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7월 29일 일요일

십자가의 도 그리고 회심

(고전1:18-25)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리라.

종교나 국가나 단체를 대표하는 상징들이 있다.
연꽃은 불교의 상징이다. 정삼각형 두개를 위아래로 합친 모양은 유대교의 상징이다. 초생달은 이슬람교의 상징이다. 망치와 낫은 소련을 상징하며, 독수리는 미국을, 일명 swastika라는 모양은 Hittler의 나치를 상징한다. 그리고 십자가는 기독교의 상징이다. 우리들은 어디를 가든지 십자가를 볼 수 있으며 많은 이들이 십자가 목거리를 하여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나타낸다.

십자가는 예수님을 상징한다.
기독교에서 십자가가 없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차를 타고 가다 보면 산 위에나 넓은 땅 위에 하얀 십자가가 세워져 있는 것을 볼 때가 있다. 그 땅의 주인이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알리려고 십자가를 세웠을 것이다. 십자가가 세워져 있는 교회를 볼 때가 있는데 왠지 마음이 포근해진다. 어둠이 임한 땅을 비추는 교회의 십자가 불빛. 동이 틀 무렵에 들리는 교회의 종소리. 점점 잊혀져 가는 기억이 되어 가고 있다.

십자가가 없는 교회.  
교회의 안과 밖에서 십자가가 사라진 교회들이 너무나 많다. 교회 밖에서 십자가가 없어져 가며 교회 안에서는 십자가가 세워져 있던 자리에 커다란 screen이 자리잡고 있어 주님의 사랑과 희생을 생각케 하는 십자가 대신에 목사님을 비롯해서 예배를 섬기는 사람들의 얼굴이 크게 비치며 예배의 초점을 흐리게 한다. 목사님이 곧 십자가를 진 예수 인듯 착각하게 한다. 십자가가 우상 숭배라고 십자가를 제거하고 있는데 과연 십자가가 우상인가 깊이 고려해 보아야 한다  

(벧전2: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답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사도 베드로는 벧전2:24에서 친히 십자가에 달려 그 몸으로말하지 않고 나무에 달렸다고 표현을 한다. 십자가는 우상의 대상이 아니며 우상화해서는 않된다. 하지만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나와 사랑하는 부모와 자녀와 이웃들을 살리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모든 죄를 담당하시고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 너무나 고마우신 주님이 기억이 나며 생각나지 않던가.

온 우주의 창조주라는 사람이 십자가에서 자신도 구하지 못하고 비참한 죽음을 통하여 모든 인간이 구원을 얻는다는 Message는 분명히 세상의 표적과 지식을 요구하는 세상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미련한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불신자들은 한 사람이 십자가에 달려 죽음으로 온 인류를 구원하며 그것을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진리를 믿을 수 없을 뿐 아니라 불합리하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세상에 속한  자들은 세상의 기준과 상식과 지식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치욕스러운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죄와 곤경에 처한 인간들에게 찿아오신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에게는 이 미련한 십자가의 도는 기쁨의 소식이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받은 자들에는 미련하게 보이지만, 십자가의 도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구원함을 받은 자를 살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고린도서는 사도바울이 3차 전도 여행중 에베소에 머물며 분열의 조짐을 보이는 고린도 교인들을 권면하며 위로하며 강건히 세워지기를 원해서 쓴 편지이다. 세상의 추구하는 것을 헛된 것으로 여기며 오직 십자가 만을 자랑하라고 권면을 한다.

우리들은 십자가의 참된 의미를 잘 모르고 지내는 적이 많이 있다.
사도 바울 당시의 십자가 형은 가장 잔인한 사형 방법이었다. 십자가에 달린 자는 오랜 시간 동안 극도의 고통을 느끼며 죽는 형벌이었다. 로마는 살인자, 반란자, 외국 죄인, 혹은 죄를 범한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는 노예들에게 십자가형을 가했다. 십자가는 세상으로부터 소외된 자들이 받는 극형이었다.

아무런 죄가 없으신 주님께서는 종교 지도자나 세상 권세자가 보는 자신들과의 관점과 다르다는 이유로 고통과 멸시와 천대와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강도들과 함께 죽으셨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후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주님을 부인하면 살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하지 않고 기꺼이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따라 기뻐하며 죽어갔다.

무엇때문에 초대교회 성도들은 기뻐하며 기꺼이 순교를 할 수 있었을까?
십자가가 그들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찿았기 때문이다. 연약한 육신의 죽음 저너머의 영생의 소망의 가치가 얼마나 소중한 지를 알았던 것이다.

사도바울은 고전2:2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또 갈6:14에서는 내게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라고 고백하였다. 우리 또한 세상것들은 배설물로 여기며 오직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성도가 되기를 간구한다.

 
십자가의 부활의 능력이 임하기 위해서는 회심해야 한다

주님은 자신을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신다.
(11:25-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과 같이 우리의 흙으로 돌아간 육신이나 살아서 주님을 맞이한 자들의 육신은 부활하여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거하게 될것이다.
(고후13:4)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

만일 구원을 받지 못하였다면 나의 영혼은 육신의 죽음 후에 영원한 멸망 가운데 거하게 된다.  하지만 믿음을 지켜 구원을 얻어 흙으로 돌아간 자들이나 살아서 주님을 맞이한 자들은 주님께서 부활하신 것과 같이부활하여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거하게 될것이다.

 
부활의 능력이요 생명의 능력이 내게도 임하게 위해서는 반드시 나에게 회심이 임해야 한다. 십자가의 사건을 믿게 되면 사람들에게는 회심이 임하게 된다. 회심은 사람들을 변화시킨다. 그들의 삶의 방식이 바뀔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회심한 자들을 주님의 자녀답게 변화시키시기 떄문이다. 우리들의 주변을 보면 회심하여 삶이 모습이 완전하게 바뀐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되며, 회심의 사건을 결코 부인할 수 없다. 기억에도 희미라며 미적 미적한 회심의 사건은 없다고 생각한다.

(23:42)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떄에 나를 기억하소서
주님과 함께 십자가가에 달린 두 명의 행악자 중에 하나는 죽음의 직전 주님을 만나 회심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비록 십자가에 달려 원치 않는 죽음을 맞이했지만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것은 그의 인생 중에서 가장 축복된 순간이었다. 평생 악한 짓만 행하였던 자가 죽음 바로 직전에서 주님을 만나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심함으로 모든 죄를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어 죽음 후에 주님과 함께 할 수 있었다. 

(26:75)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 부인하고서 주님께서 쳐다 보시자 자신의 죄악을 깨닫고는 심히 통곡하며 울었다. 그 순간이 바로 회심의 시간이었다. 회심의 사건을 통하여 베드로는 주님의 자녀로서 거듭날 수 있었고 주님을 사랑하며 또한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이 모인 교회의 반석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다.

사도 바울은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하러 기세등등하여 올라가던 중에 예수님을 만나던 순간 너무나 강렬한 빛이 임하여 눈이 멀었다. 그리고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하는 주님의 음성을 들은 그 순간이 바로 사도 바울을 있게한 회심의 순간이었다.


나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는 회심의 사건이 물에 물 탄듯 흔적도 없이 생각도 나지 않게 슬그머니 넘어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회심한 후에 몇날 몇달 몇년을 나를 구원하신 주님의 은혜에 감격해서 주님의 이름만 불러도 들어도 나를 살리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주님이 너무나 고맙고 감사해서 눈물로 범벅을 한다. 눈물이 전혀 없던 나를 눈물이 많은 나로 바꾼 회심의 사건을 어찌 기억할 수 없을까. 지금도 나의 삶을 송두리채 바꾼 그 때의 일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회심의 사건이 기억이 나지 않다거나, 눈물이 찔끔만 나왔다거나, 막연하게 구원을 얻었겠지 하는 자들은 진정으로 회심의 사건을 통하여 주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내 안에 계시는지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저 막연하게 구원받았겠지 혹은 교회에 출석한다고 해서 구원은 절대 얻어지지 않는다. 교회에서 열심으로 봉사하고 헌신한다고 해서 천국에 가지를 못한다. 아무리 목사, 장로, 권사, 집사라 할지라도 십자가의 도의 구원의 부활의 능력이 임하지 못한 자들은 언젠가는 반드시 임할 죽음 후에는 돌이킬 수 없는 엄청난 후회와 절망만이 있을 뿐이다.

회심의 사건은 나를 뒤흔드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사건이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회심의 사건이 어찌 자신도 알지 못하게 슬쩍 지나갈거라고 생각을 하는가. 나를 뒤흔드는 회심의 사건을 통하여 십자가의 부활의 능력이 임하여 구원을 얻는다.

십자가의 주님을 만나 회심하게 되면 불신자는 독실한 그리스도인이 되며, 부도덕적인 사람은 순결해지며, 부정직한 사람은 정직해 진다. 악한 행실에서 벗어나며, 덕을 쌓으려고 몸부림을 한다.  교만하고 자기 만족에 빠져 있던 자가 자신의 무가치함을 깨닫고 겸손해 지려고 한다. 이러한 변화는 십자가의 도가 이끈 것이며, 하나님의 능력인 것이다. ‘더 이상 죄가 저의 주인이 아니며 저는 이제 죄를 범하는 것이 싫습니다. 때로 저를 가두어두었던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되었읍니다하고 감사의 고백을 드릴수 밖에 없다.   

이제는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갈수록 우리는 행복을 느낀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기뻐하기 때문이다. 형용할 수 없는 어떤 능력에 의해 견고하던 내가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무엇은 바로 하나님의 능력인 십자가의 도가 내 안에 새로운 힘을 부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십자가를 온전히 보기 전에는 절망과 좌절과 패배함이 나를 억눌렀지만 십자가에 달리셔서 피흘리시는 주님을 보고 그 손을 만짐으로 우리들은 다시 살아 나게 된다. 십자가의 도는 나의 영혼을 살리고 잘 자라도록 성장시킨다.  

매일 십자가를 붙드십시다.
양팔로 십자가를 끌어 안으십시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을 꼭 붙잡고 놓지 마세요.
순간 순간 새롭게 십자가에 나아와 하나님의 능력을 입으세요.
전능하신 주님의 보혈을 믿으세요.
주변의 사람들에게 주님의 보혈을 전하여 그들 또한 회심하여 변하여 새 사람이 되는 기쁨을 같이 누리십시다.

십자가는 곧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십자가는 반드시 승리합니다  
십자가는 예언의 성취이며 완성입니다.

십자가의 도는 하나님의 사랑이며 우리들의 죄를 속죄하시고 화목케 하신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십자가의 사건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내주하시며 부활하신 주님과 같이 나 또한 부활의 능력을 입을 것을 소망하며 믿습니다.  

(22:17)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거저 받는 용서,
거저 받는 의로움,
완전한 씻김,
완전한 구원.

이러한 것들은 우리와 같이 보잘 것 없는 자들이 그리스도 예수를 믿고 자신을 주님께  맡기는 순간 우리들에게 주어지는 은혜의 선물들이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주님의 보혈을 믿으세요.
십자가에서 행하신 주님의 속죄를 믿으세요.
십자가에서의 예수님의 희생을 무시하거나 거절하지 마세요.
부활의 주님이요 생명의 주님과 늘 동행하는 놀라운 축복을 간구하세요.

늘 우리들 마음속에 십자가의 참된 의미를 간직하시를 축원을 드립니다. 고난의 땅에 살지만 죄를 지을 때마다 죄를 깨닫게 하시는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회개하여 용서를 구하며 장차 영원토록 천국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소망을 품고 승리하는 삶을 살아 가도록 합시다.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

구원을 얻게 하는 생명의 길은 모두에게 주어졌읍니다. 그렇지만 생명의 좁은 길을 택하는 자들보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크고 넓은 사망의 길을  택하는 자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에서 반드시 만나야 할 것이 바로 십자가의 도의 능력이 임하여야 합니다. 십자가의 능력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을 온전하게 만나 십자가의 도의 능력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회심의 사건이 있어야 합니다. 회심의 사건을 통하여 죽어있던 저의 영이 살아나는 거듭남의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 말씀과 같이 바람이 임의로 불어 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성령으로 난 자는 자신 안에 성령께서 임재하심을 느낄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아직도 회심의 사건을 경험하지 못한 영혼들이 저의 주변에는 너무나 많이 있읍니다. 저의 후손들과 형제 자매 그리고 이웃들 가운데 아직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한 이들이 있읍니다. 주여 긍휼함으로 저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주님을 알지 못하는 그의 후손들을 후대하시며 구원의 축복의 길로 인도하셨읍니다. 주님을 알지 못하는 저의 후손들에게도 같은 은혜를 베푸소서. 그들의 인생길에서 주님을 만나 회심의 사건을 경험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제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는 제가 연약하여 넘어지고 또 넘어지지만 저를 다시 일으켜 세우시고 십자가의 도의 능력으로 천성에 다다르게 하시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저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십자가의 도의 능력인 부활이요 생명의 능력을 저에게 베푸신 주님의 은혜가 참으로 큽니다.

주님 목이 곧은 저를 통하여 영광 받으소서. 

저와 저의 후손들을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18년 7월 15일 일요일

십자가의 도의 능력

(고전1:17-18)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린도 전서는 사도 바울이 제3차 전도여행을 떠나기 전에 에베소에서 고린도 교회의 분열의 소식을 듣고 이에 대한 자신의 권면을 쓴 서신서이다. 그 당시 고린도 교회는 여러 문제들을 갖고 있었다. 기독교의 근본적인 진리인 십자가의 도를 비롯해서 교회 기득권의 문제, 우상숭배, 성령의 은사의 남용등 여러 어려움을 극복하여 어떻게 교회를 온전히 세워야 하는 지에 대하여 말씀한다.  

사도 바울은 1장의 본문에서 십자가의 도에 대하여 말씀을 전한다. 사도 바울에게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건은 그의 삶의 모든 것이었으며 신앙의 근간이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나는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하지 않겠노라 다짐을 하곤 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건을 전파한다는 이유로 바울은 여러번의 태형을 맞았고 돌에 맞아 죽을 뻔하기도 수차례 겪었다.

바울은 십자가의 도를 말하기 전에 자신의 말의 지혜로 말하지 않겠노라 17절에서 다짐한다사도 바울은 학식과 성경지식과 경험을 두루 갖춘 현학이다.  그런 그가 자신의 지식과 학문을 의지하지 않고 간단하게 십자가의 도에 대한 진리를 이야기 하겠다고 말한다. 말의 지혜는 교묘하게 원래의 뜻을 장식하여 본질의 뜻을 명확하게 하지를 못하게 한다. 우리들도 어떤 것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미사여구를 사용하기도 하며 부풀려서 말의 본질을 가리울 때가 많이 있다. 현란한 말 재간으로 십자가의 도를 가려서는 않된다. 교회에서 선포되는 말씀 가운데에서는  분명하게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의 도가 드러나야 한다.

사도 바울에게 십자가는 여호와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의 본질 그 자체이었다. 그래서 고전2:1-2에서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에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다라고 말한다. 사도 바울을 포함하며 수많은 주님의 자녀들이 십자가의 도를 마음에 믿음으로 품기 위해서 순교했다. 십자가의 도는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했던 것이다.
 
나에게 십자가의 도는 어떻게 다가오는가?
나 또한 십자가의 도와 목숨을 선택해야 한다면 과연 나는 나의 목숨을 내놓고서라도 십자가의 도를 택할 수 있을까?

십자가의 도는 무엇일까? 
십자가의 도는 단순한 진리를 갖고 있다. KJV “the message of the cross”, NIV에서는 “the preaching of the cross” 혹은 “the word of the cross”로 헬라어로는 logos가 사용된다. “십자가의 도십자가의 말씀이라 말할 수 있다. 십자가의 도란 바로 십자가에서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자신을 희생제물로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말씀이다.  

Charles Spurgeon목사는 그의 설교에서 하나님은 인성을 가지고 이 땅에 내려 오셨고, 그 인성으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우리의 슬픔을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의 죄를 속하셨다는 이 십자가의 도의 교리는 비할 데 없는 시이며 모든 사상과 신조의 극치이다라고 전하였다.


십자가에는 어떤 하나님의 지혜가 있는지를 보자.

1.   십자가는 하나
십자가의 도는 여럿이 아니라 하나의 가르침이다. 복음은 하나이며, 구원도 하나이다. 구원을 얻음은 오직 구세주이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받는다. 속죄함을 받기 위해 여러 가지의 방법들을 통하여 얻는 것이 아닌 오직 예수를 통하여 구원은 주어진다.

십자가에서 들려오는 말씀은 (45:22) 내게로 돌이켜 구원을 받으라라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목소리는 이것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살리라하며 우리들의 행위를 강조한다. 행위로 말미암는 구원, 감정으로 말미암는 구원, 외형적인 종교로 말미암는 구원의 교리는 십자가의 도가 아니다. 어떤 영적인 성직자를 통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닌데도 사람들은 그런 사람으로부터 구원을 얻으려고 의지하려고 한다. 이는 거짓의 소리이며 결국에는 죽음에 이르게 한다.

(13: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주님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시고 운명하셨다. 이 십자가의 도는 세대를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닌, 언제 어디서나 동일하게 영원히 지속된다. 사도 바울이 2000년 전에 선포했던 복음은 현시대의 복음과 동일하며 십자가의 도 역시 전혀 변질되지 않았다. 만일 속죄나 구원이 우리의 행위로 인해 얻어져야 한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마지막 숨을 내쉬며 다 이루었다말씀하시지 않으셨을 것이다. 속죄와 구원은 예수님께서 이미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


십자가의 도는 곧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우리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셨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가르치심은 영원토록 변치 않는 구원을 얻게 하는 오직 하나의 진리이다.
 

2.   십자가의 대속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죄에 대하여 분노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구약을 보면 하나님께서 범죄한 자들을 무섭토록 심판하시는 모습이 나온다. 이 범죄한 자들이 하나님께 속죄할 때 반드시 필요했던 것이 죄를 지은 자는 죽을 수 없어 그 자를 대신할 대속물의 피이었다.  

피는 생명의 상징이다.
죄를 범한 자들이 속죄함을 받기 위해서는 "(9:22) 피흘림이 없은 즉 사함이 없느니라"의 말씀과 같이 자신의 생명을 대신 할 대속물의 피흘림이 반드시 있어야 했다.

(5:18)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벧전1: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것이니라.

첫 인간인 아담의 죄의 대가를 이어받은 모든 인간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서는 이와 방불한 누군가가 속죄함을 받았어야 했다. 모든 인간의 죄를 대치할 수 있는 그 만한 값어치가 있는 대상이 있어야 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죄있는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보내셔서 그의 피흘려 죽게 함으로 온 인간의 죄를 속죄받게 하는 계획을 하셨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기 때문에 비록 아무런 죄가 없지만 십자가에서 온 인간의 죄를 홀로 지신 예수님을 버리실 수 밖에 없으셨다. 나와 우리 모두의 죄를 대신 지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으셨어야 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죄인의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리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9:12)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의 말씀과 같이 자신의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로 우리 인간 모두에게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다.


(1:20)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2:16)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십자가에서 치른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우리들의 모든 죄는 제거되었고 여호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단번의 희생으로 열납되었고 속죄가 완성되었다.  회목제로서 십자가에서 치르신 예수님의 구속 사역으로 우리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거저 받았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베푸신 가장 크나 큰 선물이었다. 우리 인간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의 중심에 십자가의 사건이 있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모든 피를 흘리고 죽으심으로 단절되었던 하나님과 우리들의 관계가 회복되었다. 주님의 피가 하나님과 우리들의 관계를 화목케 하셨다.

주님의 보혈의 능력이 내 안에 흐릅니다. 보혈의 능력으로 구원을 얻어 영원한 생명을 갖게 해 주신 주님의 희생과 사랑에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 영광 받으소서.

 
3.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

(5:8)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십자가는 무엇을 우리들에게 전하고 있는가?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이셨다.

하나님께서는 죄로 인하여 멸망 받을 수 밖에 없는 우리들을 사랑하시어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십자가에서 죽게 하심으로 우리들의 죄를 구속하셨다.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게 하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다. 세상의 어느 아버지가 다른 이들을 살리려고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겠는가. 십자가는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시며 자비이다.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비록 하나님께서 의를 사랑하시고 죄를 미워하시지만, 그럼에도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죽게 하시므로 우리 죄인들을 살리셨을만큼 우리를 사랑하신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의 인간의 본성을 취하게 하시고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하셨다. 이는 곧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우리를 위해 죽게 하심이었다.

십자가의 도는 곧 하나님께서는 사랑이심을 나타낸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예수님이 달려 죽으신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는 속죄함을 받았다. 전에 지은 죄와 지금 짓고 있는 죄와 그리고 앞으로 지을 죄들 까지 모든 죄를 십자가에서 용서하셨다. 죄로부터 자유롭게 하셨다. 내 안에 계시는 성령께서 죄를 멀리하고 죄를 짓지 않도록 말씀하실때에 순종하여 죄로부터 멀어진 복된 인생이기를 간구한다.    

 

여호와 하나님

너무나 크신 은혜의 선물을 주셔서 저를 영원토록 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함과 희생과 사랑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모든 죄를 대속하신 자비와 긍휼하심으로 늘 죄악 가운데서 허덕이는 저를 살리셨읍니다.

우리에게 베푸신 십자가의 사랑이 너무나 크고 지극한데도 저희들은 조금만 틈만 보이면 그 십자가에서 베푸신 사랑을 잊어 버리고 제각각의 소견대로 삽니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는 저희를 사랑하시사 다시 때에 따라 십자가의 사랑을 기억나게 하시고 주님앞으로 나오게 하시는 여호와의 사랑으로 차고 넘칩니다. 제 안에 십자가의 도로 가득하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제 안에 십자가의 도를 인쳐주옵소서.

저를 살리시려고 십자가에 달려 사랑을 베푸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18년 7월 8일 일요일

미련한 십자가의 도

(고전1:18-25)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리라.
그 당시의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다. 사도 바울은 그들이 사랑이 없기 때문에 올바른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도록 고전13장에서 사랑에 대하여, 또 은사를 사용함에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않고 자신을 나타내며 교회를 어지럽혔기 때문에 14장에서 은사에 대하여 말씀한다 

고린도 교인들은 자신의 지식을 자랑했으며 입술로만 하나님을 경배했다. 10-12절에 나타난 것과 같이 분열했으며 서로 당을 짓고 서로를 헐뜯었다. 20-21절에서는 세상의 철학자, 서기관, 변사를 언급하며, 이러한 사람들은 이 세상에 속하였음을 3번이나 거듭해서 강조한다.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에서는 변사 (수사학적 능변가)는 최상의 대접을 받았다. 오늘날 영화 배우나 인기 운동 선수들과 같은 부와 명예를 누리며 대중의 환호와 선망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사도바울는 이러한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서 페하셨다고 역설한다.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구원은 우리 인간들의 상식의 한계를 뒤업는 것이다. 18절에서는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구원을 받은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가 말하며, 21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신다고 말한다.

 
미련한 것(moria)의 원어의 뜻은 미쳤다이며, 복음의 메시지는 상식적인 기준으로 볼 때 완전히 미친 것과 다름이 없음을 의미한다.

십자가에 달린 수치스러운 죽음이 어떻게 세상의 구원사건일 수 있겠는가?
그것을 믿으려면 세상의 지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며 미련한 자가 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복음이다. 

십자가의 사건은 사람들의 지식과 상식을 뛰어 넘는 것이며 그 당시 세상과 종교의 권위 체계를 뒤 엎는 것이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로마의 억압가운데 있는 자신들을 구원할 권능의 메시야가 필요했고, 헬라인들은 논리적이고 설득력이 있으며 철학적 진리를 가르치는 변사가 필요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은 이들 모두의 기대와는 맞지 않았다. 예수님은 범죄자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 그러한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어리석으며 미련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구원을 인간의 기준으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도는 역사상 가장 신비한 사건이다.
십자가의 도는 곧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게 되는 구원의 진리를 말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저와 여러분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달려 죽으신 사건은 우리들의 인간의 지식의 한계 저 너머에 계신 하나님의 계획이기 때문에 우리들은 이해할 수 가 없는 사건이다.

십자가의 은혜는 남은 자에 대한 은혜이다.
이 남은 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구약으로부터 내려오는 하나님의 섭리이다. 남은 자란 우리들의 선한 행위가 아닌 하나님께서 은혜로 택하심을 받은 자들이다. 엘리야 시대에 아합왕으로부터 핍박받아 모든 선지자들이 죽고 엘리야만 남았을때, 엘리야가 탄원하기를 모든 선지자가 죽고 나만 남았읍니다 하였을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나의 은혜로 7,000인을 남겨 두었다라고 하셨다.

십자가의 은혜는 모든 이들에게 적용되지만, 그 은혜를 믿어 구원받는 자들은 소수의 남은 자들이다.  은혜를 받지 못하는 자들은 롬11:8의 말씀과 같이 하나님이 오늘까지 그들에게 혼미한 심령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와 같이 십자가의 도를 거부하여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를 받지 못해 멸망당할 수 밖에 미련한 자들을 말한다.
 

두 가지의 미련함이 있다. 
(25)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미련한 것, 연약한 것)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하나는 주님의 십자가를 거부하는 미련함이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은 지혜가 없음으로 미련한 것이며 멸망을 받을 수 밖에 없다.

또 다른 하나는 십자가의 도를 믿는 미련함이다 
십자가의 사건은 미련하며 약한 것임을 말씀한다. 예수님의 어리석게 보이는 십자가에서의 죽음에 의해 우리들은 하나님의 새로운 종말론적인 시대에 들어 갈 특권을 얻었다.   

구원은 교회에 다닌다고 모두가 받는 것이 아니다.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을보터 남은 자의 은혜가 임해야 한다.  사도바울은 십자가의 도를 고린도에 있는 교인들에게 설명한다. 이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이 아닌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이다. 즉 교회에 다니는 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이다. 

교회에 나오는 자들 중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는데, 하나는 미련한 십자가의 도를 믿지 못하는 멸망하는 자, 다른 이는 미련한 십자가의 도를 믿어 남은 자로 택함을 받은 구원 받은 자이다. 나는 어디에 속해 있는가? 멸망 받은 자인가 혹은 구원 받은 자인가. 미련한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에게는 미련하지만 구원받은 자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미련한 십자가의 도를 믿지 못하는 멸망하는 미련한 자
하나님의 사랑의 십자가의 도를 멸시하고 무시하는 이들이 있다.
사람들은 입으로는 주님을 가까이하며 믿음이 있는듯 보이지만 실은 마음은 멀리 떠나 있어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있다. 예수님은 범죄자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세상사람들이 볼 때 그러한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어리석으며 미련했던 것이다  

속죄의 구원의 교리를 미련한 것이라고 한다. 많은 이들이 한 사람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은 구원의 교리를 어리석고 미련한 것으로 단정을 지으며 그리스도의 신성을 무시한다. 기독교를 개독교로 표현하며 폄하하기도 한다. 물론 우리 기독교 인의 잘못이 더욱 크지만, 그 이면에는 하나님의 의를 용납할 수 없는 세상의 임금인 사탄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22절에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찿으나로 기록되어있다.
사람들이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구하는 방법이 무엇이지를 나타낸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한다고 한다. 즉 하나님의 활동에 대해 증명할 수 있는 표적을 찿는다. 헬라인처럼 지혜를 구하는 경우도 있다. 하나님을 증명하기 위해 심오한 세상의 지식을 얻으려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표적을 구하는 것이나 세상의 지혜를 구하는 것은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에 관한 십자가의 도를 믿고 받아들일 수 없도록 한다.

십자가의 도를 멸시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제나름대로 재해석을 하며 치명적인 오류를 범한다. 성경은 창1:1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라 하며 지구를 제일 먼저 창조하였다고 기록했다. 진화론의 영향을 받은 학교 교육의 영향을 받아 이 사실을 믿지 못한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우주의 시작은 과거 어느 시점에서 갑작스러운 팽창으로 인해 시작되었고 지구는 수십억년의 많은 시간이 지난 후 만들어 졌다는 가설을 믿는다. 성경 말씀을 자신의 지식의 한계로 재해석하며 자신이 세운 가설대로 왜곡하였다.  

세상에 속한 이들은 성경의 진리를 왜곡시키며 하찮은 것으로 멸시하며 무엇보다 십자가의 도를 어떻게든 홰손하려고 한다. 우리들 주변에도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의 도를 부인한다. 많은 사람들은 십자가의 능력을 믿지 못하며 어리석은 짓이라고 한다 

 교회에 다니는 자들 중에서도 성경을 있는 그대로로 믿지를 못하는 이들이 많다.
성경의 진리를 자신의 얄팍한 지식과 세상의 이론에 접목하며 합리화 한다. 그 결과 죽은 자를 살리는 십자가의 도의 능력이 선포되지 못한다. 사람의 영혼을 구하는 주님의 임재가 있는 교회가 아니라 종교적인 예식을 행하는 하나의 기관으로 전락을 하였다.

왜그럴까?
그 이유는 바로 19절에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의 말씀이며 이 말씀은 사29:13-14으로부터 인용되었다.

(29:13-14)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가르침을 받았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이 백성 중에 기이한 일 곧 기이하고 가장 기인한 일을 행하리니 그들 중에서 지혜자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자의 총명이 가려지리라. 
 
하나님을 믿는 다 하면서 실상 나의 마음은 세상에 있다. 이사야는 사람들은 입으로는 하나님을 가까이하며 존경을 표하지만 마음은 멀리 떠나 있으며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는데 그 이유는 지혜가 없기 때문이라 한다.

이기적이고 욕심이 있는 교만한 인간들은 십자가의 도를 어리석은 것이라고 한다. 이런 이들은 육신에 속해 있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더욱 많은 재물을 축적할까, 어떻게 하면 인생을 즐길까하는 것들에는 관심을 기울이며 귀를 기울이며 시간을 투자한다. 하지만 십자가의 도가 무엇인지를 아는데는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는다.

자신의 영혼에 대하여 너무나 무지하다.
그들은 자신이 영원히 살 것이라고 착각을 한다. 그렇지만 우리들의 인생은 너무나 짧다. 그리고 죽을 때 그토록 애지중지하며 가지려고 애썼던 것들을 아무것도 가져 가지 못하고 단지 조그만한 땅에 누울 뿐이다.  잠시뿐인 이 땅의 삶에 집착을 하며 영생을 거부한 인생들은 얼마나 미련한가. 참으로 불쌍하고 미련하다. 

 
미련한 십자가의 도를 믿는 구원받은 자
구원의 근본은 하나님이시다. 십자가는 바로 하나님의 생각이셨다. 우리들의 지식의 한계 저 너머에 계시는 하나님의 계시인것이다. 십자가의 도는 인간의 이성의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로 말미암은 은혜이다 

십자가와 그리스도 그 자체가 하나님의 사랑의 구현이다. 세상 사람들이 미련하게 보는 십자가 사건을 믿어 구원을 얻는다. 이러한 믿음은 내가 원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능력이 내게 임하여 나로 하여금 믿게 해 주신다.  십자가는 우리들을 죄 가운데서 건져내신 하나님을 볼 수 있게 한다. 십자가가 구원을 얻은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고 구원의 유일한 길이며 하나님의 지혜이다.  

 인간이 하나님께 다다르려고 열심으로 노력을 해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 아닌, 하나님 그 분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인간으로 오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것을 받아 들이는 사람들에게는 24절에 쓰여진 대로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와 같이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참된 지혜의 은혜가 임한다.

 십자가는 우리들을 죄 가운데서 건져내신 하나님을 볼 수 있게 한다. 십자가가 구원을 얻은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고 구원의 유일한 길이며 하나님의 지혜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능력이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다시 살리시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게 하심으로 천하 만물의 주가 되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메시야의 수치스럽고 무력한 죽음을 통해 세상을 구원하시기로 결정하셨다. 그리고 십자가는 하나님의 구속사역의 중심이다. 만일 이러한 충격적인 사건이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가장 깊은 진리라면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기준도 바뀌어야 됨을 의미한다.

우리들의 생각이 나 중심에서 벗어나 하나님 중심으로 옮겨져야 한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십자가를 부인하지 말고, 자신을 부인하라말씀하신다.    

성령의 열매를 맺기에 힘쓰며 매일 매일 우리들의 세상에 속한 또 다른 나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 5:22-24에서 성령의 열매를 말씀하시고, 그리고 예수의 사람들은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말씀하신다 

매일 매일의 삶속에서 십자가를 계속해서 부인하게 되면 그 사람은 영적으로 미련한 사람이 되어 결국은 멸망 받을 수 밖에 없게 된다. 반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미련하게 믿는 자는 구원얻은 자가 되어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들에 임하여 천국을 소유한 자녀가 되어 이 땅에서 천국을 경험하며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며 장차 임할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게 된다.


미련함은 십자가에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십자가를 부인하고 거부한 자들이 실로 미련다. 
우리들의 영혼은 너무나 소중하다. 하나님은 실재하시며 천국은 실재하며, 죄의 결과는 지옥에서 영원한 사망이다  

십자가의 사건을 부인하는가?
삶을 허비하고 파멸 가운데 있는가?
십자가를 믿는 것이 미련하며 어리석다라고 생각을 하는?
자신의 영적인 상태에 관심이 없고 무지한가?
성경은 전혀 읽지를 않는가?

주님의 십자가의 도를 거부해서는 않된다 
십자가의 은혜는 모든 이들에게 열려진 은혜이지만, 미련한 십자가의 도를 믿어 하나님의 택함을 받는 자들은 얼마되지 않는 남은 자들의 은혜를 받은 자들이다   

주님의 십자가의 도를 거부하면 미련한 자가 되어 멸망을 받을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미련한 십자가의 도를 믿어 받아 들이면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들에게 임하며 멸망당할 영혼을 살리사 영원토록 하나님의 나라에서 평강과 사랑 가운데 거하도록 하나님은 인도하신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당할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반대로 미련하게 보이는 십자가의 도를 믿으면 우리들에게는 하나님의 구원이 임한다.

말씀을 무시하고 멸시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를 못한다 
예수님께서 죄인인 나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고 인정할 수도 없다.  

십자가의 도는 이성의 산물, 지식의 산물, 인간의 경험의 산물이 아니다.
십자가의 도는 하나님의 계시이다.
십자가의 도는 우리 인간의 생각이 아닌 하나님의 생각이며 계획이기 때문에, 우리 인간의 지식의 한계를 넘어 있어 우리는 결코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도를 인간의 학문이나 지식으로 풀어 낼 수 없다.
아마도 우리가 천국에 가서 영원토록 성경 공부를 할 때 지금은 궁금하고 이해할 수 없었던 많은 성경의 비밀들을 명확히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어떤 미련함을 택하시겠읍까?
미련해 보이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도를 거부하면 멸망받는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미련한 십자가의 사건을 받아들이면 하나님의 구원을 받게 된다.
선택은 내 옆에 있는 사람이 택하여야 하는 것이 아닌 바로 나의 몫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미련한 십자가의 복음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복잡한 구원의 복음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육신의 모습으로 와서 고통과 치욕과 멸시와 천대를 받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주신다는 십자가의 복음을 믿을수 있도록 은혜를 주셔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제 마음에 늘 자리잡고 있어서 어느때나 나를 살리시고 영생을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제 마음에 늘 품도록 저를 인도하옵소서.
 
저의 얄팍한 지식과 경험으로는 결코 이해할 수도 없는 하나님의 섭리의 계획을 받아들이도록 저의 마음이 완전하게 열리기를 간구합니다.
성령님 저를 도와주소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의 구원자이시며 십자가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죽을 수 밖에 없는 저를 살리셨음에 늘 찬양하며 감사합니다.

저의 찬양과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