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0월 23일 일요일

죄 아래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

(3:9-28) 그러면 어떠하냐. 나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나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10.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8.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20.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아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나니
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나가 인정하노라
 
 
사도바울은 이 말씀을 통하여 나는 얼마나 연약한 죄성을 갖고 있으며, 죄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나를 위해 모든 죄값을 치루시려 십자가에서 속량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은혜에 대하여 말한다.
 
A.     의인은 없나니
(10)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이 말씀은 전도서와 시편에도 기록되어 있다.
(7:20) 선을 행하고 전혀 죄를 범하지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없기 때문이로다
(14:3)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그렇다면 ‘의인’의 정의는 무엇인가?
(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6:25) 우리가 그 명하신 대로 이 모든 명령을 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나의 의로움이라 할지니라.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믿는 자를 의인이라고 하시며 또한 하나님은 모든 명령을 지키는 자를 의인이라고 하신다. 이 두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의인이라 부르실 때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을 믿어야 하며 그리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모든 명령 곧 율법을 지켜야 한다.
 
자신이 의인이라고 생각하는가?
성경은 분명하게 정죄하고 판단하지 말라고 경계를 하는데도 많은 믿는 이들이 자신은 의인이라고 하며 가까이서 죄를 짓는 이들을 보고 정죄하고 판단하지 않던가.
정작 자신 안에 있는 들보는 모른척하면서.
 
대부분은 의인의 개념을 착각한다.
자신이 믿음이 깊고, 잘나고, 도덕적으로 깨끗해서 의인이 된 것이 아니다.
 
‘의인’이라 불리움은 나의 죄성으로 인해 율법을 온전하게 지킬 수 없는 나를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를 말한다.
 
죄를 짓지 말라고 선포하는 목사들은 죄를 짓지 않을까?
많은 부흥회를 인도하는 영성있다고 여겨지는 목사들은 죄로부터 자유로울까?
신유의 능력으로 많은 이들을 치유하는 사명을 부여받은 자들은 죄를 짓지 않을까?
보기에 근엄하고 존경스러운 장로나 권사들은 늘 거룩한 삶을 살까?
선교지에서 모든 것을 희생하고 헌신하는 선교사들은 죄를 짓지 않을까?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나를 보면 나는 의인과는 거리가 많음을 내 자신이 너무 잘 안다.
겉에 보이는 모습이 온화하고 거룩한 척 하지만 내 속의 상태는 얼마나 속물근성이 있는지를 나는 잘 안다. 나는 순간 순간 많은 죄를 짓고 산다. 내가 아무리 거룩한 삶을 살려고 발버둥을 쳐도 죄의 속성은 나를 가만히 나두지를 않는다.
 
나는 의인과는 그야말로 동떨어진 삶을 살고 있다.
그런데도 그런 속물적인 나를 의인으로 인정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뿐이다.
하나님의 은혜에 거하기 위해서는 나 자신이 죄인임을 철저하게 인정하자.
괜히 의인한 척하다가 하나님의 분노의 심판을 받지 말아야 하지 않겠는가.
 
 
B.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죄인의 가장 큰 특징이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18)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36:1) 악인의 죄가 그의 마음속에 이르기를 그의 눈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빛이 없다하니
 
아담의 원죄를 유전인자로 물려 받는 나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며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 곧 심판하실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기에 자신의 본성에 따른 행동들을 하게 된다.
 
나는 악한 자일 뿐이다.
악한 자들의 특징은 곧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만일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마음이 있다면 결코 죄를 범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때는 하나님을 두려워 하기 때문에 죄를 지으려고 하지 않으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마음을 망각하여 잃어 버리고 내 본성이 이끄는 대로 행동하여 결국은 죄를 벗 삼는다. 내 속에는 아마도 치매성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웬만하면 심판과 공의의 두려움의 하나님의 임재를 무시하고 잊어 버리고 사랑과 긍휼의 하나님으로만 위안을 삼으려고 한다
 
사도바울은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는 죄인들의 특성에 대하여 말한다
1.     목구멍은 열린 무덤
   혀에는 속임이 있으며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나의 악행은 바로 입으로부터 시작한다.
시편기자는 시10:7에서 나의 입에는 저주와 거짓과 포악과 잔해와 죄악이 있다고 고백한다.
(10:7) 그의 입에는 저주와 거짓과 포악이 충만하며 그의 혀 밑에는 잔해와 죄악이 있나이다.
 
찬양을 하며 기도하는 같은 입으로 나는 저주를 하기도 하고 욕을 하며 속이기도 한다.
입술은 죄악의 근원이다. 그래서 믿는 자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길 것은 바로 나의 입이다.

 
2.     피 흘림에 빠른 발
   파멸과 고생으로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함
59:7-8에서 죄의 본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
(59:7-8) 그 발은 행악하기에 빠르고 무죄한 피를 흘리기에 신속하며 그 생각은 악한 생각이라. 황폐와 파멸이 그 길에 있으며 그들은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며 그들이 행하는 곳에는 정의가 없으며 굽은 길을 스스로 만드나니 무릇 이 길을 밟는 자는 평강을 알지 못하느니라.
 
죄악의 결과는 황폐와 파멸과 절망뿐이다.
그것을 왜 애써 외면하며 모른척 하는가?
이제는 그 지긋지긋한 죄악의 길에서 벗어나자. 오직 그 길만이 살 길임을 왜 모르는가!
 
 
C.     화목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나니
 
1.     모든 이들의 죄를 피로써 속량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벧전1:18-20)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성경에는 예수님의 대속사건에 대하여 창세기로부터 요한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말하고 있다.
성경전체가 예수님의 구속의 은혜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나 인간의 특성은 예수님을 거부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흘리신 보혈을 왜 그리도 값싸게 여기려고 하는 것일까!
무엇과도 바꿀수 없는 은혜를 베푸신 예수님의 은혜를 왜 그리도 대수롭게 여기는 것인가!
나 죄인의 어떤 선한 행실로도 결코 떨쳐 낼 수 없는 죄로부터 예수님의 피로써 대속함을 받은 것을 믿는가?
 
교회 역시 예외는 아니다.
교회에서는 어떤 말씀들이 선포되어지는가?
사람들 듣기 좋은 축복과 감성을 자극하는 감동스러운 말씀이 선포되고 가끔가다가 예수님의 보혈이 선포되는가?
 
교회에서는 참된 진리가 선포되어야 한다.
진리는 단순하다. 단지 인간들이 자신들의 생각으로 복잡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죄로 멸망받을 인간을 불쌍하게 여기셔서 긍휼로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이들의 죄를 구속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모든 보혈을 흘리시며 죽으셨고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성도의 마음에 내주하심으로 성도의 삶을 천국으로 인도하실 것이며 그리고 곧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구속사역은 완성이 될 것이라는 진리는 단순 명료하다.
 
그런데 나 인간들은 이 최고의 진리를 제각각의 생각으로 수많은 종파가 파생되었고 저마다 자신의 종파가 최선이라고 자신의 교회가 최고라고 치부를 하며 다른 이들을 차별하며 구별화 한다.
 
천국에 가면 어떨까?
예수님께서도 천국에서 종파대로 교회대로 나누어서 구별하실까?
사람이 생각하듯 너는 우수 종파. 너는 무엇인가 부족한 미련한 종파 하시며 구별하실까?
너는 훌륭한 교회 출신이니까 훌륭한 성도야, 너는 조그맣고 힘도 없는 교회에서 왔으니 미약한 성도야, 너는 큰 교회를 담임하며 많은 영향력을 끼쳤으니 성실한 큰 목자야, 너는 조그만 교회를 담당했으니 너는 조그만 목자야 혹은 불성실한 종아 하시며 구별하실까?
아마도 그리하시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교회는 왜 그리도 세속적으로 변하고 있는가!
왜 교회를 예수님의 의견을 물어 보지도 않고 인간의 마음대로 좌지우지 하려는가!
왜 교회가 눈에 보이는 외형적인 것에 필요 이상으로 치중을 해야만 해야 하는가!
왜 큰 교회의 목사들을 아니 대부분의 목사들을 하나님의 자리에 대신 앉히려고 하는가!
또 목사들은 그렇게 예수님의 자리에 대신 앉는 것이 마땅하다고 왜들 생각을 하는가
잘못되어도 너무나 잘못 되었다.
예수님은 어디에 앉아 계시는가?
아마도 화장실도 너무나 화려해서 거기에 계시기에 불편하시다고 하지 않으실까!
 
주님의 몸 된 교회에서 왜 주님의 사랑은 보이지 않고 인간의 욕망의 이기적인 사랑만이 보인다.
주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예배를 드리는가? 아니면 인간의 그럴듯하게 포장된 모습의 예배를 보는가?
 
 
2.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믿음
(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믿음’이란 무엇인가?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어떤 현재 증명된 사실을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단지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지 믿음이라 부를 수 없다.
 
믿음이란 보지 못한 것을 믿을 때 그것을 믿음이라 부른다.
특히 예수님안에서 믿음이란 보지 못한 예수님에 대한 것들을 믿는 것이 믿음이다.
 
히브리서 11장에는 하나님께서 믿음있는 자로 인정하신 자들이 나온다.
공통점은 이들이 어떤 훌륭한 행위를 해서 믿음이 있는 자로 인정된 것이 아니라, 단지 마음속에 하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믿음이 있는 자라 인정하신 것이다.
 
보지 못한 하나님을 마음으로 믿는가?
예수님께서 아무도 가 본 적이 없는 창세전에 말씀으로 온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것을 믿는가?
보지 못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셔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으며 그 후에 사망 가운데서 능력으로 부활하신 것을 마음으로 믿는가?
예수님께서 나의 모든 죄를 대속하시고 나를 의인이라 부르심을 믿는가?
보자 못한 예수님께서 보내신 성령님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는가?
아무 의심없이 믿는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런 나를 보시면 내가 너를 믿음이 있는 자라고 인정해 주시며 나를 의인이라 부르실 것을 나는 믿는다
 
 
 
정리를 하면,
나는 결코 죄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왜냐하면 나에게는 죄성이 있기 때문에 늘 죄를 범할 수 밖에 없으며 선과는 거리가 먼 악한 자일 뿐이다.
악한 자들의 가장 두드러진 특성은 곧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만일 나에게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마음이 있다면 결코 죄를 범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의 삶을 보면 얼마나 죄에 노출되어 있으며 죄에 대하여 무감각한 지를 알수 있다.
늘 행하는 것을 보면 입으로 얼마나 많은 죄를 짓는가. 속이고 독기를 품고 저주를 하며 악독을 퍼붙지 않는가. 결코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늘 죄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나를 너무나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긍휼과 자비를 베푸셔서,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화목제물로 달려 죽게 하심으로 모든 죄를 속량하셨다. 그래서 이를 마음으로 믿는 자에게는 그 믿음을 보시고 의인이라 인정하시며 구원을 얻게 하셨다.
 
얼마나 큰 은혜인가.
도저히 값을 길이 없는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은혜를 베푸신 것이다.
그런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모든 영광과 찬양을 올려 드림이 마땅하지 아니한가. 인생들아. 이제 죄로부터 자유케 되었으니 죄로부터 멀리하는 축복된 인생이기를 축원한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나를 에워싸는 하나님의 은혜
나의 죄성을 너무나 잘 아시고 이해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나의 연약함으로 율법을 지킬 수 없음을 인정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나의 죄를 위해 화목제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하나님의 은혜
나의 삶 가운데 좌정하시어 나를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내가 죄 가운데서 몸부림을 칠 때 마다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
. 하나님의 은혜는 너무나 크옵니다.
너무나 크신 갚을 수 없는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에 너무나 감사하며 모든 영광을 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16년 10월 9일 일요일

어떤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 주어


(1:8-12) 먼저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에 관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
(11-12)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로마서는 그리스도교에 대하여 자세하게 쓰여진 말씀이다.
사도바울은 아직 가보지 않은 로마에 사는 성도들의 믿음을 견고하게 세우려고 로마서를 고린도에서 썼다.
 
이미 복음이 개종한 유대인 그리스도인을 통하여 로마에 있는 사람들에게 전해졌다.
이스라엘 주위의 이방 나라에 전도를 통하여 세운 교회들이 전반적으로 갖고 있는 문제를 로마에 있는 교회도 갖고 있었는데 사도바울은 이를 지적하며 참다운 복음이 무엇인지를 제시한다. 개종한 유대계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계그리스도인들에는 자신의 입장이 옳다는 의견의 차이가 있어서 초대교회의 중요한 issue였다. 개종한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을 더욱 중요하게 여겨 율법을 잘 지키는 것이 복음의 올바른 생활이라고 믿었고, 반면 이방인계 그리스도인들은 낯설고 지키기 어려운 율법보다는 선한 행실을 더욱 중요하게 여겨 두 group간에는 마찰이 있었다. 사도바울은 율법도 필요하고 선한 행실도 필요하지만 복음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이며 이를 마음에 믿는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은혜로 얻음을 분명하게 지적한다.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우리 역시 본질인 예수님은 멀리 하고 비본질을 두고 내가 옳고 너는 틀리다며 싸우지 않는가
그래서 기독교에는 수많은 분파가 생겨 났으며 서로가 옳다고 주장한다과연 예수님 앞에서도 자신이 주장하는 것이 맞고 다른 이들은 잘못 되었다고 머리를 들고 말할 수 있을까?
 
 
11절을 다시 보며 이 말씀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생각해 보자.
(11) 1)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2)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
 
1.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사도바울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 주어야 하며 그 이유가 신령한 은사를 받게 되면 그들의 믿음이 견고해 진다고 말한다.
 
KJV에서 ‘I may impart unto you some spiritual gift, to the end ye may be established’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 함이라’라고 번역이 되었다.
 
‘은사’로 번역된 원어는 ‘CHARISMA’가 사용되어지며 이는 곧 선물을 의미한다.
CHARISMA는 은혜의 구체화 즉 인간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관대하시고 권세있는 관심의 구체적인 표현을 의미하는데 그것은 거룩한 은혜의 수단이 되는 즉 하나님의 은혜 경험의 매개가 되는 어떤 행동이나 말에 대해서 사용되어진다’라고 WBC 주석에서 말한다.
 
성령의 신령한 은사는 내가 바란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닌 하나님께서 자신의 주권으로 선택적으로  주시는 선물이다.
(10:1) 예수께서 그의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악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11:29)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고전12:11)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 준다’에는 ‘Impart’라는 동사가 쓰이며 ‘IMPARTATION’이란 단어는 우리에게 익숙한 단어이기도 하다.
성령의 Impartation을 경험하여 보았는가? 어떠하던가?
만일 경험하지 못하였다면 사람들이 왜 쓰러질까 의아해 할 것이다. 물론 개중에는 분위기에 따라 자진해서 넘어진 경우도 있겠지만, 경험하여 보았다면 온 몸의 힘이 다 빠져 나간 느낌이 든다. 성령의 임재가 강하게 임하면 정신은 있는데 온 몸의 힘이 빠져 손가락 발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 없으며 마음은 평안함 가운데 있다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교회는 성령의 impartation을 믿지 못하고  무조건적으로 부정의 시각으로 바라보며 이단시한다.
또 어떤 교회는 은사체험에만 중점을 두어 인간이 당면한 문제의 해결책으로만 은사를 사용하려고 한다.
 
성령의 Impartation을 부정적인  보는 첫번째 요인으로는  성령의 임재의 경험을 해 보지 않았기에 자신의 생각의 기준으로 판단하려고 한다. 성령의 임재의 경험이 없으니 성령의 은사가 나타나는 현상에 대하여 왜들 저럴까? 미친것 아니야. 아무리봐도 다 꾸며진 쇼같아 그렇게 말들을 한다자신이 경험하지 못하였다고 해서 제발 착각하여 함부로 말하지 말자. 혹 그러다가 자신도 모르게 성령을 훼방하는 죄를 짓게 되면 어쩌려고 하는가.
 
그리고 두번째 요인으로는 영적인 은사자나 영적인 은사를 받기를 원하는 자들의 재물의 유혹의 욕구일 것이다.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시기를 성령의 은사를 사용할 때에 재물의 욕구로부터 멀리하라고 가르치신다.
 
(10:8) 병든 자를 고치시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그런데 많은 영적 은사자들이 은사를 행하며 돈을 받지 않는가.
부자를 쫓아 다니며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은 멀리 하려고 하는 것이 현실이지 않는가많은 성령 은사자들이나 성령의 능력을 행하는 자들이 처음에는 주님의 마음으로 시작을 하지만 얼마못가 자신을 떠받는 것에 익숙해지며 슬며시 교만이 들어온다. 그래서 자아 곧 나라는 존재가 주님의 영의 자리에 대신 앉게 됨으로부터 예수님의 이름을 빙자하며 자신의 재물을 축적하는데 사용한다.
 
(8:18-20)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이르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 베드로가 이르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소에 시간이 없다며 주님안에 거하는 것을 등한시하며 무시한다그러다가 내 힘과 능력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삶과 죽음의 인생의 고비를 만나면 지푸라기라고 잡는 심정으로 좋다는 것은 다 하려고 한다그전에는 성령의 은사를 받는 것에 회의적이고 부정적이었지만 그래도 듣고 본 것은 있어서 성령의 은사라도 받아 기적적인 체험으로 회복되기를 원하지 않는가. 영적인 능력이 있다고 여겨지는 사역자에게 안수를 받아 병을 낫겠다고 새치기하며 머리를 디밀지 않았던가. 참으로 염치없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그렇게 해서 나의 육신의 연약함은 회복이 되었는가주님을 닮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참변화를 하였는가?
 
성령의 은사를 받기에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를 아는가?
물론 성령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지만, 주님의 자녀들이 해야 할 일이 있다.
우선 성령의 은사를 사모해야 한다그리고 다른 이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주님을 말씀을 듣는 것 보다는 바로 내 자신이 시간을 내어 주 앞에 나아와 주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기도하며 나의 영혼을 살찌우며 성령의 충만함과 은사를 사모해야 한다.
 
 
성령의 Impartation을 받고 행함에 부작용이 있다고 거부해서는 않된다. 마치 빈대를 잡으려고 초가삼간을 태우는 것과도 같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 주고 신령한 은사를 받으라고 성경은 말씀한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반드시 성령의 IMPARTATION이 있어야 하며 교회 뿐 아니라 개인의 영적의 부흥에 반드시 필요하다.
 
신령한 은사란 무엇인가? 사도바울은 고전12:1에 모든 믿는 자들이 신령한 은사에 대하여 알기를 원한다고 시작하며 신령한 은사에 대하여 고전12-14장에 기록하고 있다.
(고전12:1)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사도바울은 고전12장에서 대표적인 신령한 은사에 대하여 말한다.
(고전12:8-11)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으르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신령한 은사에 대하여 간단하게 말하면
지혜의 말씀 - 하나님의 감추어진 깊고 은밀한 비밀을 통찰력을 통하여 깨닮음
지식의 말씀 - 성경이 열리는 은사
믿음 - 구원을 주신 주님을 신뢰하는 믿음
병 고치는 은사 - 각종 질병을 초자연적으로 치유
능력 행함 - 기사와 이적을 일으키며 또한 마귀를 대적하는 능력의 은사
예언 - 하나님의 계시를 성령님의 조명하심으로 환상이나 말씀으로 아는 은사
영들 분별 - 사람들에게 숨겨진 악한 영을 판단할 줄 아는 초자연적인 은사
방언 - 사람이 이해하지 못하는 성령으로하는 하늘에 속한 언어
방언 통역 - 성령의 감동으로 방언의 뜻을 직관적으로 이해
 
이 외에도 성령의 은사에는 구제나 섬김이나 가르침 등의 다양한 은사가 있다.
 
교회는 주님께서 스며져 있는 생명의 말씀을 성령의 도우심으로 지적으로 가르쳐야 하며 또한 선포된 말씀이 내 안에서 온전하게 생동력있는 살아있는 말씀으로 역사하기 위해서는 내주하시는 성령의 은사의 역사가 반드시 나타나야 한다.
 
 
2.     견고케 함이니
왜 사도바울은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 주기를 원했을까?
성령의 은사가 임하게 되면 나를 영적으로 육신적으로 강건케 한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신령한 은사를 베푸셨다.
예수님께서는 말씀만 전하신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은사를 베푸시며 사람들을 주님의 자녀로서 온전한 삶을 살도록 견고하게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눈에는 기적처럼 보이는 수많은 일들을 행하셨다.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베푸신 수많은 기적과 이적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혼인잔치에서 물이 포도주로 바뀌었다.
오병이어와 칠병이어의 기적을 통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먹이셨다.
온갖 질병으로 고생하는 자들을 고쳐주셨다.
혈루병을 앓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자 나았다.
파도와 바람을 꾸짖으시사 삼킬듯 하던 풍랑은 이내 잠잠해 졌다.
물위를 예수님은 걸어 오셨고 예수님께서 배에 타시사 배는 순식간에 목적지에 도착하였다.
귀신들이 굴복하였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났다.
수많은 기적을 베푸신 주님.
그리고 가장 큰 기적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다시 살아 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것이다.
 
주님께서 사역을 하실 때 주님을 만난 사람들은 앉은뱅이가 일어서며, 벙어리가 말하며, 눈먼자가 다시 보며,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을 보며 주님께서 행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직접 경험할 수 있었으며 복음은 널리 전파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말로만 전하여 지식으로만 아는 복음을 통하여 주님을 만난 것이 아닌 실재적인 살아있는 삶의 경험을 통하여 주님을 만난 것이다.
 
주님이 행하신 수많은 이적과 기적을 본 이들은 주님을 믿게 되었을 것이다.
비록 한 때는 주님을 부인하며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였지만, 곧 성령의 임재함으로 변화된 인생을 살았을 것이며 이들이 초대교회의 초석이 되어 지금의 미련한 나에게도 복음이 전하여져서 주님의 자녀로서 천국을 소유한 주님의 이름의 능력의 권세를 갖게 되었음을 믿는다.
 
예수님을 따르는 주님의 제자들 역시 복음을 전할 때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 주는 역사가 일어났다.
(3:6-7)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성령의 은사를 선물로 받아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이며 구걸하던 자는 제 발로 일어날 수 있었다.
그 후의 그의 삶은 어떠했겠는가. 그전에는 좌절하고 아무런 소망이 없었지만 이제는 두 발로 자신이 가고 싶은 곳을 다니며 베드로를 통한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산증인으로 전하며 그의 삶은 전적으로 변화된 삶을 살지 않았겠는가.
 
베드로의 그림자만 지나가도 병자들이 회복되었다.
(5:15) 심지어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 위에 누이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의 그림자라도 누구에 덮일까 바라고 예루살렘 부근의 수많은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으니라.
 
 
사도바울은 말씀만 전하지 않았다.
반드시 말씀의 가르침과 함께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다.
(19:11-12)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시니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잘 아는 이야기로 로마로 압송되어 가던 사도 바울과 일행이 성령께서 가르치신대로 사도바울이 경고를 하였지만 이를 인간적인 생각으로 무시하고 항해를 계속하다가 결국 도중에 풍랑으로 표류하다 거의 죽게 되었지만 배가 암초에 걸려 한 섬에 도착하였다. 섬 원주민과 일행이 함께 모닥불을 쬐다가 사도바울이 독사에 물렸는데 섬에 사는 사람들은 그 뱀이 어떤 독사인줄 알기에 사도바울이 곧 죽을 것으로 여겼지만, 사도바울은 뱀을 털어 내고는 마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듯 하였다. 사람들은 볼 수는 없었지만 성령께서 사도바울을 치료하신 것이다. 그리고 사도바울은 섬주민들의 병을 고쳐주며 복음을 전한다. 온갖 놀라운 희한한 사건을 경험한 섬원주민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을 받아 들인다.
 
 
성령의 임재를 경험한 사람은 이 땅에서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
순교한 많은 초대교회성도들이 우리와 무엇이 다른가. 그들은 단지 예수님의 이름을 부인하기만 하면 살 수 있었는데도 그들은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고 죽음을 택하였다. 지금도 수많은 이들이 주님 때문에 자신이 알지도 못하던 곳에서 생판 모르는 사람들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내놓지 않는가. 그것을 사람들은 보며 제정신이 아니라고 함부로 폄하해서 말하지 않는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신령한 은사가 나누어 지는 IMPARTATION의 역사가 있어야 한다.
성령의 Impartation과 기적은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 있다고 생각을 한다.
그래서 성령의 임재가 있는 곳에는 우리가 설명할 수 없는 기적들이 같이 동반을 한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하나님의 개입으로만 설명이 되는 초월성의 기적들이 임한다.
이해할 수 없는 기적을 경험해 보았는가?
 
나 역시 지금까지의 삶을 되돌아 보면 이해할 수 없는 많은 일들이 있었다.
지금까지 나의 기억속에 남아있는 죽음을 직면했던 모습이다.
중학생이었을때 학교에서 집으로 가던 어떤 일로 약 5분간 지체하였고 늘 걷던 길로 가지 않고 건너편의 언덕길을 걸어 올라가며 달려 가던 트럭을 보았는데 잠시후에 언덕 아래로 내가 걸어가야 할 곳에서 바로 그 트럭이 걸어가던 사람과 함께 건물을 들이 받아 사람이 죽은 것을 보고서 어린 나이이지만  바로 나도 그 사고로 죽을 수도 있었겠구나 하며 의아하게 생각했던 적이 있다. 물에 빠져 두번 죽을 뻔 했는데, 한번은 국민학교때 동네에 물이 고인 물두멍에서 물놀이를 하다 어쩌다 발이 닿지 않는 깊은 곳에서 마구 허우적 거리며 어찌하다가 살아난 기억이 난다. 그리고 대학생 때에 교회에서 수양회를 한탄강인가에를 갔는데 수영을 제대로 하지도 못하는데 강에서 헤엄치다 그만 센 물살에 휩살려 떠내려가며 죽을수도 있겠구나 하고 안간힘을 써서 물가로 왔던 기억이 난다. 얼마나 혼이 났는지 모른다. 몇 초만 늦었더라도 죽음과 바로 직면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이런 위기의 순간에 성령께서는 나의 위험을 아시고 천사를 보내셔서 나를 구하셨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얼마전에 고약한 질병이 연약한 육신의 나를 죽음으로 데리고 가려할 때 성령님께서 간섭하시어 나의 생명을 얼마인지는 알 수는 없지만 연장을 하셨다고 나는 믿는다.
 
성령의 impartation은 교회에 그리고 작은 교회인 나에게도 반드시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그렇게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복음에서도 이론과 경험은 반드시 함께 수반되어야 한다
이론이 밑바탕으로 아우러진 실재의 경험은 반드시 필요하다.
학교에서 어떤 전문지식을 배운다고 하자. 그것은 이론뿐이지 않는가. 학교를 졸업하고 그동안 학교에서 배운 전문직에서 일한다고 하면 자신이 그동안 학교에서 배운것은 이론에 불과하다는 것을 곧 알게 된다. 실제의 현장에서는 이론 뿐 아니라 많은 경험이 같이 동반되어야 함을 깨닫게 된다.
 
 
교회에서 많은 말씀과 함께 여러 program들과 간증을 통하여 각 사람의 삶의 경험 가운데 임한 주님의 역사하심을 알리려고 한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내 머리 속에만 남아 있다면 껍데기인 이론에 불과하지 않는가.
 
기독교는 체험종교라고 하지 않는가.
체험을 할 때, 성령의 임재를 경험할 때, 성령의 은사의 역사가 임할 때 내 머리로만 알았던 예수님의 실상이 내 삶의 경험을 통하여 실재로 나타나게 되어 나의 믿음이 더욱 견고해지지 않겠는가.
 
(고전2:4-5)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도다.
 
교회에서 단지 말씀만이 선포되며 아무런 실제적인 경험이 같이 수반되지 않는다면 대개의 경우 표면적인 신앙을 가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예수님에 대하여 사람의 방법으로 지식적으로만이 아니라 성령께서 직접 나타나셔서 선언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성령께서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모든 것을 가르쳐야 한다.
 
 
결론으로 성령의 IMPARTATION은 교회의 구심점이며 나의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성령의 IMPARTATION은 성령의 임재함의 체험이다. 그저 말로만 듣던 성령님의 임재가 임하게 되면 내 몸은 인지하고 반응을 한다. 왜냐하면 나의 영은 성령의 임재를 느끼기 때문이다그렇게 체험적인 성령의 임재가 임하게 되면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의로서의 회복이 반드시 있으며 주님을 믿는 믿음은 더욱 견고해 지지 않겠는가. 늘 죄악 가운데서 신음을 하지만 자신의 죄성을 회개하며 용서를 구하고 또한 성령충만을 늘 간구하여 성령의 임재 가운데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는 신앙생활을 할 것이다. 내 안에 전능한 창조주인 만왕의 왕의 영이 내게 임하였는데 나의 삶의 방향은 당연하게 변화되지 않겠는가.
 
다양한 성령의 능력 행함의 은사가 주님을 믿는 모든 자녀에게 임하는 것을 믿는가?
그렇다면 왜 이 땅에서의 삶을 두려워하며 낙망하는가.
나 만은 성령의 은사와는 거리가 먼 예외일 거라는 생각은 이제 버리자.
주님은 나를 포함한 모든 자녀들이 성령의 능력으로 건강하고 기뻐하며 사는 것을 원하실 것이다.
그렇게 살라고 주님은 우리에게 귀한 능력있는 성령의 선물을 주셨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의 선물이 얼마나 powerful 한가.
오늘도 주님의 능력으로 살아보자. 그리고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기적을 체험하며 기적의 산증인이 되어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자.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제가 성령의 은사의 능력을 받기를 원합니다.
그동안 제 생각만으로 주님을 섬겼읍니다.
그래서 때로는 성령은 은사의 능력에 대하여 무관심하였고 때론 부인을 하였읍니다.
그저 교양있는 신자이기를 원하기도 하였읍니다.
 
지식으로만 주님을 알았기에 제게는 성령의 어떤 능력도 임할 수 없었읍니다.
또한 주님을 아는 지식도 너무나 얄팍하였읍니다.
조금 아는 것으로 주님을 나는 잘 안다고 주위의 사람들에게 아는 척도 했읍니다.
그렇지만 살아 역사하시는 주님을 만난 경험은 없었읍니다.
죽은 신앙을 가진 구태의연한 종교인에 불과하였읍니다.
 
그렇지만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주님께서 계시는 곳에서는 말씀과 함께 주님께서 행하신 능력 또한 나타난다고 말씀합니다.
 
제 안에는 주님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내주하심을 믿습니다.
성령께서 제 안에 계심으로 주님의 능력 또한 제게 임할 것을 믿습니다.
지혜, 지식, 능력 행함, 병 고침, 믿음, 예언, 영들 분별, 방언, 방언 통변의 성령의 은사가 제게도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간구합니다.
 
성령은 은사는 각 사람대로 나누어 주시는 선물이라 하셨읍니다.
저의 형편에 따라 주님께서 주시는 성령의 선물을 받아 이 땅에서 능력이 있는 주의 자녀로서 풍성한 열매를 맺으며 승리하는 삶을 살며 천국을 경험하며 살기를 간구합니다.
 
저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저를 살리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께 모든 영광을 올려 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