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은 특이한 복음서이다.
예수님의 생애를 함께 경험한 한 것에 대하여 기록한 성경말씀을 복음서라 한다. 복음서에는 모두 4복음서가 있는데 그중에 마태복음,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이 서로 내용이 비슷하다고 해서 공관복음이라 하고 요한복음은 특별한 복음서라 해서 제4복음서라 부른다.
저자는 사도요한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몇몇의 성경학자는 사도요한이 아니고 그의 제자일수도 있다고 제기한다. 요한복음뿐 아니라 대개의 성경의 저자는 확실하게 들어나지 않는다. 원저자인 성령께서 예수님을 조명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라 생각이 든다.
공관복음과 구별되는 요한복음의 특징으로는
1) 성령의 사역에 대하여 많이 설명한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아라.
유일하게 보헤사 성령님에 대하며 말한다.
2) 주님을 말씀으로 표현한다.
3) 7가지의 이적이 나타나며 각각의 이적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속성을 표현한다.
가나의 혼인잔치의 기적을 통하여 신랑이신 주님의 공생애의 사역이 시작된다.
나사로의 기적을 통하여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을 나타낸다.
4)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일곱번 “나는….이다”의 용법으로 말씀하신다.
- 나는 생명의 떡이라,
- 나는 세상의 빛이라.
- 나는 참 포도나무라.
5) 예수님의 사역이 세번의 유월절 절기를 통하여 나타남으로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을 3년으로 추측하게 한다.
6) 예수님을 묘사하는 다양한 명칭들이 나온다.
말씀. 독생하신 하나님, 독생자, 하나님의 아들, 사람의 아들, 선생, 예언자, 선지자, 이스라엘의 왕, 유대인의 왕, 하나님의 어린 양,
사람은 어떤 위대한 인물이 있다면 그 사람의 근본을 알기를 원한다. 사람의 뿌리가 어디로 부터 시작되었는지를 알기 위해 족보가 있다. 하지만 그 뿌리도 몇 세대위로 올라가면 점차로 희미해지며 결국은 어떤 시조에 다다르고 더 이상 위로 추적이 불가능해 진다.
성경을 기록한 성경저자 역시 예수님의 근원에 대하여 알기를 원한다.
그래서 마태복음에는 아브라함과 다윗왕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님의 족보가 나오고, 누가복음에는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으로부터 시작하여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 그리고 요셉의 아버지 헬리…그리고 결국은 아담에까지 이르고 그 위로 하나님에게까지 연결이 된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근원이 바로 태초에 계신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성경말씀은 모두 주님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중에서 특히 요한복음 1장 1-5절에서 주님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말씀한다. 주님을 온전히 믿는 믿음을 갖기 위해서는 우선 주님의 근원의 속성이 무엇인지를 알고 믿어 축복받은 성도이기를 축원한다.
1. 태초에 말씀으로 계신 주님
예수님의 근원에 대하여 말한다.
(요1:1-2)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창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느니라.
그런데 요한복음은 창1:1의 태초에 하나님을 말씀으로 바꾸어서 시작한다.
태초에 이미 계신 말씀이시며 하나님이신 주님. 예수님은 이미 태초에 계셨으며 말씀으로 계셨다.
태초에는 시간도 물질도 공간도 아무것도 없었는데 말씀이 어떤 모습으로 존재했는지 우리는 모른다.
말씀이 어떤 물질적인 형상을 의미하는지, 태초라는 시간이 언제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태초에는 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시간이란 관념이 없었고 혹 같은 시간을 사용한다 할지라도 그 시점이 언제인지는 알 길이 없다.
요한복음1:1과 창1:1에서 말씀하시는 진리는 우리의 지식을 초월하는 개념이다.
이것은 감추어진 하나님의 비밀이다. 예수님의 기원이 태초인 영원전부터 계셨으며 영원하신 하나님 안에 말씀으로 계셨음을 어찌 우리 인간이 이해할 수 있겠는가?
예수님의 근원을 사람의 뿌리를 찿아 가듯이 찿아 올라 갈 수 없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단지 “예수님께서 태초부터 계신 말씀이시며 곧 하나님이시다” 라는 말씀이다.
더 이상 어떤 해석이 사실 필요하지 않다. 그 너머로 유추해서 해석한다는 것은 우리 인간에게는 열려 있지 않은 하나님의 비밀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지혜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신비한 하나님의 비밀인 것이다.
우리는 태초가 언제인지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아무도 태초 때를 본 이가 없기 때문이다. 태초가 언제인지를 규명하겠다고 애쓰는 것 자체가 참으로 우스운 일이 아닌가?
성도의 자세는 있는 그대로를 믿고 받아 들이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고 생각한다.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하셨던 말씀이 육신을 입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땅에 오셨다. 흑암속에 있는 자들에게 빛을 비추사 영원한 생명을 갖게 하셨다. 이를 어찌 인간의 지혜로 풀어 낼 수 있겠는가!
그래서 믿음이 중요한 것이다.
우리는 태초 때를 보지 못했고, 육신의 옷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보지 못했지만 말씀으로 오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내 마음에 믿을 때 빛이신 말씀이 생명으로 나에게 다가오셔서 영원한 생명으로 나를 재창조하신다.
말씀은 지금도 주님이 하나님이심을 우리에게 조명하신다.
말씀은 진리이기에 모든 세상의 속되고 거짓된 것은 들어날 수 밖에 없다.
나를 진리이신 말씀앞에 비추어 보자.
내 안에 있는 세속적이고 부정한 것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를 말씀은 나의 영의 눈을 열어 보게 하신다.
(시119:18)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
2. 창조주이신 주님
주님은 모든 피조물을 창조하셨다.
창세기 1장에 하나님께서 피조물을 창조하시는 과정이 나온다.
첫째 날부터 다섯째 날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살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필요한 모든 물과 공기와 식물과 어류와 새와 동물들을 만드시고 보기에 좋았더라 하시며 흡족해 하신 하나님께서는 여섯째 날에 인간을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다.
그런데 사람은 이런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믿지를 않는다.
인간이 어느 순간 갑자기 시작된 것을 인간의 지식과 상식으로는 믿을 수 없어 인간의 시작을 인위적으로 접근한다. 진화학자들은 어떤 환경이 갖추어 졌을 때 어떻게 해서 단세포가 생겨나 그것이 점점 자라나 변이되어 어떤 개체들이 되고 그 중에서 특별한 개체가 특별한 진화과정을 거쳐서 지금의 인류의 모습을 갖게 되었다고 하는 학설을 믿는다. 하지만 현재의 과학의 수준으로는 무균인 상태에서 아무리 조건을 완벽하게 갖추었다 할지라도 아직도 단세포조차 만들 수 없다.
우주에는 수많은 은하가 있고 각각의 은하에는 수를 셀 수 없는 별들이 있으며 각각의 별들의 거리는 너무나 멀다. 우주의 크기는 아직도 규명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세상에 속한 학자들은 우주가 갑자기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갑자기 큰 폭발이 일어나서 오랜 진화기간을 거쳐 별들이 생겨났으며 지금도 끝을 알 수 없는 곳으로 팽창하고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성경 창세기에는 모든 피조물들 즉 별이나 지구나 태양이나 동물이나 식물이나 곤충이나 어류들이 진화의 과정을 거친 것이 아닌 원래 완전한 모습으로 창조되었다고 분명하게 말한다.
믿을 수 있겠는가?
뜨거운 별이 갑자기 생겨나서 오랜 시간이 흘러 별이 식은 후에 갑자기 어떤 단세포로 시작되어 많은 종류로 되었고 그 중에 어떤 것은 원숭이가 되었고 또 원숭이의 어떤 종이 더욱 발전하여 지금의 인간의 모습으로 진화되었다는 것을 어처구니 없는 것을 믿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완전한 모습의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믿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창조사역에는 어떤 오류가 없기 때문이다.
말씀이신 주님은 창조주로서 태초에 모든 피조물의 창조사역을 완벽하게 오류없이 주관하셨다.
지금도 저는 가끔가다 생각한다. 왜 대개의 동물들이나 어류나 새나 곤충은 눈은 두개이고 코는 하나이고 머리는 하나일까? 피를 돌리는 심장이 있고 혈관이 있고 숨을 쉬는 폐가 있다. 먹고 소화시키고 배설하는 과정은 조금씩 다르지만 기본적으로 모든 숨을 쉬는 피조물이 같고 있는 공통점이다.
왜 그럴까?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을 작품으로 만드신 창조주는 한분이신 주님이기에 모든 피조물들이 일관성을 갖고 있지는 않을까 생각해 본다.
주님의 창조사역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진행형이다.
창조때에 관여하신 주님은 지금도 모든 피조물의 으뜸인 우리 가운데서 창조사역을 지금도 계속하고 계신다.
아담의 원죄를 물려받은 피조물은 허무한데 굴복하여 죄 가운데 거한다.
(롬8:20)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그런데 주님은 주님안에 있는 자들을 주님의 물과 성령의 능력으로 죄의 옷을 입은 우리를 깨끗게 하여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신다.
(고후5:17)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보라 이전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누구든지 주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구주임을 믿고 고백하고 시인하여 주님께서 받아 주셔서 주님안에 거하게 된다면 나의 지난 날의 세속적이고 부정한것들은 깨끗함을 입고 주님께 속한 영적인 것으로 변하게 되어 의로운 옷을 입은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3. 생명이신 주님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생명은 하나님 나라에서의 영생을 의미한다. 그리고 영생의 중개자는 바로 주님이시다.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생명과 관계된 단어를 떠올리면 사망과 부활이 연관되어 있음을 느낀다.
육신을 입고 오신 주님은 인간이 겪는 고통을 겪어가며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삼일후에 부활하셨다.
음부에 내려가셔서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은 영원한 생명을 자녀들에게 주실 수 있는 권리와 권세를 갖고 계신다.
인간은 언젠가는 죽는다.
하지만 주님을 믿는자는 주님께서 사망을 이기시고 부활하셨듯이 우리 또한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을 갖게 될 것을 확신한다.
(요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주님은 주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광야에 몰려든 허기진 수많은 사람들에게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셨다.
주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하여 주님 자신이 생명의 떡임을 가르쳐 주셨다.
(요6: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6: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요6: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의 없느니라.
주님은 “나는 생명의 떡이라” 말씀하신다. “나의 살과 피를 먹게 되면 영생을 얻게 된다”라고 주님은 말씀하신다.
주님은 죽은지 사흘이 되어 시체썩는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살리시는 기적을 베푸신다.
(요11: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주님의 피와 살을 먹고 마시자. 그러면 나사로를 살리신 부활의 능력과 권세를 가지신 주님께서 나의 죽은 몸도 부활시켜 영생을 주실 것이다.
영생을 얻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중생의 역사가 임해야 한다는 것이다.
요한복음의 주된 관심은 바로 영생을 주시는 분이 곧 주님이시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물과 성령으로 중생하는 자에게는 주님께서 영생을 약속하신다.
당신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났는가?
주님과 함께 하는 영생을 소유했는가?
4. 빛이신 주님
주님은 빛이시다. 너무나 밝고 밝은 주님의 영광의 빛.
말씀이신 빛이 태초에 흑암가운데 오셨고, 타락한 인간의 흑암 가운데 계속 비추어 졌다. 더욱이 그 빛은 성육신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중에 보다 밝게 비추어졌으며, 종교암흑시대에도 비추어졌으며, 지금 우리에게도 주님의 거룩한 빛은 성도위에 비추고 있다. 앞으로 주님의 재림시 더욱 밝은 영광의 빛을 발할 것이다.
빛이신 주님께서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을때 흑암에 있는 자들은 눈이 가려져 있어 그 영광의 빛을 볼 수도 깨닫지도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빛으로 오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여 버렸다. 죽으신 주님은 부활하사 영광의 빛으로 비추신다.
지금 역시 대다수의 사람들은 흑암 가운데 있어 빛이신 주님을 보지 못한다.
그런데 주님의 영광의 빛을 볼 수 있는 은총이 우리에게 은혜로 주어졌다.
우리는 원래 어두움 가운데 있었다. 그런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택하심의 은혜로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믿는 순간 우리에게 주님은 빛으로 들어 오신다. 나를 덮고 있었던 모든 흑암은 너무나 강렬한 주님의 영광의 빛이 비추는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
주님은 길에서 만난 소경의 눈을 뜨게 하는 기적을 베푸신다. 그러면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요9: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내가 세상에 속해 있다면 나의 육신의 눈은 사물을 볼 수 있을지라도 나의 영의 눈은 감겨져 있어 영적인 캄캄함 밖에 볼 수 없다.
하지만 주님을 만나게 되면 빛이신 주님의 내 안에 거하며 나의 영의 눈은 뜨이게 되어 그전에 볼 수 없었던 주님의 은총들을 볼 수 있어 주님께 영광을 돌리게 한다.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자연의 피조물들이 몸짓을 보며, 환희의 소리를 듣게 된다.
주님을 만난 경험을 은혜라 표현을 한다.
주님을 만나 은혜의 경험을 한 자들의 대부분은 은혜를 받은 후 처음 본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잎사귀, 따가운 햇살, 새들의 지저귐, 시원하게 내리는 비 이런 모든 것들이 새롭게 보이며 하나님께 감사했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주님을 만난 은혜의 체험을 하였는가?
빛이신 주님. 생명이신 주님, 창조주이신 주님, 태초부터 말씀으로 계신 주님을 만난 은혜가 있는가?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이는 감사하고 또 감사할 수 밖에 없는 놀라운 경험을 해 보았는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
요한복음 1장의 말씀을 통해 주님의 근원에 대하여 생각할 수 있었읍니다.
우리가 알 수 없는 태초부터 말씀으로 계신 주님은 곧 하나님 이셨읍니다.
또한 주님은 지금 우리가 만지고 보고 느끼는 모든 피조물들을 창조하셨고
지금도 주님의 창조사역은 계속되고 있어
저와 같이 미련하고 속된 피조물을 변화시켜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창조하셨읍니다.
주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읍니다.
영생을 주시는 분은 바로 주님이십니다.
주님이 나의 구주임을 마음으로 믿어 고백하고
다시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난 자들에게
주님은 영생을 선물로 주십니다.
주님은 어둠을 밝히는 영광의 빛이십니다.
어둠속에 있어 아무것도 볼 수 없어 방황하고 넘어질 수 밖에 없었지만,
이제는 빛이신 주님께서 제 안에 계시며
저의 길을 비춰주시며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감사드리며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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