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1월 30일 월요일

미움

(10:12)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느니라.
 
 
우리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아마도 남을 험담하고 미워하는 것이 아닐까?
매일 우리는 누구를 미워하고 미움을 받는 것을 경험하지 않는가!
 
사람과의 관계를 부부간의 관계를 가족간의 관계를 주님과의 관계를 무너뜨리는 것이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미움이라 생각한다. 미움이 있는 곳에는 분노가 있고, 증오가 있고, 다툼이 있다.
 
 
A.    미움의 근원
언제 우리는 미워하는가? 여러가지 타당한 이유가 있어서 미워한다.
 
시기
(37:3-5)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므로 그를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그의 형들이 아버지가 형들보다  그를 더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더라. 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말하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
(37:11) 그의 형들은 시기하되 그의 아버지는 그 말을 간직하였더라
 
내 것을 빼앗겼을 때
나를 무시할 때
내 주장대로 되지 않을 때
나를 모함할 때
나를 함부로 대할 때
 
내 생각과 다를때
(6:11) 저희가 노기가 가득하여 예수를 어떻게 할까 하고 서로 의논하니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율법으로 중요시하는 안식일에 주님께서 병을 고치시는 것을 보고 노기가 가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미움의 중심에는 “나”가 있다
나를 알아 주지 않으니 내 마음에서는 미워함으로 나타난다.
미움은 자신으로부터 나온다. 내 자아가 기뻐하지 못하고 만족하지 못할 때 나는 상대방을 미워한다.
 
누가 가장 미움을 받았을까?
바로 예수님은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아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주님은 내가 받는 미움과는 비교할 수 없게 주님은 사람들로부터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으셨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사단은 주님의 자녀인 나 역시 미워한다는 것이다.                                                                
 
(15: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 알라.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속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미움의 근원은 사단이다.
사단은 기회만 되면 어떻게 해서든지 사람들의 마음에 미움을 심어준다.
그렇기 때문에 사단은 사람의 마음을 사용하여서 믿는 자들이 서로 미워하게 만든다.
 
주님은 이유없이 미움을 받았다. 주님의 제자들 역시 미움을 받는다.
(15:25) 그들이 이유없이 나를 미워하였다 한 말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이유없이 미움을 받을 때는 영적인 문제가 있다.
사단은 예수를 믿는 우리가 서로 미워지게 만들고 주위 사람으로부터 미워지게 만든다.
까닭없이 불공평하게 이유없이 가족안에서 직장에서 주위사람으로부터 미움을 받는다.
이럴 때 주님을 생각해 보자.
 
주님의 이름으로 미움을 받으면 감사해야 한다.
왜냐하면 내가 바로 주님의 자녀이라는 증거이지 않는가!
(6:22)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A.     
B.    미워하게 되면
미워하게 되면 마음이 굳어지고 강팍해 진다. 그래서 나타나는 특징들이 있다.
 
언사가 불평
(37:4) 그의 형들이 아버지가 형들보다 그를 더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더라.
 
죽이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미워함으로 가득차자 요셉을 죽이려고 궁리한다.
(37:18) 요셉이 그들에게 가까이 오기 전에 그들이 요셉을 멀리서 보고 죽이기를 꾀하여
 
자신의 왕권을 위협한다고 느낀 사울왕은 다윗을 미워하여 그를 죽이려고 여러번 다윗을 곤경에 처하게 한다. 피신하는 다윗을 도왔다는 이유 때문에 아무런 죄가 없는 제사장 아히멜렉과 85명의 제사장들과 그들이 사는 성읍의 많은 사람들과 가축들을 죽였다

미움은 나의 마음을 찢어 놓는다.
이성적인 판단을 흐리게 하여 살인하는 욕망을 일으킨다.

반드시 알아야 할 아주 중요한 사실이 있다.
(5:19-20)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미움은 현세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잘 경험하였듯이 미움은 육체에 속한 일들인 분노를 일으키고 사람과의 관계를 분열시키며 나아가서 주님과의 관계를 깨뜨려서 결국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게 하는 파괴적인 일이다.
미워함으로 천국을 갈 수 없다면 이는 심히 심각한 문제가 아닌가.
 

C.    미움을 이기기 위해서는
그렇다면 어떻게 미움을 극복할 수 있을까?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곧 사랑과 용서이다.
 
1. 사랑
(12)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느니라.
 
사람의 능력으로는 미움으로부터 벗어 날 수 없다.
오직 주안에 있는 사랑의 힘으로 벗어 날 수 있다.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 사랑은 나를 낮추는 것이다.
나를 낮춘다는 것은 곧 상대방을 높이며 귀하게 여긴다는 뜻이다.
 
상대방을 존귀하게 여겨야 한다
상대방을 존귀하게 대하기 위해서는 나를 낮게 여기는 겸손이 있어야 한다.
 
어떻게 우리는 나를 낮추는 겸손을 얻는가.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십자가 복음의 핵심이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며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다.
또한 끊임없이 죄를 짓게 하는 나의 자아 나의 옛사람 역시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함께 죽었다.
 
예수님으로 인하여 변화된 삶을 살게되면 삶은 변할 수 밖에 없다.
 
(6:4)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끊임없이 죄를 짓게 하는 나의 자아 나의 옛사람은 이미 십자가에서 함께 죽었다.
그렇지만 나의 자아, 옛성품, 옛사람이 살아 나려고 할 때마다 나의 죄악의 본성은 나타난다.
내 성에 차지 않으면 상대방을 미워하고, 누가 나를 미워하면 나 또한 상대를 미워한다.
 
그럴때마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바라보자.
내 안에는 주님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계시기에, 내가 원하고 간구한다면 성령님은 이미 내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시고 나를 낮추어 주신다. 내가 낮아져서 죽음의 자리로 나아 간다면 나를 미워하는 자를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2. 용서
주님께서는 허물을 덮고 70번의 7번 용서하라고 하신다.
허물을 덮는 것은 상대방의 잘못을 덮고 용서하는 것이다.
용서란 상대방의 잘못이 이해가 되지 않아도 표용하는 것이다.
 
주님은 십자가에 달리시면서 자신을 못박는 자들을 보며 아버지께 기도했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옶소서. 저들은 저들의 죄를 알지 못합니다.
 
Stephan 집사는 돌에 맞아 죽으면서 “주여 저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하며 기도하며 주님을 바라보며 죽었다. 그것을 본 사울은 후에 변화하여 사도바울로서 사명을 감당하였다.
 
왜 우리는 나에게 잘못을 저지른 자들을 용서해야 하는가?
왜냐하면 주님께서 나의 모든 죄를 이미 용서하셨기 때문에 나 또한 나의 형제를 용서해 주어야 한다.
주님으로부터 너무나 큰 죄를 탕감받았기에, 나 또한 내게 행한 형제의 조그마한 잘못을 용서해 주는 것이 마땅하다.
 
용서를 하는 것은 내게 유익을 준다.
내가 누구를 진심으로 용서하게 되면 나의 마음이 평안해 지는 것을 경험해 보았다.
내가 누구를 용서할 때 얻어지는 것은 바로 주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나를 십자가에서 용서하신 주님의 은혜를 더욱 느끼게 된다.
 
용서는 덮어주는 것이다. 뒤끝이 없어야 한다.
내게는 내게 잘못을 저지른 상대방을 용서할 수 없는 타당하고 합리적인 이유들이 너무나 많이 있다.
 
그런 이유가 있기에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세상에 속한 이들이 하는 일이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하심과 용서하심을 받은 천국백성이지 않는가!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잘못을 이유를 묻지 않고 덮어주시고 표용하셨듯이, 우리 또한 내게 잘못한 이들을 아무런 이유를 묻지 않고 용서하고 그들의 잘못을 덮어 주어야 한다.
주님께서 그런 우리를 보시며 얼마나 기뻐하시곘는가!
 
나를 미워하는 자를 용서하며 축복하자.
누가 나를 미워하는 것을 보고 나를 돌아보게 된다.
왜 내가 무엇을 했기에 저가 나를 미워할까?
내가 미움을 받게 되면 왜 상대방이 나를 미워하는지를 생각하게 되고 나의 잘못, 죄성을 다시 보게 되게 된다.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를 축복하자.
 
 
말씀을 정리하면,
미움은 모든 사람들이 갖고 있는 옛사람의 속성이며 그 배후에는 사단이 있다.
미움은 사단의 속성이다. 사단의 속성이기 때문에 미움이 있는 곳에는 분노와 혼란과 분열이 있어 모든 사람과의 관계 뿐 아니라 주님과의 관계를 깨뜨리고 결국은 파멸에 이른게 한다
 
죄성에 속해 있는 우리는 흔히 상대방을 미워하고 또한 상대방은 나를 미워한다.
하지만 우리는 주님의 자녀이기 떄문에 우리는 이러한 미움의 상호관계를 끊어야 한다.
내가 다른 이들을 미워하게 되면 내 마음에는 쓴 뿌리가 자라 나게 된다.
쓴 뿌리는 나의 마음의 평강을 빼앗아 간다.
그렇게 되면 이 땅에서 천국의 삶을 경험하지 못한다.
미움이 커 갈수록 나의 삶은 피폐해지면 지옥을 경험한다
그리고 미움을 간직하고 있다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성경은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내가 살고 내 가정이 살기 위해서는 미움에서 벗어나야 한다.
미움으로 망가진 관계에서 벗어나서 회복되어야 한다.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여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이들을 용서하자.
가장 가깝게는 나의 가정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내게 미움의 마음을 주었던 나의 아내를, 나의 남편을, 나의 부모를, 나의 자녀를, 나의 가까운 이웃들을  용서하고 사랑하자.
 
그리고 나를 미워하는 자를 축복하자
그것이 나의 살길이요 내가 회복 되어 주님께로 가까이 가는 축복의 길이요 주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은혜의 길인 것이다.
 
잊지말자.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우리 역시 죽었다는 사실이다.
죽은 자가 무슨 자신의 권리를 내세울수 있겠는가!
 
누가 나를 미워할 때마다 누군가를 미워할 때마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바라 볼 수 있는 잠시 동안의 마음의 여유를 갖자. 그렇다면 내게 사랑과 용서의 마음이 샘솟듯 일지 않겠는가!
내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축복의 길로 은혜의 길로 나를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시지 않겠는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
 
저희는 늘 누군가를 미워하는 습성을 갖고 있읍니다.
조금만 저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런 상대방을 보며 미워합니다.
 
미움은 저의 마음의 평정을 깨뜨리며,
사람과의 관계를 망가뜨리며,
또한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를 깨뜨리는
제안에 있는 무서운 옛사람의 성품입니다.
 
이 모든 것이 저의 자아가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저의 자아가 이미 주님과 함께 주님의 십자가에서 완전하게 못 박혀 죽었는데
이를 믿지 못하기에 저의 자아는 옛사람의 습성대로 행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누가 저를 미워할 때마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바라 볼 수 있는
잠시동안의 마음의 여유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그리고 제가 주의 이름으로 미움을 받는다면 그 사실만으로 감사하게 하옵소서.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증거이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요.
 
저의 눈에 가시같은 자를 사랑하고 용서하고 축복합니다.
주님께서 자신을 미워하여 십자가에서 죽인 자들까지도
그들의 죄의 용서를 간구하시며 감싸 주셨듯이
저도 주님을 닮아 저를 미워하는 자를 용서하며 사랑하며 축복하기를 원합니다.
 
주의 은혜로 충만케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15년 11월 1일 일요일

오홀라와 오홀리바

(23:4) 그 이름이 형은 오홀라요, 아우는 오홀리바라. 그들이 내게 속하여 자녀를 낳았나니 그 이름으로 말하면 오홀라는 사마리아요 오홀리바는 예루살렘이니라.
 
 
에스겔서는 에레미야서와 거의 같은 시대인 BC 593년경에 쓰여졌다.
두 권은 이스라엘의 멸망과 회복에 대하여 말하며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조명한다.
 
한글성경에는 정확하게 나타나 있지 않지만, 오홀라와 오홀리바는 자매이다.
The older was named Oholah, and her sister was Oholibah. They were mine and gave birth to sons and daughters. Oholah is Samaria, and Oholibah is Jerusalem.
 
오늘의 본문은 두자매에 대한 말씀이다. 즉 가족에 대한 이야기이다.
예레이먀서에서도 유다와 북이스라엘을 자매라 표현한다.
(3:7)그의 반역한 자매 유다는 그것을 보았는지라
 
여호와는 에스겔서 23 4절에서 북이스라엘을 “Oholar” 그리고 남유다를 “Oholibah”라 부르신다. Oholar의 이름의 뜻은 ‘Her tent’ 이며 ‘사마리아가 임의대로 세운 성소’를 의미한다고 하며, 그리고 Oholibah 이름의 뜻은 ‘My tent is in her’ 이며 ‘예루살렘에 세운 여호와의 성소’를 의미한다고 한다.  
 
오홀라라 상징된 북이스라엘은 겔23:9에 “그러므로 내가 그를 그의 정든 자 곧 그가 연애하는 앗수르 사람의 손에 넘겼더니”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앗수루에 의해 멸망당한다.
 
그리고 오홀리바, 곧 남유다는 겔23:23 “그러므로 오홀리바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나는 네가 사랑하다가 싫어하던 자들을 충동하여 그들이 사방에서 와서 너를 치게 하리니 그들은 바벨론 사람과 갈대아 모든 무리 브곳과 소아와 고아 사람과 또 그와 함께 한 모든 앗수루 사람….그들이 무기와 병거와 수레와 크고 작은 방패를 이끌고 투구 쓴 군대를 거느리고 치러 와서 너를 에워싸리라.” 말씀과 같이 바벨론에 의해 완전하게 멸망당한다.
 
그리고 그 이유가 23:30 35절의 말씀과 같이 “네가 이같이 당할 것은 네가 음란하게 이방을 따르고 그 우상들로 더럽혔기 때문이로다….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네가 나를 잊었고 또 나를 네 등뒤에서 버렸은즉 너는 네 음란과 네 음행의 죄를 담당할지니라 하시니라. 
 
여호와께서 오홀라와 오홀리바를 치신 이유가 곧 이방을 섬기고 우상을 섬기며 여호와의 이름을 잊어 버렸기 때문이다사람들은 흔히 “네가 네 죄를 알렸다”하며 뭉그러뜨려서 말하기를 좋아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분명하게 왜 그렇게 되었고 또 어떻게 될 것인가를 성경을 통해 분명하기 말씀해 주신다. 하나님께서 심판 하시는 이유를 성경은 우리에게 확실하게 가르치시며, 또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행하여야 하는 가를 분명하게 인도하신다.
 
 
기적인 사건이 있다.
오홀라와 오홀리아로 명칭된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자.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 섭리하신 하나님을 우리는 경험했고 지금도 보고 있다.
이스라엘이란 나라가 지금까지 존속되고 있다는 그 자체가 기적이다.
북이스라엘은 호세아왕이 다스리던 BC722에 앗수루에 의해 멸망당했고 (왕하17), 남유다는 시드기야왕이 다스리던 BC587에 바벨론에 의하여 멸망당한다 (왕하25), 그후 400년간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그나마 남아있던 이스라엘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로마에 의해 AC70년 경에 완전하게 멸망당한다. 모든 이스라엘 자손들은 사방으로 나라를 잊어 버리고 뿔뿔히 흩여 졌다.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들은 사방의 다른 이방민족들과 혼합되게 된다. 아마도 유대인들처럼 혼합된 민족은 찿기가 어려울 것이다.
 
이스라엘이란 나라는 약 2000년 전에 완전하게 역사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런데 2000년 쯤 지나서 1948년 다시 이스라엘로 회복되었던 것이다.
 
기적이 2000년이 지난 후에 일어난 것이다.
Palestine이란 나라가 그 땅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자신의 땅을 찿겠다고 잘 살고 있던 이들을 밀어내고 이스라엘이란 나라를 세운 일이다. 한번 생각해보자. 우리가 고구려 땅을 회복한다고 지금의 중국의 북방의 영토를 주장하고 나선다면 중국은 어떻게 반응할 까?
 
오직 하나님의 간섭이 있지 않고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인것이다.
 
2000년 동안 사람들의 기억에서 오래전에 사라져 버린 이스라엘이란 나라를 하나님께서는 잊지 않으시고 다시 회복시키신 것이다. 아니 사람들의 눈에는 잊혀 버린 2000년이란 긴 기간동안에도 하나님께서는  늘 남겨진 택하신 자녀들과 함께 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의 적극적인 간섭함으로 남은 자들인 이스라엘 자손들은 잃어 버린 2000년이 지나는 동안에도 자신들의 종교와 문화 유산들을 간직할 수 있었도 그것들을 후손에게 물려 주었던 것이다.
 
이해가 가는가?
우리 한민족은 일본에 의해 1910년 합병이 되어 조선을 잃게 된다. 그 후 약 35년간 나라를 잊어 버리고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 얼마나 많은 것들이 일본의 영향을 받았는가. 이름도 일본식으로 개명되었고 모든 종교, 경제, 정치와 문화도 일본화되어 가지 않았던가. 그 기간이 2000년을 지속되었다고 상상해 보자. 과연 그렇다면 한국이란 나라가 지금도 존속되었을까? 아마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을 것이다. 한민족은 일본인들과 뒤섞여서 구분도 되지 않을 것이고 우리가 자부하는 한글 그 자체도 없어져 버렸을 것이다.
 
어떻게 해서 이스라엘이란 나라가 2000년이 지난 후에 다시 세워졌는지는 인간의 상식과 지식과 관례로서는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예루살렘에 다시 이스라엘이 다시 세워진 것은 우리가 생각할 때는 이해할 수 없는 기적이지만, 분명한 여호와 하나님의 전적인 개입이시며 간섭이시며 주권인것임을 우리는 느낀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그토록 죄를 짓는 이스라엘 자녀들을 다시 회복하셨을까?
 
선택하신 자신의 자녀를 버리지 못하시고 끝까지 사랑하시는 여호와 이심을 우리는 에스겔서를 통해서 배운다에스겔에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의 행음과 우상섬김에 대하여 경고하시며 심판을 하실 것이라고 거듭해서 말씀하신다. 그렇지만 에스겔서를 통하여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수 있다.
바로 에스겔서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자녀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보여 주신다.
 
버릴래야 버릴 수 없는 탕자인 자녀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마음과도 같이 하나님께서는 늘 죄를 짓고 패역한 자녀들을 벌주시고 또 기다리시고 회개하고 돌아오면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절절한 사랑을 우리는 에스겔서를 통하여 느끼지 않는가.
 
에스겔서를 통해서 택하신 자녀를 끔찍히도 사랑하시는 여호와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여호와께서는 뻣나간 자녀를 향하여 거듭해서 벌을 내리시겠다고 말씀하시지만 실상은 자녀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을 느낄수 있다.
 
 
나 역시 마찬가지이다.
나는 지금껏 수많은 죄악을 향하였다.
여호와보다 세상의 다른 것을 더욱 사랑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곧 우상숭배이지 않는가.
나를 여호와보다 나의 자아을 더욱 가치있게 여기고 사랑하며 모든 것을 나의 기준으로 판단하고 나의 유익을 위하는 이기적인 모습으로 우상의 죄악을 저질렀다.
 
얼마나 많은 경우에 주님을 부인하였던가.
주님께서 나에게 너는 이같은 악을 행하지 말라고 마음속에 말씀하시는데도 그것을 무시하고 내 뜻대로 행하며 주님을 부인하지 않았던가.
 
나야말로 오홀라 혹은 오홀리아보다 더 악한 존재이지 않던가!
그런데 그런 나를 죄악을 행하는 나를, 여호와께서 오홀라와 오홀리아를 사랑하셨듯이, 여호와께서는 나를 사랑하신다.
 
그토록 사랑하시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독생자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셔서 나의 죄의 문제를 대신 해결해 주셨다 .왜냐하면 내안에 유전적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나의 죄성을 도무지 해결 받을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이스라엘 자녀를 보시며 겔24:16에서 “네 눈에 기뻐하는 것”이라 표현을 하신다. My dearest treasure” 혹은 “the delight of your eyes” 라고 번역이 되기도 하는 데 곧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택하신 자녀를 “나의 가장 아끼는 보물”이라고 말씀하신다.
 
가장 아끼는 보물인 자녀들이 목이 굳어 죄악의 길로 나아가며 패역을 저지를 때 부모의 마음은 어떠하겠는가올바른 부모라면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 자녀를 보며 야단치기도하고 벌을 가하기도 하며 때로는 얼르기도 하면서 뻣나간 자녀들이 다시 돌아오기만을 기다린다. 왜냐하면 그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탕자의 비유를 보면 뻣나간 자식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이 잘 표현되고 있다
(15:20)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며 이제나 저제나 돌아올까 걱정하며 아들이 떠나간 곳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다가 멀리서 아들이 자신에게로 돌아 오고 있는 것을 보자 너무나 기뻐서 달려가서 목을 안고 입을 맞추지 않는가.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탕자인 내가 돌아 오기만을 기다리고 계신 것이다.
이유는 단 하나. 바로 내가 하나님께서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보물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위안을 주시는 회복의 말씀이 있다.
성경을 보면 늘 죄를 행하는 이스라엘 자녀를 보시고 진노하시며 벌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된다. 하지만 자녀들이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며 용서를 구할 때 다시 회복의 은총을 베푸시는 사랑의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10:13) 이스라엘 자손의 행악함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내가 다시는 너를 구원치 아니하리라.
이라고 말씀하시며 진노하시지만
 
(10:15-16)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여쭈되 우리가 범죄하였사오니 주께서 좋은 대로 우리에게 행하시려니와 오직 주께 구하옵나니 오늘 우리를 건져내옵소서 하고 자기 가운데에서 이방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를 섬기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곤고로 말미암아 마음에 근심하시니라.
 
이스라엘 자손들이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죄로부터 멀어지게 되고 여호와를 섬기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다시 회복의 은총을 베푸신다한글로는 “마음에 근심하시니라”로 번역이 되었지만 “He could bear Israels misery no longer”로 번역이 된다. 즉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곤고를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라고 번역이 되는 것이 더욱 그 뜻이 다가오지 않는가여호와께서는 더 이상 자신의 자녀들의 곤고함을 받는 것을 견딜 수 없어서 다시 회복시키시며 사랑의 은혜를 베푸신다.
 
 
(20:17) 그러나 내가 그들을 아껴서 광야에서 멸하여 아주 없이하지 아니하였느니라.
Nevertheless (Yet) I took pity on them and held back from destroying them in the wilderness
 
“그러나” 로 번역이 되었는데 영어로는 “Yet” 혹은 “Nevertheless”로 번역이 된다.
즉 “그럼에도 불구하고”로 번역이 되었으면 더 우리에게 와닫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내가 참 좋아하는 성경 단어이다.
여호와께서 나를 광야에서 완전하게 멸절되도록 버리시겠다는 것이 아닌, 비록 내가 죄악을 끊임없이 범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나의 죄를 깨닫고 주님께로 돌아오면, 내가 주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사망의 구렁텅이로 부터 구하시겠다는 회복의 은총인 것이다.
 
 
말씀을 정리하면,
 
에스겔서에는 하나님의 절절하게 애타는 사랑이 잘 나타나 있다.
죄악을 인하여 진노의 벌을 내리시지만, 자녀를 사랑하시기에 구원의 길 역시 마련해 주신다.
 
끊임없이 죄악을 범하는 목이 곧은 오홀라와 오홀리바가 곧 내가 아닌가
하지만 주님은 그런 목이 곧은 나를 보시며 나의 가장 소중한 보물이라고 말씀하시며 회복의 은총을 베푸신다
 
여호와의 마음을 잘 나타내는 말씀인
( 18:30-31)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 각 사람이 행한 대로 심판할지라. 너희는 돌이켜 회복하고  모든 죄에서 떠날지어다. 그러한즉 그것이 너희에게 죄악의 걸림돌이 되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너희가 범한 모든 죄악을 버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할지어다.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
 
회복하고 죄에서 떠나기 위해서는 주님의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 한다.
주님의 성령의 능력은 나의 더럽고 추악한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한다.
 
주님께서 부활하신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아라 말씀하셨다.
우리는 성령의 숨결을 받아야 한다.
그래야 나는 죽지 않고 나의 마음과 영이 새롭게 된다
 
 
 

 
하나님 아버지
 
에스겔를 통하여
저를 향한 절절한 하나님 아버지의 애끓는 사랑을 느낄수 있었읍니다 .
 
늘 죄악을 행하고 패역을 범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저를 잊지 않으시고 기다리시며 또 기다리십니다.
왜냐하면 제가 곧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가장 아끼고 사랑하시는 존귀한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제가 행한 모든 죄악에서 떠나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영이신 성령으로 저를 충만케 하옵소서.
저의 마음과 영이 새롭게 되기를 원합니다.
성령님 저를 다시리옵소서.
 
제가 곧 늘 죄를 짓는 패역한 자손인 오홀라요 오홀리바이지만,
그런 제가 저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죄에서 떠나
여호와께서 저의 참 여호와이심을 알기를 원합니다.
 
심판하시는 이도 여호와시요,
구원을 베푸시는 이도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저의 삶의 주관자이십니다.
 
주님께서 저를 위하여 모든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이심을 알기를 원합니다.
 
저를 받아 주옵서서.
예수 그리시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