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5:5-9)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온갖 질병으로 우리는 힘들어 한다.
불치병으로 고생하며 삶을 마감하기도 한다. 병은 나의 삶에 직접적으로 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은 병에 걸린 이유가 죄의 결과라고 믿는다. 그래서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은 어떤 사람이 불치의 병에 걸렸다면 그를 보며 그리 못되게 굴더니 그런 몹쓸 병에 걸렸다고 하며 그 병이 원인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걸렸다고 단정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병에 걸린 이유로는 죄의 결과일 수 있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하는 경우도 있다고 설명해 주신다.
(요9:1-3)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가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함이니라.
주님은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38년된 병자를 고쳐주신다.
참고로 고고학적으로 발굴된 베데스다 연못의 크기는 100m x 60m의 크기인 저수지 용도로 쓰인 연못이다.
이 연못 주위로 병이 낫고자 하는 많은 이들이 모여 있었는데 그 이유는 이 연못에 가끔 가다가 천사가 내려와서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되는 역사가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이 연못을 빙둘러서 온갖 병자들과 가족들이 있었으니 많은 이들이 있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그 가운데 38년된 병자가 있었다. 38년간 가족으로부터 버림 받고 걸을 수도 없어서 매일 매일 구걸하며 목숨을 연명하던 사람이었다.낫고자 하는 열망이 있어 베데스다 연못에서 물이 동하기를 기다리지만 정작 물이 동할 때에 누구하나 그를 도와주는 이가 없어서 물에 들어갈 수도 없었다.
그런 그를 주님을 찿아 오셨다.
주님은 베데스다 연못가에 모인 수많은 사람중에서 38년간 병자에게 다가 오신다.
38년간 거지였으니 그의 삶의 대부분을 거지로서 산 것이다.
초라하고 남루하고 냄새나는 그를 주님은 찿아 오신다.
주님은 그에게 다가가셔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
낫고자 하는 믿음을 갖고 있던 자에게 다가 오셔서 말씀의 대화를 열기 시작하시는 주님.
아마도 그가 태어나서 처음 들어보는 다정한 말이며 위로의 말이었을 것이다.
주님은 나에게 먼저 다가 오신다.
부끄러운 죄로 인하여 사람을 기피하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나에게 물을 달라” 하시며 대화를 시작하셨듯이 주님은 지금 역시 나에게 말씀하시면서 다가 오신다.
내가 분노에 차 있다면 사랑의 주님께서 무어라 말씀하시는지를 들어보자.
내가 절망에 있다면 소망의 주님께서 나에게 다가 오셔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 지 들어보자.
내가 깊은 어두움에 있다면 빛으로 다가오시는 주님의 말씀을 들어보자.
주님의 음성에는 거부할 수 없는 따뜻한 위로가 있다.
따뜻한 말 한마디 들어 보지 못했던 38년간 병자였던 이 사람.
추위에 몸을 녹일 옷 하나 변변한 것이 없어 늘 추위에 벌벌 떨어야 했다.
먹을 것을 자신의 힘으로는 구할 수 없으니 남들이 먹다 남긴 음식을 먹어야 했으며 그나마 그것도 누가 갖다 주어야 했으니 굶는 날도 허다하였을 것이다. 자신에게 말을 거는 이도 거의 없지만 늘 듣는 말은 거칠고 무시하는 말을 들었을 것이다. 가족에게도 버림받아 물이 동할 때 자신을 들고 물에 넣어줄 수 있는 사람들도 없었다. 버림받은 외로운 인생이었던 것이다. 누구하나 그를 가치있는 인생으로 생각하는 이도 없다.
자존심은 버린지 오래되어 자존심이 무엇인지도 가물 가물 거린다.
물에 들어가는 꿈도 이제는 포기하였다. 지난 38년간 자신도 물에 들어가기를 그토록 염원하였지만 결코 자신의 힘으로는 물에 들어갈 수 없음을 이제는 안다. 그래서 물이 동할 때면 물끄러이 다른 이들이 기를 쓰고 들어 가는 모습들을 먼 발치에서 보며 혹 그가 나음을 입었으면 부러워할 뿐이다.
절망했다는 것은 아직 소망이 남아 있음을 보여준다.
절망을 넘어서 모든 것을 체념한 이 사내에게 주님은 다가 오시고 꿈을 선물하신다.
누가봐도 그는 철저하게 낙오된 인생이었으며,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최소한의 존엄성도 갖지 못했던 38년간이나 구걸하는 것이 당연함이 되어 버린 이 사내를 주님은 찿아 오신 것이다.
주님을 만나게 되면 내가 갖고 있던 절망은 저멀리 사라져 버리고 그 자리에 소망과 꿈과 기쁨으로 바뀌어 진다. 나의 불완전함은 완전함으로 회복되며 나의 자아를 되찿게 된다.
나는 어떤가?
나의 상태가 38년간 지겹도록 고질적인 병을 앓았던 이 사내보다 나은가?
고질적인 병을 오래 앓고 있지는 않는가?
우리 대부분은 질병과 직접적인 간접적인 관계를 갖고 있다.
육신적인 질병, 영적인 질병.
일시적인 질병도 있지만 어떤 병은 오래된 고질적인 질병이기도 하다.
거듭남의 커다란 은혜를 받았지만 아직도 내게는 깨어지지 않은 태어나서부터 형성된 나의 자아의 틀이 자리 잡고 있다. 주님은 나를 잘 아시기에 내가 갖고 있는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주님은 “네가 낫고자 하느냐?”하고 물으신다.
나의 의견을 물으시는 것이다. 주님은 나의 동의가 있어야지만 나를 회복시키시는 고마우신 분이시다.
일방적으로 자신의 뜻대로 하시는 절대자가 아니시며 먼저 나의 의견을 묻고 내가 동의하면 나를 고치신다.
주님앞에 나아갈 때 나의 결단이 필요한 이유이다.
낫고자 결단하고 주님께 대답하자.
주님 제가 낫기를 원합니다.
저의 병든 것들을 창조때의 보시기에 좋았더라의 상태대로 회복시켜 주옵소서.
주님 제가 회복되기를 원합니다.
주님께서 저를 어미의 태중에서 만드시고 기뻐하신 모습대로 회복되기를 원합니다.
주님 저를 만져주옵소서.
주님은 깊은 병이 오래 들어 초라한 38년된 자를 완전한 모습으로 회복시켜 주셨다.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주님께서 소망이 없었던 자의 마음을 열어 놓으시며 육신적인 치유를 하셨으며 동시에 그의 영혼의 문제도 회복시키셨다.
38년간 병을 앓아 왔지만 주님께서 그를 만지심으로 영과 육의 병이 난 후에 그는 변화하였다.
전에는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삶으로의 전환이 시작되었된 것이다. 주님께서 고쳐 주셨다는 의미는 그의 삶 전반에 걸쳐 회복의 은총이 함께 임하였다고 믿는다. 주님께서는 그의 육신적인 결함만을 고쳐 주신 것이 아니라 그가 홀로 일어나서 걸어가며 살 수 있는 은총도 함께 은혜로 주셨다고 나는 믿는다. 주님을 만나 축복의 은총을 입은 그는 일어나서 자신이 가고 싶은 곳을 마음대로 갈 수 있는 자유를 선물로 받았고, 더 이상 먹기위해 비굴하게 자신의 목숨을 연명하지않아도 되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의 힘으로 일을 하여 먹고 살수 있게 되었으며 따뜻한 곳에 잠을 청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는 사람들이 무어라해도 주님께서 자신을 낫게 하셨다고 담대하게 사람들앞에서 증언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 죄로부터 자유롭게 되었을 것이다.
일어나 걸어라.
주님께서 우리의 육신의 질병을 고쳐 주신다.
현대의학으로 치료할 수 있는 병에는 한계가 있다.
현대의학의 능력의 한계를 뛰어 넘는 질병으로 인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다가올 죽음을 두려워하며 자신의 생명의 끝남을 기다리고 있지는 않는가? 인간의 한계를 뛰어 넘는 질병앞에 사람들은 절망하기도 하고, 불만을 표현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기적을 바라기도 한다. 그러면서 자연적으로 느끼는 것이 죽음에 대한 생각일 것이다.
병에 걸리게 되면 사람들은 낫기를 소망한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낫기를 열망하여 지붕을 뚫고 주님이 계시는 곳으로 내려 오기도 한다.
낫기를 열망하여 주님의 옷자락이라도 잡기를 원한다.
육신적인 질병은 그토록 낫기를 원하며서 정작 더 중요한 영혼의 질병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일어나 걸어라.
주님께서 우리의 영적인 질병을 고쳐 주신다.
나에게는 고질적인 영적인 질병이 있다.
눈은 있지만 주님의 영광을 볼 수 없다.
생각하는것이 삐뚤어져 있어 주님의 마음으로 옳바르게 생각하지를 못한다.
자아가 너무나 강하여 내 안에 계신 주님께서 나타나실 여유가 없다.
참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에 내 고집대로만 할려고 한다.
두 다리가 있지만 정욕의 길로 가는 것이 너무 편하여 넓은 길로만 갈려고 한다.
내 안에 있는 영적이 질병이 고침을 받아야 한다.
영적인 질병의 근원은 죄다.
(요5:14) 그 후로 예수께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
주님은 지금도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그렇다면 일어나 걸어라.
내가 지시하는 땅으로 일어나서 걸어라.
죄로부터 구별된 거룩한 삶을 살도록 하라.
죄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는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무엇이 죄인지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롬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주님과 함께 동행한다면 기쁘고 즐거운 삶으로 회복될 것이다.
주님의 회복이 임하게 되면 주님은 나의 죄악된 모습을 회복시키신다.
슬픔이 있는 곳에 이해할 수 없는 기쁨이,
죽음이 있는 곳에 다시 살아나는 생명이,
불의가 있는 곳에 거짓과 교만이 없는 의가,
절망이 있는 곳에 앞을 내다보는 소망이,
가난이 있는 곳에 많은 열매를 맺는 부요함이,
질병이 있는 곳에 나음이,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의 빛이,
다툼이 있는 곳에 불평과 불만이 없는 평강이,
미움이 있는 곳에 모든 것을 덮어 주는 사랑이,
불신이 있는 곳에 믿음이 있게 된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일어나 걸어라.
주 앞에서 일어나 주앞에서 걸어 가는 인생은 실로 축복된 인생이지 않겠는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제가 낫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손길이 제게 임하면 저의 병든 육신은 나음을 입을 것이고,
불의와 아픔과 절망과 교만과 거짓이 있는 곳에
주님의 의와 진리와 사랑과 평강이 있을 것입니다.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님은 은혜로 저의 죄악된 본성을 치료해 주옵소서.
저를 회복시키사 원래의 아름다운 모습의 새로운 피조물이 되기를 원합니다.
회복되지 못한다면 매일 매일의 삶이 화가 될 것입니다.
저를 회복하옵서서.
저의 무너진 심령을 새롭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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