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15:39) 백부장이 그렇게 운명하심을 보고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왜 백부장은 예수님을 보고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하고 고백할 수 있었을까?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아는 것이 마가복음의 주제이기도 하다.
(막1: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백부장은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이다.
그는 처음에 주님을 못 박을때 죄인 중의 한사람으로 생각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주님은 죄가 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결국 백부장은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고백하는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왜 백부장은 그와같은 고백을 할 수 있었을까?
어떤 주님을 백부장은 만났던 것일까?
1. 주위사람들의 말을 들음
백부장은 주위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들었다.
(마27:40)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마27:42)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막15:32)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가 보고 믿게 할지어다.
(눅23:35) 만일 하나님의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든 자기도 구원할찌어다.
(눅23:37)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어든 네가 너를 구원하라.
(눅23:39)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사람들은 흔히 다른 이에 대하여 말할때 험담하기를 좋아한다. 없는 것도 있는 것처럼 말하며 좋지 않게 말한다. 특히 그가 범죄자라면 더욱 나쁜 점만 들춰내서 이야기를 한다. 그가 행했던 좋은 일들도 분명히 있었을텐데 사람들은 악한 행위만을 더욱 크게 부풀려서 말들을 하기를 좋아한다. 그것이 사람의 악한 본성중의 하나이다.
주님은 범죄자로서 십자가에 달리셨다.
“그당시 십자가형은 법정 최고형으로서 고통스럽게 긴시간동안 고통스럽게 인간의 정신과 육체의 한계를 느끼며 죽이는 가장 지독한 형벌이었다. 과거 로마에서는 반항한 노예로 시작해서 반역자 등의 중죄인을 십자가에서 죽였다.”
사람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보면서 욕을 하거나 험담을 하지 않았다.
십자가에 달려 죽는 자들은 범죄자들인데 사람들은 주님의 잘못한 일에 대하여 말하지 않고 하나같이 주님에 대하여 이야기하며 “하나님의 택하신 자”, “하나님의 아들”, “이스라엘의 왕”, “유대인의 왕”, “그리스도”라고 말했다. 악한 본성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기에 남의 잘못한것에 더욱 열을 내어 말들을 하기를 좋아하는데도 이들은 주님의 조그마한 실수나 잘못을 찿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를 들은 백부장은 당연히 주님에 대하여 의아심을 갖고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면서 점점 그는 이스라엘의 왕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예수가 누구인가 궁금증을 가졌을 것이고 점차로 주님을 경외함으로 바라보게 되었을 것이다.
주님에 대하여 어떤 말들을 사람들로부터 듣는가?
나는 어떤 말들을 주님에 대하여 사람들에게 말하는가?
이런 말들을 듣고 말하면서 내 안에는 주님에 대하여 더 알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는가?
과연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일까?
과연 주님은 창조주일까?
과연 주님은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일까?
과연 주님은 나를 구원할 메시야일까?
그런 주님이 왜 십자가에서 참혹한 모습으로 죽어야 했을까?
주님에 대하여 궁금증을 갖는다면 더욱 관심을 갖고 주님에 대하여 쓰여진 말씀을 읽고 싶지 않겠는가.
주님에 대하여 알고 싶습니다.
성령님 저에게 주님에 대하여 조명하여 주옵소서.
나의 깨달음으로 깨달아 알게 하신다.
주님 이외의 것들은 헛된 사람과도 같이 바람과 같이 사라져 버리는 미련한 것을 알아야 한다.
(전1:17) 내가 다시 지혜를 알고자 하며 미친 것들과 미련한 것들을 알고자 하여 마음을 썻으나 이것도 바람을 잡으려는 것인 줄을 깨달았도다.
내가 영원토록 살 수 있는 길은 주님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는 말씀을 가까이 하는 것이다.
(시119:144) 주의 증거들은 영원히 의로우시니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하사 살게 하소서.
2. 주님의 말씀
백부장은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모든 대화를 들을 수 있었다.
주님께서 하나님께 드린 대화, 주님께서 어머니와 친구에게 하시는 말씀, 두 죄수들과의 대화, 그리고 주님께서 하신 말씀. 이 모든 대화를 가장 가까이서 들을 수 있었다. 백부장은 주님의 표정 하나 하나를 자세하게 볼 수 있었고, 주님께서 힘들어 하시는 것도 볼 수 있었다.
십자가에서 주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은 신적인 권위를 갖고 있다.
· 저들의 죄를 사하소서.
·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네 어머니라.
·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 내가 목마르다.
·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 다 이루었다.
· 아버지여 내 영혼을 받으소서.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는 용서의 주님.
부모와 자식과 형제와 제자를 사랑하신 사랑의 주님.
나와 같은 육신을 갖고 있어 뼈가 부숴지는 고통을 느끼는 주님.
모두가 자신을 버린 절망의 외로움 가운데서 모든 것을 이루신 주님.
모든 것을 아버지의 손에 맡기는 순종의 주님.
나는 어떤 주님을 만난는가?
주님을 만난 기억이 있는가?
3. 자연현상
성경에는 하늘이 어두워졌고, 지진이 났으며, 성전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졌으며, 무덤에서 자던 자들이 부활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백부장은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후 주변의 자연의 현상을 목격할 수 있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오전 9시였고, 12시부터 온 땅이 어두워졌고 주님께서 운명하신 오후 3시까지 어둠은 지속되었다. 그리고 주님께서 운명하실 때 땅을 뒤흔드는 지진이 있었다.
이를 본 백부장은 경외함과 심한 두려움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땅이 어두워진일에 대하여 생각해보자.
(마27:45) 제 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하더니
(막15:33) 제 육시가 되매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눅23:44) 때가 제 육시쯤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하더니
사59:2에 온 땅이 어두움에 덮일 것을 말씀하고 있다.
(사59:2) 보라 어두움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우려니와
훤한 대낮에 햇빛을 가리고 어둠이 세시간동안 임하기 위해서는 두가지의 가정이 있을수 있는데 그중에 하나는 일식이고 또 다른 하나는 구름이 해를 가렸을 것이라 가정해 볼 수 있다.
어떤 성경학자들은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한 것이 일식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일식이 3시간 동안 지속하기 위해서는 지구는 자전과 공전을 멈추어야 하고 달 또한 제자리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물론 하나님께서 기적을 베푸시면 불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온 하늘에 빽빽한 구름으로 가득차서 해의 빛을 가렸을 것이라고 상상해보자.
빽빽한 구름이 3시간동안 주님께서 달리신 골고다 산 주위에 머물며 햇빛을 가림으로 온 땅은 심한 어두움으로 뒤덥혔다.
빽빽한 구름은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한다.
(출19:9) 내가 빽빽한 구름가운데서 네게 임함은 내가 너와 말하는 것을 백성들이 듣게 하며
(출19:16) 셋째 날 아침에 우레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매우 크게 들리니 진중에 있는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
(삼하22:12) 그가 흑암 곧 모인 물과 공중의 빽빽한 구름으로 둘린 장막을 삼으심이여
(시18:11) 그가 흑암을 그의 숨는 곳으로 삼으사 장막 같이 자기를 두르게 하심이여 곧 물의 흑암과 공중의 빽빽한 구름으로 그리하시도다.
마치 사랑하는 아들 주님의 죽음을 지켜보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임재를 상징하는듯 하다.
사랑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앞에 아무 말씀을 하시지 않으셨지만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슬퍼하셨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는 그 시간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임재하시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위로하셨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임하게 된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으면 그곳에는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사랑이 임한다.
하나님의 임재가 나에게 임하였는가?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빽빽한 구름으로 가득차서 세상 것들은 다 보이지 않고 그 가운데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이 보이는가?
4. 하나님의 선택
하나님께서는 백부장을 자신의 자녀로 선택하셨다.
백부장이 주님의 십자가의 형을 담당한 것이 우연이었을까?
아마 하나님은 백부장을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것을 보고 변화하라고 보내셨을것이다.
하나님의 선택은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이시다.
(렘18:4)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터지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좋은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
나는 어떤 그릇으로 빗어 지기를 원하는가?
백부장과 같이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바로 그 시각 그곳에 서있는 그릇이 되고 싶지 않는가?
주여 저를 아름다운 그릇으로 빗으소서.
저는 주님의 것이며 주님의 손에 있어 아름다운 그릇으로 다시 빗어지기 원하나이다.
저를 받으소서.
말씀을 정리하면
백부장은 유대인이 아니라 로마사람이다. 즉 이방인인 것이다.
아마 백부장은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전혀 모르고 있다가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는 형을 직접 지휘하면서 예수가 누구인가 궁금증을 가졌을 것이다. 어떤 죄를 지어서 이처럼 참혹한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렸을까 생각하였을 것이다. 십자가에 달려 죽는 이들은 대개가 반역을 하였거나 극악한 일을 저질렀을때 십자가 형을 선고받았다. 십자가형은 사람을 오랜 시간동안 고통을 주면서 죽이는 잔인한 형벌이다. 그래서 아마 백부장은 예수님을 그와 같이 극악한 죄를 지은 죄인으로 예수님을 취급하여 함부러 대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백부장은 이상한 느낌을 감지하였던 것이다.
점차로 그의 마음속에는 의아함이 들기 시작하였다. 백부장은 주님이 누구인지를 전혀 알지 못했지만 주위사람들이 “저이가 자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대. 그런데 어쩌다가 십자가에 달렸어. 참 불쌍한 사람이네” 하면서 수군거리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비록 주님이 참혹한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리셨지만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권위를 갖고 계셨다.
많은 말씀을 하시지는 않으셨지만 그 말씀에는 신적인 권위가 있었다. 주님과 어머니와 제자와 대화를 하셨고, 죄수들과 말씀을 나누었고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께 말씀하셨다.
백부장은 주님의 대화를 통해서 예수가 보통 죄수들과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을 충분하게 느꼈을 것이다. 주님의 한마디 한마디 말씀에는 거부할 수 없는 그 어떤 권위가 있어 그 말씀이 내마음에 깊이 파고 든다.
그리고 땅도 하늘도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후에 변하기 시작하였다. 온 땅과 하늘이 캄캄하게 어두워졌다.
주님께서 운명하실 때에 땅도 울면서 진서리를 치며 흔들어 댔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서 백부장은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되었다.
백부장은 참으로 복받은 사람이다.
그는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죽는 모습을 가장 가까이서 본 사람이다.
비록 주님의 모습이 온 몸이 찢기고 피로 엉겨붙어 있어 몰골이 처참했지만 그는 그런 주님의 모습 저너머에 계시는 주님의 실체의 모습을 만날수 있었다. 십자가에 달린 주님을 보면서 과연 이이가 누구인가? 깊이 생각할 수 있었고 주님 주위에서 일어난 일들을 보면서 과연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메시야임을 마음속에 심을 수 있었다. 그는 주님을 실질적으로 만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진실로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고 고백할 수 있었다.
주님을 만난 이후의 삶은 주님께 사로잡혀 주님을 따르는 완전히 변화된 삶을 살았을 것이라 생각을 한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님을 직접보고 체험하여 주님을 구세주로 받아 들였는데 어찌 그의 삶이 변하지 않을수가 있었겠는가?
주님의 제자들 역시 백부장과 같은 질문을 가졌었다.
주님께서 파도와 바람을 말씀으로 잠재우자 제자들은 심히 두려워하며 “아! 이가 누구인가?” 하며 주님의 정체성에 대하여 질문하였다. 제자들은 주님을 삼년간 같이 동거동락하였지만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님을 알아 보지 못했지만, 어느 순간 제자들의 마음이 밝아져서 제자들은 주님의 실제를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주님을 알기 위해서는 실질적인 주님을 만나는 체험이 있어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님을 주일날 교회에 출석해야지만 만난다고 생각을 하는 듯 하다.
그래서 교회를 벗어나면 주님을 떠난 삶을 당연시 여긴다. 세상에 속해 있는 자들은 주님을 만날 수 없다.
주님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물어보신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냐 하느냐 ? (막8:27)
그리고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물어보신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막8:29)
주님의 관심사는 사람들보다는 제자들에게 있다.
그리고 주님의 관심사는 제자인 바로 나에게 있다.
나에게 주님은 어떤 분이신가?
만일 주님께서 나에게 “너는 나를 누구라 생각하느냐?” 이렇게 물어보신다면 주님을 몰랐던 백부장이 주님을 경험한 후 “주님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고 고백하였듯이 나 또한 그렇게 고백할 수 있겠는가?
(막4:41) 이가 누구이신가?
주님의 제자들이 심한 파도와 바람에 의하여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울때에 바람과 파도를 잠잠케 하시는 주님을 보가 했던 말이다. 주님의 제자가 되어 3년간 동거동락하며 주님과 함께 하였지만 제자들은 주님의 실체를 깨닫지 못했다. 그러다가 비로서 때가 되어 제자들은 주님의 실체를 깨닫게 되고 “Who is this?” 하며 반문하게 된다.
백부장이, 제자들이 주님의 실체를 만났듯이, 우리 역시 주님의 실체를 만나야 한다.
두두려 맞아서 온몸이 멍이 들어 퉁퉁붓고, 온 몸에 피로 얼룩져 있고, 벌거 벗은 채로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모습 저 너머에 감추어진 주님의 실체를 만나야 한다.
그래서 실체적인 주님을 만나 내 입으로부터 “아! 주님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하는 진실된 고백을 하는 축복을 받자.
(막15:39) 백부장이 그렇게 운명하심을 보고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왜 백부장은 예수님을 보고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하고 고백할 수 있었을까?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아는 것이 마가복음의 주제이기도 하다.
(막1: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백부장은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이다.
그는 처음에 주님을 못 박을때 죄인 중의 한사람으로 생각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주님은 죄가 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결국 백부장은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고백하는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왜 백부장은 그와같은 고백을 할 수 있었을까?
어떤 주님을 백부장은 만났던 것일까?
1. 주위사람들의 말을 들음
백부장은 주위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들었다.
(마27:40)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마27:42)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막15:32)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가 보고 믿게 할지어다.
(눅23:35) 만일 하나님의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든 자기도 구원할찌어다.
(눅23:37)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어든 네가 너를 구원하라.
(눅23:39)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사람들은 흔히 다른 이에 대하여 말할때 험담하기를 좋아한다. 없는 것도 있는 것처럼 말하며 좋지 않게 말한다. 특히 그가 범죄자라면 더욱 나쁜 점만 들춰내서 이야기를 한다. 그가 행했던 좋은 일들도 분명히 있었을텐데 사람들은 악한 행위만을 더욱 크게 부풀려서 말들을 하기를 좋아한다. 그것이 사람의 악한 본성중의 하나이다.
주님은 범죄자로서 십자가에 달리셨다.
“그당시 십자가형은 법정 최고형으로서 고통스럽게 긴시간동안 고통스럽게 인간의 정신과 육체의 한계를 느끼며 죽이는 가장 지독한 형벌이었다. 과거 로마에서는 반항한 노예로 시작해서 반역자 등의 중죄인을 십자가에서 죽였다.”
사람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보면서 욕을 하거나 험담을 하지 않았다.
십자가에 달려 죽는 자들은 범죄자들인데 사람들은 주님의 잘못한 일에 대하여 말하지 않고 하나같이 주님에 대하여 이야기하며 “하나님의 택하신 자”, “하나님의 아들”, “이스라엘의 왕”, “유대인의 왕”, “그리스도”라고 말했다. 악한 본성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기에 남의 잘못한것에 더욱 열을 내어 말들을 하기를 좋아하는데도 이들은 주님의 조그마한 실수나 잘못을 찿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를 들은 백부장은 당연히 주님에 대하여 의아심을 갖고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면서 점점 그는 이스라엘의 왕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예수가 누구인가 궁금증을 가졌을 것이고 점차로 주님을 경외함으로 바라보게 되었을 것이다.
주님에 대하여 어떤 말들을 사람들로부터 듣는가?
나는 어떤 말들을 주님에 대하여 사람들에게 말하는가?
이런 말들을 듣고 말하면서 내 안에는 주님에 대하여 더 알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는가?
과연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일까?
과연 주님은 창조주일까?
과연 주님은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일까?
과연 주님은 나를 구원할 메시야일까?
그런 주님이 왜 십자가에서 참혹한 모습으로 죽어야 했을까?
주님에 대하여 궁금증을 갖는다면 더욱 관심을 갖고 주님에 대하여 쓰여진 말씀을 읽고 싶지 않겠는가.
주님에 대하여 알고 싶습니다.
성령님 저에게 주님에 대하여 조명하여 주옵소서.
나의 깨달음으로 깨달아 알게 하신다.
주님 이외의 것들은 헛된 사람과도 같이 바람과 같이 사라져 버리는 미련한 것을 알아야 한다.
(전1:17) 내가 다시 지혜를 알고자 하며 미친 것들과 미련한 것들을 알고자 하여 마음을 썻으나 이것도 바람을 잡으려는 것인 줄을 깨달았도다.
내가 영원토록 살 수 있는 길은 주님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는 말씀을 가까이 하는 것이다.
(시119:144) 주의 증거들은 영원히 의로우시니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하사 살게 하소서.
2. 주님의 말씀
백부장은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모든 대화를 들을 수 있었다.
주님께서 하나님께 드린 대화, 주님께서 어머니와 친구에게 하시는 말씀, 두 죄수들과의 대화, 그리고 주님께서 하신 말씀. 이 모든 대화를 가장 가까이서 들을 수 있었다. 백부장은 주님의 표정 하나 하나를 자세하게 볼 수 있었고, 주님께서 힘들어 하시는 것도 볼 수 있었다.
십자가에서 주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은 신적인 권위를 갖고 있다.
· 저들의 죄를 사하소서.
·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네 어머니라.
·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 내가 목마르다.
·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 다 이루었다.
· 아버지여 내 영혼을 받으소서.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는 용서의 주님.
부모와 자식과 형제와 제자를 사랑하신 사랑의 주님.
나와 같은 육신을 갖고 있어 뼈가 부숴지는 고통을 느끼는 주님.
모두가 자신을 버린 절망의 외로움 가운데서 모든 것을 이루신 주님.
모든 것을 아버지의 손에 맡기는 순종의 주님.
나는 어떤 주님을 만난는가?
주님을 만난 기억이 있는가?
3. 자연현상
성경에는 하늘이 어두워졌고, 지진이 났으며, 성전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졌으며, 무덤에서 자던 자들이 부활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백부장은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후 주변의 자연의 현상을 목격할 수 있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오전 9시였고, 12시부터 온 땅이 어두워졌고 주님께서 운명하신 오후 3시까지 어둠은 지속되었다. 그리고 주님께서 운명하실 때 땅을 뒤흔드는 지진이 있었다.
이를 본 백부장은 경외함과 심한 두려움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땅이 어두워진일에 대하여 생각해보자.
(마27:45) 제 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하더니
(막15:33) 제 육시가 되매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눅23:44) 때가 제 육시쯤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하더니
사59:2에 온 땅이 어두움에 덮일 것을 말씀하고 있다.
(사59:2) 보라 어두움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우려니와
훤한 대낮에 햇빛을 가리고 어둠이 세시간동안 임하기 위해서는 두가지의 가정이 있을수 있는데 그중에 하나는 일식이고 또 다른 하나는 구름이 해를 가렸을 것이라 가정해 볼 수 있다.
어떤 성경학자들은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한 것이 일식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일식이 3시간 동안 지속하기 위해서는 지구는 자전과 공전을 멈추어야 하고 달 또한 제자리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물론 하나님께서 기적을 베푸시면 불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온 하늘에 빽빽한 구름으로 가득차서 해의 빛을 가렸을 것이라고 상상해보자.
빽빽한 구름이 3시간동안 주님께서 달리신 골고다 산 주위에 머물며 햇빛을 가림으로 온 땅은 심한 어두움으로 뒤덥혔다.
빽빽한 구름은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한다.
(출19:9) 내가 빽빽한 구름가운데서 네게 임함은 내가 너와 말하는 것을 백성들이 듣게 하며
(출19:16) 셋째 날 아침에 우레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매우 크게 들리니 진중에 있는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
(삼하22:12) 그가 흑암 곧 모인 물과 공중의 빽빽한 구름으로 둘린 장막을 삼으심이여
(시18:11) 그가 흑암을 그의 숨는 곳으로 삼으사 장막 같이 자기를 두르게 하심이여 곧 물의 흑암과 공중의 빽빽한 구름으로 그리하시도다.
마치 사랑하는 아들 주님의 죽음을 지켜보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임재를 상징하는듯 하다.
사랑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앞에 아무 말씀을 하시지 않으셨지만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슬퍼하셨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는 그 시간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임재하시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위로하셨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임하게 된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으면 그곳에는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사랑이 임한다.
하나님의 임재가 나에게 임하였는가?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빽빽한 구름으로 가득차서 세상 것들은 다 보이지 않고 그 가운데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이 보이는가?
4. 하나님의 선택
하나님께서는 백부장을 자신의 자녀로 선택하셨다.
백부장이 주님의 십자가의 형을 담당한 것이 우연이었을까?
아마 하나님은 백부장을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것을 보고 변화하라고 보내셨을것이다.
하나님의 선택은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이시다.
(렘18:4)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터지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좋은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
나는 어떤 그릇으로 빗어 지기를 원하는가?
백부장과 같이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바로 그 시각 그곳에 서있는 그릇이 되고 싶지 않는가?
주여 저를 아름다운 그릇으로 빗으소서.
저는 주님의 것이며 주님의 손에 있어 아름다운 그릇으로 다시 빗어지기 원하나이다.
저를 받으소서.
말씀을 정리하면
백부장은 유대인이 아니라 로마사람이다. 즉 이방인인 것이다.
아마 백부장은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전혀 모르고 있다가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는 형을 직접 지휘하면서 예수가 누구인가 궁금증을 가졌을 것이다. 어떤 죄를 지어서 이처럼 참혹한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렸을까 생각하였을 것이다. 십자가에 달려 죽는 이들은 대개가 반역을 하였거나 극악한 일을 저질렀을때 십자가 형을 선고받았다. 십자가형은 사람을 오랜 시간동안 고통을 주면서 죽이는 잔인한 형벌이다. 그래서 아마 백부장은 예수님을 그와 같이 극악한 죄를 지은 죄인으로 예수님을 취급하여 함부러 대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백부장은 이상한 느낌을 감지하였던 것이다.
점차로 그의 마음속에는 의아함이 들기 시작하였다. 백부장은 주님이 누구인지를 전혀 알지 못했지만 주위사람들이 “저이가 자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대. 그런데 어쩌다가 십자가에 달렸어. 참 불쌍한 사람이네” 하면서 수군거리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비록 주님이 참혹한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리셨지만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권위를 갖고 계셨다.
많은 말씀을 하시지는 않으셨지만 그 말씀에는 신적인 권위가 있었다. 주님과 어머니와 제자와 대화를 하셨고, 죄수들과 말씀을 나누었고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께 말씀하셨다.
백부장은 주님의 대화를 통해서 예수가 보통 죄수들과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을 충분하게 느꼈을 것이다. 주님의 한마디 한마디 말씀에는 거부할 수 없는 그 어떤 권위가 있어 그 말씀이 내마음에 깊이 파고 든다.
그리고 땅도 하늘도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후에 변하기 시작하였다. 온 땅과 하늘이 캄캄하게 어두워졌다.
주님께서 운명하실 때에 땅도 울면서 진서리를 치며 흔들어 댔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서 백부장은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되었다.
백부장은 참으로 복받은 사람이다.
그는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죽는 모습을 가장 가까이서 본 사람이다.
비록 주님의 모습이 온 몸이 찢기고 피로 엉겨붙어 있어 몰골이 처참했지만 그는 그런 주님의 모습 저너머에 계시는 주님의 실체의 모습을 만날수 있었다. 십자가에 달린 주님을 보면서 과연 이이가 누구인가? 깊이 생각할 수 있었고 주님 주위에서 일어난 일들을 보면서 과연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메시야임을 마음속에 심을 수 있었다. 그는 주님을 실질적으로 만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진실로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고 고백할 수 있었다.
주님을 만난 이후의 삶은 주님께 사로잡혀 주님을 따르는 완전히 변화된 삶을 살았을 것이라 생각을 한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님을 직접보고 체험하여 주님을 구세주로 받아 들였는데 어찌 그의 삶이 변하지 않을수가 있었겠는가?
주님의 제자들 역시 백부장과 같은 질문을 가졌었다.
주님께서 파도와 바람을 말씀으로 잠재우자 제자들은 심히 두려워하며 “아! 이가 누구인가?” 하며 주님의 정체성에 대하여 질문하였다. 제자들은 주님을 삼년간 같이 동거동락하였지만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님을 알아 보지 못했지만, 어느 순간 제자들의 마음이 밝아져서 제자들은 주님의 실제를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주님을 알기 위해서는 실질적인 주님을 만나는 체험이 있어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님을 주일날 교회에 출석해야지만 만난다고 생각을 하는 듯 하다.
그래서 교회를 벗어나면 주님을 떠난 삶을 당연시 여긴다. 세상에 속해 있는 자들은 주님을 만날 수 없다.
주님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물어보신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냐 하느냐 ? (막8:27)
그리고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물어보신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막8:29)
주님의 관심사는 사람들보다는 제자들에게 있다.
그리고 주님의 관심사는 제자인 바로 나에게 있다.
나에게 주님은 어떤 분이신가?
만일 주님께서 나에게 “너는 나를 누구라 생각하느냐?” 이렇게 물어보신다면 주님을 몰랐던 백부장이 주님을 경험한 후 “주님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고 고백하였듯이 나 또한 그렇게 고백할 수 있겠는가?
(막4:41) 이가 누구이신가?
주님의 제자들이 심한 파도와 바람에 의하여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울때에 바람과 파도를 잠잠케 하시는 주님을 보가 했던 말이다. 주님의 제자가 되어 3년간 동거동락하며 주님과 함께 하였지만 제자들은 주님의 실체를 깨닫지 못했다. 그러다가 비로서 때가 되어 제자들은 주님의 실체를 깨닫게 되고 “Who is this?” 하며 반문하게 된다.
백부장이, 제자들이 주님의 실체를 만났듯이, 우리 역시 주님의 실체를 만나야 한다.
두두려 맞아서 온몸이 멍이 들어 퉁퉁붓고, 온 몸에 피로 얼룩져 있고, 벌거 벗은 채로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모습 저 너머에 감추어진 주님의 실체를 만나야 한다.
그래서 실체적인 주님을 만나 내 입으로부터 “아! 주님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하는 진실된 고백을 하는 축복을 받자.
사랑하는 아버지.
자신의 임무에 충실하던 백부장이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을때에도
그는 주님이 그저 극악한 형벌을 받아야 하는 죄인이로만 알았읍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주님이 하시는 말씀을 들으며
주님의 표정 하나 하나를 보면서 주님에 대하여 생각해 볼 수 있었읍니다.
그리고 하늘이 캄캄하게 어두워지고 주님이 운명하실때 땅이 뒤흔들리는 것을 보고
그는 “과연 주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었읍니다”하고 고백할 수 밖에 없었읍니다.
주님에 대하여 전혀 아는 것이 없었지만
그는 주님의 실체를 만나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계획이셨고 하나님의 주권이었읍니다.
주여! 제가 주님의 참된 모습을 보기를 원합니다.
바로 저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만나기를 원합니다.
주의 자녀로 다시 태어 나기를 원합니다.
주여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사랑하는 아버지.
자신의 임무에 충실하던 백부장이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을때에도
그는 주님이 그저 극악한 형벌을 받아야 하는 죄인이로만 알았읍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주님이 하시는 말씀을 들으며
주님의 표정 하나 하나를 보면서 주님에 대하여 생각해 볼 수 있었읍니다.
그리고 하늘이 캄캄하게 어두워지고 주님이 운명하실때 땅이 뒤흔들리는 것을 보고
그는 “과연 주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었읍니다”하고 고백할 수 밖에 없었읍니다.
주님에 대하여 전혀 아는 것이 없었지만
그는 주님의 실체를 만나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계획이셨고 하나님의 주권이었읍니다.
주여! 제가 주님의 참된 모습을 보기를 원합니다.
바로 저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만나기를 원합니다.
주의 자녀로 다시 태어 나기를 원합니다.
주여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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