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9월 25일 일요일

계획을 바꾸신 하나님

(13:7-8) 너는 이 땅을 아홉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에게 나누어 기업이 되게 하라 하셨더라. 므낫세 반 지파와 함께 르우벤 족속과 갓 족속은 요단 저편 동쪽에서 그들의 기업을 모세에게 받았는데 여호와의 종 모세가 그들에게 준 것은 이러하니….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을 축복의 땅으로 주겠다고 약속을 하셨다.
그런데 므낫세, 르우벤, 므낫세 지파가 가나안 땅이 아닌 요단 동편의 땅을 요구하자 허락하신다. 하나님께서 뜻을 바꾸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뜻을 바꾸셔서 축복의 땅으로 할당해 주신다. 9절로부터 32절에 므낫세 반 지파와 르우벤 족속과 갓 족속에게 주신 땅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원래 기업으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가나안 땅이 아닌 요단 동편에 있는 땅을 이들 족속에게 기업으로 주시며 축복을 하신다.
 
하나님의 뜻이 바뀐 것이다
 
하나님은 오류가 없으신데 어찌하여 한번 정하신 뜻을 바꾸실까?
그렇다면 의문점은 하나님은 나를 향하신 뜻을 바꾸실까?
 
만일 바꾸신다면 이 말씀은 우리에게 위로와 소망의 축복의 말씀이지 않겠는가?
내 자신을 너무나 잘 알지 않는가내 마음속에는 온갖 죄악의 속성들을 갖고 있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을 받기에는 너무나 합당하지 않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 뜻을 변경하실 수도 있다.
말라기에서 하나님은 한번 정하신 뜻은 변함이 없으신다 라고 말씀하시는데 요나서나 출애굽에서는 하나님은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나게 되면 하나님의 뜻을 돌이키신다고 말씀하신다.
 
두 말씀이 상반되는 약속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3:6) 나 여호와는 변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
 
(3:10)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을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32:14)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라.
 
말씀을 다시한번 보자.
말라기서에서 하나님께서 야곱의 자손들에게 하신 약속은 소멸되지 않을 것을 약속하셨다.
 
야곱의 자손은 누구를 말하는가
곧 하나님의 택하신 자손을 말씀하시며 주님의 자녀들을 의미하지 않는가.
주님의 자녀들이 때로는 넘어지고 자빠지고 좌절하고 소망을 잃기도 하지만 결코 버리지 않으시겠다는 확고한 하나님의 약속이시다. 결코 자신의 자녀들을 버리지 않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잡아 용기를 내어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하게 다시 일어나서 주님의 표대를 향하야 나아가자
 
그런데 요나서나 출애굽에서는 택하신 백성들이 만일 악한 길에서 떠나 돌이키면 재앙을 내리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재앙을 받는다고 해서 야곱의 자손으로서 소멸되지 않을 약속은 변하지 않는다.
주님의 택한 자녀가 주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다면 재앙이 임할 수도 있다. 재앙을 통하여서라도 그를 일깨워 다시 주님 뜻대로 살도록 인도하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변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시지만 계획을 바꾸실 때가 있다.
하나님의 관심은 자녀에게 있기 때문이다.
 
(33:11) 너는 그들에게 말하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
 
택한 자녀가 악한 길에서 돌아오는 것을 기뻐하시며 악한 길에서 뉘우쳐 다시 주님 앞에서 나오면 재앙을 거두시고 다시 의의 길로 축복의 길로 인도하신다마치 탕자가 다시 돌아오기 만을 기다려 성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아버지의 심정과도 같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가 재앙 가운데 있을때 마음 아파하시며 재앙의 뜻을 돌이키신다.
(대상21:15)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멸하러 천사를 보내셨더니 천사가 멸하려 할 때에 여호와께서 보시고 이 재앙 내림을 뉘우치사 멸하는 천사에게 이르시되 족하다 이제는 네 손을 거두라 하시니 그 때에 여호와의 천사가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 마당 곁에 선지라.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의 반응에 따라 자신의 뜻을 바꾸신다.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들이 자신의 삶의 방향을 바꾸시는 것을 보시고 축복의 길로 인도하시는 이유는 택하신 자녀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변함이 없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자녀가 죄악 가운데 있을때 마음 아파하신다.
(8:26)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죄성을 갖고 있는 내가 망령되이 행하게 되면 내 안에 계신 성령께서는 탄식하며 나를 위하여 간구하신다.
주님은 내가 죄악으로 병들어 갈 때 그런 나를 고치시겠다고 재앙을 내리시지만 마음 아파하신다.
 
 
언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을 바꾸시는가?
1.     악에서 돌아오면
 
(18:8) 만 일 내가 말한 그 민족이 그의 악에서 돌이키면 내가 그에게 내리기로 생각하였던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겠고 내가 어느 민족에게 국가를 건설하거나 심으려 할 때에 만일 그들이 나 보기에 악한 것을 행하여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면 내가 그에게 유익하리라고 한 복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리라.
(26:3) 그들이 듣고 혹시 각각 그 악한 길에서 돌아오리라. 그리하면 내가 그들의 악행으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려 하던 뜻을 돌이키리라.
(36:3) 유다 가문이 내가 그들에게 내리려 한 모든 재난을 듣고 각기 악한 길에서 돌이키리니 내가 그 악과 죄를 용서하리라 하시니라
 
우리 모두에게는 죄의 본성이 있다.
그래서 틈만 나면 내 속 깊이 감추어져 있던 죄의 본성이 삐죽히 머리를 디밀고 죄악을 범하도록 유혹하여 악행을 범하도록 교묘하게 인도한다. 악행 가운데 있다보면 어느새 익숙해지고 무디어져서 거듭해서 죄를 짓고만다. 계속해서 죄로 벗어나지 않고 악함 가운데 있다면 하나님께서 내게 약속하신 축복을 거두시고 나를 고치시기 위해 축복과 기쁨의 자리에 재앙이 임하게 된다. 만일 재앙을 보고 악한 죄의 길에서 떠나 하나님께 회개하며 용서를 구하면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시며 재앙을 거두시고 다시 기쁨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신다.
 
악으로부터 돌이키면 제일 먼저 하는 것이 회개이다.
자신이 행한 악한 죄로부터 벗어나기를 원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와 마음을 찢으며 용서를 구하는 간구이다.
 
성경에 나오는 대표적인 악한 사람인 아합과 그의 아내인 이세벨.
악한 일을 행함으로 여호와의 진노를 받은 아합과 이세벨이였지만 아합이 겸비한 마음으로 회개하자 하나님께서는 그의 뜻을 바꾸셨다. 아무리 악한 자일지라도 겸손한 마음으로 회개를 하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뜻을 돌이키시고 때를 늦추시거나 바꾸신다.
 
(왕상21:19) 너는 그(엘리야)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죽이고 또 빼앗았느냐 하셨다 하고 또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곳에서 개들이 네 피 곧 네몸의 피도 핥으리라 하였다 하라.
(왕상21:27) 아합이 이 모든 말씀을 들을 때에 그이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하고 굵은 베에 누우며 또 풀이 죽어 다니더라여호와의 말씀이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합이 내 앞에 겸비하므로 내가 재앙들 저의 시대에는 내리지 아니하고 그 아들의 시대에야 그의 집에 재앙을 내리리라 하셨더라.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사랑하시는 다윗의 죄를 묵과하실 수 없으셨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어 정욕으로 밧세바를 얻기 위해 그녀의 남편인 우리야를 죽인 다윗의 죄를 지적케 하신다. 다윗은 자신의 죄를 지적하는 선지자 나단의 책망에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한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멸하기로 하셨던 자신의 뜻을 바꾸신다.
 
(삼하11:27) 다윗이 행한 그 일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다윗이지만, 수 많은 시편을 쓴 영성이 깊은 다윗이지만 그런 다윗도 죄를 범한다. 그것도 사람을 계획적으로 살인하는 죄를 범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다윗을 기뻐하시지 않으셨고 또한 다윗의 죄는 묵과하실 수 없으셨다.
 
(삼하12:13)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나단이 다윗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이에 대한 다윗의 참회의 기도의 노래가 시51편이다.
(51:1-3)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 나의 죄악을 말깧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히 지우소서. 무릇 나는 나의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게 이해할 수 없는 재앙이 임했는가?
어려운 상황 가운데 있는가?
어떤 죄악을 하나님께 행하였는가를 살펴 보자.
하나님께 나의 죄악됨을 가슴을 찢고 회개하며 용서를 구하면 하나님께서 이를 들으시고 그 뜻을 바꾸시지 않으시겠는가.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셨기 떄문이다.
 
어려움 가운데 있다면 이렇게 기도해 보자.
저의 죄악된 행실로 인해 어려운 상황 가운데 있읍니다. 저의 죄악됨을 회개하며 용서를 구합니다.
악한 길에서 돌아오면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저에게 내리시고자 하셨던 재앙을 돌이키실 것이라고 약속하시지 않으셨읍니까저의 악한 행실을 가슴을 찢으며 회개합니다. 주님 저를 불쌍하게 여기시고 다시 주님 앞에서 즐거운 노래로 영광을 올려 드리게 하옵소서.
 
 
2.     간구하면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었다. 선지자 이사야가 그에게 나아와 이제는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하라고 말하자 히스기야는 여호와께 벽을 향하여 간절하게 기도를 한다.  여호와께서는 히스기야를 들이시고 그 뜻을 돌이키시고 그에게 15년을 더 살 수 있도록 하신다. 그 말씀대로 히스기야는 15년을 더 살게 된다.
 
(왕하20:1-2) 그 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매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가 그에게 나아와서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집을 정리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히스기야가 낯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왕하20:5)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너를 낫게 하리니 네가 삼 일 만에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 가겠고
 
 
3.     주님의 관점으로 보자
(50: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요셉이 형제들로부터 왕따를 당하고 종으로 팔려간 후로 요셉은 많은 인생의 고난과 좌절을 겪어야 했다.
그렇지만 절망의 시간 가운데서도 요셉은 하나님의 섭리하심으로 애굽의 총리까지 이르게 되며 많은 선한 일들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행한다.

인간의 관점으로 볼 때는 하나님의 뜻이 여러번 바뀐 것 같다.
하지만 주님의 관점에서의 큰 그림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하나님은 요셉을 쓰시려고 고난을 통해서 요셉을 훈련시키시고 준비시키셨던 것이다하나님은 자신의 자녀들을 사랑함에는 전혀 변함이 없으신 분이시다
 
우리 인생길이라는 것이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과 좌절을 만나지 않는가.
왜 이런 회복하기 어려운 병에 걸렸을까!
어떻게 살아야 하나 막막할 때가 있다. 무엇을 해야 먹고 살 수 있을까 전전긍긍하기도 한다.
사람과의 관계가 어찌 이리 험악할까저 사람이 사라져 버렸으면 내가 편할텐데.
 
하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왜 제게 이런 어려운 고통을 주십니까?
 
도무지 이렇게 하신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다며 믿음을 잃어버리기도 한다.
그렇게해서 주님을 떠난다면 내 마음속에는 무엇이 남을까?
공허함과 절망과 후회가 가득하지 않겠는가.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을 만난 욥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묻는다.
(38:3)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하시며 여러 가지를 물어 보시지만 욥은 한마디도 대답할 수 없었다또한 우리도 하나님께서 왜 내게 이해할 수 없는 일을 행하셨는지에 대하여 대답할 수 없다그것은 하나님께 속한 전적인 주권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슬픔과 고난과 상처는 내일의 기쁨과 즐거움과 온전함으로 회복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 들이자.
 
나에게 일어나는 사건 가운데서 나의 관점이 아닌 주님의 관점으로 보는 훈련을 하자.
무엇보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변함이 없으시다는 사실을 간직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또한 하나님의 성품도 결코 변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께서 계획을 바꾸실 때가 있는데 곧 내가 하나님께 어떤 반응을 보이느냐에 따라서 그 뜻을 바꾸시기도 하신다. 왜냐하면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약속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삶을 통하여 주님의 뜻을 이루어 가시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내가 주님의 뜻 가운데서 주님의 뜻을 이루며 살기를 기뻐하신다.
그렇지만 내가 악한 사단의 지배를 받는 세상의 풍속을 쫏아가며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치우쳐서 살아가며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축복의 길에서 벗어 난다면 나를 고쳐 주시기 위해서 재앙의 심판을 내리신다. 주시는 경고를 무시하고 계속해서 죄의 길로 간다면 결국은 파멸과 멸망을 받을 수밖에 없지만, 은혜로서 죄악을 깨닫고 주님 앞에 나아와 저질렀던 죄악의 못된 행실을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뜻을 바꾸신다.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이시며 만왕의 왕이십니다.
 
도무지 이해 할 수 없는 환난 가운데 거하기도 하고 재앙이 저를 덮치기도 하여 소망이 없는 절망 가운데 거할 떄가 있읍니다.
외롭고 아무도 도울 이가 없다고 느낍니다.
주께서는 저의 연약함을 잘 아십니다.
 
저를 사랑하시겠다는 약속은 결코 변함이 없으십니다.
주님 제가 어려움 가운데 있을 떄 제의 참 모습을 볼 수 있도록 저의 마음을 열게 하옵소서.
환난과 재앙과 어려움 가운데서 주님께서는 저에게 들려 주시고 싶으신 말씀이 있읍니다.
잘못된 죄악의 길을 가며 곤란과 환난 가운데 있을 때에 저희가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나 회개하고 주의 긍휼을 구하게 하옵소서.
아버지께서는 이를 들으시고 우리를 불쌍하게 여기사 긍휼을 베푸셔서 하나님의 뜻을 바꾸셔서 또 다른 은혜의 축복의 길로 갈 수 있도록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의 저희에 대한 사랑은 변함이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기를 만일 너희가 너희의 악한 죄악됨으로부터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면 내가 듣고 재암을 내리기로 한 나의 뜻을 기뻐하며 바꿀것이라 약속하셨읍니다
제가 악한 길에서 떠나 다시 살기를 원합니다 제게 긍휼을 베푸소서.
 
저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온전하게 이해할 수 없읍니다.
비록 제게 임한 이 환난과 어려움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읍니다.
그렇지만 주님만을 의지하는 저를 위해 행하시는 주님의 긍휼과 선함이 항상 저에게 임할 것을 믿습니다.
주님을 신뢰하며 저를 천성으로 인도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16년 9월 11일 일요일

목에 가시같은 여리고 성을 만나거든

(6:1-7) 이스라엘 자손들로 말미암아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가 없더라.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넘겨 주었으니 너희 모든 군사는 그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 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제 사장 일곱은 일곱 양각 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서 나아갈 것이요 일곱째 날에는 그 성을 일곱 번 돌며 그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 것이며 제사장들이 양각 나팔을 길게 불어 그 나팔 소리가 너희에게 들릴 때에는 백성은 다 큰 소리로 외쳐 부를 것이라. 그리하면 그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 백성은 각기 앞으로 올라갈지니라 하시매  눈 의 아들 여호수아가 제사장들을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언약궤를 메고 제사장 일곱은 양각 나팔 일곱을 잡고 여호와의 궤 앞에서 나아가라 하고 또 백성에게 이르되 나아가서 그 성을 돌되 무장한 자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나아갈지니라 하니라.
 
  우리가 많이 들은 여리고 성에 대한 이야기.
여리고 성의 함락은 BC1400년경의 사건이니 무척이나 오래 전의 이야기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동일하시기 때문에 지금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다. 여리고 성의 사건은 우리의 상식과 지혜를 뛰어 넘는 여호와의 적극적인 개입이셨다.
 
지금의 우리에게 여리고 성은 무엇을 의미할까?
제가 생각할 때 여리고 성은 목에 걸린 생선가시와도 같다고 생각한다목에 생선가시가 걸리면 얼마나 괴로운가캑캑거려 보지만 쑥 내려 가지 않고 식도를 찌르기에 괴로운 경험을 해보았을 것이다.
 
때로 삶의 여정에서 만나는 여리고인 어려운 상대
크게 우회해서  돌 아갔으면 좋겠는데 그러기에는 시간이 너무나 걸리고 또한 피한다고 해서 어려움이 나를 떠나 가는 것이 아니라 두고 두고 목구멍에 걸린 가시와도 같아 빼내기도 어렵고 그저 내 버려 두자니 침도 제대로 못 삼키도록 아프게 하며 나를 괴롭힐 것이다그렇다고 해서 깨뜨리고 가기에는 너무나 버거운 상대이다. 난공불락의 성인 것이다.
 
  430년간의 애굽에서의 종의 생활 그리고 43년간의 광야생활을 마치고 드디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 앞에 있는 요단강을 건넜다. 그리고 난공불락과도 같은 여리고 성을 만난다. 우리가 잘 알듯이 이스라엘은 여리고 성을 매일 한번씩 여섯날을 돈다. 그리고 마지막 7일째에는 일곱바퀴를 돌고 모두 큰 소리를 외치자 성벽이 무너져 내려 여리고성은 함락이 되고 모든 사람과 가축들은 몰살을 당한다.
 
여리고 성은 그리 크지는 않지만 매우 견고하게 지어진 성이었다.
여리고 성이 고고학적으로 발굴이 되었는데 성의 둘레는 약 600m이며 높이가 4m인 이중 성벽으로 만들어진 매우 견고한 성이었음을 밝혀 내었다. 이스라엘이 이 성을 함락시키기 위해서는 많은 인명피해를 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며 시간도 많이 지체해야 하는 매우 견고한 성이었다.
 
이 성은 이스라엘의 허리에 해당하는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어서 만일 이스라엘이 어렵다고 해서 이 성을 포기하고 그저 스쳐 지나 갔다면 후에 두고 두고 이스라엘을 괴롭혔을 것이다. 이스라엘은 중부에 자리하고 있는 여리고 성을 함락시킴으로 인해 가나안 땅에 중요한 교두보를 만들수 있었고 남과 북의 대적들을 차례로 진멸할 수 있었다.
 
  여리고 성에 대한 말씀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우는가.
나의 삶 가운데서 목에 걸린 가시와도 같아 어쩌지도 못하는 께림직한 여리고 성을 만났는가?
오늘의 말씀을 생각해 보자.
 
A.     하나님의 계획은 사람과는 다르다
(6:2) 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넘겨 주었으니
 
여리고성은 이스라엘이 다가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만반의 전쟁 준비를 마치고 성문을 굳게 닫아 걸고 기다리고 있었다. 전쟁준비를 다하고 기다리고 있는 여리고 성에 대한 전쟁 작전이 우리가 생각할 때에 말이 되지 않는다. 그저 성 주위를 칠일 동안 도는데 처음 엿새 동안은 하루에 한 바퀴씩, 그리고 마지막 일곱 째날에는 일곱 바퀴를 돌고 난 후에 큰 소리로 부르는 것이 작전의 전부이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 성 주위가 600m라고 하니 성 주위를 크게 돌면 약 1,5000m정도가 된다고 보면 한 바퀴 도는 데 천천히 걸어도 약 60분이면 돌 것이다. 하루에 60분씩 육일 동안 걷고 마지막 날에 일곱 바퀴를 돌아야 해서 새벽 일찍부터 걷기 시작했으니 그래도 늦은 오후에는 모두 마쳤을 것이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하여 소리치는 것이 작전의 전부이었다. 전쟁작전이라고 할 수 없고 마치 운동 plan과도 같다.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 인간과는 전혀 다르다.
(55:8)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가보다 높음이니라.  
 
그런데 왜 우리는 하나님을 나의 수준에서 이해하며 판단하려고 하는가?
올림픽의 gold medalist와 나와는 모두가 인정하는 도무지 비교할 수 없는 차이가 있다.
하물며 하나님과 나와의 차이가 어떠하겠는가!
 
제발 내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여호와의 생각도 다를 것이라고 착각하지 말자.
왜 하나님을 나의 수준으로 끌어 내리려고 하는가그것이야말로 신성모독이 아니겠는가!
내가 믿는 여호와 하나님은 끝과 크기를 알 수 없는 우주에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시며 주인이시지 않는가어찌 그 분의 생각과 나와의 생각이 같다고 생각할 수 있는가.
여호와께서 행하시려는 것을 어찌 우리가 짐작할 수나 있는가?
 
나의 힘과 능력으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능하신 손으로 나를 감싸 안으시고 나를 가로막는 여리고를 깨실 것이다.
그래서 내게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의 축복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여호와께서 내게 여리고를 허락하신 이유가 있다.
여호와께서는 나를 훈련시키신후 새로운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으로 반드시 인도하실 것이다.
 
 
B.     열린 마음의 믿음
(11:30) 믿음으로 칠 일 동안 여리고를 도니 성이 무너졌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칠일 동안 아무 말없이 여리고 성을 돈 것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하실 것을 열린 마음의 믿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애굽을 나온 2세대들이지만 1세대로부터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셨는지를 귀아프게 많이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43년의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광야 생활을 체험하고 두 눈으로 기적적으로 요단강이 열리는 것을 직접 목격하고 요단강을 건넜다. 그리고 처음 대하는 적인데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전쟁이라고 믿었다. 굳게 믿었기에 자신의 지도자인 여호수아가 명한대로 아무말 없이 묵묵하게 여리고 성을 칠일 동안 돌았던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일곱째 날 일곱 바퀴를 돌고 난 후에 그들은 일곱 제사장들의 일곱 양각나팔이 크고 길게 불때 백성들은 전력을 다하여 고함을 칠 때 견고한 성벽이 일순간에 무너져 버렸다. 일곱은 완전수라고 하지 않는가. 그 일곱이나 세번 사용되었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하겠다는 약속이었다. 믿음을 갖고 있는 자들에 하나님의 기적적인 간섭이었다.
 
열린 마음의 믿음은 나의 상황을 바꾸며 나의 삶을 바꾼다.
만일 이스라엘 백성이 닫힌 마음으로 여호수아의 말을 받아 들이지를 못했다면 하나님께서 역사하심으로 견고한 여리고성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기적을 체험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 내게도 있는가?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며 인도하시는데 왜 두려워하고 마음에 평강을 갖지 못하는가.
내 마음이 닫혀 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역사하시는 믿음을 갖기 위해서는 열린 마음을 갖고 있어야 한다
내 마음이 닫혀 있다면 내게 다가올 미래를 볼 수 없다.
 
오늘 나를 어렵게 하는 여리고를 만났지만 이 여리고를 통하여 나를 더욱 더 견고한 주님의 자녀로 빚으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기에 이미 여리고가 무너졌음을 왜 믿지 못하는가.
 
주님의 자녀로서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한다.
임마누엘이신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지 않는가!
그래서 나는 복에 복을 받은 자이다.
 
나의 마음은 주님을 향하여 열려 있는가?
그런데 왜 본질인 주님이 아닌 비본질에 그리도 눈에 불을 키고 난리 법석을 치는가.
누가 내 자존심을 건드리면 무엇이 중요한지도 모르고 분을 품고 삐지고 마음에 한을 품는다. 내 자존심이 주님보다 우선하는가?
누가 내 소유를 조금이라도 가져 가려면, 어떻게든 다시 찿아오려고 발버둥을 친다.
지금 당장이라도 죽으면 그것을 가져갈수나 있는가조그마한 재물이 주님보다 우선하는가?
누가 내 명예를 떨구려 하면 우리는 어떻게 반응하는가? 무어그리 명예가 그리 중요하던가. 얼마 지나지 않아 소식도 없이 스러져 버릴 명예가 아니던가. 명예보다 주님의 명예가 중요하지 않는가.
세상의 것은 헛된 것이라 수없이 들었지만, 당장 그 헛된 것이 내게는 소중하다고 여기지 않는가.
 
나의 마음은 주님을 향하여 활짝 열려 있는가?
주님을 믿는 믿음은 나의 삶을 변화시킨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러므로 내가 만일 주님을 믿는 믿음이 있다면 주님께 감사하자.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있다면 나를 낮추게 할 것이다.
내 안에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크면 클수록 내가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여호와를 온전하게 믿고 의지하는 믿음은 나를 가로막는 여리고성을 무너뜨린다.
나를 가로막는 목에 가시같은 여리고성이 있는가
그렇다면 나는 지금 어떤 믿음을 갖고 있는가 살펴 보아야 한다.
그 길만이 내가 사는 길이요, 나를 가로막는 여리고 성을 깨뜨리는 비결일 것이다

 
C.     도는 순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돌아야 하는 순서가 중요하다.
(6:6-7) 눈 의 아들 여호수아가 제사장들을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언약궤를 메고 제사장 일곱은 양각 나팔 일곱을 잡고 여호와의 궤 앞에서 나아가라 하고 또 백성에게 이르되 나아가서 그 성을 돌되 무장한 자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나아갈지니라 하니라.
 
제일 앞서 무장한 군인들이 가고 이어서 양각나팔을 부는 일곱 제사장을 가고 뒤를 따라 언약궤를 맨 제사장들이 가고 그리고 백성들이 뒤를 이었다.
 
1.     중심에 있는 언약궤
하나님의 적극적인 개입의 가운데는 여호와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가 있었다.
언약궤는 백성들 앞에서 나아갔고 요단강을 건널 때에도 언약궤는 앞에 서서 나아갔다.
언약궤에는 십계명과 만나가 든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들어 있다. 이는 성육신하신 주님을 의미한다. 십계명은 말씀이신 주님을, 만나는 육신으로 오신 주님을, 싹난 지팡이는 부활의 주님을 의미한다.
 
언약궤가 앞서 나아갔다는 것은 나의 삶에 부활이요 생명이시며 말씀이신 주님을 나의 삶의 중심에 모시면서 나아가야 함을 의미한다. 그럴때 하나님의 적극적인 개입하심과 섭리가 나에게 임하게 될 것이다.
 
나를 가로막는 여리고 성을 만났는가?
그렇다면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살펴 보아야 한다.
나의 삶의 중심에 과연 주님께서 계시는지를!
나의 삶 가운데 주님의 말씀이 나와 가까이에 있는지를!
단언컨데, 주님께서 내 안에 중심으로 계시지 않으시면 나를 가로막는 여리고성을 결코 무너뜨릴수 없다.
 
 
2.     양각 나팔과 함성
마지막 날에 제사장들은 양각나팔을 길게 불었다.
10:1-10에 어떻게 나팔을 만들며 언제 나팔을 불어야 하는 지를 설명한다.
(10:1-10)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은 나팔 둘을 만들되 두들겨 만들어서  그것으로 회중을 소집하며 진영을 출발하게 할 것이라….
또 너희 땅에서 너희가 자기를 압박하는 대적을 치러 나갈 때에는 나팔을 크게 불지니 그리하면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너희를 기억하고 너희를 대적에게서 구원하시리라.
 
나팔을 부는 것은 여호와께 나의 사정을 알리기 위함이다.
곧 기도와 찬양을 의미하지 않겠는가.
여호와여 제가 여기 있사오니 저의 간구를 들으소서.
저의 사정이 이러 저러하니 저를 구원하소서.
저를 둘러싼 적들이 너무나 커서 억압을 받습니다.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저를 구원하소서.
나의 사정을 여호와께 아뢰자.
내가 갖고 있는 나팔을 길게 불어 여호와께 아뢰자.
나를 가로막는 여리고성은 하나님의 적극적인 개입하심으로 무너질 것이다.
주님께서 들으시고 고쳐 주실 것이라는 열린 마음의 믿음을 갖고 나팔을 크게 불자.
나를 사랑하는 주님께 내가 갖고 있는 나팔을 크게 불어 주님께 나의 사정을 고하자.
 
 
D.     진멸하라
(6:21) 그 성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온전히 바치되 남녀 노소와 소와 양과 나귀를 칼날로 멸하니라.
 
여리고성이 외적인 요인이라 생각하는가!
아니다 내 안에도 나를 가로 막은 여리고성이 있다. 곧 내안에 있는 온갖 파리가 들끓는 더럽고 추악한 죄성들이 있다.
 
하나님께서 여리고 성의 모든 호흡하는 것을 진멸하라고 하셨듯이 내 안에 남아 나를 괴롭히는 모든 죄성들을 뿌리채 뽑아서 진멸해야 한다. 그래야 내게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받을 수 있는 준비가 된다.
 
여리고성 안에는 온갖 지저분하고 구역질 나는 냄새나는 죄들로 가득하다.
그것이 곧 나의 마음안에 있는 여리고이지 않는가!.
내 안에 있는 죄성들은 이미 주님의 거룩한 보혈로 씻김을 받았다.
주님 앞에 나아가 나의 죄성들을 제거하기를 원한다고 고백하자.
주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그 말을 듣고 즉시 역사하실 것이다.
나의 두 눈으로 내 안에 있는 죄성들이 낱낱이 꺼집어 내어져 성령의 불로 소멸되는 것을 볼 것이다.
 
 
 
여리고성은 나의 삶에서 만나는 난공불락과도 같은 장애물을 의미한다.
피해갈 수 없는 꺼림칙한 목에 걸린 가시와도 같은 여리고 성재정적인 문제일 수 있고, 사람과의 관계일 수 있고, 건강의 문제일 수 있고, 불가항력인 자연재해를 의미할 수 있다. 만일 그런 여리고성을 만났다면 이 본문의 말씀을 기억하고 능히 헤쳐나갈 수 있는 담력과 마음의 위안을 갖자.
 
혹 여호와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나를 가로막던 여리고성은 무너지지 않겠는가.
여리고성을 무너뜨린 주님의 임재와 능력과 권능이 내게도 있으니 얼마나 나는 축복된 성도인가
 
 
여리고 성을 만났는가!
나는 너무나 힘이 들어 결코 넘어설 수 없는 여리고라고 말하지만, 여호와께서는 결코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신다.
나의 힘과 능력으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능하신 손으로 나를 감싸 안으시고 나를 가로막는 여리고를 깨실 것이다.  그래서 내게 약속하신 가나안의 축복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여리고성이 내게 주어진 것은 여호와께서 나를 훈련하는 과정일 것이다.
 
여리고성을 만난 내게 어떤 믿음이 있는가.
나는 과연 주님을 향한 열린 마음의 믿음을 갖고 있는가?
모든 것을 주님을 의지하는 믿음. 여호와를 온전하게 믿고 의지하는 믿음은 나를 가로막는 여리고성을 무너 뜨릴 것이다.
 
나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나의 생명을 요구하는 여리고성을 만났는가?
여리고 성을 돌 때에 정해신 순서가 있었다.
양각나팔을 불며 언약궤가 뒤를 따랐다.
 
오직 여호와만께서만이 하실 수 있다고 생각이 드는가?
왜 망설이는가!  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시지 않겠는가!
못나고 부족하지만 그래도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아들이요 딸이지 않는가?
지금 여리고 성을 만나 늦었다고 나는 생각을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래도 지금이 은혜받을 만한 때이니 내게로 나오라고 말씀하시지 않는가!
주님께로 나아가 나의 사정을 여호와께 아뢰자.
내가 갖고 있는 나팔을 길게 불어 여호와께 아뢰자.  주님께서 들으시고 고쳐 주실 것이라는 열린 마음의 믿음을 갖고 나팔을 크게 불자.
 
그리고 이 모든 것의 가운데는 말씀이 있어야 한다.
주님의 말씀. 생명의 말씀. 능력의 말씀. 은혜의 말씀. 보호의 말씀이 내 삶의 한 가운데 분명하게 좌정하고 있어야 한다. 말씀 가운데 있는가?
 
 
여리고성은 바로 내 마음안에도 있다.
여리고성 안에는 온갖 지저분하고 구역질 나는 냄새나는 죄들로 가득하다.  그것은 곧 나의 마음안에 있는 여리고이지 않는가!.
내 안에 있는 죄성들은 이미 주님의 거룩한 보혈로 씻김을 받았다.
주님 앞에 나아가 나의 죄성들을 제거하기를 원한다고 고백하자.
주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그 말을 듣고 즉시 역사하실 것이다.
나의 두 눈으로 내 안에 있는 죄성들이 낱낱이 끄집어 내어져 성령의 불로 소멸되는 것을 볼 것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제 삶에 도저히 넘어 설 수 없는 여리고 성을 만납니다.
왜 제가 여리고 성을 만났는지를 저는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고 납득도 가지 않습니다.
또한 이 여리고성을 도무지 저의 힘으로는 넘어설 수가 없읍니다.
이 여리고성을 통하여 저를 훈련하시고자 하시는 아버지의 심정을 느끼지만 제게는 너무나 버겁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저를 가로막는 여리고는 결국 깨어질 것을 믿습니다. 왜냐하면 저를 사랑하시는 여호와께서 저를 지키시고 인도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힘과 능력이 제게도 임할 것을 저는 믿습니다.
 
여리고성을 만나거든 저의 믿음을 다시 점검할 수 있게 하옵소서.
저의 믿음이 어디에 서 있는지를 확신하게 하옵소서.
 
여리고 성을 만나거든 기도의 불을 다시 붙일 수 있도록 저를 도와 주옵소서.
제 안으로부터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성령의 불이 훨훨 타오르며 제가 드리는 주님 뜻대로 드리는 기도의 향이 하나님 보좌에 상달되어 응답을 받아 저를 가로막는 여리고를 깨뜨리게 하옵소서.
 
늘 말씀안에 거하여 언제 만날지 모르는 여리고를 준비할 수 있도록 말씀을 사모하는 은혜를 주옵소서.
늘 말씀을 사모하며 말씀을 통하여 주님의 뜻을 알며 주님의 심정을 닮아가도록 인도하옵소서.
 
제 안에는 아직도 여리고의 잔당들이 여기저기 제 마음의 깊숙한 곳에 숨어 있읍니다.
냄새나고 불결하고 더러운 죄악의 습성들을 멸절하기를 원합니다.
저를 도와주옵서서.
 
주님을 쫒아 가는 여정 가운데 목에 걸린 가시와도 같은 여리고를 만나거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하옵소서.
제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점검하는 기회로 삼아 버릴 것은 버리고 다시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을 향하여 다시 나아갈 수 있는 은혜를 허락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