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8월 24일 일요일

나귀새끼를 타신 주님과 나귀새끼


(11:1-10)  7. 나귀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놓으매 예수께서 타시니


주님은 이제 마지막 유월절을 보내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성으로 입성하신다.
주님은 예루살렘에 들어가면 고난과 핍박을 받고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리시고 죽게 될 것을 아셨다.
그런데도 이제 주님은 이 땅에서 가장 중요한 사명을 감당하시려 예루살렘을 향하여 들어가면서 나귀새끼를 타고 입성하신다이 예루살렘 입성의 사건은 사복음서 모두 기록하고 있는 중요한 사건이다.  이 본문을 통해 주님은 왜 나귀새끼를 타셨으며 또한 나귀새끼는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하여 살펴보자.

A.    왜 주님은 나귀새끼를 타셨을까?
사람들은 주님께서 행하신 여러 기적들을 이미 들었다.
많은 병자들을 고치셨고 귀신들린 자를 낫게 하셨고자신들이 굶주릴 때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서 하늘에서 내려주시는 만나를 먹게 하셨고그리고 죽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목격하였다.

그들은 이런 주님을 자신의 왕으로 섬기고자 하였고 그래서 예루살렘성으로 입성하시는 주님을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12:13)” 하며 열렬하게 환영하였다.

그런데 나귀새끼를 탄 왕의 모습을 그려보자
아무리 좋게 봐도 왕의 위엄을 찿아 보기 어렵다.
왜 주님은 하필이면 나귀 그것도 나귀새끼를 타셨을까?


1.    말씀의 성취
주님은 일부러 나귀새끼를 타신 것은 예언을 성취하시기 위함이셨다.
(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셔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왕이신 주님은 나귀새끼를 타시기까지 겸손하셨다.
만왕의 왕이시요 만주의 주이시지만 스스로 낮추셔서 종의 신분으로 까지 낮아지셨다.

주님은 자신이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자신을 배워  마음의 평안을 가지라고 우리에게 가르치신다.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주님께서 겸손함을 십자가에서 보여 주셨듯이주님을 닮아가기를 원하는 주님의 자녀 역시 주님의 겸손함을 배워야하고 겸손을 실천해야 한다우리의 마음에 겸손으로 가득하다면 복잡한 세상의 소음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어  마음에는 주님이 주시는 평안으로 가득차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싫어 하셔서 물리치신다하지만 겸손한 자는 기뻐하시며 은혜를 베푸신다.
교만함을 주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아니라 마귀가 주는 것이다그래서 우리는 교만하지 않기 위해서 늘 마귀를 대적하여야 한다그렇지 않다면 슬그머니 교만은 나에게 들어와 자리를 잡아 겉으로는 온유하며 겸손한듯 하지만속으로는 욕심과 교만으로 가득차게 된다.  
(4:6-7)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마귀를 대적하라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2.    화평의 왕
또한 주님께서 나귀새끼를 타신 것은 주님은 평황의 왕으로서 이 땅에 오셨음을 의미한다.
(9:10) 내가 예루살렘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주님께서 나귀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은 자신이 육신의 왕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화평을 주시기 위하여 구원을 베푸시기 위하여 오셨음을 사람들에게 알려 주시고 싶으셨던 것이다주님은 나귀새끼를 타심으로 세상을 통치하실 왕으로서 오신 것이 아니라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속죄양으로 오신 것을 말씀해 주고 싶으셨던 것이다.

말은 세상의 왕이 타며 또한 전쟁에 군마로서 사용된다.
그래서 이 당시에는 말과 병거가 얼마나 많이 있는가에 따라 군사력을 대변하였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말을 끊고 전쟁하는 활도 끊겠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더이상 말과 무기를 다 없애 버리고 전쟁대신에 화평을 전하려고 말대신 나귀새끼를 타신 왕이신 주님을 이 땅에 보내셨다

나귀새끼를 타신 주님은 겸손하신 왕이시다
나귀새끼를 타신 주님은 화평의 왕이시다.
우리는 주님의 겸손과 주님이 주시는 화평을 배워야 한다.

온 우주를 통치하시는 주님은 겸손하셔서 스스로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셔서 이제 자신의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성으로 들어 가시며 나귀새끼를 타신 평화의 왕으로서 입성하신다


B.     나귀새끼

주님은 나귀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 가셨다.
말은 위엄이 있어서 왕이나 귀족이나 장수들이 탄다반면 나귀는 보통 사람들이 타거나 짐을 나르는데 사용된다.
그런데 주님은 다 자란 튼튼한 나귀가 아니라 아직도 어린 나귀새끼를 타셨다나귀는 말과는 달리 키가 크지 않은 아담한 size 이다더구나 새끼이니 사람보다 적었을 것이다.

나귀새끼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1.    주께서 쓰시겠다고 부르심
(11:3)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니라.

주님께서 타신 나귀새끼는 미성숙하고 연약하다.

누가복음 19:30 에는 아무도 타 보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19:30) 너희는 맞은 편 마을고 가라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또한 마태복음에는 나귀새끼 하나뿐아니라 그 어미 나귀도 있었음을 묘사를 한다.
(21:2)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리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주님이 타신 나귀는 아직 어미의 보호를 받는 아직도 어리고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사람에게 길들여 지지 않은 나귀새끼이었던 것이다.  가축이 되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하다사람을 태울 말이나 나귀가 사람을 제대로 태우기 위해서는 수많은 반복의 훈련을 통해 사람을 태울 가축으로 길들여 진다그런데 이 나귀새끼는 아직 훈련도 제대로 받지 않은데다 사람이 한번도 타지 않은 가축이었던 것이다

주님은 다 자란 어미나귀와 새끼 두 마리중에서 아직 길들여 지지 않아 사람을 태우면 싫어 사람을 떨구려는 아직도 연약한 어린 나귀새끼를 타셨다

주님의 택하심은 우리의 생각과는 상반되는 경우가 많다.
보통의 우리 였다면 이 상황에서 길도 들지 않고 연약한 어린 나귀새끼 대신에 튼튼하고 길도 잘 든 어미 나귀를 타려 하였을 것이다.

“주께서 쓰겠다고 하라” 이 주님의 한마디에 나귀새끼는 쓰임을 받았다.
어린 나귀새끼도 이에 응하고 주님께 순종하며 주님을 태우고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였다.
왜 하필이면 주님께서 부르신 나귀가 어린 새끼인지는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이시다.

주님은 지금도 나귀새끼같은 우리를 부르신다.
나는 아직도 믿음으로도 미처 자라지 못하여 늘 넘어지고 쓰러진다.
또한 아직 한번도 사람이 타지 않아 어색하고 나귀새끼처럼 나 역시 주님의 말씀에 어색해하며 주님께 순종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그러데도 주님은 그런 나를 부르시며 “내가 쓰겠다” 라고 말씀하신다.
주님께서 쓰시겠다고 하시는데 무엇을 망설이는가.


2.    풀어 끌고 오라
(11:7) 나귀새끼를 끌고 와서

 (19:30) 너희는 맞은 편 마을로 가라그리고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1)    풀어
주님은 줄에 묶여 있는 나귀새끼를 풀어서 끌고 오라 말씀하신다.
나귀새끼는 묶여 있다가 자유케 되었다.

주님께서 쓰시는 자는 자유롭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우리의 결박을 푸시기 때문이다.
(116:16) 여호와여 나는 진실로 주의 종이요주의 여종의 아들 곧 주의 종이라주께서 나의 결박을 푸셨나이다.

주님께서 쓰시는 자는 흉악의 결박에서 자유롭다.
사람에게 묶이지 말고 자유로워야 한다
세상의 권력에 묶이지 말자.
세상의 재물에 묶이지 말자.
세상의 정욕에 묶이지 말자.
세상의 그릇된 가르침에 묶이지 말고 풀려야 한다.

2)    끌고오라
주님은 맞은 편 마을에 가서 나귀 새끼를 끌고 오라고 말씀하신다.
나귀는 주님을 태울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나귀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끌려 왔던 것이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끌려 왔지만 이 나귀새끼는 아마도 자신의 등에 탄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았을 것이다.  비록 말은 할 수 없었지만 만왕의 왕시며 창조주이신 주님이심을 알았을 것이다.

주님이 자신을 쓰시겠다고 부르셨을때 얼마나 기뻐했을까.
주님이 나처럼 연약하고 무엇하나 제대로 할 줄도 모르는 나를 부르신대!
나를 타고 가신대!
늘 죄를 짓는 나를 부르셔서 존귀하게 해 주신대!

왕이신 주님께서 나의 등에 타시고 들어 가신다고 감격에 가득찿을 것이다.
그래서 힘을 내어서 뿌뜻하게 주님을 태우고 당당하게 한걸음 한걸음 예루살렘 성을 향하여 갈 수 있었을 것이다.


3.    환영
주님을 태우고 예루살렘성으로 들어가는 길은 환영의 길이었다.
사람들은 나귀새끼를 타시고 입성하시는 주님을 열렬하게 환영하였다.
이들은 비록 후에 주님을 배반하고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하였지만이 때만큼은 종료나무를 깔고 자신의 겉옷을 벗어 길에 펴서 주님의 입성을 “호산나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요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서는 영광이로다” 기뻐하며 열렬히 환영하였다

사람들은 언제 변할지 모른다.
오늘의 친구가 내일에는 원수가 된다.
또한 어제의 원수가 오늘은 절친한 관계가 되기도 한다.

사람은 환경에 따라자신의 유익에 따라 변한다그래서 주님을 열렬하게 환영했던 이스라엘사람들은 더 이상 주님이 자신이 꿈꾸어오던 민족을 해방하고 가난에서 벗어나게 할 구원자가 아니라,  나귀새끼를 타신 초라한 모습으로 영혼을 구원할 구원주로서 오셨음을 알고는 주님을 헌신짝 버리듯이 버렸다버린 것도 모자라 이들은 주님을 증오하며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천사들과 하늘나라의 선민들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너무나 기쁘게 환영하였을것이다.

주님을 따르는 자들은 결국은 주님과 같은 대우를 받게 된다.
주님을 위해 사용되는 자는 때로는 사람들로부터 환영을 받지만 그 환영은 얼마가지 못한다하지만 진심으로 주님을 위해 일한 자는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그 상급을 받게 된다.
사람이 주는 환대에 속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께서 나귀새끼를 일부러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음은
우선 말씀의 성취이었음을 알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또한 나귀새끼를 타시기까지 겸손하신 주님은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이심을 나타내 주심에 감사합니다.
자신의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잘 아시는 주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 부족한 늘 죄를 짓는 저를 위하여
예루살렘성에 성경에 말씀하신대로 나귀새끼를 타시고 입성하셨읍니다.
사람들은 그런 주님의 모습을 보며 자신의 겉옷과 종료나무잎을 길에 깔아
주님을 열렬하게 환영하였지만
얼마 못가 주님이 자신의 굶주림을 채워줄 구원자로 오심이 아님을 알고는
주님을 저주하며 증오하며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했읍니다.

주님을 믿는 자녀인 저희에게도 주님께서 겪으신 같은 은혜가 주어질 것에 감사하며
앞으로 어떤 일이 기다려도 기쁨으로 맞이하게 하옵소서.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주님의 사랑하는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자신을 죽이려는 예루살렘에 들어 가시면서 나귀새끼를 타셨읍니다.
주님은 내가 쓰겠노라 하시며 죄악의 흉악에 묶여 있는 저를 부르십니다.

주께서 나를 쓰시겠다고 부르시면
주님 제가 여기 있사오니 주의 뜻을 이 종을 통하여 이루소서.
제가 비록 연약하고 어리지만 기쁘게 저에게 부여된 사명을 이루기를 원합니다.

주님과 같이 가는 길에는 때로는 사람들로부터의 열렬한 환대도 있읍니다.
하지만 사람은 언제든지 자신의 유익에 따라서는 변할 수 있읍니다.
사람의 환영보다는 하나님으로부터의 환영을 더욱 감사하게 하옵소서.

주님 저는 나귀새끼처럼 아직도 너무나 부족합니다.
그런데도 내가 너를 쓰겠노라 저에게 말씀하십니다.
이 한마디의 말씀에 감격하며 주님께 감사하는 삶을 살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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