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6:35-44) 39. 제자들에게 명하사 그 모든 사람으로 떼를 지어 푸른 잔디위에 앉게 하시니
오병이어의 기적의 사건은 사복음서 모두 기록된 중요한 말씀중의 하나이다. 복음서의 기자들은 주님께서 행하신 이 기적의 사건에 깊은 감명을 받아 자신의 복음서에 기록을 하였다.
주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서 무엇을 보여 주시려 했는가?
주님은 이 오병이어의 사건을 통해서 자신이 곧 구약의 출애굽때에 만나를 주신 분이시며, 또한 자신이 곧 생명의 떡이심을 나타내려 하셨다.
그런데 제자들이나 사람들이나 주님의 오병이어의 기적을 잘 못 이해하였다.
5,000명을 먹인 오병이어의 사건이나 4,000명을 먹인 칠병이어의 사건을 본 후로 제자들이나 군중들은 주님을 자신의 굶주림을 해결할 분으로 생각하였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본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더 이상 굶주리지 않아도 될 것을 기대했다. 사람들이나 제자들은 주님을 자신이 굶주릴때 언제든지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서 양식을 해결하실 수있는 구원자로만 생각하였다. 그래서 군중들은 자신의 배곺음을 해결할 수 있는 왕으로서 예수님을 세우려 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의 우리들 대부분 역시 오병이어의 기적을 단지 물질적인 풍요로움에 초점을 맞추려고 한다. 흔히 교회에서 교회건물을 중축하거나 어떤 project를 할 때 “오병이어”의 theme을 설정한다. 그리고 fund를 마련하기 위해 강조하는 것이 비록 적은 예물이지만 그 예물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되면 오병이어의 기적이 되어 많은 것으로 채워질 것이라고 한다. 또한 성도들은 예물을 드릴 때 비록 적게 드리지만 오병이어의 기적이 되어서 차고 넘치도록 부어주실 것이라 기대를 한다. 어떻게 보면 참으로 얄팍하고 공짜만 바라는 염치없는 사람과도 같다.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제자들은 보이는 것과 물질적인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몰려든 군중들이 하루종일 먹지 않아 배고파할 때 예수님께서 너희들이 그들을 돌려 보내지 말고 먹여라 할 때 제자들은 많은 인원을 먹이기 위해서는 이백 데나리의 재물이 필요하다는 것을 계산할 수 있었다.
대다수의 우리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잘못이해하고 있다.
왜냐하면 제자들이 그렇듯이 우리 또한 마음이 둔하여져있기 때문이다 (막6:52).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어찌하여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말씀하셨다.
주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서 육신적이며 물질적인 떡 뿐 아니라, 영적인 생명의 떡에 대해서도 말씀하시기를 원하셨다.
마가복음을 통해 오병이어의 사건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를 살펴보자.
1. 장소 (35)
(막6:35) 이 곳은 빈들이요
(눅9:12) 우리가 있는 이 곳은 빈 들이니이다
(마14:19)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막6:39) 제자들에게 명하사 모든 사람으로 떼를 지어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하시니
(요6: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시니 그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이 말씀들을 종합해보면 오병이어의 사건이 일어난 곳은 “인가와 떨어진 빈들이고, 떡과 물고기를 먹은 장소는 푸른 잔디가 많이 나 있는 곳”이라 할 수 있다.
빈들은 황막하고 황폐한 광야를 말한다.
원어에서 빈들은 “버림받은 곳, 고독한 곳, 황막한 곳, 황폐한 곳”의 뜻을 가지며 “광야”로도 번역이 된다.
이스라엘은 유독 돌들이 많이 있다. 아마도 이 빈들도 돌들이 가득차 있는 곳일 것이다. 그리고 성경은 유독 이 사건이 일어난 곳은 푸른 잔디가 많이 깔려 있는 곳이라고 친절하게 우리에게 부연하여 설명해 준다.
성경은 참으로 우리의 생각의 범위를 넓혀준다.
그냥 배불리 먹었다고해도 이해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도, 예수님께서 축복하여 나누어준 떡과 물고기를 먹을 수 있도록 사람을 50명씩 100명씩 나누어 앉게 하신 장소를 “푸른 잔디가 많이 있는 곳”이라고 부연해서 설명한다.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쉬면서 먹을 수 있는 곳을 죽어 있는 잔디가 아닌 살아 있는 푸른 잔디가 많이 깔려 있는 푹신한곳으로 인도하셨다.
세심하신 주님은 우리가 편히 먹고 쉴 수 있는 곳으로 인도하신다.
그것도 주님은 세심하게 돌과 흙이 있는 거칠고 황량한 곳에서 푸른 잔디가 많이 있는 곳으로 인도하신다.
시23편의 말씀이 떠오르지 않는가!
(시23) 그가 나를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도다
우리는 때로는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추우며 또 돌이 많은 빈들과 같은 황량한 곳에 거하여야 한다. 그렇지만 그곳은 잔디가 많이 깔려 있는 안락한 장소이다.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볼 때 내가 거하는 곳이 돌이 가득차고 바람이 불면 먼지가 날라 다니는 황량한 빈들이지만, 실은 푸른 잔디가 많이 깔려 있어 평안하게 앉을 수도 누워 잘 수도 있는 안락한 곳이다.
주님은 우리를 늘 잔디가 있는 평안히 거할 수 있는 곳으로 인도하신다.
그곳에서 우리는 허기진 배를 채울수 있고, 피곤한 몸의 휴식을 취할 수 있다.
주님은 나의 머리터럭이 몇개가 있는지를 아신다. 주님은 늘 내가 잔디가 많이 깔려 있는 안락한 곳으로 인도하신다.
내가 지금 있는 곳이 황량한 곳인가?
그런 나에게 주님은 말씀하신다. “너는 염려하지 말라.”
주님은 곧 나를 잔디가 많이 깔려 있는 안락하고 평안한 곳으로 인도하신다.
아니 어쩌면 지금 내가 있는 곳이 이미 잔디가 많이 깔려 있는 주님의 평강이 임하는 축복받은 장소일 것이다.
2. 재물 (37)
(막6:37)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
남자 5,000명과 그의 가족을 먹이기 위해서는 200데나리온이 필요하다.
육신에 필요한 떡을 먹기위해서는 떡을 살 수 있는 재물이 필요하다. 또한 먹고 입고 자기 위해서도 재물이 있어야 한다. 재물은 우리의 삶에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며 필요하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 땅에서 필요한 재물을 허락하신다.
(마6:26-28)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고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들의 꽃도 키우시고 공중의 새도 먹이시는 하나님.
그러므로 주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두려워 말라” 말씀하신다.
주님은 우리가 무엇이 필요하며 무엇이 불필요로 하는 지를 알고 계시기에 때에 맞추어 주신다.
중요한 것은 이 재물을 어떻게 선용하는가에 있다.
자신의 이익만을 쓰기 위해서 모아 두게 되면 “내가 오늘 너의 생명을 취하면 그동안 네가 너를 위해 모아두었던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주님은 말씀하신다.
주님께서 나에게 재물을 주신 이유는 그 재물을 나를 위해서도 쓰지만 나의 이웃들을 위해서도 잘 쓰라고 주신 것이다.
자신의 것을 이웃을 위해서 나누어 주는 것을 주님은 기뻐하신다.
나누어 주는 삶.
이는 곧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두가지 계명인 “네 하나님을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사랑하고,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를 실천하는 삶이다.
3. 질서 (40)
(막6:40) 떼로 백 명씩 또는 오십 명씩 앉은지라.
성경은 성인남자가 약 5,000명이라 했으니 가족까지 합치면 약 20,000명. 주님은 이들에게 양식을 나누어 주실 때 50명 100명씩 나누어 앉게 하셨다.
주님은 군중들을 질서있게 앉게 하셨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다.
(고전14:33)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우리가 있는 곳에는 질서가 있어야 한다.
가정의 질서
가정의 질서를 잘 말씀하고 있는 대표적인 성경은 에베소서에 기록되어 있다.
가장 기본적인 단위인 가정에서부터 질서가 있어야 한다.
가정에서 질서가 무너진다면 하나님을 올바르게 섬길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가정을 통하여 하나님을 섬기며 사랑하는 법을 배우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가정의 질서를 제대로 지키지 못하면서 하나님을 제대로 섬긴다고 제발 말하지 말자.
사회의 질서
(딛2:9) 종들은 자기 상전들에게 범사에 순종하여 기쁘게 하고 거슬러 말하지 말며
(롬13:1) 너희는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교회의 질서
(고전14:40) 모든 것을 품위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
4. 만족함 (42)
(막6:42) 다 배불리 먹고
사람들은 배불리 먹기를 원한다. 그것이 인간의 본능이요 짐승들의 본능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자신만을 위하여 게걸스럽게 먹으려고 한다면 그는 짐승과도 같다고 말을 한다. 이제는 그러한 모습에서 벗어나야 한다. 나 홀로 배불리 먹겠다고 하는 생각을 이제는 내려놓아야 한다. 그것은 결국은 썩어 없어져 버릴 허망한 것에 헛된 소망을 두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어 물질적인 축복을 받기를 갈망한다.
그래서 예수님을 잘 믿었더니 부자가 되었다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진 간증을 듣기를 좋아하며 그 간증을 듣고 자신도 예수님을 잘 믿어 부자가 되려고 한다.
하지만 그런 육에 속한 떡이나 재물은 결국은 썩어 없어져 버리는 헛된 것 뿐이다.
(요6: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만나는 하나님께서 출애굽당시에 선민들에게 날마다 주신 삶의 양식이다.
하나님이 주신 양식인 만나를 매일 먹었어도 그들 모두는 결국 죽었다.
우리 또한 아무리 주님이 주신 육의 양식을 먹는다 해도 결국은 죽는다.
아무리 재물이 많아도 사람은 결국은 죽으며 그리고 그처럼 할 짓 못할 짓해가며 남의 손가락질 받으며 애지중지하며 모은 재물을 단 한푼도 이세상을 떠날 때 가져갈 수 없다.
만나를 먹은 이스라엘 백성은 결국은 모두 죽었다.
하지만 하늘에서 내려오신 산 떡이신 예수님을 먹게 되면 영원히 죽지 않게 된다.
주님은 우리에게 결국은 썩어져 버릴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먹으라고 말씀하신다.
(요6:26) 너희가 나를 찿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주님은 이 오병이어의 사건후에 자신이 생명의 떡이라 말씀하신다.
(요6:48) 내가 곧 생명의 떡이라.
사람에게는 두 가지 떡이 필요하다.
하나는 육신을 위한 떡이고 다른 하나는 영혼을 위한 떡 곧 생명의 떡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이 땅에 사는 동안 육신을 입고 있으며,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갈 준비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주님은 우리의 삶에 필요한 육신의 떡을 공급하시는 분이시며 또한 생명의 떡 또한 우리에게 공급하셔서 영원한 생명을 갖게 하시는 분이심을 말씀하신다.
삶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주님을 믿는다면 진정으로 변화해야 한다.
모든 삶의 중심에 주님이 계신 영적인 삶으로의 변환을 해야 한다.
영생하도록 있는 영의 양식을 배불리 먹고 성장해야 한다.
(마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이요.
그리고 우리 주님을 믿는 성도들은 하박국선지자의 고백처럼 외양간에 소가 없어도 땅에 소출이 없어도 만족할줄 알아야 한다.
늘 하늘로 부터 내려오는 은혜의 영의 양식을 먹어 새사람으로 변화하여 항상 어떤 곳에 있든지 만족하며 주님의 임재를 느끼며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리심으로 나의 모든 죄를 대속하시고 자녀삼으신 주님께 감사하는 삶을 하나님께서는 기쁘시게 받으신다.
또 한가지 우리에게 위안을 주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는 차별이 없다는 것이다.
모두 다 배불리 먹었더라.
주님은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모두 다 배불리 먹게 하셨다.
먹지 않은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었다. 그리고 모두들 먹고 싶은 만큼 배불리 먹었다.
인간세상에는 어디를 가든지 차별이 많다.
어려서 학교에서부터 차별이 있으며 그 차별을 어쩔수 없이 받아 들이기도 하고 또흔 대항하기도 한다. 소위 “왕따”라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에는 존재하지 않을 것을 확신한다.
주님의 자녀 모두는 차별함이 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다.
5. 절약 (43)
(막6:43) 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요6:12) 그들이 배 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주님은 제자들에게 남은 음식을 모두 모으고 버리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남은 양식을 모았더니 열두 바구니를 모을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음식을 무절제하게 낭비해서는 않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세상의 음식을 살 수 있는 재물을 주셨다.
하나님께서 주신 세상의 재물을 낭비해서는 않된다.
주신 재물이 풍족하다고 없는 자를 업신여기며 교만하며 나 자신을 부를 나타내고자 유행을 쫓아가며 명품을 고집하며 흥청망청 소비해서는 않된다.
주님의 자녀는 절약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세상의 떡의 축복 또한 주님께서 주시는 것이다.
베풀어 주신 축복에 늘 감사하며 또 감사하도록 하여야 한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은 늘 굶주린 저희들에게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셨읍니다.
굶주린 자는 옛적에도 있었고 지금도 우리 주변에는 널려 있읍니다.
사람들은 주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자
주님을 자신의 굶주림을 해결하실분으로 생각하여 왕으로 섬기려 하였읍니다.
지금의 우리 역시 주님을 나의 굶주림을 해결하실 분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주님에게 나의 어떤 물질적인 요구를 들어 달라고 끊임없이 간청을 합니다.
주님은 그런 불쌍한 저를 보시며 은혜와 자비를 베푸십니다.
그리고 “너는 염려하지 말고 근심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말씀하십니다.
비록 제가 먼지가 이는 황야가운데 있지만
주님께서는 저를 잔디가 많이 깔려 있는 곳으로 인도하시고 먹을 것을 주십니다.
주님은 늘 저의 머리터럭도 다 세시며 세심하게 저를 돌보아 주십니다.
세상일로 이제는 염려하지 않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아무리 염려해도 어느 것 하나 해결되지 않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수 없이 저에게 닥친 현실을 보며 낙담하며 좌절합니다.
주님의 자녀에게는 주님께서는 육신의 축복과 영의 축복을 주셨음을 확신합니다.
어느곳에 있든지 늘 기쁘게 받아 들이고 마음에는 평강을 갖게 하옵소서.
그것만이 주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주님의 자녀로서의 살 길임을 이제 느낍니다.
주님의 말씀과 같이 결국은 썩어져 버릴 육신의 떡 보다는
영원한 생명을 주는 생명의 떡을 먹으려고 합니다.
생명의 떡이신 주님을 차고 넘치도록 먹어 새생명을 가지려 결단합니다.
주님 저를 도와주세요.
저만의 이익을 알았던 제가 이제는 변화하여
차고 넘치도록 주시는 영원한 소망의 생명의 떡을 취하여
주님을 위한 삶으로의 전환을 갖기를 원합니다.
주님 저를 통하여 영광 받으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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