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알려진 탕자의 말씀이다.
세 사람이 나온다. 탕자, 형 그리고 아버지.
탕자는 세상에 나가 방탕하며 죄를 범하였고 결국은 지쳐서 돌아오는 모습이, 집에서 순종하던 형은
돌아온 동생을 아버지가 환대하며 맞아주자 분노를 하는 모습이, 아버지는 멀리 떠난 탕자를 무작정 기다리다
돌아오자 너무 기뻐서 다시 새옷을 입히고 반지를 끼우고 잔치를 벌이며 또한 한편으로는 화난 맏아들을 위로하며 다독거리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말씀이
‘이에 돌이켜’이라고 생각을 한다.
‘이에 돌이켜’는 ‘he came to himself’ 혹은 ‘he came to his
senses’으로 번역을 하였는데 어리석은 죄악된 모습으로부터 돌이켜 온전함으로 회복됨을 말한다. 탕자에게 ‘이에 돌이켜’의 순간이 없었다면 그는 아직도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라도 먹으며 탕자의 생활을 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 모두는 죄의 본성을 갖고 있기에 탕자인 죄인들이다. 그래서
어느 순간 ‘이에 돌이켜’의 결정적인 순간이 반드시 있어야
아버지의 품으로도 돌아 갈 수 있다.
‘이에 돌이켜’는 회심의 이야기이다.
회심은 우리의 삶에 어쩌면 가장 중요한 시간이다.
회심의 과정이 있어야지만 주님의 사랑을 깨닫고 영원토록 아버지가 계신 곳으로 회귀할 수 있다.
나의 인생에는 수많은 사건들이 있었다.
그 중에서 회심의 순간은 나의 인생에서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시간이었다.
영원한 생명과 사망 중에서 영원한 생명을 약속받는 시간이다.
본문의 말씀은 탕자가 아버지에게로 돌아가기로 결심한 순간이다.
한 잃어버린 영혼이 아버지의 사랑을 기억하고 되돌아 가는 순간이다.
영적각성의 시간이다.
진실한 마음으로 하는 회개의 순간이다.
지금껏 익숙한 모든 것으로부터 변화하여 주님 앞에 나아가도록 마음에 결심하는 시간이다.
나의 인생의 시간 가운데 가장 소중하고 잊을수 없는 시간인 것이다.
어찌 잊을수가 있는가? 내 생명이 사망에서 벗어난 시간인데!
여러분들도 그런 결코 잊을 수 없는 회심을 통해서 나의 영혼이 하나님 품 안에 안긴 구원받은 시간이 있었는가?
나에게도 주님 앞에 나아가게 하는 영적각성의 순간이 있었다.
탕자와 같이 세상에서 온갖 단맛 쓴맛을 먹고 마시며 즐기며 세상에 취해서 지쳐서 아무 생각이 없이 엎드려져 있었는데 갑자기 눈물이 나며
‘아버지여 제가 더 이상 이곳에 머물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더
이상 세상과 짝하여 가지 않게 해주세요. 제가 갈 곳이 없습니다. 제가
더 이상 가기도 싫습니다. 저를 건져 주옵소서’하고 기도를
하였다. 무척이나 짧은 기도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으시고 그 후의 나의 삶은 180도 전환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주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필요없는 잔 가지들은 쳐주시고 사람들도 정리해 주셨다.
주님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나를 뒤돌아보는 순간이 있었는가?
세상이 주는 쥐엄열매를 먹다가 도무지 목에서 넘어가지 않았던 순간이 있었는가?
눈물 콧물을 흘리며 ‘아 이제는 미련한 제가 주님 앞으로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저를 건져 주옵소서’하며 결단하는 순간이 있었는가?
회심의 순간은 천둥이 치듯 내 마음 속에서 울리며 깊이 각인이 되는 순간이다.
왜냐하면 그 후로부터 나는 새 사람의 옷을 입기 때문이다.
생명과 사망의 갈림길에서 생명의 은총을 받은 내 생애의 가장 축복된 시간인 것이다.
주님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나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회심의 순간.
주님은 그 순간을 위해서 나를 강권적으로 인도하셨다.
(눅14:23)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주님의 강권하심이 없었다면 나와 같은 자가 어찌 주님의 집에 거할 수 있었을까?
주님은 지금도 강권적으로 주님의 천국잔치에 참여할 자들을 불러 모으신다.
주님은 탕자의 말씀을 하시기 전에 잃어버린 영혼에 대하여 비유로 말씀하셨다.
양 백마리 중에서 잃어버린 한마리의 양과 열 드라크마 중에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잃어버린
한 양이나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를 찿았을때 너무 기뻐서 사람들을 모아서 잔치를 하지 않겠느냐? 이와같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잃어버린 한 영혼을 찿았을때 천국에 있는 의인 아흔 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 기뻐하신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서 탕자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탕자의 비유를 통해서 잃어버린 한 영혼이 어떻게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 오는 지를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지금도 잃어버린 한 영혼을 찿고 계신다.
세상과 짝하여 살고 있는 잃어버린 영혼이 쥐엄열매를 먹다가 스스로 깨닫고 회개하고 주님 앞으로 나오는 영혼을 찿고 계신다.
탕자는 재물을 모아서 아버지의 집을 떠나 세상에 나아간다.
(13)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 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허랑방탕한 삶을 NIV에서는 wild living이라
번역하였다.
어떤 삶이 허랑방탕한 삶인가? 곧
형이 30절의 말씀에서 지적한 것과 같이 무위도식하며 거들먹 거리며 진정한 마음을 주는 사랑이 아니라
돈을 얻기 위해서 갖은 수단과 거짓으로 마음을 꾸미고 몸을 파는 창녀들과 함께 술에 쩔어 취하고 세상에 취한 삶이다.
탕자는 허랑방탕한 삶을 통하여 무엇을 얻었는가?
재산을 낭비하였고 (13), 그 결과 궁핍하여졌고 (14), 먹을
것이 없어서 돼지를 치는 일을 하게 되었는데 (15),
너무 배가 고파서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라도 먹으려고 했지만 정작 주는 자가 없는 지경에 까지 이르렀다 (16).
돈이 있을 때는 많은 이들이 자신의 주변에 있었으며 자신의 밸까지 빼어 줄 것 같이 얄량거리며 가장 친한 친구인듯 했지만, 돈이 다 떨어지고 돼지 치는 곳에 있자 친구들이라 믿었던 그들은 탕자를 마치 돼지처럼 취급하며 먹을 것도 주지
않고 도와 주지도 않는다. 세상은 그를 아무짝에도 쓸모없다고 외면하고 버린 것이다. 비로서 탕자는 아무도 자신을 진정으로
위해 주는 자가 없음을 깨닫고는 자신을 뒤돌아 보게 된다. 땅을 치고 가슴을 쥐어 박으며 원통해하며 후회하지만 상황은 전혀 바뀌지
않는다. 아무도 그 탕자를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 아무도
그에게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 조차도 먹을 것을 주지를 않는다. 얼마나 비참한 상태가 되었는가!
그리고 탕자는 이렇게 말한다.
(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회심의 첫단계는 긍휼의 하나님에 대하여 깨닫는다.
탕자는 자신의 아버지의 집에 있는 품꾼이라도 굶주리지 않고 풍족한 모습을 비로서 깨닫는다. 그동안 모르고 있었던 아버지의 긍휼에 대하여 생각해 낼 수 있음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큰 축복이다.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라도 배를 채우려 하지만 그것마저 없어서 굶주리며 그토록 의지하던 세상은 자신을 버린 바로 그 순간에 탕자는 긍휼의 주님 앞으로 되돌아
갔다. 탕자의 인생 가운데 가장 중요하고 소중한 순간이다. 주님은 그런 상황 가운데 있는 탕자의 마음에 그 동안 새카많게 잊고 있었던
아버지와 끊임없이 자신을 사랑해준 아버지의 사랑에 대하여 생각나게 하신다. 그것이 곧 긍휼의 하나님께서
내게 베푸시는 은혜이다.
회심의 두번째 단계는 나의 죄를 자복하는 것이다.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아마도 탕자는 이 생각을 하며 땅을 치며 통곡을 하지 않았을까?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놓기까지 짝하며 의지하였던 세상은 자신을 철저하게 버렸고 돼지보다 못하게 취급됨을 인식하였을때, 비로서 아무 조건 없이 자신을 사랑해준 아버지의 사랑이 생각이 나서 얼마나 감사하며 미안하며 송구해서 자신의
죄를 자백하며 서럽게 통곡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한다.
나의 죄를 자백하며 땅을 치며 가슴을 치며 통곡하며 울었던 적이 있었던가?
(눅18: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자신의 죄를 아는데 어찌 눈을 들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수 있겠는가. 가슴을 치며 자신의 죄인됨을 용서하시는 주님을 찿는 마음을 주님은 결코
멸시하지 않으신다.
회심의 세번째 단계는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를 분명하게 아는 것이다.
(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내가 어디에 서있는지를 나의 영적인 상태가 어떤 지를 분명하게 아는 것이 우리에게는 필요하다.
내 자신은 나의 죄악됨을 너무나 잘 안다. 나는 감히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라 떳떳하게 부를 수
있는 행동들을 전혀 하지 못했다.
회심의 네번째 단계는 실행에 옮기는 것이다.
(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이에 돌이켜’ 탕자는 비로서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았다.
그리고 자신이 그동안 정이 들고 익숙했던 세상의 죄악됨으로부터 발을 털고는 긍휼의 아버지께로 돌아가서 죄를 자복하고 받아 주면 품꾼으로
살기로 결심을 하고 발걸음을 옮긴다. 그의
인생의 새로운 출발이 시작된 것이다.
회심한 베드로의 경우를 보자.
베드로는 잡혀 가신 주님을 세 번 부인하고서 주님께서 자신을 바라보실 때에 비로서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는 회개하며 심히 통곡하며 영적인
각성을 한다.
(눅22:61-62)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베드로가 왜 심하게 통곡을 하였는가?
베드로는 주님께서 자신을 바라보실때 ‘닭이 울기전에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신 주님의 말씀이 생각이 났다. 결코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다던 자신이 주님을 세번 부인한 것이 너무나 미안하며
또한 주님을 구주로 믿고 따랐던 것이 실은 자신의 어떤 욕심을 이루고자 했던 자신의 진정한 죄악된 모습을 보고는 참을수가 없어 베드로는 심한 통곡을
하였다.
그런데 베드로는 고작 세 번 주님을 부인한 일로 그토록 참을 수가 없어서 심한 통곡을 하였는데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는 모르긴 몰라도 주님을 세번 아니
삼십번 삼백번 이상 부인하였을 것이다. 그런데도 심한 통곡은 커녕 나 잘 났다고 의시대며 나대지 않았던가!
베드로는 주님께서 자신을 보실 때에 회심한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났을때 회심하였다.
나무에 올라간 삭개오를 주님께서 이름을 부르시며 보실때 삭개오는 자신의 참된 모습을 보고 이에 돌이키며 회심한다.
회심할 때 반드시 주님의 임재가 있어야 한다.
주님께서 회심하는 나를 쳐다 보고 계신다.
그리고 수반하는 것이 심히 통곡함이 따른다고 나는 생각을 한다.
진심으로 회심하며 통곡할 때 나의 영혼은 새롭게 태어난다.
육신이 새로이 태어 날 때 아기는 자신의 존재를 알리며 세상에 나왔다고 운다.
육신의 자신의 탄생을 알리며 울듯이 영혼도 새롭게 태어날 때의 기쁨을 알리는 것이 눈물을 흘리며 하는 통곡이라고 믿는다.
며칠이고 몇달이고 몇년이고 주님의 이름만 부르면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사랑을 베푸신 주님께 감사하며 눈물을 흘려 보았는가?
회심하였는가?
가슴을 두드리며 ‘주님 제가 죄인입니다. 저의 죄를
회개합니다. 저의 죄를 용서하시니 감사합니다’ 하며 눈물을
흘리며 심한 통곡을 한 적이 있는가?
뚜렷한 회심의 기억은 없지만 그저 교회에 다니다보니 자연적으로 믿어졌다고 믿는가?
조금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였으니 나는 구원을 받았다고 확신을 할 수 있을까?
인격적으로 임하시는 성령님에 관해 들은 적은 있어서 내게도 성령님은 그저 스쳐가듯이 잠잠하게 임하셨다고 믿는가?
나는 지적인 사람이라 성령께서도 표시가 안나게 임하신 것 같아하며 스스로 위안을 하는가?
세상의 삶과 주일 교회에서의 삶은 완전하게 다른데도 나는 진정한 주님의 자녀라고 말할 수 있는가?
참으로 주님앞에 뻔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는가?
주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내 마음에 계심을 확신하는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
주님을 만나 저 자신의 깊은 곳에 감추어진 죄악된 모습을 돌아보는 ‘이에 돌이켜’의 시간이 있어서 지금 주님 앞으로 나올 수 있었읍니다.
회심의 순간은 저희들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입니다.
회심을 통하여 저희의 영은 새롭게 각성하며 사망을 떠나서 비로서 생명으로 옮겨집니다.
스스로 돌이킬 수 있도록 제 마음을 인도하시는 주님의 은혜에 감사합니다.
돼지처럼 탐욕스럽게 세상과 짝하며 살다가 결국은 세상이란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게 해 주시는 시간입니다.
잃어 버렸던 한 영혼이 세상의 탐욕과 저주로 부터 벗어나 영원한 생명으로 전환하는 축복의 순간입니다.
저에게도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새 생명을 찿을 수 있도록 스스로 돌이키는 회심의 시간을 허락하여 주셨으니 주님의 은혜가 차고도 넘치나이다.
회심의 순간을 통하여 언제든지 주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특권을 주셨읍니다.
저에게는 영원한 생명의 증표가 제 마음속에 각인이 되어 있읍니다.
주여, 주님의 이름을 아는 자들 모두가 회심의 순간들을 경험하였으면 합니다.
저들 마음속 깊이 각인되는 회심의 순간들이 있었으면 좋겠읍니다.
베푸신 주님의 사랑이 너무가 고맙고 감사하고 송구해서 어쩌지를 못하고 가슴을 치며 울며 불며 통곡하는 영혼의 탄생의 시간들을 통과하였으면
합니다. 자신을 돌이키는 순간은
저희들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시간입니다.
우리 모두가 구원받아 주님의 이름이 마음속에 새겨진 천국백성으로서 영생을 소유한 자들이기를 간구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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