



(9) 내가 나의 맹령한 분노를 나타내지 아니하며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님이라. 네 가운데 있는 거룩한 이니 진노함으로 네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I will not execute the fierceness of mine anger, I will not return to destroy Ephraim, for I am GOD, and not man.

이 말씀을 보면서 용서에 대하여 생각할 수 있었다.
우리가 잘 알듯이 여호와는 사랑의 하나님이시며, 참고 참으시는 인내의 하나님이시며, 모든 죄악을 잊으시는 용서의 하나님이시다.  그렇지만 결코 간과해서는 않되는 것이 하나님은 진노하시는 여호와이시다. 한번 진노하시면 그 어떤 것도 그 진노하심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여호와는 공의로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잊지 말아야 한다.
(15:6-7)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나를 버렸고 내게서 물러갔으므로 네게로 내 손을 펴서 너를 멸하였노니 이는 내가 뜻을 돌이키기에 지쳤음이로다. 내가 그들을 그 땅의 여러 성문에서 키로 까불러 그 자식을 끊어서 내 백성을 멸하였나니 이는 그들이 자기들의 길에서 돌이키지 아니하였음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가 내게 임하지 않게 하려면 내가 해야 하는 것은 나의 죄악을 깨닫고 여호와께 용서를 간구해야 한다. 혹 하나님의 긍휼하심의 은혜로 용서를 받는다면 나는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의 심판을 받지 않을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내가 주님의 길에서 벗어나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여러 광야의 곤고함을 통하여 나의 죄악된 것을 깨닫고 돌아오도록 하심을 우리의 인생을 통하여 경험할 수 있지 않았던가.  하지만 돌이키지 않고 끊임없이 여호와를 떠나 죄악된 길을 간다면 여호와의 맹렬한 무서운 진노가 임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이심이 얼마나 내게는 감사하며 축복인가.
만일 하나님께서 사람이셨다면 나는 벌써 이전에 내침을 받았을 것이다.

우리는 나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를 잘하지를 못한다.
용서한다고 말했는데 그런데 왜 다시 생각나며 치를 떠는가?
그것을 용서라고 할수 있는가? 

나는 온전하게 용서를 할 수 없기에 나를 무조건적으로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온전하게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참으로 죄인인 나를 위하여 육신의 몸을 입고 오시고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영원토록 사랑가운데서 살리시려고 십자가에서 자신의 목숨을 내려 놓으신 예수님을 온전하게 이해할 수 없으며 온전하게 사랑을 줄 수도 없다.

용서의 이야기로 잘 알려진 만달란트 탕감받은 자의 이야기가 있다.
만달란트라면 어마어마한 돈인데 평생을 아무리 열심히 해도 도저히 갚은 길이 없는 채무액을 모두 면제받아 탕감받았는데 그는 자신에게 아주 조그마하게 빚진 자를 도무지 용서할 수 없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 아닌가.
누구보다 많은 숨겨진 죄악을 갖고 있는데도 여호와께서는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다. 그런데 나는 내게 조그만 죄를 저지를 자를 결코 용서할 수 없어 두고두고 곱씹으며 말로는 용서를 한다고 했지만 도저히 내 마음속으로는 용서를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나에게 잘못을 저지른 누구를 온전하게 용서를 해 준적이 없기 때문이다.  도저히 내 마음속으로 그를 용서할 수 없고 용서라는 단어조차 용납이 않되지만 여호와께서는 그런 나를 보시면서도 나와 그 사람 역시 용서를 하신다.

 
용서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용서는 그 전에 지었던 모든 죄악을 잊어 버리는 것이다.

(31:34)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7:18-19)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과 그 기업에 남은 자의 허물을 사유하시며 인애를 기뻐하시므로 진노를 오래 품지 아니하시나이다.  다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10:16-17) 주께서 이르시되 그날 후로는 그들과 맺을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그들의 마음에 두고 그들의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또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용서란 깨끗하게 잊는 것이다.
그러기에 여호와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는가.
(1: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희게되리라.



지금 이 순간이 여호와께로 돌아와 여호와를 찿을 때라고 말씀하신다..
(55:6-9)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찿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을 너희의 길과 다름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용서를 구하는 자는 악한 길과 불의한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의 긍휼을 바라보아야 한다.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오늘 지금 이때가 곧 여호와께 돌아갈 시점이다.
내일이 내게 없을수도 있기 때문이다. 강물이 흘러가면 다시 그 물이 그 곳에 있을 수 없듯이 오늘 지금 내게 주어진 시간은 다시는 내게로 돌아 오지 않는다.

 

하나님 아버지
나를 너무도 사랑하시는 여호와의 사랑앞에 저는 어찌할 수가 없읍니다.


저는 제 자신을 너무나 잘 압니다.
얼마나 패역하며 얼마나 죄의 생각을 갖고 있는 지를 저는 잘 압니다.
너무나 많은 죄악을 저지르고도 모른척하며 결국은 등을 돌리고야 마는 패역함이 제게는 있읍니다.
그런 저를 보시고도 너무나 사랑하시는 자녀이기에 차마 내치시지 않으시고 다시 품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여호와께서는 저를 팔로 안으시고 몸을 숙여서 저와 눈높이를 맞추시고 저의 사정을 보시며 저를 품어주셨읍니다. 제가 약해 있을 때에 병이 들었을 때에 제가 어려운 곤고함 가운데 있을 때에 저를 기억하시고 저의 모든 약함을 회복시키시고 인도하셨읍니다. 하지만 저는 얼마못가 저에게 베푸신 여호와의 은혜를 잊어 버리고 다시 세상의 소욕이 주는 패역함을 즐기는 죄악을 범하였읍니다. 그런데도 저를 진노로서 내치지 않으시고 저를 사랑스러운 신부로서 다시 사신 신랑이신 주님의 사랑에 감사를 드립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용서의 은혜에 대하여 숙고할 수 있으니 감사합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저에게 잘못하는 자들은 저의 주변에 많이 있읍니다.
용서란 저의 인생에서 겪어야할 시험과도 같다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용서의 시험을 잘 거치면 저의 여호와에 대한 믿음 또한 자라날 것으로 기대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저는 저에게 잘못한 이들을 온전하게 용서할 수가 없읍니다.
분명 머리로는 잊어 버리는 것이 용서인줄 알겠는데 도저히 저의 육신의 생각은 저에게 잘못한 것들이 기억이 나서 계속해서 정죄하는 죄를 범합니다.
여호와께서 저에게 행하신 용서란 저의 모든 죄악을 용서하시고 잊으시는 것이었읍니다.
진홍과 같은 죄를 양털이라 하시며 기억도 않으시는 하나님의 용서를 배우기를 원합니다.
저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고 또한 내 마음으로부터도 용서하여 저에게 행한 모든 잘못함을 저의 생각으로부터 잊고 기억도 나지 않게 되기를 원합니다. 여호와와께서는 저를 용서하셨고 또한 그 사람도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저를 눈동자처럼 지키시며 제가 황무한 광야길을 가는 동안 줄곧 저와 함께 하시며 사랑의 은혜를 베푸시는 축복을 주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저를 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열정과 자비와 사랑으로 저를 살리신 하나님께 오늘도 저는 영광을 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