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4:4-7)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이제 곧 봄이 온다.
봄이 오면 많은 과실나무들이 싹을 내고 꽃을 피운다. 그 가운데서 벌들이 하는 역활은 매우 중요하다. 벌들이 분주하게 날라 다니면서 벌꿀을 모집하는 동안 꽃가루가 이곳 저곳으로 옮겨져서 꽃들은 과실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된다.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만남이 있어야 한다.
우리 역시 주님을 만나야지만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주님은 나를 기다리고 계신다.
사마리아 여인이 주님을 만난것이 우연이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사마리아를 통과하여”라고 번역되었지만, 영어성경에는 “He had to go through Samaria”라고 번역되었다. 주님께서 Samaria를 반드시 가셔야 했음을 강조하고 있다. 주님께서 죄있는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신 것은 이미 주님께서 정하신 주님의 뜻이었던 것이다 .
주님은 가장 적절한 때에 사마리아 여인을 만났다.
어쩌면 사마리아 여인보다 더 죄가 많은 내가 주님을 만난것이 나의 뜻인가? 아니다. 결코 아니다.
나를 만나시려는 주님의 뜻이었기에 가능한 주님의 섭리이었다.
주님은 유대지방을 떠나 갈릴리로 다시 가시는 도중에 어떤 목적이 있으셔서 일부러 사마리아로 가신다.
보통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지역에 발을 들여 놓지 않았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사람들을 부정하다고 생각하였고 그들과는 대화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유대에서 갈릴리로 가기 위해서는 요단강을 건너 요단강 동편의 길로 우회해서 왕래했다.
그런데 주님은 곧장 사마리아 지역으로 발길을 돌리셨다.
바로 사마리아 여인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셨다. 사마리아 여인은 성적으로 부정한 여인이었다. 다섯 남편이 있었으며 지금 살고 있는 이도 남편이 아니며, 성적으로 무절제한 삶을 살고 있는 부정한 여인이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여인에게 오시지 않으셨다면 그 여인은 결코 영생의 구원을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어떻게 이 여인이 주님을 만나 구원을 얻었고 주님의 뜻은 무엇이었는지를 살펴보자.
A. 사마리아인
사마리아인은 유대인들이 보기에 같이 상종하기에 거북한 이방인이다.
사마리아는 북이스라엘 지역을 말한다. 그들도 한때 유대인이었지만 앗수루에 의해 북이스라엘이 멸망하고 앗수루는 이곳에 자국인들을 이주시켜 혼혈화한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과의 반감의 역사는 오래되었다. 그 역사는 앗수루 왕에 의해 북 이스라엘 왕국에 정착한 혼열 인종인 사마리아인의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참조, 왕하 17:24-41). 일부 사마리아인들은 자신들이 참 이스라엘에 대한 약속의 상속자로 생각했다.”[1] “그들의 신앙초점은 모세 율법인 오경에 맞추어져 있었다.”[2] 하지만 대부분의 사마리아인들은 이방종교의 영향을 받아 우상들을 섬겼다. 유대인들은 같은 피가 섞였지만 이방신을 섬기는 혼열인인 사마리아인들을 멀리하며 같이 상종하는 것을 금했다. 또한 사마리안인들 역시 유대인들을 배척하였다. 주님께서 제자들과 예루살렘을 가기 위해서 사마리아 고을로 들어서자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들인 예수님의 일행을 배척하며 받아들이지를 않았다.
(눅9:52) 사자들을 앞서 보내시매 그들이 가서 예수를 위하여 준비하려고 사마리아인의 한 마을에 들어갔더니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기 때문에 그들이 받아들이지 아니 하는지라.
사람은 다른 인종을 차별한다. 단일 민족이라고 자부하는 한국인들은 특히 인종차별이 심한듯하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총은 차별이 없으시다. 하나님의 은혜는 유대인이나 혼혈인인 사라리아인에게나 동일하게 임하시며 더 나아가서 나와 같은 이방인에게도 임하신다.
나는 혈연적으로나 영적으로나 사마리아인과 같이 이방인이었다.
주님을 만나기 전의 나는 이방인처럼 온갖 우상들을 섬겨왔다. 미신을 섬기기도 하였고, 금이나 자식이 가장 귀한 것처럼 애지중지하며 우선권을 주었다. 세상의 권력이 나의 우상이기도 했고, 명예나 자존심을 잃는 것은 마치 모든 것을 잃는 것처럼 행동하기도 했다.
주님보다 우선시하는 모든 것들은 우상인 것이다.
B. 정오
주님께서 정오때에 우물가로 찿아 가신 것은 사마리아 여인의 상황을 배려하신 것이다.
(6)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여섯 시는 지금의 시간으로 정오에 해당된다.
이스라엘의 낮은 상당히 덥다. 낮 특히 가장 뜨거운 시간에는 사람들은 다니지를 않으려 한다.
사마리아 여인은 정오시간을 택하여 물을 길러 우물가로 갔다. 자신의 부정함을 아는 이 여인은 사람들을 피해서 사람들의 왕래가 드문 뜨거운 정오시간에 우물가로 갔던 것이다.
성경에는 종종 사건이 일어난 시간이 언급된다.
밤중은 사단이 역사하는 시간이다.
니고데모가 주님을 찿아온 시간이 한밤중이었다.
가롯유다가 주님을 배반하기로 결심하고 나선 시간이 밤이었다.
(요13:30)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더라.
주님을 잡으려고 가롯유다가 무리들과 함께 온 시간이 새벽 동트기 전이었다.
(요18:3) 유다가..아랫사람들을 데리고 등과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
나는 혹 밤에 거하고 있지는 않는가?
흑암의 영이 지배하는 어둠의 권세 안에서 벗어나고 있지를 못하는 가?
(눅22:53)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때에 내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둠의 권세로다 하시더라.
내가 주님께 불순종하고 있다면 나는 어둠속에서 자고 있는 것이다.
어둠속에서 자고 있다면 주님께서는 이 음성을 들려 주실 것이다.
(막13:35-37)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일는지, 밤중일는지, 닭 울 때일는지, 새벽일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가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반대로 낮은 주님의 영이 역사하는 시간이다.
주님은 가장 강한 빛이 내리 쪼이는 정오에 죄가 많은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셔서 거룩한 빛을 선물로 주셨다. 어둠에서 벗어나서 태양빛보다 더 강한 주님의 빛을 받자. 내가 밝은 빛에 거한다면 나는 주님께 속한 자이다. 하지만 내가 어둠가운데서 졸고 있다면 깨어야 한다.
C. 우물가
주님은 우물가에 먼저 오셔서 사마리아 여인을 기다리고 계셨다.
사마리아 여인이 있는 우물가로 가신 것이 아니라 주님은 사마리아 여인이 오기 전에 그녀를 생각하며 기다리고 계셨던 것이다.
우리는 내가 원해서 주님을 만났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내 안에 있는 어둠안에 거하시를 좋아하는 죄의 성품은 어떻게 하든 빛이신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나를 덮고 있는 빛을 가리우는 두꺼운 장막을 찟고 주님 앞에 나오기 위해서는 주님께서 오셔야 한다. 내 힘과 의지로는 결코 주님앞에 나아갈 수 없다.
그런데 왜 주님은 많은 장소들 중에서 우물가를 택하셨을까?
1. 조용한 공간
주님께서 사마리아여인을 만난 우물가는 조용하고 한적한 공간이었을 것이다.
정오시간은 햇빛이 너무나 뜨겁고 강하여서 사람들이 왕래를 하지 않는다.
사마리아 여인은 이런 사실을 잘 알기에 사람들의 왕래가 적은 정오시간을 택하여 물을 길러 나갔던 것이다. 사람의 왕래가 드문 시간에 조용한 장소에서 주님은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셨다.
우리 역시 어떤 일을 하려고 할때 주변이 시끄럽고 요란하다면 집중하기가 어렵다.
우리 삶이 여러가지가 얽혀 있어 복잡하다면 주님을 생각할 여유가 없어진다.
주님을 만나기를 원하면서 여러가지 세상 일에 사로잡혀 있다면 주님의 음성을 듣기가 어려울 것이다. 너무나 많은 잡음 가운데서 내게 들려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어찌 들을수 있겠는가!
주님을 만나기를 갈망하는가?
그렇다면 내가 먼저 해야 할 것은 복잡한 나의 삶의 주변을 정리하고 조용한 곳인 우물가로 나아가야 한다. 모든 것이 차단된 조용한 곳에서는 주님과 대화하기가 한층 수월해 질 것이다.
조용한 가운데서 들리는 너무나 귀한 주님의 음성을 들어보자.
죄 많던 나를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에 감격하며 감사해서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주님을 만나기 좋은 곳은 바로 세상의 소음으로부터 차단된 곳일 것이다.
바로 그 곳에서 주님은 내게 물을 좀 달라 하시며 대화의 물꼬를 트실 것이다.
세상의 번잡함을 잠시 내려두고 잡음이 없는 조용한 곳으로 나아가서 미련하고 패역한 나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하나님이신 주님을 생각하며 주님의 은혜를 그리워해 보자.
2. 대화의 시작
처음보는 사람을 만나 대화를 시작하는 것은 불편할 수 있으며 어떻게 대화의 시작을 하는 가에 따라 사람의 첫인상을 가늠하게 한다.
주님은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를 자연스럽게 시작하신다.
주님은 다수의 유대 남성인 제자들이 있음으로 불편해 할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를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 제자들 모두 먹을 음식을 사기 위해 마을로 가서 혼자 계셨다. 그리고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셔서 “물을 좀 달라 (요4:7)”하시며 대화의 문을 여신다. 그리고 이 여인의 죄문제를 제기하신다. 많은 남자들이 있는 곳에서 너는 남편이 다섯이 있었고 지금 살고 있는 이도 네 남편이 아니다라고 말했다면 이 여인은 수치심에 못이겨 복음이고 뭐고 화를 내고 자리를 떠났을 것이다.
아무도 있지 않은 곳에서 주님은 우선 이 여인의 죄문제를 끄집어 내시고 해결하신다.
주님은 이 여인이 갖고 있는 자신만의 은밀하고 부끄러운 비밀을 들추어 내시며 굳게 닫혀 있었던 이 여인의 마음을 여신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신다. 내 안에도 나만이 아는 부끄러운 것들이 있다. 주님은 그런 부끄러운 일들을 사람들에게 나타내지 않으시고 나와 만나신다.
주님은 자신이 생명수이심을 증거하신다.
(요4:1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사마리아 여인을 만난 주님은 물을 달라고 부탁하신다. 그러자 이 여인은 당신은 유대인인데 어찌하여 나같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 반문하자, 주님은 이렇게 답변하신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선물을 알았고 네게 물을 달라 청하는 이가 누구인지를 알았더라면 그에게 부탁하면 그가 너에게 살아있는 물을 주었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주님은 자신이 “나는 생명수라. 내가 주는 물을 마시면 목마르지 아니하리라”라고 확증을 하신다.
주님을 만나 주님께서 주시는 생수를 마시자.
육신의 요구를 충족하기 위해 쫓아가는 인생은 늘 그 무엇인가에 갈증을 느낀다.
어떤 것이 가장 좋게 보여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해 가졌지만 곧 만족하지 못한다. 곧 더 나은 어떤 것이 나의 마음을 사로잡아 이번에는 그것을 갖는 것이 나의 삶의 최선인양 노력을 해서 얻는다. 하지만 결코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또 더 나은 다른 무엇인가를 가지려고 한다. 자기만족과 욕심과 교만의 악순환이 반복될 뿐이다. 세상의 것은 만족함이 없다. 더 나은 것을 추구하지만 결국은 절망만을 안겨다 준다. 왜냐하면 물질적인 세계에는 한계가 있으며 곧 시간이 지나면 잊혀 버려지기 때문이다.
주님은 나의 모든 것을 아신다. 주님앞에 나아가자.
사마리아여인을 기다리고 계셨듯이 주님은 나를 생수가 있는 우물가에서 기다리고 계신다.
물을 좀 달라 하시며 나에게 은혜를 주시기 위해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자.
우리는 거칠고 모진 삶으로 인해 목말라하면서 심한 갈증을 느낀다.
주님은 그런 지쳐있는 있는 나에게 생명수를 주시면 마시라고 하신다.
D. 변화된 사마리아 여인
주님을 만난 사마리아 여인은 변화한다.
즉시로 마을로 되돌아가 메시야를 만났는데 그가 내가 그동안 했던 모든 부정한 일들을 말하였다고 라고 선포하자 이 여인을 알고 있던 마을 사람들은 주님께 나와서 주의 복음을 듣고 그들 역시 변화한다.
원래 그녀는 사람들과 대화도 나누기를 좋았했던 본성을 지녔었지만 자신이 부정한 행위로 창피하여 점점 사람과의 관계를 기피하였다. 주님을 만남으로 그녀는 변화하였다. 주님을 만나 자존감이 회복된 그녀는 자진해서 동네사람들에게 찿아가서 자신이 만난 주님을 자신있게 증거할 만큼 힘들었던 사람들과의 관계가 회복되었고 무엇보다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로서의 삶으로 변화되었다.
이 사마리아 여인을 통하여 동네 사마리아인들에게도 주님의 복음이 전하여 졌고, 그 후손인 이방인인 나에게도 복음이 전해졌다.
주님은 나와 같은 이방인의 영혼도 사랑하셔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시기 위해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났던 것이다. 주님을 만난 사마리아 여인은 변화하였다. 이전의 성품을 벗어 버리고 새로운 피조물로서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전도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기 시작한 것이다.
오늘도 주님은 믿음에 대하여 어둠속에 있는 이방인인 내게 “물좀 달라”하시며 대화를 시작하신다.
주님께서 임하실 때 내가 있는 곳은 매우 강렬한 빛이 비추게 된다. 빛 앞에 모든 어두움은 자취를 감춘다. 너무나 강렬한 빛이 사방에서 비춤으로 그림자도 없다. 주님의 빛이 임하게 되면 내 안에 감추어져 있던 어둠은 드러나게 되어 소멸될 수 밖에 없다.
주님을 만나기를 원한다면 한적한 우물가로 나아가자.
세상의 소음으로부터 차단된 조용한 가운데 주님을 바라볼때 주님은 나의 모든 죄를 기억나게 하신다.
주의 거룩한 빛앞에 나의 모든 어둠의 죄가 들어나서 나의 죄를 고백함으로 용서함을 받도록 인도하신다.
세상의 것으로 더럽혀져서 갈급한 내 심령.
생명수이신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수를 한껏 마실때 다시는 영혼의 목마름이 없는 은혜를 주실것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저의 사정을 잘 아시는 주님께서는 제가 온전하게 주님을 만났을 수 있도록
저의 수치를 덮으시고 제가 가장 편한 시간에 찿아 오십니다.
주님은 저를 너무나 배례해 주십니다.
저의 모든 부끄럽고 죄악된 본성을 주님께 고백합니다.
어둠에 있는 저를 빛이신 주님 앞으로 인도하옵소서.
가장 강렬한 빛으로 저를 비추어서
제 안에 있는 사단의 속성들을 태우시고
저를 새로운 피조물로 새롭게 빗어 주옵소서.
세상의 번잡함을 내려 놓고 주님께서 계신 우물가로 나아가서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받기를 원합니다.
내게 물을 좀 달라 하시며 저와 대화를 원하시는 주님.
주님께서 거저 은혜로 주시는 생명수를 한껏 마셔서
더 이상이 세상이 주는 갈증함에서 벗어나기를 소망합니다.
주님의 생명수에는 영생이 있고 다시는 목마름이 없음을 이 종은 믿고 확신합니다.
주님의 자녀이지만 세상에서 지쳐있는 저를 다시 소생케 하시고 회복시켜 주옵소서.
주님의 은혜가 너무나 크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ferences
[1] George Beasley-Murray, Word Biblical Commentary 36 요한복음 (서울: 솔로몬, 2010), 208,
[1] Joel B. Green & Scot Mcknight, 예수복음서사전 (서울: 요단, 2008), 4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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