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5월 25일 일요일

과연 이 모든 악을 행하였으나

(삼상12:20-25)  사무엘이 백성에게 이르되 1) 두려워하지 말라. 2) 너희가 과연 이 모든 악을 행하였으나 여호와를 따르는 데에서 돌아서지 말고 3) 오직 너희의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섬기라.
….. 4) 만일 너희가 여전히 악을 행하면 너희와 너희 왕이 다 멸망하리라.


사울을 왕으로 택해서 세운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암몬족속이 전쟁을 일으킨다.
몇몇의 사람들은 사울의 왕위를 인정할 수 없었고, 아직 사울의 왕위가 확립이 되어 있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해 사울이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진정한 왕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신 것이다.

사울은 암몬족속이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하나님의 영에 크게 감동되어 (11:6) 그 노가 크게 일어나서 전 이스라엘에 자기를 따르라고 명령한다. 여호와의 두려움이 임한 이스라엘 자녀들은 한 사람같이 나와 전쟁을 준비하게 된다. 그 수가 약 330,000명이 되는 대군이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11:8).
한사람같이 된 이스라엘 자녀들은 암몬족속을 쳐서 큰 승리를 하게 된다.

이에 사무엘은 온 이스라엘에게 길갈에 모여 새로이 사울을 왕으로 다시 삼아 나라를 새롭게 한다.
그러면서 사무엘은 이스라엘 자녀들에게 여호와께서 그동안 행하신 일들을 말하며 기억하라고 한다.
여호와를 잊고 떠나 있을때에는 여러 적들의 침입으로 환난을 겪게 되어 백성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면 여호와께서 듣고 여러 사사들을 보내어 원수들의 손에서 건져내어 안전하게 살게 하셨다. 그렇지만 이번 암몬족속이 쳐들어 올 때에 여호와의 도우심을 간구하기 보다는 왕을 세우기를 간구하는 범죄를 행하였다.

만일 너희가 구한 왕과 너희가 여호와를 경외하며 따르면 좋지만, 만일 여호와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면 너희 조상을 치신 것같이 너희 또한 치시리라. 징조로 천둥과 비가 올 때가 아닌 밀 베는 때이지만 오늘 우레와 비를 보내어 너희가 왕을 구한 죄악의 큼을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하고 여호와께 아뢰었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여호와께서 우레와 비를 보내어 모든 백성들이 두려워 하였다. 그리고 모든 백성이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며 죽지 않게 해달라고 사무엘에게 중보해 달라고 간청한다
     
사무엘은 회개하는 이스라엘 자녀들에게 네가지 권면을 한다.

1.   두려워 하지 말라.
비록 여호와께 범죄하였지만 두려워하지 말라.
여호와께서는 선하시며 인자하시기 때문에 나의 죄를 깨닫고 죄로부터 돌아서고 여호와께로 돌아 온다면 나의 죄를 기억지도 않으시고 나를 다시 품어 주시기 때문에 두려워 말라라고 권면을 한다.
여호와와 함께 한다면 어떤 상황에서든지 두려워 하지 말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치신다.

성경은 수없이 많은 곳에서 우리들에게 세상사람들로부터 두려워하지 말라고 권면을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당하는 두려움을 잘 알고 계신다. 수많은 두려움이 믿는 자들을 감싸고 억누른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면 이 모든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두려움의 대상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되어야 한다.
(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2.   과연 이 모든 악을 행하였으나
사무엘은 이스라엘 자녀들에게 너희는 과연 이 모든 악을 행하였다라고 말한다.
“You have done all this evil”의 현재완료형이 쓰인다. 죄를 범한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며 돌이킬 수 없음을 의미한다. 하나님 자녀로서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 사람을 의지하는 것은 죄임을 분명하게 말을 한다.

사무엘은 이스라엘이 지은 죄들을 삼상12:7-13에서 언급한다.
애굽으로 들어간 이스라엘 자녀들이 곤난을 겪자 그들은 여호와께 울부짖으며 구원해 달라고 간구한다.
간구를 들으신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아론을 보내어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인도하여 정착하고 살게 하신다. 하지만 9절에서 자신을 구원하신 여호와를 곧 잊게 되게 우상들을 섬기게 된다. 이에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자녀들을 주변의 나라들에게 파신다. 이에 이스라엘 자녀들은 다시 여호와를 찿으며 그의 구원을 울부 짖으며 간구하자 여호와께서는 사사들을 보내어 이스라엘 자녀들을 구원하신다.

그런데 이번에 아모리 족속이 쳐들어오자, 이번에는 이스라엘의 간구의 내용이 달라 지게 된다.
여호와의 도움심을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나라와 같이 그들을 다스릴 왕을 달라고 간구를 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왕이 되어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나라인 신정국가이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에 속한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는 것을 거부하고 사람을 왕으로 섬기겠다고 간구를 한 것이다.

이는 말하자면 구테타인 것이다.
하지만 자비의 하나님께서는 이 간구마저 들어 주신다.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셨을까.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자녀들이 자신만을 섬기며 자신의 통치를 기꺼이 받아 들이는 것을 기뻐하신다.  
왕이신 여호와는 선하시며 좋으신 왕이시므로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베푸시며 자신의 자녀들을 지키시는 권세와 능력을 갖고 계신 전지전능하신 여호와이신데, 그만 자신의 자녀들이 여호와를 왕으로 섬기며 믿기 보다는 연약하며 죄있는 사람을 왕으로 섬기며 믿으려고 할때 여호와께서는 얼마나 슬프셨을까.

마치 나의 자녀가 아비인 나에게 더이상 당신은 나의 아비가 아닙니다. 나는 다른 사람을 나의 아비로 섬기겠읍니다할 때 얼마나 나의 마음은 아플까? 슬프고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을 받게 될것이다.

그런데 마음이 아프신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버리고 사람을 왕으로 삼고 그를 섬기겠다는 간구마저 들어 주신다. 하나님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자녀의 간구도 들어 주시는 분이시다.  
나의 간구가 때로는 하나님을 아프시게 하는 간구일지언정 여호와께서는 그런 나의 죄악된 간구를 들어 주신다.

여호와는 이스라엘 자녀들에게 그들이 간구하는 왕을 선택해서 주신다.
사무엘은 이 모든 것이 여호와 앞에 죄악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는 사람이나 그 어떤 것을 의지하는 것은 죄악이다.
이는 돌이킬 수 없는 죄악인 것이다.

우리 역시 수 많은 죄를 이미 범하였다.
무엇이라 변명할 수 없는 죄들을 이미 범하였다.
여호와를 의지하기 보다는 세상의 것들을 의지하며 우상으로 섬겼다..
여호와을 왕으로 섬기기 보다는 나의 소중한 그 어떤 것을 왕으로 알고 섬기며 여호와께 이미 죄를 범한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인 것이다.


3.   오직 너희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섬기라.

 24-25에서 어떻게 여호와를 섬겨야 하는 지를 말씀한다.
(24-25)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행하신 1) 그 큰 일을 생각하여,  2) 오직 그를 경외하며,  3) 너희의 마음을 다하여 진심으로 섬기라. 만일 너희가 여전히 악을 행하면 너희와 너희 왕이 다 멸망하리라.

1)     큰 일을 생각하라
여호와께서 출애굽을 할 때 열두재앙을 내려 주심으로 애굽으로부터 나오게 하셨고 홍해를 갈라 그 사이로 길을 만드셔서 애굽으로 부터 분리를 시키셨다. 구름기둥이로 불기둥으로 길을 인도하셨으며 만나를 주심으로 생명의 양식으로 주리지 않았으며, 바위를 터뜨려서 물을 주시어 목마르지 않았으며 광야길을 가는 동안 옷이 헤지지 않았다. 여호와를 잊어 버려서 그 결과 압제가운데 있어 고통과 신음가운데 있는 이스라엘 자녀에게 사사들을 보내시어 구원을 하시었다.
이 모든 것들을 생각하라고 권면한다.

우리는 흔히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이 나의 힘으로 온것이라 생각들을 한다.
하지만 지금의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나를 먹이시고 재우시고 잠잘곳을 예비하신 여호와의 인도하심이 지금까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러한 여호와께서 나에게 행하신 큰 일들을 생각하여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 우리의 입에서는 여호와께 대한 감사가 끊이지 않게 된다.
  
2)     경외하라
Fear Him.
여호와를 두려운 마음으로 섬겨야 한다.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실 때 세상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지만, 여호와는 두려워 해야 한다.
여호와는 자비와 긍휼의 은혜의 하나님이시지만, 여호와는 우리의 죄악됨을 심판하시고 벌을 주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시요 심판주이시다. 생명을 취하시기도 하시고 주시는 여호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생명을 얻게 되며 재앙을 당하지 않게 된다.
(19:23)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사람으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 경외하는 자는 족하게 지내고 재앙을 당하지 아니하느니라.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나와 자손의 축복이 임하게 된다.
(5:29) 다만 그들이 항상 이같은 마음을 품어 나를 경외하며 내 모든 명령을 지켜서 그들과 그 자손이 영원히 복받기를 원하노라.

여호와를 경외함은 지식과 지혜의 근본이다.
(1: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9:10)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3)     마음을 다하여 진심으로 섬겨라
성경은 곳곳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한다.
주님은 진정과 신령으로 여호와를 섬기라고 하신다.

너희의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섬기라.”
(6:13)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를 섬기며 그의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
(22:5) 너희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계명을 지켜 그에게 친근히 하고 너희의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그를 섬길지니라.
(4:10)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2:11)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여호와께서 행하신 큰일을 생각하며 경외하며 진심으로 섬겨야 하지만, 그렇지 않고 여호와를 잊어 버리게 되면 여호와의 진노가 임하여 결국은 멸망하게 된다.


4.   여전히 악을 행하면 멸망하리라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으며 여호와를 섬기지 않고 여호와를 잊어 버리고 계속해서 악을 행하게 되면 여호와의 진노가 임하여 멸망하게 된다.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는 것은 곧 악이라고 성경은 말씀한다.
(2:19) 네 악이 너를 징계하겠고 네 반역이 너를 책망할 것이라.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께서 숱한 이적과 기사를 통해 자신의 살아 계심을 증거하셨으며 자신의 뜻을 명확하게 제시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께 대한 반역행위이다. 하나님께 반역하는 자에게 결국은 멸망이 찿아 오게 된다.

여호와은 진노의 하나님이시다.
여호와께서는 자신보다 다른 것을 섬기는 것을 진노하시며 싫어하신다.

(6:15)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신즉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진노하사 너를 지면에서 멸절시킬까 두려워하노라.
(20:5) 십계명의 둘째 계명인 너희는 우상을 섬기지 말라.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여호와께서 나에게 많은 은혜를 베푸시고 자신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나 때문에 고통과 고난을 당하게 하사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다. 이처럼 나를 사랑하신 여호와께서 자비와 긍휼로 나를 인도하신다. 그런데 이러한 여호와를 내가 잊어 버리고 계속해서 죄악 가운데 있다면 결국은 여호와의 진노가  임하게 되어서 멸망하게 된다. 영원한 멸망인 것이다.


하나님의 위로
멸망받을 수 밖에 없는 우리들에게  22절에서 위로하시며 약속하신다.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자녀를 끝가지 사랑하신다.
(삼상12:22) 여호와께서는 너희를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것을 기뻐하셨으므로 여호와께서는 그의 크신 이름을 위해서라도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실 것이요.

여호와의 끝없는 사랑을 느낄수 있다.
성경은 끝없는 인간의 죄악됨을 말한다.
여호와 안에 있어 여호와를 구하면 여호와의 축복이 임하지만, 여호와를 잊어 버리고 떠난다면 죄악과 곤난과 환난이 임하게 된다. 이때 자신의 죄를 깨닫고 여호와께로 돌아와 자신의 죄를 자복하면 회개하면 여호와께서는 들으시고 다시 구원의 역사를 이루신다.

여호와는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신다.
여호와께서는 비록 때로는 여호와를 잊어 버리고 탕자와 같이 여호와를 떠난 삶을 살지라도 그런 나를 기뻐하시며 끝까지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신다.

여호와께선 나를 자녀로 택하심을 결코 후회하지 않으신다.

( 2:23) 내가 나를 위하여 저를 이 땅에 심고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 저희는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여호와께서는 자녀를 통하여 그의 크신 이름을 들어 내시며 영광을 받으신다.
(50:15) 환난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

그러므로 여호와와 함께 하는 성도의 삶은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
(1:77-79)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라. 이로써 돕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며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않은 자에게 비취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107:10-14)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 그러므로 그가 고통을 주어 그들의 마음을 겸손하게 하셨으니 그들이 엎드러져도 돕는 자가 없었도다. 이에 그들이 그 한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들의 고통에서 구원하시되 흑암과 사망의 그들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그들의 얽어 맨 줄을 끊으셨도다


말씀을 정리하면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자에게 다시 긍훌을 베푸신다.
나의 죄를 깨닫고 여호와께 죄를 회개하고 여호와께 돌아 왔다면 나의 죄를 기억지도 않으신다.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심으로 세상의 적들을 두려워 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다시는 나의 지난 날의 죄를 다시 행하여서는 않된다오직 여호와만을 마음을 다하여 섬겨야 한다. 그렇지 않고 여호와를 잊어 버리고 다시 죄악가운데 거하게 된다면 결국은 영원한 멸망이 임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멸망받기에 합당한 자일지라도 하나님의 자녀로 택하심을 입었다면 결코 버리시지를 않으시고 구원의 은총을 베푸신다. 성도의 삶 가운데 고통이 임함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 나를 일깨우시기 위함이다. 그럴때 오직 여호와을 의지하고 부르짖는다면 여호와께서는 모든 결박을 풀으시고 사망과 흑암으로부터 나를 건져 내시고 다시 구원의 길을 갈 수 있도록 축복을 하신다.





!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 크십니다.
세상의 욕심을 구하는 나의 간구가 여호와 앞에 크나큰 죄악이지만
그래도 여호와께서는 그런 나의 간구를 들어 주시기도 하시면서,
나의 자녀야 나의 사랑하는 자녀라고 불러 주십니다.

저는 너무나 큰 죄인입니다.
여호와께서는 나의 왕이시며 나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왕이신데
저는 그런 여호와를 곧잘 잊어 버립니다.
저를 사랑하셔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사
십자가에서 죽게 하시기까지 하시면서
저의 구원을 이루셨지만,
이미 저는 여러번이나 여호와를 왕으로 섬기는 것을 잊어 버리고
세상을 왕으로 섬겼읍니다.
이는 부인할 수도 없는 이미 제가 저지른 죄악입니다.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읍니까!
늘 여호와를 잊어 버리고 죄악을 행하지만
여호와께서는 이런 나를 사랑하시고 버리지 아니 하십니다.
그리고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래도 내게로만 돌아오라.
내가 너를 버리지 아니할 것이요
내가 너를 사망과 어둠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며
나의 돕는 해가 너에게 비쳐서
내가 너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할 것이며
영원한 평강이 있는 곳으로 너를 인도하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경외합니다.
여호와는 만군의 주이시요 만왕의 왕이십니다.
늘 쓰러지고 넘어지지만 일으켜 세우시고
나의 간구에 귀를 기울이시는 여호와를 사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14년 5월 18일 일요일

에벤에셀

                                                                                                                                       

(삼상7:12)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이르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


에벤에셀의 뜻은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이다.
에벤에셀의 하나님을 고백하기까지 두 가지 큰 사건이 있다.
1) 여호와의 법궤사건과 2) 미스바에서의 영적각성이다.

1.   여호와의 법궤

이스라엘 백성은 블레셋과의 전쟁에 여호와의 법궤를 가지고 나갔지만 전쟁에서 패하고 엘리 제사장과 두 아들 모두 죽었으며 여호와의 법궤는 블레셋 사람들에게 빼앗긴다. 블레셋 사람들은 전쟁에서 전리품으로 취득한 여호와의 임재를 상징하는 여호와의 법궤를 자신들이 섬기는 다곤 신상앞에 놓아 두지만 다곤 신상의 머리와 발과 팔이 부서지는 것을 목격하고 또한 피부병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간다. 블레셋 사람들은 여호와의 법궤로 인해서 여호와의 재앙의 심판이 자신들에게 임한것을 깨닫게 된다.

(삼상5:11) 이스라엘 신의 궤를 보내어 그 있던 곳으로 돌아가게 하고 우리와 우리 백성이 죽임 당함을 면하게 하자 하니 이는 온 성읍이 사망의 환난을 당함이라. 거기서 하나님의 손이 엄중하시므로 (God’s hand was very heavy on it)

블레셋 사람들은 여호와의 심판이 임한것을 보고 여호와의 법궤를 이스라엘로 돌려 보내기로 한다.
그래서 블레셋 사람들은 자신들의 방법대로 여호와의 궤를 멍에를 메어 보지 못한 암소 두마리를 새수레에 실고 속건제물로 방백의 수효대로 금독종 다섯과 금 쥐 다섯 즉 많은 금과 함께 보낸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만일 여호와의 법궤를 싦은 수레가 곧바로 이스라엘의 진영인 벧세메스로 가면 이 큰 재앙은 여호와께서 자신들에게 내린 것이지만, 그렇지 않고 좌우로 치우쳐서 다른 곳으로 가게 되면 우연히 임한 것이라 한다 (9). 하지만 두 암소가 끄는 여호와의 법궤를 실은 수레는 곧바로 벧세메스 길로 행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인계된다.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한치도 어그러짐이 없으며 인간을 제외한 모든 창조물들은 여호와의 말씀앞에 순종한다.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법궤를 들여 다 본 까닭에 70명이 죽게 된다 (6:19).

성경에는 법궤로 인해 죽은 사람들이 나온다.
이 성경구절에서 70명의 사람들이 죽는다. 그리고 다윗왕 때 수레에 실고 가던 법궤가 소가 날뛰므로 흔들리는 법궤를 잡던 웃사가 여호와의 치심으로 죽게 된다.

Indiana Jones The raiders of the lost Ark 영화를 보면 서로 여호와의 법궤를 차지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으며 마침내 찿았을때 여호와의 법궤를 열어보고 그 안을 들여다 본 많은 사람들이 죽는 모습의 영상이 떠오른다. 법궤로 부터 사망의 천사들이 나아와 자신들을 쳐다보는 모든 사람들의 영혼을 취함으로 그들은 죽게 된다.

이 일로 벧세메스 사람들은 거룩하신 여호와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 (6:20)” 하며 고백하며 여호와의 권능을 새삼 알게 된다그리고 벧세메스 사람들은 여호와의 법궤를 기럇여아림의 지경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으로 옮겨 다윗왕이 예루살렘으로 옮기기까지 약 20년을 머물게 된다.

이 사건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의 법궤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고,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게 되었다. 즉 믿음의 전환점이 되었던 것이다. 소중한 것을 잃어 버리고 다시 찿은 이 사건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동안 잊고 있었던 여호와 앞으로 다시 나아 가게 되었다.

(7:2) 궤가 기럇여아림에 들어간 날부터 이십 년동아 오래 있은지라.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니라.
(7:4)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바알들과 아스다롯을 제거하고 여호와만 섬기니라.

여호와의 임재를 상징하는 여호와의 법궤는 소중한 것이다.
우리 인간의 탐욕스러운 마음으로 여호와의 법궤를 쳐다 본다면 곧 죽음이 우리를 가로 막게 된다.

법궤안에는 세가지 성물이 들어 있다.
모세의 돌판, 아론의 싹난 지팡이, 맛나가 들어있는 항아리.
법궤안에는 값어치가 나가는 보물들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니다.
법궤안에는 여호와의 주권을 상징하는 두 돌판,  
죽은 생명도 살리시며 생명을 주관하는 여호와를 상징하는 싹난 지팡이,
그리고 우리의 영과 육을 먹이시는 여호와를 상징하는 맛나의 항아리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여호와의 법궤를 탐욕의 눈으로 혹은 호기심으로 여호와의 법궤안을 들여다 보고자 한다.

지금은 여호와의 법궤가 어디에 있는 지 알 수 없다.
지금의 우리에게 여호와의 임재를 상징하는 여호와 법궤는 하나님의 성전안 바로 나 그리고 나아가서는 교회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나의 욕심으로 교회를 섬긴다든가, 교회를 이용해서 나의 육신적인 욕망을 채우려 한다면 다시한번 깊게 생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나 중심적인 형식적인 섬김 곧 여호와의 법궤안을 들여다 본 자들에게는 여호와의 벌은 엄중하게 임한다.


2.   미스바에서 영적 각성
블레셋의 위협앞에 벌벌떠는 육신적인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 영적인 각성이다.
지금의 우리에게 블레셋은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의 믿음을 방해하는 것들을 의미한다.
여호와 앞에 반드시 서있다면 넘어지지 않겠지만, 하루에도 수없이 우리는 넘어진다.
사람들과의 관계의 문제, 경제적인 문제, 정신적인 문제, 육신적인 문제등 많은 것들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가지 못하도록 방해를 하며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그 결과 조금만 힘든 상황이 앞을 가로 막으면 살려 달라고 하나님께 매어 달린다.
그러한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미스바에서 행하였듯이 영적각성이 필요하다.
영적으로 깨어야 한다

사무엘은 만일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와 이방 신들을 제거하고 여호와만을 섬긴다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실 것이라고 선포하다. 그러면서 사무엘 선지자는 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미스바에 모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스스로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기 위해서 준비한다.

미스바에서 영적 부흥이 일어났던 것이다.     
(삼상7:6) 그들이 미스바에 모여 1)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고, 2) 그 날 종일 금식하고,  3) 거기에서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 하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세가지를 행함으로 참회의 예배를 여호와께 드림으로 여호와께로 돌아온다.  

1)     물을 길어 여호와앞에 부으라.
영적인 부흥을 위해서는 우선 물을 길어서 여호와앞에  부어야 한다.
물을 붓는 다는 것은 영적인 정결함과 여호와를 간절히 찿음을 뜻한다.

물은 성경에서 정결함을 상징하고 또한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의미한다.
구약에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우선 물로서 깨끗이 씻어야 했다.
(29:4, 8:6) 너는 아론과 그 아들들을 회막 문으로 데려다가 물로 씻기고
(16:4) 룩한 세마포 속옷을 입으며 세마포 고의를 살에 입고 세마포 띠를 띠며 세마포 관을 쓸찌니 이것들은 거룩한 옷이라 물로 몸을 씻고 입을 것이며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에 대한 열망은 목마른 사슴이 물을 찿는 것과 같다.
(42:1)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55:1)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금식하고 회개하기 전에 우선 필요한 것은 나의 정결함과 목마른 사슴이 물을 찿듯 열심을 다해서 여호와 하나님을 찿아야 한다

2)     금식하라.
금식이란 나의 육신적인 욕망을 끊고, 영적인 음식으로 나를 먹이는 것이다.
나의 육신은 날로 후패해 가지만, 나의 영혼은 강해진다.
금식은 하나님과의 친교를 위한 준비로 행하였다.
모세가 십계명을 받기 전에 금식하였고, 다니엘도 환상을 보기 전에 금식하였다.
또한 금식은 큰 근심이 있을때에 행하였다.
금식은 연약한 인간이 하나님께 어떤 간구가 있을때 행하였다.

금식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이 있으며, 또 하나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금식이 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은 나를 묶고 있던 결박을 풀어 자유케 한다.
(58:6)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풍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꺽는 것이 아니겠느냐.

하지만 남에게 보이려는 금식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으시며 금해야 한다.
(6:16)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3)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고백하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이 여호와께 범죄함을 깨닫고 회개하게 된다.
하지만 내가 여호와께 범죄함을 알지 못한다면 나의 죄를 여호와께 고백할 수 었다
여호와께 나의 죄를 고백하기 위해서는 나의 마음에 선한 양심이 회복되어야 한다.

때로는 힘이 들고 어렵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스바에서 경험하였듯이 영적인 각성이 필요하다.  
미스바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영적인 각성을 경험하게 되어 오직 여호와만을 섬기게 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 사무엘이 살아서 지도하며 중보하는 동안에 이스라엘은 평화가 있었다.   

우리의 삶에도 영적인 각성은 반드시 필요한다.
타락하고 피폐한 우리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여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려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잊고 있어 소원해진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늘 나와 함께 하신다면 우리에게는 늘 평강이 있게 된다.

늘 생명의 근원이신 성령의 생수를 마셔야 한다. 하나님을 찿는 갈급함이 있어야 하며 늘 나 자신을 정결하게 성령의 생명의 물로서 깨끗하게 씻어야 한다.
때에 따라 금식을 통하여 나의 세상적에 속한 육신의 소욕을 제어하며 나의 간구를 하나님께 드리게된다.
하나님께 범죄할 때마다 여호와께 나의 죄를 고백하며 회개하여야 한다.
그럴 때 세상의 거침돌들은 더 이상 나를 가로 막고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삶 가운데 주님이 함께 하시는 참 평화가 깃들이게 된다.                                                                                                                                                                                                                                                                                                                                                                                                                                      




말씀을 정리하면
블레셋 사람들은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스바에 모인 것을 알고 치러 오지만 여호와의 적극적인 개입하심으로 패퇴하게 된다. 그리고 사무엘은 돌을 취하여 미스바아 센사이에 세워 이로되 에벤에셀이라 하며 기념한다. 그리고 사무엘이 있는 동안에는 이스라엘 에게 평화가 찿아 오게 된다

에벤에셀즉 지금까지 나를 도우시는 하나님 이심을 고백하기 위해서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여호와의 법궤의 소중함과 미스바에서의 영적인 각성이다.

우선 여호와의 임재하심을 나의 호기심이나 나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바래서는 않된다.
지금의 우리에게 여호와의 법궤는 교회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교회는 여호와의 임재의 상징이며 여호와의 성전이다.
가장 우리가 실수하기 쉬운 것은 교회를 너무나 쉽게 생각한다
교회는 나의 어떤 욕심을 채우려는 곳이 아니다.
교회는 나의 의지를 세우며 나를 나타내려는 곳이 아니다.
교회는 나의 호기심으로 기웃 기웃 바라 보는 곳이 아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곳이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당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미스바의 영적각성이 반드시 있 어야 한다.
구원의 우물에서 생명의 생수을 길어야 한다.
마음껏 채우시는 값이 없는 생명수를 마음껏 마실때 우리의 영혼은 비로서 정결하게 된다.
그리고 때로는 나의 육신의 욕심을 제어하는 금식을 통하여 나를 지켜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여호와께 범죄할 떄 마다 여호와께 나의 죄를 고백해야 한다.

여호와의 법궤의 소중함을 알고 미스바의 영적각성을 통할 때 비로서 에벤에셀의 여호와께서 저를 도우십니다하고 고백하게 된다.





여호와여.
우리가 여호와의 임재를 소중하게 여기기를 원합니다.
여호와께서는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주권을 가지신 왕중의 왕이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죽은 생명을 다시 살리시는 사망을 권세를 깨뜨리신 생명의 왕이십니다.
여호와께서는 나의 영과 혼과 육을 먹이시며 살찌게 하십니다.

미스바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직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다짐하며
생명의 물을 길어서 여호와께 드리고
나의 육신의 욕망을 제어하며 금식하였듯이
여호와께 나의 죄를 고백하고
여호와와 앞에 다시 서 있기를 소망합니다.

여호아는 지금까지 저를 도우신 에벤에셀의 하나님이십니다.
제가 어미의 뱃속에 잉태되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저를 지켜 주셨고 도우셨읍니다.
앞으로도 영원토록 저와 함께 하시며 저를 도우실 여호와을 찬양하며 영광을 드립니다.

아멘.

2014년 5월 11일 일요일

믿음의 시험인 인내



(삼상13:8-9)  사울은 사무엘이 정한 기한대로 이레 동안을 기다렸으나 사무엘이 길갈로 오지 아니하매 백성이 사울에게서 흩어지는지라. 사울이 이르되 번제와 화목제물을 이리로 가져오라 하여 번제를 드렸더니

사울은 하나님의 택하심으로 왕이 되었다.
이제 2년이 지나 어느정도 왕권이 확립이 되어가고 있을 즈음에 사울의 믿음을 시험하는 일이 벌어진다.

사울이 왕이 된지 2년후에 블레셋은 병거 3,000과 마병 6,000명의 대군으로 쳐들어 온다.
그당시 이스라엘에 쇠로 만든 칼이 사울과 요나단만이 갖고 있었다고 한다. 칼과 창과 병거로 잘 무장된 블레셋군과 몽둥이를 든 이스라엘군과는 현격한 전력의 차이를 보이며 누가 보아도 전쟁의 승패는 이미 정해진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위기에 몰린 사울은 사무엘에게 와서 번제를 올려 달라고 요청을 한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 약속한 7일안에 오지를 않자, 두려워하며 요동하며 흩어지는 백성들을 다시 규합하고자 자신이 직접 번제를 드리게 된다. 번제를 드린 후에 사무엘은 왔는데 왜 늦게 온 것에 대한 해명은 전혀 언급되지 않고 다만왜 이와같은 일을 행하였느냐. 이 일로 인해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며, 여호와께서 그의 마음에 맞는 자를 구하여 여호와께서 그를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셨다라는 책망의 소리를 듣게 된다.

사울은 믿음의 시험에서 떨어지게 된다.
사울은 이 믿음의 시험에서 떨어져서 더 이상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될 수 없었으며, 그 결과 사울 대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다윗이 왕권을 이어받는 전환점이 되게 된다. 이후로 사울은 더 이상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서의 왕이 아닌 사람의 마음에 합한 왕으로서의 길을 가게 되며 점차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틀어지게 된다.

그리고 결국에 사울은 사람으로부터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아 죽게 된다.
사울은 너무나 큰 것을 지불해야 했던 것이다.

왕으로 지명받았을 때 짐보따리 사이에 숨어 있을 정도로 겸손했더 사울.
성령의 충만함으로 예언자의 무리와 함께 예언을 하기도 했던 사울.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함을 입어 왕이 된 사울은 그 누구보다 더 하나님을 따랐던 사울.

하지만 사울은 이 사건후로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다.
왜 그랬을까? 사울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인내가 없었던 것이다

근본적으로 사울의 믿음의 대상이 하나님을 향하기 보다는 자신과 세상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고,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약속이 성취되기까지 참는 인내심이 부족하였던 것이다
사울은 하나님의 사람을 인내심을 갖고 참고 기다리는 것보다. 세상에 속한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으려고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오직 제사장이 할 수 있는 번제를 자신이 드리며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게 된다.
그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었으므로 하나님의 법을 온전히 준수하는 시범을 보여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만인앞에서 스스로 하나님의 법을 깨면서 자신을 나타내려고 하였다.

성경에는 인내한 사람들과 인내하지 못한 사람들의 기록이 있다.
인내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유업으로 받아 축복을 받지만, 그렇지않고 인내하지 못한 자들은 하나님의 축복과는 관계가 없는 삶을 살았던 것을 볼 수 있다.

인내한 아브라함.
아브라함과 사라를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70세 이었을 때 너의 후손으로 복을 받게 하리라는 약속을 받는다. 아브라함은 이 약속을 하나님으로 받고서 약 20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20년동안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은 언제나 이루어 질 것인가 기대하며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 지기를 기다렸다. 때론 그 하나님의 약속이 희미해지며, 약속이 과연 이루어 질까 하는 의심도 있었겠지만 아브라함과 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인내하며 오랜시간을 기다렸다.
그 결과 아브라함과 사라는 마침내 아들 이삭을 얻게 되었으며,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다.

100년동안 인내한 노아
노아는 하나님께서 방주를 지으라는 명령을 받은 후에 홍수가 날것을 대비하여 100년 동안 방주를 지었다.
노아의 시대에는 비라는 것이 없었다. 단지 하늘에는 또 다른 물의 층이 있어 늘 습기가 가득하였을 것이라고 추측을 한다. 노아는 단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100년동안 사람들의 무관심과 따돌림을 당하면서 방주를 지었다. 인내를 갖고 방주를 지었고 히브리서에 믿음의 조상의 한사람으로 성경에는 기록된다.


인내하지 못한 에서
수렵을 업으로 삼은 에서가 사냥에서 지쳐서 집으로 돌아 왔을때 야곱은 에서의 장자권과 팥죽 한그릇과 바꾸자는 제안을 한다. 너무나 허기가 진 에서는 야곱의 제안에 승낙하여 야곱과 에서는 전혀 다른 길을 가게 된다. 만일 에서가 인내심이 있어서 비록 너무나 허기가 졌지만 조금더 참았더라면 자신의 장자권의 축복을 팥죽 한 그릇과 바꾸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인내심과 반대의 특성은 성급함이다.

성급한 입다.
사사 입다는 전쟁에서 승리에 도취하여 처음으로 자신을 맞이하는 자를 제물로 바치겠다고 서원을 한다.
이 성급한 맹세로 인하여 입다는 자신의 딸을 성전의 예물로 바치게 된다.

성급한 사울
사울은 블레셋과 싸움을 하면서 원수에게 보복할 때까지 아무 음식물이든지 먹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맹세를 하면서 어기는 자는 반드시 죽음을 당하게 될것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단독적으로 습격하느라고 듣지 못한 요나단은 벌꿀은 찍어 먹고 다시 활기를 찿게 된다.
이 일로 요나단은 사울의 맹세로 죽게 되었지만 부하 장수들의 만려로 요나단은 죽지 않게 된다. 사울은 치열한 전투에서 지친 자신의 부하들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성급하게 맹세하여 전 군대가 위기에 처하도록 하였다. 만일 사울이 사려가 깊은 지도자이었다면 전쟁중에 그와같은 성급한 어처구니 없는 맹세와 저주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인내의 하나님

왜 우리는 인내를 가져야 하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는 바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속성중에 하나가 인내이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인내의 속성을 갖고 계신다.

하나님은 인내의 속성을 갖고 계신다.
(15:4) 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주사
(34:6)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반포하시되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그리스도 역시 인내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인내하시며 십자가의 형벌을 고스란히 받으셨다.
(살후3:5) 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성령의 열매중의 하나는 인내이다.  
(5: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인내의 유익은 무엇인가

결실하게 한다.
( 8:15)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사랑
온전한 사랑을 얻기 위해서는 인내가 있어야 한다.
진정한 사랑은 오래 참게 한다
(고전13:4-5) 사랑은 오래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의 정의를 말한 이 구절에서참고는 두번 반복을 한다. “오래 참고로 시작해서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견딘다로 끝을 맺는다.

용서
(4: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하나님께서는 나를 어떻게 사랑하실까?
만일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심이 내가 다른 이를 사랑할 때 상대방을 판단하고 사랑할만 하면 사랑으로 대하듯이 하신다면 결코 나를 사랑하실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내 안에는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실 선함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나의 모습 그대로를 바라보시며 참고 또 참으시며 사랑하신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상대방을 상대방의 입장에서 이해하고 서로 용납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은 참고 참는 인내심이 있어야 한다.
상대방을 나의 기준으로 이해하다보면 결코 상대방을 사랑할 수 없게 된다.
다른 이들을 나의 기준으로 판단하지 말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그를 바라보며 그의 잘못됨을 참고 참으면서 사랑해야 한다.
그럴때 비로서 나는 나와 관계가 있는 이들의 잘못을 용납하며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상대방을 온전하게 용납하기 위해서는 단시간에 이루어 지지 않는다.
사랑의 마음을 갖고 참고 또 참으며 인내할 때 비로서 서로 용납을 하게 된다.
그렇지 않고 사랑의 마음도 없고 오래 참을수도 없다면 결코 서로 용납할 수 없게 된다


구원의 완성
(3:26)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62:1)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
(37:7) 여호와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21:19)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
(8: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찌니라.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다.
나의 어떤 선행으로도 우리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
단지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주안에서 선함을 하며 잠잠히 참고 기다리며 여호와의 구원이 나에게 임하기를 바라보아야 한다.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선택이시며 주권이시다.
잠잠히 참고 기다리며 여호와의 은혜와 자비가 나에게 부어지기를 바라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인내는 어떻게 얻어지는가?
인내은 믿음의 시련을 통하여 얻어진다.

나의 믿음을 시험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
그것은 바로인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환난의 위기 가운데서 참고 견디는 인내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믿음을 성장시킨다.
믿음에서 필요한 것이 인내이다.

인내는 그리스도의 자녀인 우리에게는 반드시 필요하며, 인내는 믿음의 시련을 통하여 얻어진다.
(10:36)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1:3-4)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5:3-4)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인내는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고 세상에 요동하지 않고 굳건히 기다릴 수 있게 한다.
그렇지 않고 인내가 없다면 하나님의 약속이 있음을 어렴풋이 알긴 알지만, 세상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되기 때문에  기다릴 수 없어 세상의 관습을 쫓아 가게 된다

모든 것이 잘 될 때에는 나의 믿음 또한 잘 자라는 듯하다. 그래서 착각을 하게 된다.
이만하면 나는 그래도 괜찮은 믿음을 갖고 있다고 착각을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풍요롭다면 결코 나의 믿음이 어디에 있는 지를 잘 알 수 없다.
믿음은 삶의 위기가 올 때 드러나게 된다.

예상하지 못한 인생의 어려움과 걸림돌에 걸리게 되면 확고하게 갖고 있었다고 믿었던 믿음은 흔들리게 된다.
폭풍우가 몰아치고 심한 비바람이 불어 나무가 꺾이며 집이 흔들거릴 때, 나의 믿음 역시 흔들린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기다리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외부의 상황적 요소들을 보면 도무지 기다릴 수 없다고 생각이 든다. 그래서 잠잠히 기다리지를 못하고 어려움을 헤쳐 나가기 위해 온갖 세상의 수단을 간구하며, 세상의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한다. 세상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버리게 되어 하나님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된다. 그 결과 내가 갖고 있다고 믿은 믿음은 산산조각이 나서 공중에 흩어지고야 만다.     

인내는 우리의 믿음생활에서 반드시 가져야 하는 속성이다.
인내없이 우리의 믿음은 성장할 수 없다.

사울은 믿음의 시련이 왔을 때 하나님 안에서 잠잠히 참고 인내하기 보다는 자신의 생각대로 해결하려고 하였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내가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참아내는 인내를 보시기를 바라신다





말씀을 정리하면

사울은 삶의 위기가 왔을때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지 못해 더 이상 인내하지 못하고 세상사람들을 의식하여 세상의 방법대로 행함으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왕권을 하나님의 뜻에 맞는 다윗에게로 옮기셨다.
이후에 사울의 삶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멀어진 삶을 살게 되었다.

인내한 아브라함이나 노아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존귀한 도구로 사용되었지만, 인내하지 못한 에서나 사울은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멀어져서 세상에 속한 자가 결국은 멸망당할 수 밖에 없었다.

인내는 하나님의 속성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인내하셨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내하심으로 십자가에서 구원을 온전히 이루셨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는 인내의 열매를 맺게 하신다.

또한 말씀이 내안에서 결실하기 위해서는 참고 기다리는 인내가 있어야한다.
서로 용납하기 위해서는 오래 참는 사랑이 있어야 한다.
구원을 온전하게 이루기 위해서는 잠잠히 여호와의 은혜를 기다려야 한다.

인내는 그저 나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인내는 믿음의 시련을 통하여 얻어진다.
인내는 우리의 믿음의 성장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
인내는 내가 갖고 있는 믿음이 어디에 서 있는지를 알게 한다.
인내는 우리가 하나님에게 점점 가까이 가게 한다.

우리의 삶에서 반드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위기의 순간들.
때로는 넘어야 할 위기가 너무나 가파르고 높아서 어떻게 넘어야 하는지를 몰라 상심하고 있을때 나의 마음속에서 잠잠히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
너는 잠잠히 내가 너에게 행하는 일들을 보라. 나의 사랑하는 자야, 잠잠히 참고 기다리라.
하지만 마음속에서 어렴풋이 들은 이 말씀을 의지하고 믿고 참고 또 참으며 기다리기 보다는 세상의 눈으로 보아 판단하고 세상의 방법으로 참지 못하고 성급하게 해결하려고 한다.
잘 참고 기다리며 인내를 배우자.
시험을 잘 통과한 인내는 내가 하나님께로 나아갈때 그 길을 잘 인도해 줄것이다.
인내는 나의 믿음을 자라게 하며, 하나님께서는 많은 상급으로 나에게 보상해 주실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하심으로 왕이 된 사울.
그가 처음부터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있었던 것은 아니었읍니다.
사울은 왕이 되어 자신을 왕으로 선택하신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나라를 만들기를 원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려움이 닥쳐오자 사람들은 왕인 자신의 leadership을 의심하고 사울로부터 떠났으며
사방에는 막강한 적의 위협앞에 있어서 자신을 지키기도 급급하게 되었읍니다.
그러한 환경속에서 사울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참고 인내하며 기다리기 보다는
사람들을 의지하려고 하였읍니다.
모든 것이 자신을 조여오는 임박한 상황에서 사무엘이 약속한 7일이 지나도 오지 않자
이렇게 무작정 기다리다가는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것을 잃을수도 있겠구나 염려한 사울은
그만 자신의 방법대로 이를 해결하려고 하였읍니다.

저 역시 어려운 상황이 닥쳐 왔을때 잠잠하게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기다리기 보다는
세상의 도움을 바라며 세상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 하였읍니다.
많은 잘못됨의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하나님의 섭리하심이 역사하시기까지 참고 기다려야하는 인내가 필요함을 조금씩 알게 되었읍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은 시련을 겪으면서 얻는 인내를 통하여 점점 자라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믿으며 참고 인내하여
구원을 온전하게 이루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