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11:1-9)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거늘 선지자들이
그들을 부를수록 그들은 점점 멀리하고 바알들에게
제사하며 아로새긴 우상 앞에서 분향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에브라임에게 걸음을 가르치고 내 팔로 안았음에도
내가 그들을 고치는 줄을 그들은 알지 못하였도다.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그들을
이끌었고 그들에게 대하여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 같이 되었으며 그들 앞에 먹을 것을 두었노라. 그들은
애굽 땅으로 되돌아 가지 못하겠거늘 내게 돌아 오기를 싫어하니 앗수루 사람이 그 임금이 될 것이라…
내 백성이 끝끝내 내게서 물러가나니 비록 그들을 불러 위에 계신 이에게로 돌아오라 할지라도 일어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나의 맹령한 분노를 나타내지 아니하며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님이라. 네 가운데 있는 거룩한 이니 진노함으로 네게 임하지 아니하리라.호세야서는 특별한 말씀인듯하다.
호세야는 여호와의 말씀하신대로 음란한 여인을 아내로 맞이 하였고 세 아이를 낳았는데 첫째 아이의 이름을 이스르엘 (폐하다), 둘째는 로루하마 (용서하지 않다), 그리고 세째는 로암미 (내 백성이 아니다)로 이름을 주신다. 그리고 그 후에 아내는 집을 나가 다시 음란한 삶을 살지만 호세야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값을 치루고 아내를 다시 집으로 데리고 온다.
호세야서를 통해서 끝없이 음란한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의 모습을 본다.
음녀와 같은 이스라엘은 계속해서 거듭된 죄악을 범하지만 차마 내쳐 버릴 수 없으신
하나님의 아프신 사랑이 호세야서 전반에 걸쳐서 나온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런 음녀와 같은 나의 신랑이 되시겠다 약속을 하신다.
(2:19)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흏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아버지의 구구절절한 사랑의 고백이다.
나를 너무나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사랑앞에 나는 가슴이 먹먹하다.
(3) 내가 에브라임에게 걸음을 가르치고 내 팔로 안았음에도
I taught Ephraim also to
go, taking them by their armsI took Israel by the arm and taught them to walk
(신1:31)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 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내 아이들이 어렸을 때 걸음마를 가르친다고 두 팔을 붙잡고 아이가 걷는 것을
돌보았던 것을 생각해보면 지금도 웃음이 나오며 그 시절이 그립다. 아버지가 아이에게 한없이 줄 수 있는
사랑이다. 그저 아이가 귀엽고 사랑스러워 두 손을 꼭쥐고 행여 넘어질 까 뒤에서 또는 앞에서 보살펴
주었다. 어느정도 걸음이 익숙해
지면 두 팔을 꼭 잡는 대신 살며시 쥐고는 뒤뚱거리다 넘어지려 할 때는 꼭 잡아 넘어지지 않도록 하지 않았던가. 아이를 두 팔로 품안에 꼭 안을때 아이의 따스한 체온을 느끼며 두 빰에
뽀뽀를 하기도 하고 눈을 마주치며 두 손으로 아이를 높이 올리며 아이가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며 아이와 교류하며 사랑을 주었다.
4절은 ‘그들 앞에 먹을
것을 두었노라’로 번역을 했지만, NIV는 ‘I bent down to feed them’이라
번역을 했다. 부모가 어린 자녀에게
음식을 먹이려고 무릎을 굻어 앉아 주는 모습이다. 나 역시 아이에게 무엇을 먹이려면 허리를 숙이고 숟가락으로
입에 넣어 주지 않았던가. 어린
아이를 볼 때 서서 보는 것이 아니라 무릎을 꿇고서 그 아이와 눈높이를 같이 해 보자. 그러면 서서 내가 보았던 것과는 사뭇 다른 그 아이가 보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는
나와 눈높이를 맞추신다.
하나님 아버지는 나와 눈높이를 맞추신다. 아버지는 나와 눈높이를 같이 하시며 하나님의 자리에서 나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있는 그 곳에서 내가 보는 것을 보시며 이해하신다.
하나님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시는 것이 마치 어린아이가 걸음마를 배울때 손을 잡아
주며, 몸을 숙여서 눈을 맞추고 숟가락으로 먹여주는 부모와도 같은 사랑을 주신다. 여호와의 사랑과 보살핌은 우리를 상하게 하지 않으신다.
(신32:10)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같이 지키셨도다. 마치 독수리가 자기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자기의 새끼위에
너풀거리며 그의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의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같이 여호와께서 홀로 그를 인도하셨고 그와 함께 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
여호와를 만난 자는 인생 광야 길을 가는 동안 여호와께서는 독수리가 자기 새끼를
훈련시키려고 떨어 뜨린 새끼를 날개로 살포시 받으시며 또한 그를 온갖 사나운 짐승들로부터 지키시고 마치 눈동자처럼 지키신다.
여호와를 만났는가?
여호와를 만난 자에게 약속하신 눈동자처럼 지키시는 여호와의 축복이 임하기를 간구를
한다. 오직 여호와 만을 믿고 의지하며 그분의 사랑안에 기대자. 결코 나를 붙드시고 실망시키지 않는 여호와의 사랑의 은혜안에 거하자. 여호와를 만났는가?
(3) 내가 그들을 고치는 줄을 그들은 알지 못하였도다
but they knew not that I healed
them.
여호와는 나의 상처를 싸매시며 치료하시며 낫게 하신다.
(출15:26) 나는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렘30:17)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들이 쫓겨난
자라 하며 찿는 자가 없는 시온이라 한즉 내가 너를 치료하여 네 상처를 낫게 하리라.
제가 아팠을때 하나님께서 주셨던 말씀이다.
(사57:18) 내가 그의 길을 보았은즉 그를 고쳐 줄 것이라.
그를 인도하며 그와 그를 슬퍼하는 자들에게 위로를 다시 얻게 하리라.여호와께서 나를 고쳐 줄 것이고 나로 인해서 슬퍼하는 자들에게 위로를 주실 것이라고 약속의 말씀을 주셨다.
육신의 아픔만을 치료하시겠다고 말씀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영적인 아품도 치유하시는 하나님.
몸이 아플때 하나님께 낫게 해 달라고 간구를 한다. 또 나의 마음이 아플때 공허를 느낄때 여호와를 찿는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나의 영과 육이 아프다고 울면서 간구를 할 때 들으시고 응답해 주신다. 응답을 받았을때는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며 영광을 올려 드린다.
(사1:2)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그런데 그 날이 오래 가지를 못한다.
여호와께서 나의 상처를 싸매시고 치료하셨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나를 양육하시는
여호와의 손길을 잊어 버리고 거역한다. 얼마못가
하나님의 긍휼의 사랑을 잊어 버리고 다시 세상의 방식대로 세상의 소욕대로 세상의 기준으로 판단하고 절제를 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사랑을 잊어 버린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분명 마음에 어떤
감동을 주시는데 순종하지를 않는다. 왜냐하면 나의 자아가 나의 소욕이 우선이기 때문이다.(8)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불붙듯 하도다.
아드마와 스보임은 소돔과 고모라 근처에 있던 성읍이며 소돔과 고모라와 함께 멸망당했다 (신29:23).
아버지의 자식을 포기할 수 없는 사랑의 고백이다.
5-7절을 보면 어찌할 수 없이 패역한 우리에 대하여 말씀한다.
넘어질까 손으로 안으시며 허리를 굽히고 눈을 맞추며 먹을 것을 주시며 사랑을
베푸시지만 자녀들은 그런 아버지의 사랑을 버리고 세상에 머물기를 원한다. 세상의 소욕대로 욕망대로 자신을
내 맡기고 그 가운데서 위로를 얻으려고 애지중지하며 집착하던 성읍이 깨지는 아픔을 겪으며 좌절한다. 그런데도
아버지 앞으로 나아갈 마음이 없는 패역한 자식들이지만 그래도 내칠수 없으신 아버지의 사랑.
누가복음을 보면 탕자를 포기하실 수 없으셨던 아버지의 사랑의 이야기가 있다.
자신의 집을 떠나 세상으로 떠난 탕자가 마음을 돌이키고 이제나 올까하여 성문쪽을
바라보는 아버지. 결국 온갖 고생을 하다가 돼지가 먹는 열매를 먹으면서 비로서 아버지의 사랑이 있는 곳으로 가야겠다는 영적인 각성을 한다. 다시 돌아간 아들은 더 이상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탕자가 아닌 아버지의 아들로서의 지위를 회복한다. 세상은 그런 아들을 보면서 탕자라고 불렀지만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이 탕자라고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아버지의 눈에는 말을 잘 듣지는 않았지만 사랑하는 아들일 뿐이다. 그래서 그토록 기다리던 아들이 다시 집으로 돌아 왔을때 아버지는 좋은 옷을 입히고 좋은 음식을 먹이며 기뻐하였던 것이다.
나 역시 내가 보기에도 탕자와 같은 모습이 아니었던가.
그렇지만 내가 벗나가고 죄악의 길을 갔었을지언정 여호와 하나님의 눈에는 나는
사랑스런운 자녀인 것이다. 그래서 때로는 채찍으로 징벌을 하시지만, 자신의 피로 사신 사랑하는 자녀인 나를 결코 버리시지 않으셨다.
나는 마땅히 멸망을 당할 수 밖에 없지만 여호와께서는 나를 택하사 나를 끝까지 보호하시고 인도하실 것을 믿는다.
(9) 내가 나의 맹령한 분노를 나타내지 아니하며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님이라. 네 가운데 있는 거룩한 이니 진노함으로 네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을 보면서 용서에 대하여 생각할 수 있었다.
우리가 잘 알듯이 여호와는 사랑의 하나님이시며,
참고 참으시는 인내의 하나님이시며, 모든 죄악을 잊으시는 용서의 하나님이시다. 그렇지만 결코 간과해서는 않되는 것이
하나님은 진노하시는 여호와이시다. 한번 진노하시면 그 어떤 것도 그 진노하심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여호와는 공의로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잊지 말아야 한다. (렘15:6-7)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나를 버렸고 내게서 물러갔으므로 네게로 내 손을 펴서 너를 멸하였노니 이는 내가 뜻을 돌이키기에 지쳤음이로다. 내가 그들을 그 땅의 여러 성문에서 키로 까불러 그 자식을 끊어서 내 백성을 멸하였나니 이는 그들이 자기들의 길에서 돌이키지 아니하였음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가 내게 임하지 않게 하려면 내가 해야 하는 것은 나의 죄악을 깨닫고 여호와께 용서를 간구해야 한다. 혹 하나님의 긍휼하심의 은혜로 용서를 받는다면 나는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의 심판을 받지 않을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내가 주님의 길에서 벗어나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여러 광야의 곤고함을
통하여 나의 죄악된 것을 깨닫고 돌아오도록 하심을 우리의 인생을 통하여 경험할 수 있지 않았던가. 하지만 돌이키지 않고 끊임없이 여호와를 떠나 죄악된 길을 간다면 여호와의
맹렬한 무서운 진노가 임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이심이 얼마나 내게는 감사하며 축복인가.
만일 하나님께서 사람이셨다면 나는 벌써 이전에 내침을 받았을 것이다.
우리는 나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를 잘하지를 못한다.
용서한다고 말했는데 그런데 왜 다시 생각나며 치를 떠는가?그것을 용서라고 할수 있는가?
나는 온전하게 용서를 할 수 없기에 나를 무조건적으로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온전하게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참으로 죄인인 나를 위하여 육신의 몸을 입고 오시고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영원토록 사랑가운데서 살리시려고 십자가에서 자신의 목숨을 내려 놓으신 예수님을 온전하게 이해할 수 없으며 온전하게 사랑을 줄 수도 없다.
용서의 이야기로 잘 알려진 만달란트 탕감받은 자의 이야기가 있다.
만달란트라면 어마어마한 돈인데 평생을 아무리 열심히 해도 도저히 갚은 길이 없는
채무액을 모두 면제받아 탕감받았는데 그는 자신에게 아주 조그마하게 빚진 자를 도무지 용서할 수 없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 아닌가.
누구보다 많은 숨겨진 죄악을 갖고 있는데도 여호와께서는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다. 그런데 나는 내게 조그만 죄를 저지를 자를 결코 용서할 수 없어 두고두고 곱씹으며 말로는 용서를 한다고 했지만
도저히 내 마음속으로는 용서를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나에게 잘못을 저지른 누구를 온전하게 용서를 해 준적이 없기 때문이다. 도저히 내 마음속으로 그를 용서할 수 없고 용서라는 단어조차 용납이 않되지만
여호와께서는 그런 나를 보시면서도 나와 그 사람 역시 용서를 하신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용서는 그 전에 지었던 모든 죄악을 잊어 버리는 것이다.
(렘31:34)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미7:18-19)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과 그 기업에 남은 자의 허물을 사유하시며 인애를 기뻐하시므로 진노를 오래 품지 아니하시나이다. 다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히10:16-17) 주께서 이르시되 그날 후로는 그들과 맺을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그들의 마음에 두고 그들의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또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용서란 깨끗하게 잊는 것이다.
그러기에 여호와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는가.(사1: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희게되리라.
지금 이 순간이 여호와께로 돌아와 여호와를 찿을 때라고 말씀하신다..
용서를 구하는 자는 악한 길과 불의한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의 긍휼을 바라보아야
한다.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오늘 지금 이때가
곧 여호와께 돌아갈 시점이다. 내일이 내게 없을수도 있기 때문이다. 강물이 흘러가면 다시 그 물이 그 곳에 있을 수 없듯이 오늘 지금 내게 주어진 시간은 다시는 내게로 돌아 오지 않는다.
하나님 아버지
나를 너무도 사랑하시는 여호와의 사랑앞에 저는 어찌할
수가 없읍니다.
저는 제 자신을 너무나 잘 압니다.
얼마나 패역하며 얼마나 죄의 생각을 갖고 있는 지를
저는 잘 압니다.
너무나 많은 죄악을 저지르고도 모른척하며 결국은
등을 돌리고야 마는 패역함이 제게는 있읍니다.
그런 저를 보시고도 너무나 사랑하시는 자녀이기에
차마 내치시지 않으시고 다시 품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여호와께서는 저를 팔로 안으시고 몸을 숙여서 저와
눈높이를 맞추시고 저의 사정을 보시며 저를 품어주셨읍니다. 제가 약해 있을 때에 병이 들었을 때에 제가
어려운 곤고함 가운데 있을 때에 저를 기억하시고 저의 모든 약함을 회복시키시고 인도하셨읍니다. 하지만
저는 얼마못가 저에게 베푸신 여호와의 은혜를 잊어 버리고 다시 세상의 소욕이 주는 패역함을 즐기는 죄악을 범하였읍니다.
그런데도 저를 진노로서 내치지 않으시고 저를 사랑스러운 신부로서 다시 사신 신랑이신 주님의 사랑에 감사를 드립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용서의 은혜에 대하여 숙고할 수
있으니 감사합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저에게 잘못하는 자들은 저의 주변에
많이 있읍니다.
용서란 저의 인생에서 겪어야할 시험과도 같다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용서의 시험을 잘 거치면 저의 여호와에 대한 믿음
또한 자라날 것으로 기대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저는 저에게 잘못한 이들을 온전하게
용서할 수가 없읍니다.
분명 머리로는 잊어 버리는 것이 용서인줄 알겠는데
도저히 저의 육신의 생각은 저에게 잘못한 것들이
기억이 나서 계속해서 정죄하는 죄를 범합니다.
여호와께서 저에게 행하신 용서란 저의 모든 죄악을
용서하시고 잊으시는 것이었읍니다.
진홍과 같은 죄를 양털이라 하시며 기억도 않으시는
하나님의 용서를 배우기를 원합니다.
저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고 또한 내 마음으로부터도
용서하여 저에게 행한 모든 잘못함을 저의 생각으로부터 잊고 기억도 나지 않게 되기를 원합니다. 여호와와께서는 저를 용서하셨고 또한 그 사람도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저를 눈동자처럼 지키시며 제가 황무한 광야길을 가는
동안 줄곧 저와 함께 하시며 사랑의 은혜를 베푸시는 축복을 주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저를 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열정과 자비와 사랑으로 저를 살리신 하나님께 오늘도 저는 영광을 드립니다.
저를 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열정과 자비와 사랑으로 저를 살리신 하나님께 오늘도 저는 영광을 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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