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의 첫머리에서 여호와께서는 우리 인생들에게 매우 중요한 두 가지의 질문을 하신다.
당신은 왜 하나님을 섬기는가? 그리고 죽음을 생각해 보았는가?
왜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며 경외할까? 왜 교회에 갈까?
나의 육신의 죽음 후의 구원의 소망을 위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올바른 태도일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바로 지금의 현실의 안주를 위해서 하나님을 섬기지나 않는가!
사탄은 우리를 너무나 잘 안다. 인생들이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나의 어떤 곳이 연약한지를 꽤뚫고 있다. 하나님을 섬기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가 사탄의 지적대로 물질의 풍요로움과 자녀들의 축복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섬기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의 두드러지는 특징이 하나 있는데 혹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않으면 물질의 풍요로움이 해를 입지 않을까 혹은 자녀들에게 어떤 잘못된 일이 생기지나 않을까 생각을 한다. 교회에 빠지면 혹 재정적으로 어려움이 닥치지 않을까 혹은 자녀가 해를 입지나 않을까 염려를 한다. 사탄은 우리의 약점을 잘 알기에 물질을 갖고 혹은 자녀를 갖고 시험을 한다. 교회에서도 하나님을 잘 믿었더니 큰 물질과 명예와 자녀가 잘 되는 복을 받았다는 간증에 더욱 관심을 갖는다. 하나님의 축복을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풍요로움으로만 제한을 하려고 한다.
하나님을 잘 섬기면 복을 받아 물질적으로 풍요로움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섬기는가?
나의 기업과 가정에 물질적인 축복이 임하는 것을 원해서 하나님을 섬길까?
혹 하나님을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얻기 위해서 섬긴다면 다시 생각해 보자.
풍요로움의 축복을 받기 위해 하나님을 섬겼기 때문에 까닭없고 이해할 수 없으며 감당할 수 없는 불행이 닥쳤을때 하나님을 원망하며 멀리하려고 한다. 하지만 욥기에서 보듯이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불행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욥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의인이다.
그런데 욥은 까닭없는 불행을 겪는다. 모든 소유물을 순식간에 잃고 그의 사랑하는 모든 자녀들까지 한 날에 잃는다. 참으로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비참한 일을 겪는다. 그런 욥을 보고 사람들은 겉으로는 의인인듯 보이지만 실은 우리가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죄를 지었기에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셨다고 단정을 하며 당치도 않는 정죄를 하며 욥을 몹쓸 죄인 취급하며 멀리한다.
우리 한번 생각해보자. 만일 욥이 겪은 모든 것을 잃어 버리는 불행이 어느날 갑자기 내게 임했다면 나는 어떨까? 비참한 상태인 나를 사람들은 멀리하고 사람 취급을 하지 않을 것이다.
흔히 사람들은 남의 불행을 보고 말들을 한다.
저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아서 불행하게 되었데.
저 사람은 자신의 죄악으로 인해 벌을 받아 죽을 병에 걸렸데.
저 사람은 교회를 멀리 하더니 쫄딱 망했데.
따뜻한 위로를 해주지 못할지언정 제발 다른 이의 불행을 보고 함부로 말하지 말자. 겉으로는 위로의 모습을 보이지만 속으로는 자신의 잣대로 몹쓸 죄인 취급을 하지 말자. 망했다고 그 사람을 상종하지 못할 사람으로 낫게 보며 업신여기지 말아야 한다.
어떤 이들은 실제로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곤고함을 겪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이는 그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이지 내가 그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며 상관할 바가 못된다.
또 욥과 같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어떤 의인들은 모든 것을 잃을만큼 죄악을 범하지 않았지만 고통 가운데 있는 이들도 있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 안에서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일 수도 있다. 고난 가운데 있는 이가 혹 욥과 같이 하나님께서 의인으로 인정한 이들도 있을 것이니 제발 함부로 대하지 말자.
욥의 친구들은 사리판단도 현명하고 세상의 경험도 많고 성공한 자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욥을 판단을 한다. 위로한다고 하지만 실은 욥의 내면의 형편은 볼 수가 없기에 자신의 상식으로 굳어진 냉혹한 의견을 내세운다. 인생의 경험과 지식으로 가늠할 수 없는 하나님을 자신의 잣대로 판단하여 욥을 곤고함을 받아 마땅한 죄인으로 몰아가며 욥에게 상처를 준다.
하나님은 이를 기뻐하시지 않으신다.
그래서 여호와는 욥기의 마지막 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욥42:7) 내가 너와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르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라….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 너희가 우매한 만큼 너희에게 갚지 아니하리라.
인생들은 의인을 함부로 대해서는 않된다.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존재물은 온 우주에 아무 것도 없다. 인생들은 곁에 있는 의인을 생명의 은인으로 알아야 한다. 비록 그가 초라해 보이고 없이 보이지만 그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의인이다. 의인인 욥이 찬구들을 위하여 중보할 때 하나님께서 들으신 것과 같이 의인인 그가 나를 위하여 중보한다면 회복이 임할 수 있기 떄문이다.
(악5:16)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겉으로는 초라해 보이고 아무 것도 없이 보이는 이가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의인일 수 있다. 의인이 인생의 곤고함을 위하여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응답하신다. 언제 우리는 의인을 만날지 알 수 없다. 그런데 실은 우리 주위에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의인들이 있는데 알아 보지를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람의 깊은 내면을 보지 못하고 겉에 보이는 모습으로 판단하는 것에 어려서부터 습득이 되었기 때문이다.
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말자. 그들 역시 나처럼 하나님께서 소중하게 여기시며 사랑하는 존재들이다.
요사이 갑질을 하는 자들에 대한 news들이 많이 나온다. 왜 그들은 사람을 함부로 대하며 갑질을 해댈까? 왜냐하면 사람을 물질적인 관점으로만 보고 판단해서 그럴 것이다. 그런 갑질을 하는 자들의 마음에는 세상적인 소욕으로 가득차 있다. 갑질을 하는 자들이여 제발 회개하여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으로부터 사함을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눅6:37)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성령이 내주하는 자들은 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않고 존중을 하며 주님의 사랑을 나누어 준다.
주님을 믿는 자들은 먼저 온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지 말아야 한다. 내가 정죄하는 것으로 나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정죄함을 받기 떄문이다. 먼저 사람이 사람답게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한다. 성령 충만함으로 우선 내 자신이 온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아무리 목사나 장로나 집사나 사람이 올바른 사람이 되어 있지 않다면 본인 뿐 아니라 그가 속해 있는 가정이나 교회는 어려움을 겪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 한가지 생각해 볼 것은 바로 죽음이다.
우리의 삶은 이해하지 못하는 일들이 태반이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을때 나를 도와줄 평생의 은인을 만나기도 하고 혹은 나에게 해를 끼칠 원수를 만나기도 한다. 갑자기 사고를 당해 죽을 수도 있으며 큰 부상을 당해 평생을 고생하기도 한다. 전혀 생각지도 않았는데 고칠수 없는 병을 만난다. 사업이 어려워져 먹고 사는 것에 전전긍긍하기도 한다. 그토록 잘 되기를 원하는 자녀들이 나의 뜻과는 다른 길을 가기도 한다. 그러면서 하나 깨닫는 것은 그래 그 길이 너의 인생인데 그저 잘 되를 간구를 한다.
내가 어찌해 볼 수 없는 인생의 길에서 나는 무엇을 보고 만났는가? 내가 원하는 축복이란 무엇인가?
참으로 우리의 인생길은 짧다. 시간은 활을 떠난 화살과도 같이 빠르게 지난다. 어느새 시간이 이처럼 흘렀다. 많은 것들을 보고 경험했지만 올바른 사람이 되려면 아직도 나는 한참이나 부족하고 모자르다. 죽기전까지도 풀지 못할 숙제인듯하다.
(욥1:21)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은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전5:15) 그가 모태에서 벌거벗고 나왔은즉 그가 나온 대로 돌아가고 수고하여 얻은 것을 아무것도 자기 손에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사탄의 지적대로 대부분은 하나님을 물질의 축복을 주시는 절대자로 섬긴다.
육신이 갈급해하는 물질 저 너머의 축복을 바라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주신다. 나의 생명도 주셨으니 또한 언젠가는 반드시 거두어 가신다. 이 땅에 올 때 욥이나 전도서의 고백과 같이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으니 알몸으로 다시 돌아가게 된다. 그런데도 우리는 살면서 더 많은 것을 가지려고 아둥바둥댄다. 열심으로 애를 써서 얻었지만, 죽음의 문턱을 넘을 때에 가졌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아무 것도 가지고 갈 수 없는데도 말이다.
욥기의 이 말씀을 보면서 죽음에 대하여 생각을 한다.
욥이 이와같은 고백을 하기 전에 많은 이들이 죽었다. 욥의 열 자녀들과 많은 종들이 하루만에 죽었다. 사랑하는 자녀들과 사람들의 죽음 앞에서 욥은 얼마나 황망하였을까? 한 날에 사랑하던 자녀들과 교분을 쌓으며 아끼던 종들을 잃어버린 욥의 마음은 애통함으로 찢어들듯 아팠을 것이다. 멍하니 하늘을 쳐다 보며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을 것이다. 욥처럼 가까이서 사랑하던 이들의 많은 죽음을 한 날에 경험한 이도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알던 많은 이들이 죽었다.
장례식을 가서 보면 어떤 이들은 평안한 모습으로 관 안에 누워있는 이들이 있고, 또 어떤 이들은 병으로 인해 삐쩍마른 모습으로 안스러이 누워있는 이들도 있다. 그런데 한가지 공통점은 아무도 어떤 물질적인 것을 가지고 죽음 저너머의 길을 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나 또한 얼마후에는 그들처럼 관에 누워 있을것이다. 나는 어떤 모습으로 누워있을까? 묘지에 가서 비석을 보면 어떤 이들은 나이 들어 죽은 이들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얼마살지 못하고 요절한 이들도 많다. 그들 각각의 사연을 알 수는 없지만 죽음은 원하든 윈치않든 생명의 호흡을 하고 있는 우리가 언젠가는 반드시 겪어야 하는 하나의 관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언젠가는 내게 닥쳐올 죽음을 잘 준비해야 한다. 죽음은 두려운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세계로의 여행을 의미한다.
어떤 이들은 죽음 저너머의 삶을 부정한다. 죽음 후에는 깨닫게 되겠지만 그 때에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후회로 가득할 것이다. 또한 죽음 후에는 천국과 지옥의 삶이 있는데 어느 곳으로 가게 될 지는 내가 호흡이 있는 동안 겪으며 어렴풋이나마 알게 된다. 죽기전까지 나는 어떤 삶을 사는 것이 마땅한가를 주님께 물어보자. 주님은 반드시 답을 주실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을 믿는 자들은 주님께서 사랑하셔서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생명의 길을 열어 주신 자들이기 때문이다.
모든 재물과 자녀들을 한꺼번에 잃어 버린 후에 욥이 한 고백과 같이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취하시는 이도 여호와이시니 여호와여 영광을 받으시고 저의 찬송을 받으소서’ 하고 나 또한 고백을 할 수 있을까? 나의 모든 것을 잃어 버렸다면 나 또한 욥과 같은 고백을 하며 여호와께 찬송을 드릴 수 있을까?
나의 생명을 주시고 또한 거두시며 주관하시는 여호와께 우리의 찬송을 드리자.
(딤전6:7-8)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그리고 어려운 일을 허락하신 주님께 감사하자. 어려운 일 저너머에는 또 다른 축복이 기다리고 있다.
(살전5:18)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에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
욥기를 통하여 불행은 갑자기 임하여 모든 것을 잃어 버릴수도 있음을 깨닫게 하셨읍니다.
불행을 겪고 있는 자들에게 위로를 한답시고 내 기준으로 그를 판단하지 않도록 하옵소서. 저 역시 이해하지 못하는 불행을 만날 수도 있읍니다. 지금은 불해을 겪고 있는 그는 어쩌면 저보다 하나님꼐서 인정하시는 의인일 수 있읍니다. 의인을 함부로 대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으신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읍니다. 부지중에 의인을 잘못 대하여 하나님의 노여움의 진노를 받지 않기를 간구합니다. 사람들을 대할 때 그 사람의 외모를 보고 형편을 보고 판단하지 않게 저의 마음을 다스려 주옵소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의인의 반열에 올라 만나는 이들에게 복을 비는 중보자의 사명을 감당하기를 간구합니다.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이 이 땅에 태어나 얼마후에는 아무것도 갖고 가지 못하고 죽음의 문을 넘어 가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수 많은 인생들이 태어나고 죽었지만 어느 누구도 애지 중지하던 자신의 것을 가지고 간 자는 아무도 없었읍니다. 손에 아무 것도 쥐지 못하고 그저 흙으로 돌아 갈 뿐입니다. 이 땅에서 살면서 아둥바둥 거리며 살지 않기를 간구합니다. 하루 하루의 삶에 만족하며 늘 감사하게 하옵소서. 상황이 어떠하든지 여호와께 감사할 수 있는 영혼은 참으로 복을 받은 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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