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1월 20일 일요일

선을 행하는 나와 함께 하는 악




(7:17-25)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우리 주님의 자녀들에게 당면한 인생의 문제는 천성에 다다르기까지 좁은길과 넓은 길의 선택의 싸움의 연속일 것이다. 나의 마지막 호흡을 하기까지 늘 선과 악과의 싸움 곧 좁은 길을 갈 것인가 아니면 넒은 길을 갈 것인가 늘 선택의 갈림길에 서있다.  좁은 길을 간다는 것은 곧 세상의 소욕들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의미한다. 선과 악과의 선택에서 쉽고 자연스러운 악을 택하는 대신에 때로는 희생을 감수하면서라도 어려운 선을 택.하는 삶을 말한다. 왜 선과 악의 선택에서 나는 어려워할까? 그것은 내 안에는 선과 악이 함께 공존을 하기 때문이다. 



A.   선과 악의 공존
(21)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인간은 선하게 태어났을까 아니면 악하게 태어났을까? 오랫동안 사람들이 되새기며 생각하는 말이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전에는 나는 인간은 선함을 갖고 태어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인간은 원래 악을 갖고 태어났다고 믿는다.

갓난아이들은 아직 아무 악함에0. 노출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태어났기에 악이 없는 듯 보인다. 하지만 그 안에는 sinful nature 곧 악한 본성을 함께 갖고 태어났기에 시간이 지날수록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지만 악함이 저도 모르게 시간이 지나갈수록 조금씩 조금씩 강도가 세어지며 나타나기 시작한다. 

우리는 모두 악한 본성을 모두 갖고 있다.
신실하게 믿는 자나, 개차반 같은 신앙생활을 하는 자나,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선량한 불신자나, 어떤 도를 열심히 수도하는 자나 하나도 예외 없이 우리 모두는 악한 본성을 갖고 있다. 거룩하게 보이는 자나 죄 없이도 살 것 같은 사람 안에도 죄의 본성은 남아 있다. 아무리 죄악이 그 안에서 훈련받아 절제되고 있어도 기회가 되면 어느 순간 표출이 되어 자신의 숨겨져 있던 죄의 모습이 드러난다.
사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는 강렬한 체험을 한다.
그 후로 그의 삶은 성령의 능력으로 완전하게 변화된 삶을 살며 주님의 복음을 세상에 널리 알리는 주의 사도로서의 사명을 충실하게 감당을 한다. 원래부터 성실하고 완전해지려는 성정을 지녔기에 성령을 체험하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며 열심히 주님을 섬기며 거룩한 삶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며 자신은 죄악으로부터 완전하게 벗어난다고 생각을 하였을 것이다.  성령의 강렬한 임재 가운데 죄악된 행실로부터 완전하게 벗어났다고 생각을 하였지만 때로는 자신도 모르게 나타나는 자신의 죄악된 행실을 보고 깨닫고는 17-20절에서 고백을 한다.

(17-20)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우리는 너무나 죄에 연약하다.
그래서 늘 죄에 노출되어 있고, 자신도 모르게 죄악을 행하기도 하지 않던가.
죄로부터 결코 나는 벗어날 수 없다.  죄를 짓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쳐 보지만 어느새 슬며시 죄란 놈은 나를 흔들어 놓는다.

선을 행하기를 원하지만 선을 행하지 않고, 악을 행하기를 원하지 않지만 악한 일을 행하는 것이 우리 인간의 속성이다.  선을 행하려는 마음과 악을 행하려는 마음이 내 마음에는 늘 공존을 하며 어느 쪽이 이기는가 늘 다툰다. 그런데 문제는 대부분의 경우 악함이 이긴다. 왜냐하면 그것이 나의 육신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Anyone who has tried to do good is aware of this struggle. We never know how hard it is to stop sinning until we try. No man knows how bad he is until he has tried to be good.
죄를 이기려고 발버둥을 친다. 
얼마나 죄로부터 벗어나기가 어려운지를 늘 실감을 한다.

나에게는 선함이 없음을 죄에 노출될 때마다 뼈저리게 실감을 한다.
사도바울의 고백과 같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라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하고 고백을 할 수밖에 없다. 늘 죄에 노출되어 있고 죄를 짓지 않으려 나를 경계하며 나를 다스리려 하지만, 조금이라도 경계를 느슨하게 하면 죄란 놈은 나를 잡아 끌어 놓고는 어김없이 나를 뒤 흔들고야 한다.

Am I as a sincere Christian immune to sins?
No, not at all. That’s absolutely right.



B.   속사람과 겉사람 (22-23)
주님은 죄를 지향하는 나와 거룩을 지향하는 나로 둘로 나누셨다.
(22-23)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각 사람에게는 육과 영 곧 겉 사람과 속 사람이 있는데, 겉 사람 곧 육신은 노화하며 후패하여 가는데, 속 사람인 영 곧 마음은 육체의 소욕을 따라 죄의 법을 따르는 엣사람과 성령의 소욕을 따라 하나님의 법을 따르는 새사람이 있다고 말씀한다.
(4:22-24)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


1. 옛사람=겉사람
옛사람은 육에 속한 자이며 죄의 법을 따른다.
옛사람은 죄에 속한 자이며 죄의 종노릇을 할 수밖에 없는 자이다.

나를 보면 나는 아직도 내 안에 혈기가 있고, 정욕의 탐심이 있으며, 거짓이 있음을 보면서 괴로워한다. 이는 나의 타락된 본성인 옛사람이 행하는 것이다.

주님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라고 말씀하시며 사람의 마음속에서 나오는 죄악들을 말씀해 주신다.
(7:21-23)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게 하는지라.


2. 새사람=속사람
늘 마음은 원하지만 죄를 범하는 우리의 연약함을 너무나 잘 아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셨다.

(8:1-2)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새사람은 생명의 성령의 법이 그 마음속에 임한 사람이다.
그렇지만 주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믿어 죄사함을 받아서 새사람이 되었지만 죄의 유혹은 여전히 있다.
나의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사람이 되는 것은 나의 힘으로 능력으로 선행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이 내게 임하여 거룩함으로 새사람을 입어야 한다. 
거듭난 영혼은 성령께서 내주하심으로 죄에 대하여 더욱 민감하게 반응을 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내 가운데서 행하여지는 죄를 보면서 나는 곤고한 자라고 고백을 한다.
육신을 입고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죄의 본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죄에 민감하게 반응을 하며 죄에 노출되었을 때마다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여야 한다.
 

3. 나의 옛사람은 이미 죽었다.
죄를 사랑하는 나의 옛사람은 이미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었다.

(6: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6:11)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나의 옛사람이 십자가에서 죽은 것은 현재 진형형이 아니라, 이미 주님과 함께 나의 옛사람은 죽었다.

나의 자아가 살아 있어서 분노가 있으며, 음란함이 있으며, 시기가 있으며, 남을 속이는 죄 가운데 있는 나를 보며 괴로워 한다. 하지만 나의 옛사람은 이미 죽었다. 나의 타락한 죄의 본성을 갖고 있는 옛사람은 이미 죽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선포하며 죄로부터 자유롭게 되어야 한다.

새사람으로 사는 것은 주님께서 자녀들에게 주신 특권이다.
죄는 여전히 내 주위에서 나를 괴롭히며 깊은 나락 가운데로 끌고 들어가려고 한다.
하지만 새사람에게 죄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주님께서 주셨다.
죄에 더 이상 내가 종노릇하는 것이 아니라, 죄의 노예가 아니라, 이제는 죄를 다스릴 수 있는 자로서의 변환이 이루어 진것이다.

나는 죄에 대하여 이미 죽은 자이다.
주님께서 내가 전에 지은 죄악을 그리고 앞으로 행할 죄악들 모두 이미 십자가에 못을 박으셨다.
나의 자아는 이미 죽은 존재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때 나의 자아도 그 안에 함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나에게는 죄의 욕구가 있다. 왜냐하면 나는 육신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벧전4:1-3)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

나의 자아는 죽었지만 나의 육신의 욕구나 정욕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때로는 실수를 하고 때로는 죄악을 범하기도 하며 죄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나를 보며 힘들어 한다.
그래서 때로는 벗어나기 어려운 죄로 인하여 야기된 죽음과 같은 고통을 경험하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죽은 자아로 인해 나의 육신의 욕구나 정욕을 따르지 않으려 하며 성령님의 인도함으로 살아가는 성화의 과정을 가게 된다.
내가 마지막 호흡을 할 때까지 성령의 도우심으로 대적함으로 육체의 욕심을 따라 잉태된 죄로부터 죽는 삶을 날마다 경험할 수 밖에 없다.

(5:16-17)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C.   항상 감사하라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마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죄의 유혹은 늘 가까이 있어 죄에 연약한 나의 육신은 죄에 져서 죄 가운데 있어 결국은 죽을수 밖에 없는 곤고한 인생이다.  하지만 나의 마음 곧 속사람은 성령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나님의 법을 따르는 새사람으로서 열매를 맺으며 주님의 자녀로서 축복된 삶을 산다. 나를 사망의 죄로부터 건져 주시고 영원한 사랑 가운데 살게 하신 주님의 은혜에 늘 감사할 수 밖에 없다.
(고후4: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나의 죄성을 잘 아시는 주님께서 나의 모든 죄를 십자가에서 사해 주셨으며, 이제 내가 나아가야 할 길을 분명하게 제시하셨다.  죄의 유혹에 나의 육신이 굴복하여 죄를 지음으로 낙심을 하기도 하지만, 성령님의 인도를 감사하며 순종하는 나의 속사람은 날로 날로 새롭게 회복할 것이다

(고전15:55-57)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는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러므로 우리는 늘 주님께 감사하여야 한다.
사망이 나를 이겨서 영원한 어둠으로 끌고 가려고 하지만 결국 주님의 은혜로 승리를 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제 안에는 두가지의 마음이 있읍니다.
죄를 짓고자 하는 마음과
주님의 선함을 따라 가려는 마음이 있어
제 안에서는 늘 갈등을 하며 전쟁을 합니다.


죄의 유혹에 넘어가서 죄를 짓기도 하며,
또한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한 생각을 따라 선한 행실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저는 죄악 가운데 있음을 고백할 수 밖에 없읍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그런 저를 보시고
저의 모든 죄악을 따르는 옛사람을 십자가에서 이미 못을 박아 장사를 지내게 해 주셨읍니다.

이미 저의 죄는 십자가에서 이미 죽었음을 항상 기억하게 하옵소서.
저의 자아는 아직 죄성이 살아 있어서
분노와 음란과 시기와 속이는 거짓이 있는 한심한 저를 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미 죄를 따르는 저의 옛사람은 이미 죽었으므로
순간 순간마다 죄의 유혹이 올 때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포하며 자유 가운데 거하도록 저를 인도하옵소서.
 
날마다 주님께서 은혜로 주신 새사람으로서의 특권을 마음껏 누리며
늘 감사하는 삶을 살며 주님께 영광을 드리기를 간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16년 11월 6일 일요일

죄가 더한 곳에 더욱 넘치는 은혜





(5:20-6:2)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로마서에는 유독 율법과 구원에 대한 말씀이 많이 언급이 된다. 그 당시 로마 교회가 갖고 있는 당면한 문제이었으며 지금의 우리 역시 같은 문제들을 갖고 있다. 율법인 말씀을 중시하는 자와 은혜를 중시하는 자들이 서로가 맞다고 한다. 하지만 말씀과 은혜가 적절하게 조화가 되어야 한다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의 능력과 성령의 능력이 임하시를 간구한다.

  1.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한 나라에는 많은 사람들이 산다.


서로 제각각의 사고방식과 판단과 이해가 다르기 때문에 여러 문제가 일어난다.  나라를 올바르게 치리하기 위해서는 공통의 어떤 규정이 필요해서 생겨난 것이 법이다.  그래서 대다수의 사람들의 공통의 기준으로 판단하고 공평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법률을 제정한다.  그래서 그 법에 저촉이 되는 행동을 하게 되면 그동안의 판례를 기준으로 형량을 정한다.  한 나라에 맞는 법이 있듯이, 가정에도 나름대로의 법이 있고, 교회 역시 교회법이 있으며 회사도 회사법이 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나라에서도 법이 필요하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선민들에게 일찍이도 규격화된 법과 규례를 제정해 주시고 잊지 말라고 문서화 하셨다.
곧 하나님의 손길로 돌에 새겨 주신 십계명이며 이를 기반으로해서 더욱 자세하게 쓰여진 것이 모세의 율법이다. 이 율법은 그 당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주셨으며 지금의 우리에게도 적용이 되어 많은 이들이 율법대로 살려고 노력을 한다.
 
 
대다수의 종교들은 열심히 고행과 수행을 통하여 얻고자하는 어떤 것을 얻으려고 한다.
그 영향을 받아 유대인들이나 기독교인들의 많은 이들이 율법을 온전하게 행함으로 의롭게 된다고 믿는다.
그래서 그들은 열심으로 율법을 행함으로 의인이 되고자 하는 구도자로서 살려고 하며 자신의 몸에 배인대로 모든 것을 율법적으로 판단하려고 한다. 스스로 의인이라 생각을 하기도 한다.  하나님으로부터 의인으로 인정받는 것은 믿음으로 받는 은혜인데도 불구하고 율법의 선행이 기준이 된다. 
 
 
 종교의 영이 임한 사람들을 우리는 주위에서 볼 수 있다. 
성경의 말씀을 인용하며 겉으로 보이는 외형적인 것에 치중하며 이것은 해도 되고 저것을 해서는 결코 않돼하며 정작 자신도 온전하게 제대로 지키기 못하면서 다른 이들을 율법적으로 판단하고 정죄한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율법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우리는 더 이상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흔히 착각을 한다.
주님께서는 율법을 폐하시지 않으셨다. 자신을 율법이 요구하는 사망에 내어 주심으로 율법을 완성하셨다.
(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래서 율법과 구원은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다.
 
사도바울은 롬3:20과 롬7:7에서 율법으로 죄를 깨닫는다라고 말한다.
(3:20)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
(7:7)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율법은 나의 어떤 행동이나 생각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죄가 되는 지를 깨닫게 해주며,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죄들로부터 구원을 얻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임을 깨닫게 해 준다.
 
은혜로 구원을 얻은 후에도 계속해서 우리는 죄를 짓는다.
저는 이렇게 생각한다.  죄를 판단하는 기준이 내게는 두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율법 곧 말씀이요, 다른 하나는 바로 내 마음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이시다.  내 마음에서 죄의 생각을 하게되면 성령께서는 우선 알려 주셔 죄를 짓지 못하도록 가르켜주신다. 그렇지만  성령의 가르침에 순종하지 않아 결국 내 몸을 통하여 죄를 짓게 되면 율법의 기준이 나에게 적용된다.  율법은 그러한 행동이나 생각은 죄라고 나를 가르친다.  그래서 하나님의 긍휼의 은혜로 구원을 얻었지만  이 땅에 사는 동안 지속적으로 나의 죄를 알게 해주는 율법으로 벗어날 수 없고 그 율법이 늘 나의 삶에 밀접하게 관여를 하여 나의 속의 모습이 어떤 줄을 알게 해 준다.
(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우리는 생명이 있는 동안 율법의 지배를 받는다. 그래서 율법이 정한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을 하지만 결코 죄와 사망의 법에서 벗어 날수 없다.  그렇지만 우리가 마지막 호흡을 하고 주님의 품으로 돌아가는 순간 율법의 요구로 부터 자유롭게 되며 율법을 완성하신 주님의 생명의 성령의 법을 따르게 될것이다.
 
 
성문화된 율법으로 하나님께 범죄하는 나의 죄를 깨달아 알게 된다.
예수님을 알기 전과 알고 난 후의 우리의 삶의 푯대와 기준이 달라지지 않았는가?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죄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들이 예수님을 안 후에는 죄로 떠오른다.
세상의 법으로 정한 죄의 기준과 예수님께서 정하신 죄의 기준은 서로 다른 것이 있다.
 
예수님은 마5장에서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하시면서 죄에 대하여 일곱번 말씀하신다.
 
  • (5: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 (5:26) 네게 이르노니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 (5:2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 (5:3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 (5:3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
  • (5:39) 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 (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세상의 법과 상이하게 다른 예수님의 법.
예수님의 법은 세상과는 틀린 죄의 기준이 적용되어 세상에서 보는 죄의 기준을 초월한다.
예수님 안에 거하면 거할 수록 더욱 많은 죄들이 내 심연으로부터 떠오르게 된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고백하지 않던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라.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낼까.
사도바울은 예수님을 안 뒤에 예수님의 은혜안에 거하면 거할 수록 더욱 많은 죄들이 떠올라 죄에 얽매인 자신을 돌아 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이지 않는가!
예수님 안에 거하려고 하면 할수록 내 안에 숨겨져 있던 죄들이 표면에 떠오르며 그 문제에 대하여 고민하게 되지 않던가. 
 

율법 곧 말씀으로 죄를 깨닫는다.
그런데 많은 죄들 가운데서 가장 큰 죄는 무엇일까 
살인한 죄일까? 정권을 뒤엎는 반역의 죄일까? 어린 아이를 강간치사한 죄일까?
나를 사사건건 괴롭히며 억울하게 하는 자를 보며 죽일 놈이라 하는 데 그 놈의 죄가 가장 악한 죄일까?
 
모든 죄들의 기준은 바로 를 기준한다는 것이다 
주님 역시 자신이 기준이 되심으로  예수님 편에서 가장 큰 죄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이다.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을 믿으면 영생을 하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멸망한다고 약속하신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은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부인하는 가장 큰 죄를 범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요16:7-11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6:7-11)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깨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
  
예수님을 믿으며 죄에 거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곧 예수님에 대하여 자세하게 쓰여져 있는 성경말씀을 늘 가까이 해야 한다.
성경에는 죄가 무엇인지를 알게 하는 율법이 있고, 그리스도의 자녀로서 이 땅에서 행하여 할 올바른 예의와 윤리가 기록되어 있고, 지옥과 천국은 어떤 자가 가는 지를 말하며, 하나님이시면서 인간의 아들로 오신 주님께서 베푸신 신적이며 인간적인 사랑이 있으며, 또한 장차 오실 재림의 주님을 준비하는 슬기로운 자가 되라고 소망을 준다. 캄캄한 어둠의 사망속에 거하여할 나의 생명을 살리시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케 하는 은총의 말씀을 늘 가까이 해야 한다. 말씀은 나를 자유롭게 해 줄 것이다.
 
  
  1.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예수님은 이미 나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셨다.
예수님께서 나의 모든 죄를 이미 사해 주셨기에 계속해서 죄를 지어도 괜찮다고 생각을 하는가?
그래서 앞으로 더욱 많은 죄가 더해 질 것이니 은혜가 넘쳐난다라고 말하려 하는가.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 말씀을 이렇게 이해한다.
은혜가 넘쳐 나면 날수록 더욱 많은 죄가 더하여 진다.
 
많은 죄를 지으면 지을수록 죄를 사하여 주시는 은혜가 더욱 넘쳐난다라고 이해하기보다, 은혜안에 거하면 거할 수록 내 안에 숨겨져 있던 많은 죄들이 드러나게 되어 죄가 더하여 진다라고 나는 이해를 한다.
 
 
이 말씀을 생각하면서 탁한 물과 밑바닥에 있는 돌맹이를 생각해 보았다.
물이 탁해 있을 때에는 보이지 않아서 물 밑바닥에 무엇이 있는 지를 알 수 없다. 그렇지만 물이 정화되어 깨끗해지면 물 밑바닥에 어떤 돌맹이들이 있는지가 잘 보이게 된다.
 
은혜란 내 마음이 맑은 물로 정화되는 것과도 같다라고 생각을 한다.
죄로 인해 탁해져 있는 내 마음에 성령의 물의 은혜의 능력이 임하게 되면 탁해져 있던 나의 마음이 깨끗한 물로 정화가 된다.
 
지구에서 가장 깨끗한 호수 중의 하나가 바이칼 호수라고 한다. 그곳을 가면 물이 너무나 맑아서 햇빛이 미치는 매우 깊은 곳까지도 볼 수 있다고 한다. 물이 깨끗하면 깊은 곳에 있는 나무조각이나 돌들이나 물고기들을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나의 마음이 성령의 은혜로 정화되어 깨끗하다면 나의 마음의 깊은 곳까지도 보여지게 될 것이다.
 

짙은 안개가 낀곳에서는 한치 앞도 볼 수가 없지만, 바람이 불어 안개를 지워버리기 시작하면 풀과 나무들이 보이기 시작하며 곧 산이 보이고 멀리 있는 구름도 보인다. 내 마음이 깊은 안개로 끼여 있다면 내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죄의 실체를 볼 수가 없다. 하지만 성령님의 충만하심으로 내 마음을 뒤덮고 있는 안개가 겉히기 시작하면 나의 실체를 보게 된다. 얼마나 죄악들로 뒤덮혀 있는지를.
 
(13:11)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맹인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하니 즉시 안개와 어둠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하는 지라.
(44:22)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 같이, 네 죄를 안개 같이 없이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 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라.
 
나의 인생에 나의 죄로 인한 안개가 끼이게 되면 앞을 볼 수 없다.

내 마음이 안개로 뒤덮혀 있다면 거짓과 속임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으며 결과는 나를 캄캄한 어둠이 있는 사망으로 인도한다.  안개를 사라지게 하시는 분은 오직 성령님이시다. 성령님께서 내게 충만하게 임할때 나의 깊은 곳을 볼 수 없게 하는 안개는 사라지게 되어 나의 깊은 곳에 감추어진 은밀한 죄들이 드러난다.
 
성령의 은혜로 내 마음이 깨끗하게 정화가 되어 내 마음의 깊은 곳까지 볼 수 있었으면 한다.
이 모든 것이 나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은혜이지 않는가.
  
성령의 은혜로 말미암아 주님의 은혜안에 거하려 하면 할수록 죄의 기준은 점점 나를 은밀하게 보이지 않던 깊은 곳까지로 인도한다. 왜냐하면 성령의 거룩한 밝은 빛이 내 마음을 조명하시기 때문에 깊은 곳에 은밀하게 감쳐져 있던 죄까지도 명맥하게 드러나게 된다.  이전에는 죄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들이, 내가 주의 밝은 빛 가운데 거하려 하면 할 수록 티끌과도 같은 죄들이 드러난다.
 
 
 깨끗하다고 생각되는 방에 한줄기 강한 빛이 비추게 되면 빛 안에는 얼마나 많은 티끌들이 있는가. 
어둠으로 가려서 볼 수 없었던 티끌들이 강력한 한 줄기 빛이 비추면 드러난다.
 
 오염으로 탁해져서 생명체가 살 수 없는 죽음의 물을 온갖 쓰레기들을 제거하고 깨끗한 물을 계속 공급하며 정화의 과정을 거치면 밑바닥이 보이며 깨끗하게 되어 생명의 물로 회복이 된다.  아직 가보지는 못했지만 청계천을 생각해 보자. 이전에는 온갖 더러운 것들로 오염되어 물고기들이 살 수 없었던 죽음의 물이었지만, 지금은 어떤가.  쓰레기들을 제거하고 물이 고이지 않고 잘 흐를 수 있도록 하여 정리를 하자, 지금은 맑은 물이 되어 많은 물고기들이 공존하는 생명의 물로 바뀌지 않았는가.
 
생명을 소생케 하는 성령의 능력이 임해야 한다.
나를 변화시키는 성령의 능력은 나를 은혜안에 거하게 한다.
나를 베푸신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 지를 늘 감사할 수 밖에 없게 한다.
  
  
주님의 이름을 가만히 불러 보자.
베푸신 주님의 은혜를 생각해 보자.
나를 긍훌하게 여기시는 주님의 사랑을 바라보자.
이 세상에서 나를 이해하시는 분은 오직 예수님이라는 사실이 실감이 나는가?

가슴이 먹먹해 지는가? 
아니라면 나의 마음은 아마도 지금 탁해져 있을 것이다.
세상의 찌든 소음으로 내 마음은 예수님께 대한 정함이 없을 것이다.
 

나의 깊은 마음의 심연을 바라보자.
혹 안개가 끼여서 죄들이 감추어져 있지나 않은지를.
내 속에 주님께서 미워하시는 숨겨진 오염된 죄악들이 없는지를 바라보자.

한 줄기 강한 주님의 빛안에 들어가자.
나의 생명을 깨끗하게 정화시키는 성령의 은혜에 거하자.

안개에 갇혀서 이러저리 방황하던 것으로부터 자유함을 받자.

주님의 은혜안에 가하며 더욱 많은 죄들을 보게 되기를 간구한다.
그것이 곧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은혜의 삶이며 주님과 동행하며 얻어지는 무엇과도 바꿀수 없는 축복이지 않겠는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이름의 능력을 의지하여 아버지께 간구합니다.
이 세상을 사는 제 안에는 선과 악이 함께 공존을 하고 있읍니다.
제 속 깊은 곳에는 아직도 감추어진 찌질한 죄악들이 숨겨져 있읍니다.
평소에는 거룩한 모양새를 갖추고 있다가도 기회만 되면
이 놈이 슬며시 머리를 내밀고 저를 쓰러뜨려 깊은 나락 가운데로 끌고 가려고 합니다.
 
성령의 능력이여
제게 임하소서.
저의 오염된 마음을 정화시켜 주시어,
제 마음 깊은 곳에 깊숙하게 숨겨져 있는 죄악의 실체를 보게 하소서.
이를 물리칠 수 있는 능력을 제게 부어 주옵소서.
제안에서 주님을 향한 삶을 방해하는 안개가 제거되기 원하옵니다.
성령의 바람이여 불으사 안개를 흩으소서.
주님의 거룩한 강력한 빛이 제게 비추어 먼지와 같은 하찮은 찌질한 죄악들이 드러나게 하옵소서. .
주 앞에 정함이 있는 자이기를 간구합니다.
주여 저를 도와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