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5월 21일 일요일

모든 진영의 중앙에

(2:17) 그 다음에 회막이 레위인의 진영과 함께 모든 진영의 중앙에 있어 행진하되 그들의 진 친 순서대로 각 사람은 자기의 위치에서 자기들의 기를 따라 앞으로 행진할지니라

모세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전쟁에서 싸울 수 있는 20세 이상의 남자만 603,500이 되는 이스라엘을 나누어서 진형화한다. 가나안을 향하여 가면서 수많은 싸움을 하게 되는데 이들과 효과적으로 맞서기 위하여 동서남북으로 나누어 진을 치게하신다.
동편으로 세족속이 자리잡았는데 유다지파가 이끌었다.
남쪽에도 세족속이 자리잡았으며 르우벤지파가 이끌었다.
서쪽에도 세족속이 자리잡았으며 에브라임지파가 이끌었다.
북쪽으로 세족속이 자리잡았으며 단지파가 이끌었다.
행진할때에는 동편에 속한 유다지파를 선두로 시계방향으로 남편이 따르고 그 뒤를 이어 회막이 중앙에서 따르고 그리고 서편 그리고 마지막으로 북편에 속한 지파가 대형을 유지하며 움직였다. 이스라엘은 동쪽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회막도 동편을 향하여 설치했으며, 행진 할때에는 동편에 속한 유다지파를 선두로 앞으로 나아갔다.
이스라엘의 진친 모습을 보면 마치 십자가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 회막이 자리잡고 있는데 특별히 선택된 레위지파가 회막을 중심으로 둥글게 진쳐 백성들과 회막을 격리하는 역활을 함으로 백성들이 하나님의 임재에 함부로 다가가서 죽음을 당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선민으로 선택된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은 경외의 대상이자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하나님은 사랑과 자비의 모습으로 나타나시지만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 방종한 삶을 살게 되면 심판의 하나님으로 나타나셨다.


질서의 하나님
(고전14:33)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하나님은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기 전에 질서있게 이스라엘 자손을 편성하셨다. 동서남북으로 용사들의 수도 적절하게 질서정연하게 편성한 것은 앞으로 있을 수많은 전쟁에서 효과적으로 일을 분담하기 위해서이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회막과 성물들을 지으실 때도 그리하셨지만 세세한 것 까지도 염두에 두시고 적절한 곳에 균형을 맞추어 진영을 나누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질서의 하나님이시며 정리된 것을 좋아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성경에는 질서의 하나님께서 가정과 교회와 나라의 질서를 세우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주님의 자녀이라면 주님께서 질서정연한 것을 좋아하시듯이 우리 또한 질서정연해야 한다. 모든 것이 잘 정리되어있다면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일에 집중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것이 우리의 삶의 비결이다. 우리 앞에는 크고 작은 수많은 싸움들이 기다리고 있다. 이 전쟁을 잘 치루기 위해서는 나의 삶이 질서정연하게 정리가 되어있어야 한다.
아직 가서 보지는 못했지만 하나님의 왕국 또한 질서정연하게 구분이 되어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삶이 질서정연하도록 나를 훈련시키시고 정리하실 것은 정리하게 하시며 나를 인도하실 것임에 확신한다. 질서를 좋아하시는 하나님을 닮아서 나의 삶 또한 질서정연히 정리가 되도록 노력해보자. 분명하게 주님은 그런 모습을 보시고 기뻐하시며 나의 간구를 들어 주실것이다.
나의 가정에서나 사회에서나 교회에서나 하나님께서 정하신 질서를 지키자.
내가 속한 곳에서 질서를 지키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질서를 지키기 위해서 가장 걸림돌이 나의 이기심과 내가 남보다 잘났다고 여기는 교만이 아닐까? 주님의 뜻대로 행하기 보다는 나의 뜻대로 하려고 하지 않았던가. 또한 상대방을 존중하며 무례하게 행하지는 않았는가. 내가 속한 곳에서 질서를 지키기 위해서는 나를 늘 십자가에 나의 자아를 내려 놓아야 할 것이라 믿는다.

모든 것의 중심인 회막
(29:43) 내가 거기서 이스라엘 자손을 만나리니 내 영광으로 말미암아 회막이 거룩하게 될지라.
여호와께서는 성막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만나셨다. 여호와께서 임하실 때에는 여호와의 영광으로 가득하였다
회막은 행진을 할 때나 한곳에 머무르고 있을 때나 언제나 중앙에 위치했다. 회막에 하나님의 임재가 임할 때에 여호와의 영광으로 가득하였다. 이스라엘의 중심에는 회막이 자리잡고 있어서 하나님께서 그들과 만나시며 교통하시었다.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은 요셉 이후에 약 430년 동안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였다. 긍지와 자긍심을 가져야 할 하나님의 백성에게 애굽 땅에서 종살이를 하였다는 것은 수치였다. 
모세가 여호와께서 가르신 홍해를 건넜듯이 여호수아와 자손들이 여호와의 개입하심으로 기적적으로 요단강을 건너가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수5:9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5:9)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떠나가게 하였다 하였으므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택하신 이스라엘이 애굽땅에서 종살이를 한 것은 수치이셨다. 그래서 수치가 떠나가도록 이스라엘 백성을 준비시키시고 다스리셨다.

애굽에서 자의반 타의반 끌려 나왔지만 아직도 그들의 마음에는 종의 타성이 남아 있어 애굽을 동경하며 애굽의 문화와 종교와 유산을 동경하는 습성이 남아 있어 그것들을 제거하고 선민으로서의 자존감을 회복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40일이 걸리는 광야길을 40년을 가게 하시면서 고칠 것은 고치시고 버려야 할 것은 버리게 하시며 이스라엘 자손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훈련시키셨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보호하시며, 만나와 메추리를 먹이시며, 바위를 터뜨려 물을 먹이시며 인도하신 40년의 광야생황를 통하여 오직 의지하고 도움을 받으실 분은 여호와 하나님 이심을 알게 하셨고 전쟁에 임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셨다
그 중심에는 여호와의 임재를 나타내는 회막이 있었다. 그래서 백성들은 모세가 성막에 들어가 있는 동안 그곳을 향하여 서서 존경심과 경외심을 나타내었다 

(33:9-11) 모세가 회막으로 나아갈 때에는 백성이 다 일어나 자기 장막 문에서 서서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기까지 바라보며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때에 구름 기둥이 내려 회막 문에 서며 여호와께서 모세와 말씀하시니 모든 백성이 회막 문에 구름 기둥이 서 있는 것을 보고 다 일어나 각기 자기 장막 문에 서서 예배하며


모든 천막들은 회막을 향하여 진을 쳤다. 사람들은 아침에 일어나서 천막을 나오며 회막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무슨 일이 있을때마다 회막을 쳐다보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생각하였을 것이고, 구름으로 뒤덮인 성막을 보면서 두려움과 경외함으로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을 쳐다 보았을 것이다. 회막은 그들의 삶의 가장 가운데서 영향을 준 거룩한 장소였다.
삶의 가장 가운데 위치한 회막.
때로는 시험에 빠져서 여호와를 불신하며 배역하는 죄를 지음으로 여호와의 진노의 재앙의 심판을 겪기도 했지만 그래도 그들 마음의 중심에는 회막이 있어서 여호와를 매일 바라보며 여호와의 섭리에 감사하며 여호와께 다시 돌아 올 수 있었으며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용서하시고 다시 여호화를 섬길 수 있는 은혜를 베푸셨다.
나의 삶 속에도 회막이 한 가운데 자리잡고 있는가?
여호와께서 나를 다스리시도록 내 마음 한 가운데 회막이 있는가?

지금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성막은 어디에 있는가?
성막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성경은 회막 혹은 성막으로 표현을 한다.
(출40:34-35)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나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
회막이나 성막은 같은 장소를 말한다. 하지만 차이점이 있는데 회막은 사람이 만든 여호와께서 임하실  장소를 말하며 그곳에 여호와의 영광이 실지로 임하여 회막이 거룩하게 됐을때 성막이라 부른다
회막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인 지성소에는 언약을 넣어둔 법궤 혹은 언약궤가 있는데 그 안에는 돌판에 새겨진 십계명과 아론의 싻난 지팡이와 만나가 들어있는 항아리가 있었다. 십계명은 말씀을 상징하며, 싻난 지팡이는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여호와의 질서를, 만나는 우리의 삶의 일용함을 공급하시는 여호와를 말한다.
언약궤를 덮는 뚜껑인 속죄소에 서로 머리를 숙이고 날개를 펼친 두 그룹이 있는데 그 사이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면 회막에 구름이 덮였고 여호와의 영광으로 충만하였다.


여호와의 영광은 곧 거룩한 빛이신 주님을 의미한다.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회막이 이스라엘 민족의 중앙에 위치하였듯이, 바로 내 영혼 한 가운데 성막이 있다.
성령께서 내주하시는 자에게는 그 중심에 주님께서 거하시며  그곳에서 주님은 나를 만나신다.
(2:20-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나의 삶 한가운데 내 영혼 한 가운데에 주님께서 계시는 성막이 자리잡고 있는가?
만일 성막이 내 가운데 자리 잡고 있지 않다면 교회에 나가는 신자일지라도 나는 아직 구원를 받지 못한 불쌍한 영혼일 뿐이다.
성막이 내 마음의 한 가운데 있다면 내가 해야 할 일은 단 한가지 곧 거룩함의 존재가 되기에 힘을 다해야 한다. 그렇게 되도록 성령께서는 나를 인도하실 것이다.


(고전3:16-17)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거룩한 존재가 되도록 내 안에 계시는 성령님께서는 나를 다루어 가실 것이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께서 임재하신 성막이 내 영혼 한 가운데 자리잡고 계심을 나는 믿는다.
주님의 영광이 임하신 성막의 중심에 말씀과 창조의 질서와 일용함의 섭리가 있어 나를 인도하실 것이다 
내 안의 성전에 계신 주님께서 나를 구원의 문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하늘에 계신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진 중앙에 회막을 위치하도록 진을 치셨고 모든 장막들은 회막을 향햐돌고 하셨읍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자손들은 자신의 장막에 드나들때마다 회막을 바라볼 수 있었고 모세가 여호와와 함께 있을 때마다 여호와의 영광이 임함음로 구름으로 덮어 성막이 되게 하셨읍니다.
전쟁에 임할 때에나 한가로이 거할 때에나 근심과 걱정으로 마음이 우울할 때에나 회막을 바라보며 힘을 얻고 위로를 얻을 수 있었읍니다. 회막은 그들의 삶의 중앙에 자리잡고 있으며 여호와의 임재를 알렸읍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셨음으로 인해 이제는 성막이 제 마음 한 가운데 자리를 잡아 여호와의 영광이 비치도록 은혜를 베푸셨음에 감사할 뿐 입니다. 제 마음의 중심에 여호와의 영광으로 가득하여 거룩함이 충만하기를 간구합니다. 제 삶의 한 가운데 좌정하사 저를 천국으로 인도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17년 5월 7일 일요일

죽음을 맞이한 두 강도


(23:39-43)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십가자에 못박혀 죽음을 맞이하는 두사람.
똑 같이 십자가형을 당하는 죄를 지어 하나는 구원을 얻었지만 다른 하나는 구원을 받지 못하고 죽었다.

모든 이들은 죽는다.
아무리 재물이 많아도 권력이 있어도 영성이 깊어도 그 어느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

죽음은 우리의 삶에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아무리 멀리하려고 하지만 죽음은 나의 삶 가운데서 영향을 준다. 이미 내 주위에서 나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알고 지냈던 많은 이들이 죽었으며, 그들이 죽음을 맞이 했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잠시 손을 놓고 그들의 모습을 다시 떠올리며 죽음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 나 역시 잠시후면 죽음의 문을 통과해야 한다.

사람뿐 아니라 모든 호흡을 하는 피조물은 죽으며 썩어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
(3:19)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3:20)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우리는 제각기의 모습으로 죽음을 맞이한다.
죽음을 준비하여 죽음을 받아 드리며 맞이하는 이가 있으며, 전혀 죽음을 생각지도 못하다가 순식간에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육신의 종말을 맞기도 한다.

어떤 이는 나이가 들어 노쇠하여 죽는다.
어떤 이는 태어나서 신체의 이상으로 얼마못가 죽는다.
어떤 이는 건강한데 갑자기 심장이 멈쳐 죽는다.
어떤 이는 치료할 수 없는 병에 걸려 오래 살지 못하고 고통 가운데 뼈가 앙상하게 들어나도록 말라 죽는다.
어떤 이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갑작스러운 사고로 목숨을 잃기도 한다.
어떤 이는 자신이 지은 죄 값으로 사형을 당한다.
어떤 이는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사형을 당한다.
어떤 이는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끊는다.

과연 나의 죽음이 다가왔을때 나는 어떤 모습으로 죽음을 맞이할까?
죽음의 순간에 나는 무엇을 생각할까?
나의 죽음을 잘 준비하고 있는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두 강도.
구원받지 못한 강도와 구원받은 강도. 이들이 어떠한 모습으로 죽음을 맞이하였는가를 살펴보며 언젠가는 반드시 다가올 나의 죽음을 준비하자.

구원받지 못한 강도
죽음의 순간에서도 남을 비방한다.
남을 비방하고 욕하고 나의 잘못이 아니고 너의 잘못이라고 원망을 한다.

자신을 뒤돌아보고 자신의 죄를 회개할 시간이 있었지만 세상을 원망하고 저주하며 욕하다가 곧 의식이 희미해져버려 회개할 수 있는 시간을 놓치고 만다.  바로 곁에 예수님께서 계셨는데도 그는 예수님을 알아 보지 못하고 구원을 받지 못했다. 옆에 같이 달린 예수님께서 모든 죄를 사하실 권세가 있고 영혼을 지옥 아니면 천국에 보내실 권세가 있는 창조주이심을 알았다면 그는 자신의 영혼을 부탁했을 것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는 바로 곁에 계신 예수님을 알아 보지 못했다.

참 불행한 인간이다.
얼마나 좋은 기회였던가. 일생동안 선한 일이라고는 눈을 씻고 보아야 할 정도롤 선한 일과는 담을 쌓고 악한 일만 행해서 가족들로부터도 버림받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인생이었다. 결국 사람들에게 잡혀서 아무리 발버둥을 치고 살려 달라고 애원을 해보았지만 아무도 그의 말을 듣지 않고 잔인하게 십자가에 못을 박고 달아 버렸다. 그리고 죽음의 순간이 바로 앞에 왔는데도 바로 곁에 계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자신의 죄를 회개도 하지 못하고 원망만 하다가 정신이 희미해지며 결국 그의 육신은 종말을 맞이했다.

구원받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의 모습을 보자
음녀를 대표하는 이세벨.
(왕하9:33) 이르되 그를 내려던지라 하니 내려 던지매 그의 피가 담과 말에게 튀더라. 예후가 그의 시체를 밞으니라.
이세벨은 자신이 행한 악행에 대하여 회개하지 않고 내어 던져져 죽음을 맞이했다.

예수님을 배반한 유다
(27:3-5) 그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유다는 예수를 은 삼십을 받고 배신하여 예수를 결국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였다. 자신이 행한 일을 뉘우치고 후회했지만 그렇다고 회개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하나님을 속인 아나니와 삽비라의 죽음
(5:3-10) 베드로가 이르되 아니이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려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곧 그가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려져 혼이 떠나는지라.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그의 남편 곁에 장사하니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거짓을 말하다가 갑자기 혼이 떠남으로 엎드러져 죽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복음에 대하여 들고 알고 있었으며 천국에서의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회개가 중요하다는 것도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변명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고 갑작스럽게 급사함으로 자신의 죄를 회개할 수도 없었다.

우리의 주위에서도 이런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의식이 희미해져 가는 순간에도 바로 옆에 계신 예수님을 받아 들이지 못하고 부인하다가 결국은 의식을 잃고 죽음을 맞기도 하며, 또 어떤 이는 전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순간에 자신의 육신의 종말을 맞이하여 회개할수도 없어 결국은 구원을 받지 못한 자들에게 약속된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다.


구원받은 강도
이 강도 역시 죽음을 맞이하고는 자신을 이렇게 만든 자들을 저주하며 주위에 있는 자들을 비방한다.
(27:44) 함께 십자가에 목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15:32) 이스라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가 보고 믿게 할지어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

구원받지 못한 강도처럼 평생 선한 일이라고는 눈꼽만큼도 하지 못했던 실로 버림받은 자였다.
그 역시 다른 강도처럼 예수를 욕하였다. 왜냐하면 그것의 그의 죄악된 본성이기 때문이다.
살면서 배운 것이라고는 남을 원망하고 저주하고 삐뚤어진 시선으로 남들을 대하며 욕하는 것이 몸에 익숙하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예수님을 욕하고 저주했다. 하지만 곧 자신의 죄를 뉘우치며 시인을 한다.  자신의 죽음이 얼마남지 않았음을 알고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는 예수님께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간청을 한다. 죽음을 맞이하기 전에 그의 일생에서 가장 값진 고백이다. 그가 그의 인생에서 가장 잘 한 것은 죽음 직전에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예수님께 자신의 영혼을 부탁한 것이다. 평생에 죄를 짓고 살았지만 죽음을 앞둔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을 만나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었다.

한가지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그가 예수님을 전혀 알지 못한 상태에서 예수님께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고백한 것은 아니다.
(41)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음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그는 이전에 예수님에 대하여 들었고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보았다. 사람들을 해치며 악한 짓들을 하고 다녔지만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일들을 들었다. 혹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심을 어렴풋이나마 알았기에 죽음의 순간에 예수님께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고백할 수 있었다.

그래서 주님을 믿는 우리는 나와 가까운 사람들에게 주님의 이야기를 해 주어야 한다.
혹 그들이 생각지도 못한 원치 않는 죽음을 맞이했을때 혹시라도 예수님을 기억하고 예수님께 자신의 영혼을 받아 달라고 고백할 수도 있지 않곘는가 

구원받은 강도는 평생에 선한 일이라고는 눈꼽만큼도 기억이 나지 않을만큼 하였지만, 그래도 그의 인생에서 가장 훌륭하고 값진 말을 목숨이 끊어지기 전에 할 수 있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우리도 죽으면서 이렇게 고백할 수만 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주여 저의 영혼을 주님의 손에 올려 드립니다. 저를 주님의 나라로 인도하소서.
이것이 나의 고백이기를 간구를 한다. 행여나 순식간에 나의 생명의 마직막을 맞이 할지라도 이 말만은 하고 나의 마지막 호흡을 했으면 한다.

스데반의 죽음의 모습을 보자.
(7:59-60)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스데반은 주의 복음을 전하다가 거부하는 유대인들과 종교 지도자들에게 돌을 맞아 죽어가면서 주님께 자신의 영혼을 받아 달라고 하고 무릎을 꿇고 자신을 돌로 치는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며 죽었다.

스데반과 같이 나의 육신의 마지막 호흡을 하기 전에 모든 이들을 용서하고 떠나자.
나의 모든 죄들을 용서해 주신 주님께 그 동안안의 삶을 감사하며 그리고 나의 영혼을 주님께 부탁하자. 자비로운 주님께서 나의 영혼을 받아 주실 것을 믿자. 죽음의 순간 천국으로 나를 데리러 온 천사들을 보게 될 것이다.


말씀을 정리하며,
우리의 육신의 호흡이 있을때 예수님에 대하여 소망을 가질수 있지만 호흡이 끊어져서 육신의 종말이 오면 더 이상 회개하여 죄사함을 받고 예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다.
(146:4)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라.

그래서 전도서 기자는 우리가 흙이 되어 땅으로 돌아가기 전에 아직 나의 영이 육신안에 머무르고 있을때 나에게 구원을 베푸시려는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 뜻을 다 이루신 예수님를 기억해야 한다고 말한다.
(12:7)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우리의 육신은 죽음을 통해서 다시 홁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육신의 종말인 죽음을 통과하게 되면 나의 영혼은 흙으로 돌아갈 육신을 떠나 생전에 행한 믿음의 결과대로 천국 아니면 지옥으로 간다.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나는 어떤 죽음을 맞이할까?
과연 죽음의 순간에 나는 어떤 모습일까?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에 죽음을 향하여 간다.
어떤 인생을 가게 될 것은 각자의 선택이다.  선하고 복된 인생을 살며 죽음을 잘 준비하여 모두가 반드시 겪어야 할 인생의 관문인 죽음을 두려움없이 기쁨으로 통과하여 그 후 주님과 함께 영원을 누리는 복된 인생이기를 간구한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오늘은 죽음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읍니다.
십자가에 달린 두 강도. 그들은 자신의 죄 값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는 형을 받았읍니다.
자신을 십자가에 달리게 한 이들을 원망하여 저주도 퍼부우며 같이 달린 주님을 향하여 욕도 하였읍니다.
그렇지만 한 강도는 자신의 행한 일들을 회개하며 주님께 자신의 영혼을 부탁했읍니다.
그는 자신의 곁에 같이 매달린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확실하게는 몰랐지만, 그래도 듣고 본 것이 있어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어렴풋이나마 알아 생사를 주관하시는 예수님께 자신의 영혼을 받아 달라고 간청을 할 수 있었읍니다. 그의 인생에 가장 훌륭한 고백이요 자신의 생명을 지킨 무엇과도 바꿀수 없는 고백이었읍니다. 그는 평생에 선한 일이라고는 거의 한 적이 없는 자였지만, 주님은 그런 자의 죄의 고백과 영혼을 받아 달라는 간청을 들으사 용서를 하시고 주님의 자녀로 받으셨읍니다.

주위의 사람들에게 때를 얻든 지 못얻든지 죽음 후의 천국과 지옥에 대하며 말을 하며 이를 결정하는 주님에 대하여 전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저 역시 저의 죽음의 순간에 스대반이 그랬듯이 저와 함께 관계를 맺었던 모든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저의 영혼을 주님께 받아 달라고 간구를 하기를 원합니다. 

저의 이 땅에서의 삶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늘 죽음을 준비하는 거룩한 성도이기를 원하오며, 흙으로 결국은 돌아가는 유한한 인생을 사는 동안 늘 주님을 기억하기를 간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