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1:20) 네가 본 것은 내 오른손의 일곱 별의 비밀과 또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요한계시록의 원독자들은 로마제국과 종교지도자들의 고난과 박해를 받아야 했던 초대교회 성도들이다.
박해하는 자들의 정체를 밝힌다면 핍박이 더욱 심해질 것이기에 직접적으로 밝히지 않고 간접적으로 비유와 상징으로 쓰여졌다. 특히 요한계시록은 사도바울이 전도하여 세운 아시아 지역에 있는 일곱 교회에 주님의 말씀을 전하며 핍박과 환난 가운데 있는 그들을 위로하고 권면하며 힘과 용기와 소망을 준다.
주님은 일곱교회에 말씀하신다.
믿지 않는 자들에게 주신 말씀이 아닌 교회에 나가는 자들에게 주신 말씀이다.
교회에 나간다고 모두 구원을 얻었을까?
교회에 매 주일 나가서 예배를 드린다고 구원받은 성도일까?
교회에 열심히 봉사하고 헌신한다고 주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았을까?
주님께서는 일곱교회에 말씀하시면서
우선 자신이 누구이신지를 말씀하시고, 칭찬할 점과 질책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지적하신다. 그리고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상급과 그렇지 못한 자들이 받는 벌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일곱교회는 곧 나의 모습이다.
일곱교회의 특성을 알아보고 그 가운데서 나의 모습을 발견해 보자.
때로는 주님께 칭찬받을 만하지만 때로는 주님의 질책을 받아야만 할 때도 있다.
주님은 그런 나를 지켜 보시며 온전한 길로 가도록 꾸짖기도 하시며 칭찬도 하시며 격려하신다.
끝까지 주님을 따라 갈 때 우리에게는 주님께서 약속하신 상급이 기다리고 있다.
일곱교회에게 주님은 어떤 지적을 하셨는지 나를 비추어 보자. 그러면 나의 어떤 점이 잘못하고 있는지를 깨달아 회개하고 주님 앞에 나아가 변화가 된다면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모습이 아닐까?
1. 에베소교회
(2:4) 처음 사랑을 버린 자.
주님을 만났을 때 주님을 사랑합니다 하며 눈물을 흘리며 베푸신 주님의 은혜에 너무나 감사하였다.
은혜의 달콤한 시간이 지나면 세상의 유혹에 다시 빠지고 만다.
그러면서 처음 주님을 만났을 때의 감사와 사랑의 감격을 잊어 버린다.
첫사랑을 잊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무미건조한 신앙생활을 한다.
주님은 그런 자를 가엽게 보시며 나와의 만났던 그 시간을 기억하고 다시 첫사랑을 회복하라고 말씀하신다.
(2:7) 이기는 자에게는 하나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게 하신다고 약속하신다.
생명나무는 하나님의 나라의 생명수가 흐르는 강가에 심겨져 있다. 그 열매를 먹음으로 영원을 살게 된다.
믿음으로 승리한 자가 가는 곳은 바로 하나님 나라.
2. 서머나교회
주님의 칭찬을 받은 교회이다.
(2:9) 환난과 궁핍 하지만 실상은 부요한 자.
비록 처해져 있는 환경은 참으로 열약하여 가난과 궁핍이 있으며 견디기 어려운 환난도 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믿음을 잃지않고 지키고 있다.
환난의 기간은 십일이다.
주님의 자녀에게도 환난은 임한다. 그렇지만 그 환난의 기간은 정해져 있으며 짦은 기간이다.
우리에게 있는 환난은 영원토록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잠시동안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허락하신 것이다. 환난은 곧 물러간다. 하루 하루 인내하다 보면 어느새 나를 괴롭히던 환난은 저 멀리 지나가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흔히 사람들은 잘 살고 있었던 믿는 자에게 어떤 환난이 닥쳐 오게 되어 망하였거난 심한 병에 걸리거나 집안에 우환이 닥치면 그의 어떤 신앙생활의 잘못으로 인해 벌을 받아 어렵게 되었다고 지례 짐작을 하고 정죄하기도 한다. 제발 성도는 바깥에 보이는 것으로 다른 이들을 함부로 정죄해서는 않된다. 혹 그 환난이 그 성도를 너무나 사랑하시는 주님께서 더 크게 쓰시기 위해 연단하시기 위해 주신 어려움일수 도 있기 때문이다.
(2:11) 이기는 자에게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는 약속을 주신다.
이긴 자는 장차 하나님 아버지께서 백보좌의 심판을 통해 이긴 자에게는 둘째 사망을 겪지 않는 영원히 멸망하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축복이 주어지지만 이기지 못한 자들은 영원한 불못의 사망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
3. 버가모교회
(2:13-14) 사단의 위가 있는 곳에서 믿음을 지킨자와 발람의 교훈을 지키며 행음하는 자.
이방종교와 거짓교훈이 성행하고 있는 곳이다.
바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다. 우리의 주변에는 세상의 유혹으로 가득차 있다. TV를 틀면 좋은 program들도 있지만 대다수는 주님을 배척하는 화면들로 가득차 있다.
지금의 세상의 모습을 살펴보자. 과연 이것이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세상일까?
거짓교리에 속아 넘어간 이단의 교주를 섬기는 많은 이들.
주님의 이름을 부인하며 창조주이신 주님은 없으며 인간이 원숭이로부터 진화되었다고 믿으며 자신의 자존감을 원숭이에 비교하는 어리석은 교육.
우리는 너무나 어지럽고 혼돈되고 창조의 질서를 무시하려는 무너진 세상에서 살고 있다.
어지러운 세상에서 믿음을 지키는 자를 주님은 기뻐하신다.
(2:17) 이기는 자에게는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새이름이 기록된 흰 돌을 주신다.
비록 사단의 위가 있어 고난 가운데 있으며 힘도 없고 연약하며 궁핍한 가운데 있지만 믿음을 지키며 기뻐하며 끝까지 인내하며 주님을 따라 갈 때 주님은 약속하신 상급을 주시며 축복하신다.
4. 두아디라교회
(2:19-20)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하며 열심으로 신앙생활을 하지만 이세벨을 용납한 자.
오늘 대부분의 교회의 모습이지 않는가?
열심을 내어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하지만 교회에 이세벨의 영이 들어왔다. 이세벨은 우상숭배를 상징한다.
교회에 우상숭배가 들어와서 깨끗하고 정결해야 할 곳을 더러움과 혼합되게 하였다.
이세벨은 선지자 엘리야를 대적하던 사단의 종이었다. 그녀는 바알숭배를 이스라엘에 들여온 자이다.
믿는 자들이 조심해야 할 것은 우상숭배이다.
하나님 보다 그 어떤 것을 더욱 소중하게 여기며 사랑하는 것이 우상숭배이다.
나의 자녀나 부모나 배우자가 나의 우상이 될 수 있고, 어떤 사람이 나의 우상이 될 수 있고, idol이 나의 우상일수 있다.
(2:28) 이기는 자에게는 새벽별을 주신다.
새벽별은 곧 주님을 의미하며 그리스도의 통치에 참여하는 약속을 받는것을 의미한다.
5. 사데교회
(3;1) 살았다 하나 실은 죽은 자이다.
성도로서 듣지 말아야 하는 말씀이다.
하지만 우리는 죽은 자와 같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는가?
살았으나 실은 죽은 자는 외형적인 신자의 모습이다.
종교적인 열심은 있다. 열심히 헌신하고 봉사도 하며 겉으로 보기에는 천사와 같은 모습의 가면을 쓰고 있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진심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모습이 없다. 교회를 벗어나서 그의 본모습이 나타난다. 사회에서나 가정에서 양면의 얼굴을 갖고 있다.
주님은 그런 자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그런 이중적인 모습에서 벗어나라고 말씀하신다.
깨어서 갖고 있는 것을 꼭 붙잡으라고 강경하게 요구하신다. 주님께서 맡기신 일을 아직 하지 못했으나 주님께서 언제 생명을 취하실지 알 수 없기에 주의 복음을 기억하고 회개하라고 하신다.
습관적인 종교행위.
남에게 보이려고 하는 위선적인 신앙행동.
나의 믿음이 당신들보다 낫다고 여기는 오만한 종교인.
나는 영적인 사람이라고 주위사람들에게 주입시키는 주제를 모르는 자기도취형.
겉과 속이 다른 양면성을 가진 이중인격자.
교회에서는 거룩한 신자인듯 행동하지만 교회를 벗어나면 성경과는 담을 쌓은 이.
너무나 많은 이들이 형식적으로 주님을 믿는다.
이들은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 주고 칭찬해 주면 기뻐한다.
그런데 만일 하나님께서 그런 자신의 잘남을 알아 주시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사람이 몰라 주어도 하나님께서 알아 주신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남루하고 초라하고 역한 냄새가 나고 믿음이 없는 듯처럼 보이지만 그의 마음속에 주님을 향한 진솔한 마음이 있다면 그것으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기뻐하시며 받아 들이실 것이다.
형식적이고 외식적인 믿음의 행동에서 벗어나야 한다.
(3:5) 이기는 자는 흰 옷을 입을 것이며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할 것이다.
이미 이름이 기록된 자라도 나의 어떤 행위에 따라 나의 이름이 생명책에서 지워지기도 한다는 뜻일까?
아마 이 구원에 대한 교리는 우리 인간은 풀 수 없는 진리일지 모른다.
칼빈의 “성도의 견인”의 영향을 받은 장로교는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기 때문에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는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주장에도 모순이 있다.
인간이 주장하는 기독교교리에는 그것을 지지하는 성경구절이 있지만 반대로 모순이 있는 성경구절도 있다. 따라서 신학자나 어떤 특정 교파가 주장하는 교리에 100% 확신하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고 본다.
다만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여 주님의 마음을 배우며 주님을 따라가는 삶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6. 빌라델비아교회
주님의 칭찬을 받은 교회이다.
(3:8) 적은 능력을 가졌지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은 자.
대부분 주님을 열심히 믿는 자들은 가난하고 힘이 없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다수를 차지하는 사회의 구성원인 보통사람들이다.
주님을 믿지 않는 자들은 자신의 부모나 어떤 배경을 전혀 의지할 수 없고 오직 믿고 의지할 곳은 자신뿐임을 알아 한계가 있는 자신의 모습에 절망하며 좌절하여 모든 것을 될되로 대라 하는 식으로 포기하는 삶을 산다. 하지만 주님을 믿는 자는 세상에서 믿고 의지할 이는 아무도 없지만 전지전능하신 주님께서 자신의 보호자가 되심에 감격하며 열심으로 주님의 믿음을 지키려 한다.
세상은 가난하고 능력이 적은 자들을 앞에 내세우지 않는다.
그리고 주님의 겸손을 배운 믿음이 있는 자들은 자신을 들어 내지 않는다.
항상 자신은 무익한 종이라고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는 자들이다.
또한 주님은 우리에게 한소망을 주시는데 곧 환난의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해주신다는 말씀이다.
(3:10)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떄라.
주님의 재림이전에 징조로서 임할 극심한 환난의 시험.
인내하여 주님의 이름을 지킨자들에게는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해주신다는 약속이시다.
이 약속을 받는 거룩한 성도들이 되어야 한다.
(3:12) 이기는 자는 하나님의 이름과 새예루살렘의 이름과 주님의 새이름이 기록된 하나님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하신다.
7. 라오디게아교회
(3:15) 차지도 뜨겁지도 않은 자이다.
라오디게아 지방에는 두가지 유용한 물이 나오는데 하나는 뜨거운 온천물이 있고 또 따른 하나는 차가운 물이 나와서 이 물들은 사람을 치료하는데 쓰여졌다고 한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뜨겁거나 차야지만 몸을 치료하는데 쓰이는데 그렇지 않고 차지도 덥지도 않은 물은 아무 쓸모가 없다고 이곳의 특성을 비유로 말씀하신다.
나의 믿음이 차지도 뜨겁지도 않은 미지근하다.
이런 자의 특징은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지만 실은 너는 곤고하며 가련하며 가난하며 눈이 멀었고 벌거벗었다”라고 주님을 말씀하신다. 참된 부요는 사람이 돈으로 살 수 없다. 다만 주님께서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이다.
소위 잘 나가는 사람들 중에 이와같이 뜨뜻미지근한 이들이 많다.
주님을 믿으면서 교양있게 중용의 길을 택하겠다고 한다. 너무 지나치지 않게 또 너무 모자르지 않게 적당한 믿음생활을 하려고 한다. 또 격식이 있고 교양이 있기에 맹신자들을 혐오하기도 한다.
길거리에서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란 placard를 두른 이들을 피해 가기도 하며 경멸하며 손가락질하는 이들은 대부분 교회의 신자들이다. 깨어있는 성도라면 자신은 하지 못하지만 창피를 무릎쓰고 한 영혼이라도 구원하겠다고 열심히 주님을 전도하는 이들을 배려하고 아끼며 존중해 주어야 한다.
아마 이들은 하나님 나라에서 나와는 비교할 수 없는 큰 상급을 받을지도 모른다.
주님은 이런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은 뜨뜻미지근한 자를 토해 내시겠다고 하신다.
신자들 가운데 주님께서 토해내실 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얼마나 무서운 말씀인가?
그런데 주님은 뜨뜻 미지근한 아무 쓸모없는 자도 사랑하신다.
비록 내가 뜨뜻미지근한 자일지라도 주님은 그런 나를 사랑하시며 주께로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신다.
(3:19)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며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3:21) 이기는 자는 주님의 보좌에 함께 앉게 하신다.
너무나 과분한 주님의 은혜이다. 차지도 뜨겁지고 않았던 아무 쓸모없던 나였지만 주님께 나와 나의 잘못을 회개하고 나의 잘못된 행동을 고쳐서 주님께 뜨거운 자가 되면 주님은 그런 내가 너무나 기뻐서 자신의 보좌에 함께 앉게 하는 영광을 주신다.
주님께서 일곱교회에게 주신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 무엇인가?
곧 회개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라고 생각을 한다.
일곱교회중에는 잘못을 지적하지 않으신 두 교회가 있고 질책을 받은 다섯 교회들이 있다.
주님께서는 질책을 받은 교회에게 한결같이 “회개하라”고 말씀하신다.
“회개”는 세상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성도의 삶에 가장 필요한 것이며, “회개”는 인간의 결단을 필요로 한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여정은 때로는 첫사랑을 잃어 버리기도 하고, 핍박과 고난을 받아 절망 가운데 있기도 하고, 하나님 이외의 것을 우상으로 섬기며 행음하기도 하고, 깊은 나락에 빠져 전혀 거룩함이 없는 죽은 자와 같은 생활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주님의 이름을 의지하며 믿음을 지킬줄 도 알지만 또 어떤 때는 차지도 덥지도 않은 미지근한 신앙생활을 하기도 한다.
주님께 죄를 지을 때마다 죄를 깨닫고 회개하여야 한다.
주님께서는 나의 연약하여 죄에 쓰러져 넘어진 모습을 보시고 일으켜 세우시고, 내 발이 진흙속에 깊게 빠져 빼기 어려울 때 나의 손을 붙들고 진흙속으로부터 꺼내 주시며 다시 주님의 사랑을 깨닫고 천성을 향하여 가는 순례자의 길을 걷게 하시며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갖고 믿음을 지킨 자들을 주님은 기억하시며 새하늘과 새땅에 임하는 새예루살렘에 거하는 축복을 주신다.
주님께서는 나의 회개의 결단을 요구하신다.
나의 죄를 깨닫고 주님께 나의 죄를 회개하며 용서를 구하여야 한다.
주님은 나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보혈을 쏟으셨다.
주님은 나의 진정한 마음으로 드리는 죄에 대한 회개를 기뻐하시며 나의 죄를 용서하신다.
회개는 성도의 삶 속에서 죄를 지을 때마다 순간 순간 주님께 드려야 한다.
회개에 필요한 것은 나의 눈물이다. 진정한 회개에는 반드시 눈물이 동반된다.
(애2:19) pour out your heart like water in the presence of the Lord.
나의 마음을 다하여 주님께 드리는 물같이 드리는 나의 눈물을 주님은 기쁘하시며 받으실 것이다.
주님은 나의 간구를 들으시며 흘리는 눈물을 보신다.
자신의 심정을 토로한 시편에서도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며 드리는 눈물이 나온다.
극심한 곤경 가운데 있던 다윗이 참회하며 여호와를 바라며 눈물을 흘린다.
(시6:6)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날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시39:12) 여호와여 나의 기도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 내가 눈물 흘릴 때에 잠잠하지 마옵소서.
여호와는 히스기야왕의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병에 대하여 드리는 간절한 통곡의 기도를 들으셨다.
주님을 향한 나의 물같이 흐르는 눈물의 기도를 들으시고 나를 불쌍히 여기시며 주님의 사랑으로 응답하신다.
(사38:5)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그리고 주님께서는 회개하여 용서받고 이기는 자에게 상급을 주실 것을 약속하시는데, 그 상급이란 바로 우리의 영혼이 거할곳인 “하나님 나라”이다. 그토록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 바로 그곳은 우리의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와 어린 양이신 주님께서 계시는 곳이다.
주님은 내가 주님의 자녀이기에 전에도 말씀하셨고. 지금도 말씀하시며 그리고 앞으로도 말씀하실 것이다.
때로는 칭찬하시며 격려하시지만 내가 그릇된 길로 갈 때 나의 죄와 잘못을 꾸짖으시고 사랑의 매를 드셔서 내가 온전한 의의 길로 가도록 섭리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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