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일5:10-16)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대하여 증언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새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14)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16)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리하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그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하였는데 그렇다면 ‘영생’이란 무엇인가?
‘영생’이 있음을 나는 믿는가!?
우리 인간은 모두 언젠가는 반드시 죽는다.
어떤 모습으로 마지막 숨을 쉴지는 예상하지 못하지만 반드시 죽는다.
아무리 살려고 발버둥을 치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죽음을 막아 보려지만 비켜갈 수 없다.
기독교적인 의미에서 영생 곧 구원이란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속죄로 인한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현세와 그리고 다가올 내세를 포함한 영원한 생명을 의미한다고 본다.
A. 영생의 확신을 가진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11)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영생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며 영생은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증거가 있다.곧 예수 그리스도의 영인 생명이 있는 것이다.
주님은 요5:24에서 이런 말씀을 하신다.
(요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또한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믿는 자는 영생을 이미 얻었다고 주님은 거듭해서 말씀하신다. 내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현재의 사건이지만 영생을 얻은 것은 과거의 사건이다. 즉 예수님을 믿음으로 내게 영생이 주어 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며 다 이루셨을때 이미 주어진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를 드리신다.
(요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주님은 이 말씀을 통해서 영생을 얻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 지를 말씀하신다.
영생을 얻기 위해서 무엇을 알아야 함을 말하는가?첫째, 하나님께서 유일하신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한다.
둘째,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어야 한다.
이 말씀이 내 마음에서 의심없이 믿어지는가?
영생은 곧 하나님과 예수님을 아는 것이다.
‘안다’는 지식적으로 아는 것과 체험적으로 아는 것을 의미한다.
지식적으로 아는 것을 의미한다면 열심히 성경을 읽고 공부하고 연구하면 될 것이다. 하지만 체험적인 경험이 없다면 지식에만 머물러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과 예수님을 알려면 늘 말씀에 머무르며 말씀안에 계신 하나님과 예수님을 만나고 또한 삶 가운데서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체험할 때 하나님과 예수님을 지식적으로 경험적으로 알아가게 될 것이다. 즉 영생의 본질은 예수님과의 전인격적인 교제를 통하여 예수님과 하나님을 알아가며 그 안에서 누리는 영원한 축복이다.
믿음의 선진 중에서 대표적인 분인 다윗을 보자.
다윗은 어려서부터 여호와를 의지하였으며 여러 위험 가운데서도 여호와의 도우심을 체험하며 여호와를 알아갔다. 그래서 다윗은 여러 시편에서 자신이 겪어서 아는 여호와를 찬양한다. 특히 시18에서 다윗은 자신이 아는 하나님에 대하여 말한다. 시18편에는 다윗이 얼마나 여호와를 의지하엿으며 또한 하나님에 대하여 알려고 하였는지를 잘 말해주고 있다.
(시18:1)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시18:10) 그룹을 타고 다니심이여 바람 날개를 타고 높이 솟아오르셨도다.
(시18:31) 여호와 외에 누가 하나님이며 우리 하나님외에 누가 반석이냐.
우리도 다윗과 같이 내가 아는 하나님에 대하여 또한 주님에 대하여 내 자신만의 언어로 말할 수 있을까?
하나님께서 온 천하를 창조하신 유일하신 하나님 이심이 잘 믿어지지 않으며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동정녀를 통하여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음도 잘 믿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나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죄를 속죄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음은 더욱 더 믿겨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속에는 어둠의 죄성이 남겨져 있어서 거룩한 하나님을 부인하도록 인도를 하기 때문이다.
불신이 가득한 우리에게 주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는 방법을 제시하신다.
(요14:7)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주님을 알아야 한다. 주님을 아는 것이 곧 유일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도무지 인간의 지식과 상식과 경험으로는 믿을 수 없지만,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이 믿어지는 것이 은혜이다
또한 주님은 우리에게 자신의 이름의 능력과 권세를 주셨다.
예수님의 이름에는 놀라운 능력이 있다.
(요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롬10: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우리는 영생을 받았다.
B. 영생의 확신을 가진 자는 담대하게 하나님께 간구한다.
(14)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믿음생활의 근본은 ‘영생의 확신이 있는가’ 라고 생각한다.
영생의 확신이 있다면 담대할 것이다. 이 땅에서 만나는 여러 어려움과 환난 가운데서도 꿋꿋하게 주님을 믿고 의지하는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며 주님의 섭리하심으로 결국은 주님의 땅으로 인도하실 것임을 믿기 때문이다.
영생의 확신을 가진 자의 대표적인 자인 스데반의 담대함을 보자.
그는 주님을 증거하다가 신성모독이라 주장하는 자들이 던진 돌에 맞아 죽어 가면서 담대하게 자신의 영혼을 주님께 부탁드리며 자신을 돌로 친 자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간구하며 죽었다.
(행7:59)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어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베드로의 모습은 어떠한가.
예수님의 형제인 사도 야고보가 순교한다. 그리고 베드로는 옥에 갖히게 된다. 자신 역시 날이 밝으면 순교할 것을 아는 베드로는 그런 가운데서도 깊은 잠을 잔다. 깊이 잠든 베드로를 깨우기 위해서 천사는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서 깨웠다. 죽음의 공포를 이겨낸 담대한 모습이다.
(행12:1-2) 그 때에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에서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행12:5-6)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 헤롯이 잡아 내려고 하는 그 전날 밤에 베드로가 두 군인 틈에서 두 쇠사슬에 매여 누워 자는데 파수꾼들이 문 밖에서 옷을 지키더니 홀연히 주의 사자가 나타나매 옥중에 광채가 빛나며 또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이르되 급히 일어나라
영생의 확신이 있는 자는 담대하게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
죽음은 모든 인생이 언젠가는 반드시 거쳐할 하나의 관문일 뿐이며 그 너머에는 영생이 기다리고 있음을 믿기에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 그저 담담하게 죽음을 맞이 할 뿐이다.
또한 영생의 확신이 있는자는 담대하게 주님의 뜻을 하나님께 간구한다.
우리의 삶이란 고통과 좌절과 실망의 연속이다. 아무리 열심히 믿음 생활을 해도 내 안에 영생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불안하고 초조하고 때론 근심 가운데 살 수 밖에 없다.
과연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는가?
나는 주님을 아는가?
내가 이런 저런 죄를 짓는데 나는 과연 천국에 갈 수 있을까?
나의 마음은 왜 이리도 불안하며 평안하지가 않는가.
누가 나에게 조금만 잘못을 해도 눈에 불을 키고 달려든다.
모든 것을 다른 이의 탓으로 돌리며 불평한다. 다른 이들에게 나의 억울함과 사정을 알아 달라고 호소한다. 심리학자나 상담가들은 상대방이 말하는 사정을 잘 들으라고 한다. 그런데 근본적인 문제는 내 마음속에 참된 평강과 감사함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내 마음에 영생에 대한 확신이 있다면 담대하게 주님의 뜻대로 하나님께 간구한다.
주님의 뜻대로 간구를 하였기에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응답해 주신다.
주님께서 내 안에 충만히 계시기에 현재에 닥친 절망과 곤고함이나 환난에 결코 연연해 하지 않고 오히려 의연하게 주님의 자녀로서 대처할 것이며, 담대하게 하나님께 나의 처지를 아뢰며 인도해 달라고 간구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죽어도, 내일 죽어도 내가 갈 곳이 어디인지를 알며 확신하기에 조금 일찍 주님 앞에 간다 한들 아쉽지가 않을 것이다. 단지 지난 날이 후회스럽고 아직 내게 맡겨진 일들을 온전하게 해내지 못했다는 자책감은 들겠지만, 그래도 주님을 의지하기에 이내 마음에는 평강과 나를 지금까지 살펴주신 주님의 섭리함에 감사하며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담대하게 하나님께 간구할 것이다.
지금도 나는 주님의 임재를 그리워한다.
내 삶이 얼마나 남았을까 떄로는 생각을 하지만 그렇다고 전전긍긍해 하지 말자.
또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미리 근심하지 말자.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는가.
(마6;34) 그런즉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오늘 한 날의 근심과 괴로움은 한 날로 족하다고 말씀하지 않는가.
오늘 하루의 은혜로 족하다.
내일은 또 다른 오늘이지 않겠는가.
내일이 나의 삶의 종말일지라도 두려워하지 말자.
육신의 종말은 나만 겪어야 하는 것이 아닌 모든 이들이 반드시 겪어야 하는 관문이며 또 다른 세계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이 세상과는 다른 그 곳에 가면 어떤 일이 있을까 기대가 되지 않는가! 지금까지 우리의 육신이 겪었던 이 땅의 삶과는 전혀 다른 은혜의 세상이 기다린다. 그곳에 가면 나는 무슨 일을 할까?
나는 가끔가다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우주는 너무나 크며 수를 셀 수 없는 은하수들이 있으며 각각의 은하수에는 셀 수 없는 수많은 각각의 별들이 있다. 하나님께서 허락을 하신다면 나는 천국에서 우주를 탐구하는 존재가 되고 싶다고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생각만해도 기대가 된다.
주님의 은혜에 감사할 뿐이다.
영생의 확신을 주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담대하게 나를 통하여 주님의 뜻이 이루어 지기를 하나님께 간구한다.
C. 영생의 확신을 가진 자는 이웃의 영생을 간구한다.
(16)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주님은 우리에게 큰 계명을 주셨다.
(마22:37-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제 자신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막12:30-31)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그렇다면 나의 이웃은 누구인가?
어떤 이가 예수님께 이렇게 물어본다.
(눅10:29)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서 여짜외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이렇게 물어보자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들으신다. 강도 만나 가진 것을 빼앗기고 맞아서 거의 죽게 된 자를 제사장, 레위인 그리고 사마리안인이 만나는데 유대인이며 종교 지도자인 제사장과 레위인은 못본 체하고 피하여 지나가지만 이방인인 사마리아인은 그를 불쌍히 여겨 상처를 치료하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며 떠날 때 주막 주인에게 돈을 주며 잘 보살펴 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이렇게 물으신다.
(눅10:36-37)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나 자의 이웃이 되겠는냐.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같이 하라 하시니라.
바로 나와 가까이 있는 사람만이 내 이웃이 아니라, 생판 모르는 가난하고 초라한 자들도 나의 이웃이며 이들을 못본 체하며 지나지 말고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
영생의 확신이 있는 자는 가까이 있는 이웃 뿐 아니라 스쳐 지나가는 불쌍한 자들에게도 자비를 베푼다. 왜냐하면 그의 마음에는 주님의 영이 거하시기에 긍휼과 자비와 사랑의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세계를 품고 열방을 품고 모든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나오다가 만난 불쌍한 자들을 불쾌하다고 머리를 돌리고 못본 척 하고 지나가지 말자. 그런 행위가 제사장이나 레위인과 다른 것이 무엇인가. 그것보다는 오늘 내가 스쳐 지나가며 만난 알지 못하는 불쌍한 이들에게 자비를 베풀며 그의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주님께 간구해 보자. 그것이 더욱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며 또한 영생에 가까운 길이지 않겠는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또한 주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 이미 영생을 주셨다.
영생의 확신을 갖고 더욱 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 가며,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이 땅에서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담대하게 주님의 뜻을 간구하며, 나와 가까운 나의 이웃 뿐만 아니라 스쳐 지나가는 불쌍한 자들의 영생을 위하여 간구하는 인생의 축복과 그리고 하나님께거 계신 천국에서 주님과 함께 하는 영생의 축복을 받기를 간구한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영생이란 곧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아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유일하신 하나님을 알아 가기를 원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깊이 알기를 원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주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영생의 구원을 약속하셨읍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에 대하여 성경에 자세하게 일러 주셨읍니다.
말씀 안에 계신 주님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아 가기를 원합니다.
시편에 기록된 다윗의 고백과 같이 저 역시 제가 아는 하나님에 대하여 저 만의 찬양을 드리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을 알아가는 것이 인생에서 가장 축복된 삶임을 깨닫습니다.
우리에게 영생의 확신이 있다면 우리는 더욱 더 담대하게 이 땅을 살아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생의 확신이 있는 자는 이 땅에서의 삶 보다는 주님께서 함께 하시는 영원한 삶의 세계를 더욱 그리워 할 것이기 때문이기에 이 땅에서 미련을 갖지 않을 것입니다.
온갖 혼잡함과 더러움과 엮겨운 냄새가 진동하는 곳에서 저희는 살고 있읍니다.
그 가운데서 주님의 거룩한 향기를 내뿜으며 주위를 정화시키기를 원합니다.
이 세상에 너무 연연해 하지않도록 저희를 인도하심에 감사드립니다.
이제 얼마 후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있는 곳에
저 역시 믿음이 선진들과 함께 할 것이라는 사실에 가슴은 벅찹니다.
영생의 확신이 있는 자는 나의 이웃을 돌아보게 됩니다.
저 멀리 있는 자들이 아니라 바로 제가 오늘 스치며 만나는 저의 이웃들에게 주님의 자비를 베풀며 따뜻한 한 마디를 하며 그들에게 제가 갖고 있는 영생의 확신을 나누어 주는 도구로 저를 사용하옵소서.
저에게 영원한 기쁨과 찬양이 있는 곳에서의 영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저의 찬양을 받아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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