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일1:5-10)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사귐, 관계, Fellowship은 우리의 삶에 참 밀접하게 관련이 되어있다.
우리의 인생은 관계속에서 시작하고 관계에서 끝이 난다.
서로 모르는 사람끼리 만나 맺어지는 부부관계.
부모과 자녀와의 관계
형제 자매간의 관계
친구간의 관계
사람과의 관계
관계 속에서 태어나 관계 속에서 죽어 간다. 관계는 인간의 본질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흔히 인성이 먼저 되어야 한다고 한다.
올바른 인성을 갖고 있을 때 올바른 사람과의 관계가 형성이 될 것이지만 올바른 관계를 가지려면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 하며 그 과정에서 마음은 병이 든다. 아무리 노력해도 인간간의 관계는 완전하지 않고 언제 허물어질지 모른다. 왜냐하면 완전한 인성을 가진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성경은 완전한 사귐에 대하여 말씀한다. 곧 주님과의 사귐이다.
그래서 교회는 관계에 대하여 강조를 한다.
그래서 각 교회마다 각가지의 fellowship의 program을 한다,
부부와 자녀간의 fellowship.
교인과의 fellowship.
세상사람들과의 fellowship.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주님과의 fellowship.
어떤 이들은 주님과의 교제가 무엇인지를 경험해 보지 않아 그저 막막히 그런 것이 있는가 한다.
그래서 주님과 교제를 나누는 것이란 열심히 교회에 나오고 헌신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또 어떤 이들은 주님과 깊은 교제를 나눈다고 말한다. 그런데 실생활은 주님의 자녀로서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행동들을 한다. 본문에서 말하듯이 그는 하나님과 교제하고 있다고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어둠에 거하기에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참 성도로서 주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는 사람들은 자신을 잘 나타내지 않아 겉모습만 보고 그가 주님과 깊은 교제 가운데 있음을 알 수 없을 경우가 많다.
주님과의 사귐.
주님과의 교제.
주님과의 관계.
자신과 가족의 영혼 구원을 위해 교회에 다니는 참성도라면 누구나 주님과의 깊은 사귐을 나누기를 원할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는 가짜 신자, 거짓된 성도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믿음 생활을 하는 성도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주님과의 깊은 사귐 즉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주님과의 친밀한 사귐이란 무엇인가? 본문에서 잘 가르쳐 주신다.
A. 빛 가운데 거하라
주님과의 교제에 가장 필요한 것이 곧 빛에 거해야 한다고 말한다.
(5)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하나님은 빛이시다. 주님 또한 빛이시다.
주님은 빛이신데 그렇다면 사울과 같이 강렬한 빛으로 나타나신 주님을 보았는가?
저는 빛으로 오신 주님을 아직 눈으로 보지 못하였다.
하나님께서 빛이심이 이해가 가는가.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왜 그럴까! 빛에 대한 고정관념이 있어서 그럴 것이다.
저는 주님이 빛이심을 이렇게 이해한다.
빛의 개념을 더욱 확대해 보자.
물리시간에 빛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는 것을 배웠을 것이다. 빛은 파장이며 많은 빛의 파장들이 있다고 배우지 않았는가. Frequency 곧 파장은 반복적이며 일정한 진폭을 말한다.그리고 각 빛에는 고유의 파장이 있다. 빛 가운데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영역을 가시영역이라 한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가시영역의 빛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다양한 빛이 훨씬 더 많고 영역은 거의 무한대이다. 적외선, x선, Gamma선, 멀리 떨어진 우주에 있는 인공위성과의 통신을 가능케 하는 무척이나 빠른 파장을 갖고 있는 전파들 그리고 아직 발견되지 않은 영역의 파장들과 그리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하나님 고유의 빛의 파장.
사람들에게 비추는 생명의 빛은 곧 우리가 사랑하는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요한복음에서 주님을 생명의 빛이라고 소개를 한다.
(요1:4-5)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였더라.
빛에 거한다는 것은 곧 주님 안에 거함을 말한다.
내 생명 안에는 어둠 아니면 빛이 거한다.
그것을 믿는가!
내 안에 빛이 거함이 믿어지는가!
만일 믿어지지 않는다면 나의 신앙생활을 다시 점검해 보아야 한다.
나의 영생이 걸린 아마도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자녀이면 그 안에는 주님이신 생명의 빛이 거한다.
그 생명이 빛이 나타나는 곳이 있는 데 바로 나의 눈을 통하여 내 안에 계신 주님의 빛이 나타난다.
(마6:22-23) 눈은 마음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눅11:34)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
나의 눈은 내 몸의 등불이다. 그래서 내 속에 있는 것을 비춘다.
내 눈으로부터 생명의 빛이 나타나는가?
어떤 사람의 눈에서는 따뜻한 온화한 사랑의 느낌을 느낄 수 있지만,
어떤 사람의 눈에서는 독기가 서려 있음을 보며 왠지 모르게 섬뜩할 때가 있지 않는가.
사람들이 나의 눈으로부터 무엇을 느낄 수 있을까?
빛을 느낄까 아니면 어둠을 느낄까?
B. 빛 가운데 행하면
성경은 어떻게 하는 것이 주님과의 사귐을 갖게 하는 지를 가르치고 있다.
(6-7)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온 세상은 제각각의 파장으로 온통 뒤덥혀 있음을 알고 있는가.
내가 깨어 있거나 자고 있을 때에도 내 주위로 온통 빛의 파장으로 뒤덮혀 있음을 이해하는가.
각종의 파장으로 뒤덮혀 있는 곳에서 내가 원하는 Source와 연결되기 위해서는 동기화가 필요한 것이다.
빛으로 쓰이는 문명의 이기들을 예로 들어보자.
의료에 요긴하게 쓰이는 x-ray,
어두운 곳에서도 부딪히지 않고 길을 정확하게 아는 박쥐와 같이 항공운항을 가능하게 하는 Radar.
얼마전에 2006년에 발사된 New Horizon위성이 지금에야 명왕성을 통과하며 사진을 보냈다. 어떻게 약 50억Km 떨어진 곳으로부터 전송된 사진을 받아을 수 있을까?
반가운 사람들과 매일 소식을 전하는 Cellphone.
내가 있는 곳의 위치를 정확하게 아는 GPS.
모든 문명의 유익한 기기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파장 곧 빛을 사용한다.
이런 기기들과 연결되어 유용하게 쓰기 위해서는 동기화가 되어야 한다.
한 예로Drama를 집에서 볼 수 있게 하는 TV. 각 TV Station은 자신의 고유의 파장으로 방송의 내용을 출력한다. 그것을 각 TV 안에 있는 Decoder가 내가 원하는 program을 보내고 있는 방송국과 synchronize되도록 해 준다.
마찬가지로 빛이신 주님과의 사귐을 갖기 위해서는 주님과 동기화가 되어야 한다.
내가 주님과 연결되어 친밀한 교제를 나누기 위해서는 주님과의 channel에 맞출 수 있는 Synchronization (동기화)가 반드시 맞추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동기화가 맞지 않다면 원치않는 수신을 하게 되어 잡음으로 가득하게 될 것이다. 성경은 주님과의 사귐을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빛이신 주님과의 Channel에 동기화를 시켜야 하는지를 말씀한다.
본문 말씀에는 두가지 행함이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어둠 가운데서의 행함’ 또 다른 하나는 ‘빛 가운데서의 행함’.
주님과의 사귐을 갖기 위해 주님과 동기화 되기 위해서는 ‘빛 가운데서의 행함’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한다.
어둠에 속한 자들을 옛사람이라 부르며 세상에 속한 행실을 한다.
빛에 거하는 자들을 새사람, 의의 거룩한 옷을 입은 자라고 말하며 거룩한 행실을 한다.
1. 어둠에 행하면
(6)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어둠에 거하는 자들은 어떤 행동들을 하는가.
①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사단은 거짓의 아비이다.
그래서 거짓을 조심해야 한다.
만일 믿는 자가 거짓으로부터 자유로운 자가 있다면 그는 실로 천국이 가까운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또한 이어지는 요한 일서의 말씀을 통해서 보면
② 헹제를 미워한다
(요일2:9-11)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또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
눈이 멀었으니 나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빛이 보이겠는가?
눈이 멀었으니 나로부터 내 안에 계신 주님의 거룩한 빛이 발산이 되겠는가?
눈이 멀었으니 보이는 것은 캄캄한 어둠 뿐이다.
③ 세상의 것들을 사랑한다.
어둠에 거하는 자들은 옛사람의 속성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육신에 속한 자들이며 세상의 것들을 사랑 할 수 밖에 없다.
(요일2:15-16)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2. 빛 가운데 행하면
(7-8)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①.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빛에 거하는 자는 주님과의 사귐을 나누며 또한 성도간의 교제를 나누게 된다.
‘서로 사귐’은 일방적인 통행이 아니라 쌍방향을 의미한다.
주님과의 사귐은 일방적인 짝사랑의 사귐이 아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듯이 우리 또한 나의 사랑을 고백하며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
주님과의 사귐을 위해서 주님께서는 주님의 영이신 성령을 우리의 마음속에 보내 주셨다.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은 누구보다 하나님의 사정과 나의 사정을 잘 아시기에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해준다.
②.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십자가에서 쏟으신 주님의 거룩한 보혈이 나의 모든 죄를 깨끗히 씻겨 주신다.
그리고 주님과의 교제 가운데 있는 자는 죄의 문제를 해결 받았기에 천국을 소망하게 된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특히 사복음서는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님께서 바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시고 온갖 고통과 비난을 받으시며 끝내는 십작가에 달려 모든 피를 흘리시며 죽으셨다.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하신 것이다.
우리는 거듭해서 반복적인 죄를 짓지만 결국은 어느 순간 그 죄에서 자유롭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나의 마음속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무조건적인 용서가 있기 때문이다.
빛에 거하여 주님과 사귐을 갖기 위해서는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빛의 행실이 따라야 한다.
즉 행함이 반드시 있어야 함을 강조한다.
빛의 자녀로서 온전한 행실을 하는 자는 주님과의 온전한 사귐을 나누게 되며 주님의 거룩한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하게 씻겨준다. 그렇지 않고 주님과의 사귐을 갖기 원한다며 빛에 거하는 행동을 하지 않고 어둠의 행실을 한다면 그 사람은 거짓을 하는 것이며 진리 가운데 있지 못한다고 말한다.
C. 빛에 거하려면
빛에 거하는 자만이 주님과의 온전한 사귐을 나눌 수 있다.
그렇다면 주님과의 온전한 사귐에는 무엇이 필요한가? 죄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회개’를 한다는 것이다.
(8-9)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빛에 거하기를 원하는 심령은 죄에 대하여 민감하게 반응한다.
사도바울은 나는 곤고한 자라고 고백한다. 사람들이 주님안에 깊이 거하면 거할 수록 죄성에 대하여 민감하게 반응한다. 반대로 육신안에 거할 수록 죄성에 대하며 둔하게 반응한다. 왜냐하면 반복된 죄성이 내 몸에 습관적으로 굳어져 내 몸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이다.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어떤 결과가 초래되는가.
(10)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회개치 않는 영혼에는 말씀이 거하지 않는다.
말씀 곧 주님께서 그 안에 계시지 않는 다면 그 영혼은 결국 어디에 가게 되는가?
(요15: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온전한 회개를 하나님께서는 들으시고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며 모든 불의함으로부터 나를 정결하게 하신다. 우리는 회개를 하며 주의 보혈로 깨끗하게 씻어 달라며 용서를 구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간구한다.
이는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공의로우시며 심판주이시며 주권자인 주님을 인정하는 행위이다.
그런데 사람에게는 언제나 회개할 시간과 여유가 주어지지 않는다.
각 사람의 마지막은 어떤 모습으로 오게 되는 지를 모른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이 죽기전까지 먹고 마시며 떠들며 다투며 기쁨을 누리려고 한다. 그러다가 전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자신의 마지막을 맞는 이들도 부지기수이다. 평소에 자신의 죄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회개하며 용서를 구한 영혼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자신의 마지막을 맞이 하더라고 준비가 되었 있지만, 그렇지 않고 회개를 통한 죄사함이 없는 영혼은 밖에 버려져서 불에 타오를수 밖에 없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여
이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간의 사귐의 관계가 있읍니다.
부부의 관계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
교회에서 교인간의 관계
올바른 관계도 있지만 왜곡되어 나의 심령을 해치는 잘못된 관계도 있읍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주님과 사귐이 있다고 하면서
실은 잘못된 주님과의 사귐이 너무나 많이 있읍니다.
왜냐하면 저희들 마음속에는 거짓의 영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다니면서 수없이 들었던 주님과의 교제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보지도 않았고
또한 저의 마음속에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를 못했읍니다.
너무나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그것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귐이라고 착각을 많이도 했읍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와 올바른 사귐을 하시고자 하십니다.
빛이신 주님안에 거하며 주님과의 사귐을 갖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곧 죄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회개하며 용서를 구할 때
저는 빛이신 주님의 파장에 동기화가 되어
주님과의 사귐을 갖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죄는 저와 주님과의 사귐을 가로막는 거친 갈림돌입니다.
저에게 시간이 주어진 오늘이 바로 죄에 대하여 용서를 구할 때 입니다.
오늘은 또 주어지지 않습니다.
제게 허락된 시간이 늘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달아
늘 죄에 대하여 민감하게 반응하여 용서를 구하는 심령이 되도록
제 안에 계신 성령님 강팍한 저의 마음을 만져 주옵소서.
빛이신 주님과의 온전한 사귐을 갖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곧 저의 인생의 목표가 되게 하옵소서.
그리할때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제 안에 계신 주님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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