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7월 29일 일요일

십자가의 도 그리고 회심

(고전1:18-25)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리라.

종교나 국가나 단체를 대표하는 상징들이 있다.
연꽃은 불교의 상징이다. 정삼각형 두개를 위아래로 합친 모양은 유대교의 상징이다. 초생달은 이슬람교의 상징이다. 망치와 낫은 소련을 상징하며, 독수리는 미국을, 일명 swastika라는 모양은 Hittler의 나치를 상징한다. 그리고 십자가는 기독교의 상징이다. 우리들은 어디를 가든지 십자가를 볼 수 있으며 많은 이들이 십자가 목거리를 하여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나타낸다.

십자가는 예수님을 상징한다.
기독교에서 십자가가 없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차를 타고 가다 보면 산 위에나 넓은 땅 위에 하얀 십자가가 세워져 있는 것을 볼 때가 있다. 그 땅의 주인이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알리려고 십자가를 세웠을 것이다. 십자가가 세워져 있는 교회를 볼 때가 있는데 왠지 마음이 포근해진다. 어둠이 임한 땅을 비추는 교회의 십자가 불빛. 동이 틀 무렵에 들리는 교회의 종소리. 점점 잊혀져 가는 기억이 되어 가고 있다.

십자가가 없는 교회.  
교회의 안과 밖에서 십자가가 사라진 교회들이 너무나 많다. 교회 밖에서 십자가가 없어져 가며 교회 안에서는 십자가가 세워져 있던 자리에 커다란 screen이 자리잡고 있어 주님의 사랑과 희생을 생각케 하는 십자가 대신에 목사님을 비롯해서 예배를 섬기는 사람들의 얼굴이 크게 비치며 예배의 초점을 흐리게 한다. 목사님이 곧 십자가를 진 예수 인듯 착각하게 한다. 십자가가 우상 숭배라고 십자가를 제거하고 있는데 과연 십자가가 우상인가 깊이 고려해 보아야 한다  

(벧전2: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답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사도 베드로는 벧전2:24에서 친히 십자가에 달려 그 몸으로말하지 않고 나무에 달렸다고 표현을 한다. 십자가는 우상의 대상이 아니며 우상화해서는 않된다. 하지만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나와 사랑하는 부모와 자녀와 이웃들을 살리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모든 죄를 담당하시고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 너무나 고마우신 주님이 기억이 나며 생각나지 않던가.

온 우주의 창조주라는 사람이 십자가에서 자신도 구하지 못하고 비참한 죽음을 통하여 모든 인간이 구원을 얻는다는 Message는 분명히 세상의 표적과 지식을 요구하는 세상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미련한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불신자들은 한 사람이 십자가에 달려 죽음으로 온 인류를 구원하며 그것을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진리를 믿을 수 없을 뿐 아니라 불합리하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세상에 속한  자들은 세상의 기준과 상식과 지식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치욕스러운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죄와 곤경에 처한 인간들에게 찿아오신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에게는 이 미련한 십자가의 도는 기쁨의 소식이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받은 자들에는 미련하게 보이지만, 십자가의 도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구원함을 받은 자를 살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고린도서는 사도바울이 3차 전도 여행중 에베소에 머물며 분열의 조짐을 보이는 고린도 교인들을 권면하며 위로하며 강건히 세워지기를 원해서 쓴 편지이다. 세상의 추구하는 것을 헛된 것으로 여기며 오직 십자가 만을 자랑하라고 권면을 한다.

우리들은 십자가의 참된 의미를 잘 모르고 지내는 적이 많이 있다.
사도 바울 당시의 십자가 형은 가장 잔인한 사형 방법이었다. 십자가에 달린 자는 오랜 시간 동안 극도의 고통을 느끼며 죽는 형벌이었다. 로마는 살인자, 반란자, 외국 죄인, 혹은 죄를 범한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는 노예들에게 십자가형을 가했다. 십자가는 세상으로부터 소외된 자들이 받는 극형이었다.

아무런 죄가 없으신 주님께서는 종교 지도자나 세상 권세자가 보는 자신들과의 관점과 다르다는 이유로 고통과 멸시와 천대와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강도들과 함께 죽으셨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후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주님을 부인하면 살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하지 않고 기꺼이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따라 기뻐하며 죽어갔다.

무엇때문에 초대교회 성도들은 기뻐하며 기꺼이 순교를 할 수 있었을까?
십자가가 그들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찿았기 때문이다. 연약한 육신의 죽음 저너머의 영생의 소망의 가치가 얼마나 소중한 지를 알았던 것이다.

사도바울은 고전2:2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또 갈6:14에서는 내게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라고 고백하였다. 우리 또한 세상것들은 배설물로 여기며 오직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성도가 되기를 간구한다.

 
십자가의 부활의 능력이 임하기 위해서는 회심해야 한다

주님은 자신을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신다.
(11:25-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과 같이 우리의 흙으로 돌아간 육신이나 살아서 주님을 맞이한 자들의 육신은 부활하여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거하게 될것이다.
(고후13:4)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

만일 구원을 받지 못하였다면 나의 영혼은 육신의 죽음 후에 영원한 멸망 가운데 거하게 된다.  하지만 믿음을 지켜 구원을 얻어 흙으로 돌아간 자들이나 살아서 주님을 맞이한 자들은 주님께서 부활하신 것과 같이부활하여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거하게 될것이다.

 
부활의 능력이요 생명의 능력이 내게도 임하게 위해서는 반드시 나에게 회심이 임해야 한다. 십자가의 사건을 믿게 되면 사람들에게는 회심이 임하게 된다. 회심은 사람들을 변화시킨다. 그들의 삶의 방식이 바뀔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회심한 자들을 주님의 자녀답게 변화시키시기 떄문이다. 우리들의 주변을 보면 회심하여 삶이 모습이 완전하게 바뀐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되며, 회심의 사건을 결코 부인할 수 없다. 기억에도 희미라며 미적 미적한 회심의 사건은 없다고 생각한다.

(23:42)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떄에 나를 기억하소서
주님과 함께 십자가가에 달린 두 명의 행악자 중에 하나는 죽음의 직전 주님을 만나 회심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비록 십자가에 달려 원치 않는 죽음을 맞이했지만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것은 그의 인생 중에서 가장 축복된 순간이었다. 평생 악한 짓만 행하였던 자가 죽음 바로 직전에서 주님을 만나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심함으로 모든 죄를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어 죽음 후에 주님과 함께 할 수 있었다. 

(26:75)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 부인하고서 주님께서 쳐다 보시자 자신의 죄악을 깨닫고는 심히 통곡하며 울었다. 그 순간이 바로 회심의 시간이었다. 회심의 사건을 통하여 베드로는 주님의 자녀로서 거듭날 수 있었고 주님을 사랑하며 또한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이 모인 교회의 반석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다.

사도 바울은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하러 기세등등하여 올라가던 중에 예수님을 만나던 순간 너무나 강렬한 빛이 임하여 눈이 멀었다. 그리고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하는 주님의 음성을 들은 그 순간이 바로 사도 바울을 있게한 회심의 순간이었다.


나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는 회심의 사건이 물에 물 탄듯 흔적도 없이 생각도 나지 않게 슬그머니 넘어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회심한 후에 몇날 몇달 몇년을 나를 구원하신 주님의 은혜에 감격해서 주님의 이름만 불러도 들어도 나를 살리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주님이 너무나 고맙고 감사해서 눈물로 범벅을 한다. 눈물이 전혀 없던 나를 눈물이 많은 나로 바꾼 회심의 사건을 어찌 기억할 수 없을까. 지금도 나의 삶을 송두리채 바꾼 그 때의 일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회심의 사건이 기억이 나지 않다거나, 눈물이 찔끔만 나왔다거나, 막연하게 구원을 얻었겠지 하는 자들은 진정으로 회심의 사건을 통하여 주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내 안에 계시는지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저 막연하게 구원받았겠지 혹은 교회에 출석한다고 해서 구원은 절대 얻어지지 않는다. 교회에서 열심으로 봉사하고 헌신한다고 해서 천국에 가지를 못한다. 아무리 목사, 장로, 권사, 집사라 할지라도 십자가의 도의 구원의 부활의 능력이 임하지 못한 자들은 언젠가는 반드시 임할 죽음 후에는 돌이킬 수 없는 엄청난 후회와 절망만이 있을 뿐이다.

회심의 사건은 나를 뒤흔드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사건이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회심의 사건이 어찌 자신도 알지 못하게 슬쩍 지나갈거라고 생각을 하는가. 나를 뒤흔드는 회심의 사건을 통하여 십자가의 부활의 능력이 임하여 구원을 얻는다.

십자가의 주님을 만나 회심하게 되면 불신자는 독실한 그리스도인이 되며, 부도덕적인 사람은 순결해지며, 부정직한 사람은 정직해 진다. 악한 행실에서 벗어나며, 덕을 쌓으려고 몸부림을 한다.  교만하고 자기 만족에 빠져 있던 자가 자신의 무가치함을 깨닫고 겸손해 지려고 한다. 이러한 변화는 십자가의 도가 이끈 것이며, 하나님의 능력인 것이다. ‘더 이상 죄가 저의 주인이 아니며 저는 이제 죄를 범하는 것이 싫습니다. 때로 저를 가두어두었던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되었읍니다하고 감사의 고백을 드릴수 밖에 없다.   

이제는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갈수록 우리는 행복을 느낀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기뻐하기 때문이다. 형용할 수 없는 어떤 능력에 의해 견고하던 내가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무엇은 바로 하나님의 능력인 십자가의 도가 내 안에 새로운 힘을 부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십자가를 온전히 보기 전에는 절망과 좌절과 패배함이 나를 억눌렀지만 십자가에 달리셔서 피흘리시는 주님을 보고 그 손을 만짐으로 우리들은 다시 살아 나게 된다. 십자가의 도는 나의 영혼을 살리고 잘 자라도록 성장시킨다.  

매일 십자가를 붙드십시다.
양팔로 십자가를 끌어 안으십시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을 꼭 붙잡고 놓지 마세요.
순간 순간 새롭게 십자가에 나아와 하나님의 능력을 입으세요.
전능하신 주님의 보혈을 믿으세요.
주변의 사람들에게 주님의 보혈을 전하여 그들 또한 회심하여 변하여 새 사람이 되는 기쁨을 같이 누리십시다.

십자가는 곧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십자가는 반드시 승리합니다  
십자가는 예언의 성취이며 완성입니다.

십자가의 도는 하나님의 사랑이며 우리들의 죄를 속죄하시고 화목케 하신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십자가의 사건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내주하시며 부활하신 주님과 같이 나 또한 부활의 능력을 입을 것을 소망하며 믿습니다.  

(22:17)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거저 받는 용서,
거저 받는 의로움,
완전한 씻김,
완전한 구원.

이러한 것들은 우리와 같이 보잘 것 없는 자들이 그리스도 예수를 믿고 자신을 주님께  맡기는 순간 우리들에게 주어지는 은혜의 선물들이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주님의 보혈을 믿으세요.
십자가에서 행하신 주님의 속죄를 믿으세요.
십자가에서의 예수님의 희생을 무시하거나 거절하지 마세요.
부활의 주님이요 생명의 주님과 늘 동행하는 놀라운 축복을 간구하세요.

늘 우리들 마음속에 십자가의 참된 의미를 간직하시를 축원을 드립니다. 고난의 땅에 살지만 죄를 지을 때마다 죄를 깨닫게 하시는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회개하여 용서를 구하며 장차 영원토록 천국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소망을 품고 승리하는 삶을 살아 가도록 합시다.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

구원을 얻게 하는 생명의 길은 모두에게 주어졌읍니다. 그렇지만 생명의 좁은 길을 택하는 자들보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크고 넓은 사망의 길을  택하는 자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에서 반드시 만나야 할 것이 바로 십자가의 도의 능력이 임하여야 합니다. 십자가의 능력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을 온전하게 만나 십자가의 도의 능력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회심의 사건이 있어야 합니다. 회심의 사건을 통하여 죽어있던 저의 영이 살아나는 거듭남의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 말씀과 같이 바람이 임의로 불어 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성령으로 난 자는 자신 안에 성령께서 임재하심을 느낄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아직도 회심의 사건을 경험하지 못한 영혼들이 저의 주변에는 너무나 많이 있읍니다. 저의 후손들과 형제 자매 그리고 이웃들 가운데 아직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한 이들이 있읍니다. 주여 긍휼함으로 저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주님을 알지 못하는 그의 후손들을 후대하시며 구원의 축복의 길로 인도하셨읍니다. 주님을 알지 못하는 저의 후손들에게도 같은 은혜를 베푸소서. 그들의 인생길에서 주님을 만나 회심의 사건을 경험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제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는 제가 연약하여 넘어지고 또 넘어지지만 저를 다시 일으켜 세우시고 십자가의 도의 능력으로 천성에 다다르게 하시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저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십자가의 도의 능력인 부활이요 생명의 능력을 저에게 베푸신 주님의 은혜가 참으로 큽니다.

주님 목이 곧은 저를 통하여 영광 받으소서. 

저와 저의 후손들을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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